엘샤다이 칼럼

믿음은 인정함, 행동함의 두 의미가 있습니다.

Author
gospel323
Date
2018-07-11 10:40
Views
931
믿음은 기본적으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실험을 통해 확인한 것만 사실로 인정하려는 과학주의 세계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으로 확인한 진리는 분명 진리이나 그 범위가 대단히 좁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진리는 모두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것만이 아닙니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저자에게 찾아가서 일일이 확인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저자의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듭니다.

특히 역사기록(History)은 더욱 그렇습니다. 직접 그 시대로 가서 확인할 수 없기에, 역사는 기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한산대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내게 사실되게 합니다. 믿음은 내가 가서 확인할 수 없는 과거 역사를 내게 사실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신념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단 내가 보지 못했기에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내가 보거나 보지 못함으로 결정짓는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으로 나와 상관없이, 내가 보지 못했어도, 진리로 존재합니다. 이는 인간은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확인할 수없는 범주의 진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믿음 여부가 십자가 사건의 진실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내 믿음과 상관없는 개관적인 진리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건은 나를 위한 진리가 되고, 내가 거부하면 그 사건은 나와 상관없는 진리가 됩니다. 믿음은 진리를 객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적용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이처럼 구원 얻는 믿음이란 내가 보지 못한 2천년전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그 사실을 전해준 사람들의 기록인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내가 2천년전으로 가서 확인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행동을 수반하는 전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행동하게 하지 않습니다. 이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예의로서의 긍정적인 것이든, 아니면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의 부정적인 것이든 그렇습니다. 따라서 죄에 오염된 현대사회는 우리로 여러 가지 면에서 Poker face하도록 가르칩니다.

영화 “대부” 1편에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약사업을 같이하자고 찾아온 솔로조의 제안을 대부의 아들 산티노가 단번에 거부합니다. 솔로조 배후에 있는 타탈리야 패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이때 대부는 솔로조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내보낸 후 산티노를 나무라며 말합니다. “네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위험하니 말하지 말라” 대부의 말은 곧 현실로 나타나 산티노는 총으로 난사당해 죽습니다. 산티노와는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한 솔로조가 죽인 것입니다. 그가 발설한 말이 그로 죽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믿음을 우리 내면 속에 있는 생각의 한 작용으로 생각합니다. 즉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행동과 분리된 생각의 한 작용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는 전인격적 행위입니다. 이는 지적 인식, 감정적 동의, 의지적 행동, 이 세가지를 모두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계약서를 체결할 때 계약서를 상세히 읽어보고 서명함과 같습니다. 나의 결정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사인(signature)과 같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사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섬겨야하는 피조물인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죄를 저질렀다. 그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는 본성을 가진 아담으로 태어난다. 이 때문에 이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아담(인간)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아담의 나라는 죄로 인한 사망 형벌과 사단의 유혹과 참소가 있는 나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대신 담당케 하시고 구원하셨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되게 만드신다.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부패한 본성을 가진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가 하나님 되는 아담의 본성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지난 날 아담의 본성으로 살았던 모든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얻는 믿음이란,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아담적 삶에서 돌이키는 것과 자기의 주인됨을 포기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되는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이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