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장 계시의 하나님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46
Views
2023
제1장 계시의 하나님

1.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1.1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질문

두 마리의 개미가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위에 뉴욕이라는 큰 도시가 있다고 하고 한 마리는 없다고 한다. 그 개미가 또 말한다. “하늘에는 엄청나게 큰 쇳덩이가 날아 다니고 물렁물렁한 큰 존재들이 돌아다닌다.” 다른 개미가 말한다. “그것을 타 본적 있는가? 그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끝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아닌가? 아마 인류역사상 이것보다 더 오래된 질문과 논쟁은 없을 것이다. 이 질문이 그토록 오래된 것은 그 질문 내용의 성격자체가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인간 삶의 근본적인 태도를 달리 해야 하는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인류는 지금처럼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이 없어질 테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류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이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을 없애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기소장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라는 질문은 반드시 한 번 죽음의 강을 건너가야 할 인간에게 있어서 그냥 호기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그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절대적인 질문이 된다. 그래서 인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렇지 않다는 일반인 두 부류로 구분이 되고, 따라서 인류의 사상사에는 기독교적 유신론과 그 이외의 모든 사상을 포함한 무신론등 두 개의 커다란 세계관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질문이 끝없는 논쟁으로 이어지고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은 서로가 상대방에게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시켜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입증되지 못하니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도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체험에 불과하다고 일반인들은 거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객관적으로 제시해도 일반인들은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되어진 것이라고 거부한다. 그러면 이 부분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도 질문한다. 그것은 일반인들 자신에게 하나님의 체험이 없고, 아무리 피조세계를 살펴도 하나님이 계심을 볼 수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증거는 아니지 않는가? 과연 이 지루한 논쟁의 끝은 어디에 있는가?

1.2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

17세기 이후부터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큰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문명의 도구들은 바로 과학의 뒷받침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인류는 과학을 통해 시간의 제약은 인터넷과 통신수단을 발전시키므로, 공간의 제약은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어 냄으로 최소화시키며 또 식량부분과 의학적인 분야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인류가 자연과학적 진리들을 탐구하고 확인함으로 얻게 된 것들이다. 따라서 인류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인류가 무한 신뢰하는 과학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현상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 관계를 명백하게 밝혀내어 그 원리를 인간에게 필요한 도구로 응용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거쳐 진리를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첫째, 관찰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이 계속되는 관찰 가능한 반복현상이 있어야 한다. 둘째, 생각(가설, 이론)한다. 그 현상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론을 통해서 설명해본다. 셋째, 실험적 증명을 한다. 추론해낸 인과율 가설이 맞는지 계속 실험한다. 넷째, 법칙으로 인정된다. 모든 실험에서 재관찰이 되어져야하고 예외가 없어야 한다. 분명히 인류는 이 과학적 방법을 통해 학문과 인류 실제 생활 속에 대단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학적 증명방법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이 아니다. 해결할 수 없는 몇 가지 근본적인 제약이 있다.

첫째, 과학은 관찰 가능한 물리적 존재들에 대해서만 설명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관찰 불가능한 비 물리적 존재들은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있는 마음이나 정신은 실험실에서 데이터로 측정되지 않는다. 만약 마음과 정신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둘째, 관찰할 수 있어도 실험적 증명이 불가능한 사실은 설명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역사는 단 한번 일어난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은 재관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은 또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역사에 기록된 기록을 믿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는 확인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역사기록을 믿는 것이다.

셋째, 관찰 가능해도 살아 움직이는 동물 및 인격체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낚시할 때 어떤 물고기가 언제 물지는 아무도 모른다. 똑같은 미끼를 가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기다려도 오늘 잡힌 큰 물고기가 내일 또 다시 잡힌다는 보장이 없다. 또 A라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A가 되는 것은 아니다. B라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A가 될 수 있고 A라는 교육을 받은 사람은 B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A나 B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 A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과학적 증명 방법은 관찰 가능한 물리세계에 한하여 사용되어지는 진리인식의 방법이다. 세상은 관찰 가능하고 인과율의 법칙이 통하는 물리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를 포함한, 실험 불가능한 비 물리세계가 훨씬 더 크다. 따라서 검증한 것만 믿겠다는 과학주의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이요 종교적 신앙이다

아더 홈즈, 휘튼대학의 철학교수는 하나님의 창조는 세 가지 과학을 가능하게 했음을 지적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재료, 공간, 시간은 실험과학이 가능하게 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은 실험과학의 데이터를 가지고 합법칙성을 이용하여 이론과학이 가능하게 했다. 셋째,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응용과학의 근거가 되었다고 했다. 모든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하는 명쾌한 설명이다.

1.3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

다시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아닌가에 대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일반인들은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과학적 증명 방법은 극히 제한적인 물리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방법이다. 과학적 증명방법이 통하지 않는 훨씬 큰 인간세계와 비 물리세계가 있다. 과학은 만능이 아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 세상은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 너무도 많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백악관 비밀금고 속에 들어있는 자료나 아니면 앞에 앉아 창문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백악관에서 자료를 공개하거나, 앞에 앉아있는 그 사람이 내게 직접 말해줄 때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믿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사실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용감하고 비논리적이다. 차라리 모르겠다고 말하는 불가지론이 올바르고 정직하다.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가장 분명한 대답은 “그렇다”와 “아니다”가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렇지 않음에 대한 증명이 불가능하다”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유무를 판단할 방법 자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세계에 살고 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무한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눈(감각기관)으로 확인하고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제한된 물리적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질문자체가 틀렸고 시도자체가 그릇되다. 물리적 존재가 아닌 영이신 하나님을 물리적 방법으로 검증하겠다는 것이 넌센스이다. 이것은 성경과 세상의 객관적 증거와 개인의 주관적 증거들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증거는 많으나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자연과학적 증명 방법으로 데이터화해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증명된 사실이 유신론과 무신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을 과학적 방법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인간의 제한성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이 나온다. 유신론이 신앙이듯, 무신론도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다. 무신론은 하나님을 과학적 증명 방법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똑같은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 개인의 성향문제이다. 이것이 죄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이성)을 도구로 설명하는 중세의 신존재 증명에 의해 하나님을 확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신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

2. 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히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다.

2.1 성경 -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구원계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무한한 영광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주셔야만 알 수 있다. “네가 어찌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욥11:7)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내 양복 안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양복 단추를 풀러 그들에게 안주머니를 보여주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 알려주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계시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의 존재와 뜻을 나타내어 주셔야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주신 것이 두 가지 있다. 조직신학에서 통상 일반계시로 불리워지는 것인데 바로 피조세계와 인간 내면의 양심이다.

첫째, 피조세계 혹 창조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 위엄을 현시하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이다. 그림을 보면 그린 작가의 모습이 나타나듯이 우주 천체의 광대함과 소우주 인간의 섬세함을 보면, 이들이 스스로 생길 수 없고 이들을 만드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 피조세계의 모습과 그들이 빈틈없이 정확하게 운행하는 것을 보며 진화에 의해 스스로 생겨서 그렇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

그러나 죄의 오염으로 눈이 어두워진 인간은 피조세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신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다고 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롬1:18-20)

둘째, 양심이다. 양심은 모든 인간 본성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곧 하나님 형상의 흔적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며 타락 후에도 그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창9:6) 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인간의 도덕적 성품 속에서 나타난다.(롬2:12-16) 즉 인간 본성 속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양심)이 있다.(롬1:19) 옳은 것은 해야하고 그릇된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 의식이 있다는 것이지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윤리의식은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판단과 자기 결정의 독립적 주체인 인간에게만 있다. 즉 인간은 선과 악을 선택하는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윤리적 선을 행해야 한다는 기본적 의식이 공통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인간은 윤리적 존재라고 불리운다. 윤리의식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이 때문에 인류는 짐승의 집단이 아닌 어느 정도 인륜이 있는 인간사회로 유지된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윤리의식)도 죄의 오염으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피조세계와 양심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인류를 향한 계획을 알 수는 없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말씀해주셔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인간을 향한 자신의 계획을 직접 말씀하여 주셨다. 그들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당시 그 사람들에게만 나타났지만 우리는 이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과, 이들이 우리들에게 전달해준 하나님 계시의 내용을 인정한다. 기록되어진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특별계시이다.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얻게 된다. 여기서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시고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전달수단을 동반하여 말씀하신 계시라는 의미이다. 특별계시는 구원의 길을 계시하는 기록되어진 성경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책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경이 인간 스스로의 기록인 일반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의 책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하나님은 구원계시가 기록될 때 기록자들에게 특별한 영적 감동을 주심으로 계시 기록이 오류나 변개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가 정확히 전달되도록 문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주셨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축자영감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주신 성령의 감동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에 대해 영감을 주셨다는 축자영감에 대하여 어떤 비판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실 때 성경 기록자들은 무슨 기계적인 타자기처럼 사용하셨냐고 비아냥거린다. 자기의 사상과 생각은 없이 자기가 무슨 기록을 하는지도 모르며 무조건 손이 흔들리는 대로 글을 적어가도록 하셨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계시를 기록하실 때에 기록자들의 성격과 기질, 은사와 재능, 그들의 교육과 문화, 어휘와 문체 스타일 등을 함께 사용하셨다. 그래서 바울의 문체와 베드로의 문체가 다르다. 우리는 이것은 유기적 축자영감이라 부른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한한 인간은 초월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존재와 뜻을 나타내 주셨다. 그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어떤 소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한 그 계시의 책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이다.

2.2 믿음 - 계시 수납의 손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만 당신을 직접 나타내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고, 만났고, 알았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게 된다. 믿음이란, 사실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사실로 인정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시각장애인이 박물관 유리 벽안에 보관 전시되어 있는 전시품을 볼 때 자기 스스로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옆에 인도하는 안내인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확신하는 신념이 아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유리 벽안에 전시품은 사실로 존재한다. 안내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가 전시품의 존재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안내인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고 거부하면 모르게 되는 것일 뿐이다. 역사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김유신 장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기록을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나는 믿는다. 나는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해주신 하나님과 그것이 기록될 때 오류가 없도록 간섭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감 변조 없이 기록으로 남겨 내게 전달해준 사람들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믿는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전 인류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과 인간 구원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믿음으로 알게 되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고 그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믿음을 계시 수납의 손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특별계시를 주신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인 성경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외에는 자신의 뜻을 계시하여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기록인 성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믿는다. 이 믿음의 구체척인 의미는 후에 로마서를 통해 발전 설명하겠다.

2.3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성경으로 기록되어져야 하는 이유

하나님의 구원계시는 돌에 직접 새겨주신 모세의 십계명을 제외하고는 언어의 형태로 주어졌다. 언어는 보이지 않는 음파의 진동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사라지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글의 형태로 기록하게 하셨다. 서철원 교수는 성경 기록의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인간 기억의 한계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특수한 때에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임한 특별계시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소수이고 그들의 수명도 제한되어 있다. 또 그들조차도 기억력의 한계가 있다.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받은 계시는 결코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 변조와 파괴의 방지를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면 세대가 점점 지나갈수록 계시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변형이 되게 된다. 첫 계시 받은 사람이 아닌 다음 사람에 의해 삭제나 첨가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추가되기 시작하며 점차 하나님의 계시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수 천년 구전으로 전달된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여 우리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한심한 일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를 성경기록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신 것은 큰 은혜이다.

셋째, 시대와 국가를 넘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구원계시는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국가의 인류에 해당된다. 따라서 하나님 특별계시가 기록으로 남겨져야 그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인류에게 전달될 수 있다. 전 인류가 하나님의 첫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과 사도들로부터 특별히 선발되어 그 계시를 암송하고 있는 이스라엘 히브리어 구전 계시자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은혜이다.

3. 성경이 신앙과 삶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는가?

3.1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가 있다.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행정명령은 대통령의 권위가 있다. 종이 자체를 대통령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대통령의 인격, 분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직접 부르셔서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기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직접 기록이다. 누가 하나님의 권위 앞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며, 우리가 얻게 되는 하나님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의 신앙과 생활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하나님 지식도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되고 검증되어져야 하며, 또한 필요하다면 수정되고 보완되어져야만 한다.

전 인류에게 있어서 특히 성도와 교회에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은 초월하신 하나님이 인류 역사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주신 특별계시이다.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고 또 그 이상을 가르치거나 삭제할 사람도 없다. 성경은 그 자체로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성경의 권위 앞에는 아무도 맞설 사람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셔서 인간에게 전달하여주신 책이기 때문이다.

3.2 성경은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백과사전이 아니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다.(딤후3:15-17) 즉 성경의 핵심내용은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됨을 회복하는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기록된 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죄와 사단, 그리스도와 구원, 교회와 인류역사의 회복 등 장엄한 구원의 대 서사시를 그려주고 알려준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려 하신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감 등 이것을 위해 창조원리에서부터 종말론까지 배운다. 성경은 인간의 성공학이나 소원성취, 우주의 기원과 동물세계의 원리 등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다.

성경의 구원계시는 인간의 생명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포함한 모든 부분의 구속을 목표로 한다. 성경을 배우면 전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태도가 바뀌게 된다. 이것은 성경을 받아들이는 자의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구원계시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 대리통치자로서의 위치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계시는 개인구원에서 시작하여 피조세계 전반에 하나님 통치를 회복한다.

3.3 성경 이야기에서 교리를 배우고, 교리를 가지고 성경 이야기를 가르친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성경공부는 성경 이야기에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의 범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에는 단편적인 성경 이야기로 배우기 시작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성경을 읽는 개인에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회복이라는 확고한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하게 만든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것이고, 성경을 배우는 것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핵심되는 가르침을 전통적으로 교리(Doctrine)라고 불러왔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성경 이야기에서 교리를 배우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교리를 가지고 성경 이야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교리 위에 있는 성경 이야기와 교리 없는 성경 이야기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자녀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르쳐줄 것이고, 후자는 그때마다 변화되는 삶의 교훈이나 신앙인의 자세 정도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교리(敎理)란 무엇인가? 교리는 신약의 사도와 제자들이 가르치는 성경해석을 일반 성도들이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성경요점을 말한다. 교리는 인간의 범죄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러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요약되며, 일반적으로는 “구원의 길”, 이것을 다루는 학문을 “조직신학” 또는 “교의신학”이라 부른다.

무엇이 100층 이상의 빌딩을 세우고 지탱하게 하는가? 건물 내부에 칠해진 페인트 때문인가 천장에 있는 조명 때문인가? 투박하지만 견고하게 버텨주는 바닥기초와 치밀하게 짜여진 강철 프레임이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이 골격을 포장하는 기술이다. 건물에서 카페트와 창문유리는 기본 골격이 있을 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듯, 수많은 성경 이야기는 구원의 길로 요약되는 기본 교리 위에서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사람들은 아담 이야기가 동화가 아니며,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 우리 이야기로 알게 된다. 이때 그 앞에 감격하고 오직 예수를 고백하게 된다.

교리는 인간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가르침 없는 성경공부는 뼈대 없이 집을 짓는 것과 똑같다.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지어지지도 않는다. 성경을 많이는 배우는데 무엇을 배우는지 잘 모르고, 현실에 부딪히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잘못이다. 교리를 모르면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과 교리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성경의 요점이 교리이기 때문이다. 조금 딱딱해 보여도 교리를 든든히 세워가며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배우자.

3.4 “성경이 가는 곳까지 나도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나도 멈춘다.”

성경만이 기독교 진리와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에서 나온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설교는 기독교의 설교가 아니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읽어도 그 본문에 대한 해석이 각각 다른 경우가 있다. 이런 해석학적 혼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에 대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 말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교황만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카톨릭 신자 개인은 성경을 해석할 수 없으며 또 해석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로마 바티칸과 교황이 결정한 해석만 따르면 된다. 왜냐하면 교황은 무오하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이를 거부한다. 어린아이가 성경을 읽고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가 검증한 올바른 해석을 했다면 교회는 그 해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성경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고 성령의 직접 음성인 내적인 빛(감동)으로 해석한다. 종교개혁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이들은 성경을 읽기보다는 깊은 기도를 강조하고 성경을 읽어도 본문의 의미보다 자신에게 주시는 내적 감동을 더 중요시 한다.

성령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란 참 매력적인 말이다. 그러나 그 객관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성경의 객관적 본문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성령의 감동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성령의 감동이다. 개인 신앙생활에 대단히 유익하다. 그러나 객관적 성경 본문의 내용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강조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깨달음이 많은 사람의 신앙생활에 지침이 되는 가르침이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성경에 기준을 두고 검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남겨주신 이유이다. 확신의 정도와 체험의 진실 여부를 떠나 개인의 깨달음이 성경을 벗어나지 않으면 성령의 감동이고, 성경을 벗어나면 개인의 주관적 감정으로 확인된다. 모든 기독교 진리의 절대 기준은 성경이다.

셋째, 성경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로마 교황의 권위나 개인의 주관적 감정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본문의 객관적인 의미가 중요하고 그 본문의 의미 안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관적 말씀을 발견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과 모든 개혁교회의 주장이다.

성경은 신적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에게 주신 글이다. 이는 성경의 기록목적 자체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란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문자가 아닌 인간의 문자로 기록해주신 이유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부모는 갑작스런 일로 외출했고 아이의 저녁식사를 챙겨주지 못한다. 이때 부모는 집에 글을 남긴다. “아들아!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냉장고에서 무엇을 꺼내 어떻게 요리해서 저녁을 먹으렴...” 이때 당신은 어떤 문장의 글로 남기는가? 아이가 전혀 읽을 수 없는 암호로 쓰는가? 배우지도 못한 외국어로 쓰는가?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담은 난해한 글로 쓰는가? 아이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글은 아이의 국어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함도 아니요 추리능력을 배양하기 위함도 아닌, 저녁 잘 먹고 건강하게 있기를 바라는 글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인간의 글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고도의 지성을 가진 지식인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은 수련으로 신비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자만 깨달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의 글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읽는 자는, 현대 문명인이든, 아마존 원시종족이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 사함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성경은 이천 년 전의 기록이며, 이스라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어떤 문장은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지엽적인 것이다. 명확하지 않은 구절중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바꿀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죄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 기본진리에 대해 어떤 누가 읽어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다. 성경은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명확하게 가르친다. 오해의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는 신학자와 목회자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을 더욱 풍성히 또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신학과정을 거친 성경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경의 명확성은 신학자들이 무용(無用)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성경을 읽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도움은 일반인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원리는 성경을 모든 진리의 기준으로 두었다는데 있다. 성경이 있었기에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원리가 나왔다. 오늘의 개혁교회는 성경에서 나왔다. 만약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원리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종교적 자유와 감격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오늘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수 없는 종교적 억압에 눌려 힘들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가지 않고 성경을 사용한다. 본문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관심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을 인용해서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 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그 본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오늘의 말로 바꾸고 우리의 현장에 적용해서 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먼저는 그 본문의 의미이다. 그 본문의 의도를 오늘의 말로 바꾸는 것이지 본문과 전혀 상관없이 오늘의 말로 바꾼다면 그는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아 성경을 새로 쓰는 사람이다. 성경은 내 생각을 합리화해주는 수단이 아니다. 나는 성경의 수종자인가 아니면 성경의 사용자인가?

우리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있을까? 이는 모든 것은 거부하고 성경만 가르쳐야 한다는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바울의 전도는 세상 학문을 도구로 성경의 진리를 전한 것이다. 만약 세상 학문을 가르치지 않고 성경만 가르친다면, 그것도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단편적인 성경 이야기만 가르친다면 우리 아이들은 전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교회라는 게토에 갇힌 능력 없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이는 성경의 내용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려고 특별한 사람들에게 계시해주신 구원의 길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모든 인생은 이 구원계시를 받아들여 하나님 백성이 되고 그 다음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이것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은 없다. 이것이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목적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가르치자. 제아무리 개인의 종교적 확신과 신앙 체험이 귀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보다 앞서서는 안된다 1963년 6월 11일 베트남 정부에 항거하며 소신공양(분신자살)한 베트남 승려 Thich Quang Duc (틱 쿠앙 둑)이 있다. 그는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가부좌로 앉아 산체로 불에 탔다. 말콤 브라운은 이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서 전 세계에 알림으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개인의 종교적 확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확신과 체험은 그가 믿고 있는 진리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하나님 말씀인 성경만이 그 진리여부를 확증한다. 개인의 체험과 확신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중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가르치자. 우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자. 이 아름답고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 회복의 세계관을 가르치자. 성경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은 우리 자녀들은 절대로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될 것이다.(마7:24)

<요약>

세상에는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믿음과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믿음이다. 이것이 세계관이다. 사람은 이 두 세계관 중 어느 하나를 가진다. 그런데 이 둘은 추구하는 목표와 삶의 가치체계가 전혀 상반되고 다르다.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사망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 죄라고 한다. 세상은 죄와 사망의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도처에 죽음의 현상들과 갈등이 넘쳐난다. 이런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사람은 복되다.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될 것이다.(시1:3)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주신 특별계시 성경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하다.

-------------------------------------
"십자가 복음의 영광"에 나오는 모든 글 인용 출처와 각주들이 아래한글 파일을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모두 지워져 버렸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복음은 어느 개인과 교회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초대교회와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입니다. 어거스틴, 칼빈등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지켜온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지금도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을 통해 가르쳐지고 있고, 어릴적 교회 목사님들과 우리 부모님들을 통해 배워온 복음입니다. 이 복음 이외에 다른복음은 없습니다.(갈1:8)

본 내용은 복사방지탭이 걸려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사랑하고, 후대들에게 가르치려는 의도라면, 상업적 의도와 도용,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일만 없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셔서 사용해도 좋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널리 전파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