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3장 인간, 하나님의 형상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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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
제3장 인간,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반사체

1.1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야 하는 피조물(창1:27)

인간에 대한 학술적 명칭은 다양하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직립보행 인간),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로퀜스(언어적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문법적 인간)... 이중 인간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택할까? 이런 것들은 인간의 여러 특징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해서 설명하는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의 정의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여기서 하나님 형상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복사판, 반사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할 때 그 본래 고유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이다. 달은 태양을 의존할 때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고 발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반사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서는 절대로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의존 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제 모습이 드러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정확한 정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사판, 반사체라는 하나님 형상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다.

1.2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창1:26,28)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야 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만드신 것이다. 그 다스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셨다.(창2: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일까?

팔기 위하여 작품을 만드는 자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그 작품 자체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온 피조세계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드셨다. 대화하실 인격적 상대가 없어 외로우신 것도 아니었고, 영광송을 불러줄 찬양대가 없어 쓸쓸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술 화가가 자기를 위하여 자기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고 작품을 그리듯,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을 현시하는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광대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지구를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피조세계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천지를 만드시고(창1:1), 그 안에 빛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나누셨다. 둘째 날에는 그 천지 안에 궁창을 만드시고(창1:6), 지구의 하늘 위에 있는 물과 지구 안의 물을 나누시며, 지구 안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심으로 육지와 바다를 조성하셨다.(창1:10) 셋째 날에는 물과 구분된 땅위에 각종 풀과 채소와 나무와 식물을 만드셨다.(창1:11) 넷째 날, 하나님은 다시 하늘에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심으로 지구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창1:16) 바다는 각종 생물과 물고기, 하늘은 온갖 종류의 새로 번성하게 하셨다.(창1:21) 다섯째 날, 하나님은 땅 위에 온갖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이 조화 있게 뛰놀도록 하셨다.(창1:25) 여섯째 날, 하나님은 맨 마지막으로 이 모든 피조세계를 조화있게 만들 가장 핵심적인 존재,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6)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대리통치자의 영광과 권위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반사체가 되게 하셨다.(창1:27)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대리통치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창1:28) 하나님은 인간이 대리통치자로 있는 이 모든 피조세계를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범죄 이후 인간의 정복함과 다스림은 칼로 지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피와 눈물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범죄 이전 인간에게 주신 피조세계 통치권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고 하나님의 지혜로 만물이 질서있게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이로 인해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악보에 그려진 작곡자의 의도대로 각 악기 연주자들이 정확히 자기 소리를 내고 조화를 이루도록 지휘봉으로 사인을 주듯,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하모니의 모든 영광을 작곡자에게 돌리듯, 인간에게 주신 대리통치자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이 자기 소유물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를 위임받아 통치하는 것이기에 대리 통치자이다.

1.3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 피조물이다. 흙으로만 만들어진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소유한 영적인 존재이다.(창2:7)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위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존재로 창조되었다. 물론 여기서 교제란 이 세상 친구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과 창조자와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요 교통임을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자신의 모습을 가진 인격으로 대우하시고,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인격적 교제를 의미한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교제할 수 없다. 하나님도 다른 어떤 피조물과 교제하지 않으신다. 오직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만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이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 육체의 중요성을 내포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쉽게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이 되어있는지는 신비이다. 인간은 천사와 다르게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두 영적존재를 창조하셨는데 곧 천사와 인간이다. 천사와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대리통치자가 되기 위해 육체를 가진 하나님 형상이란 점에서 그 지위와 위엄이 천사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천사는 육체가 없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또는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하나님 형상이 아니다. 당연히 피조세계의 통치자가 되지 못한다. 천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드는 영적 존재이다.(히1:14)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서로 거스리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는 오늘의 모습처럼 죄의 오염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하나님을 본성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았고, 죄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범죄 이전의 사람은 비록 오늘과 같이 생물학적인 육체를 가졌지만 그것은 조금도 불의하거나 부패하지 않은 거룩한 몸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산 영 곧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라고 불리웠다.(창2:7) 비록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불편함이 있지만 천사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거룩한 영과 같은 존재였다. 오히려 천사가 인간의 육체를 부러워하고, 육체는 거룩한 영으로서의 생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육체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직접 만지고 다스리며 통치하는 근거였다. 육체가 없는 천사는 물리적 피조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

육체는 영혼과 함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영혼 없는 육체가 하나님 형상이 아니듯이, 육체 없는 영혼도 완전한 하나님 형상이 아니다. 비록 지금 죽음 이후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각기 땅과 하늘에 구분되어 있지만 재림 때가 되면 모든 육체는 부활하여 다시 자신의 영혼과 하나 된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인간은 하나님이 첫 창조하신 그 본래 상태로 돌아가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로서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기독교는 영혼만 중요시 하고 인간의 육체 또는 육신을 가진 이 땅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인간구성의 절대적 요소이다. 잠시 땅속에 묻혀 영혼과 분리되지만 반드시 다시 부활의 모습으로 만나 범죄 이전의 상태 곧 거룩한 육체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은 우리 육체가 버려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천사가 부러워하는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에서, 오늘날 같이 부패한 본성을 가진 타락한 육체로 전락하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패한 자기 본성을 따라 사는 육체로 전락시켰다. 이때부터 인간은 산 영이 아니라 육체라고 불리워진다.(창6:3) 영과 육체가 정 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바로 범죄 이후 부터였다.

1.4 피조세계에서 그 위엄과 존귀함이 하나님의 영광과 같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고후4:4)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가 앞서 설명한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존재,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자유 인격이란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를 첫 아담과 대조되는 마지막 아담으로 설명하는 바울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메섹 체험은 유대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의 신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셨던 것이다. 바울은 영광의 광체에 둘러싸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뵈옵고 예수가 바로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분으로 보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잃어버린 인간의 모든 피조물보다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다시 회복한 분이다. 그리고 성도는 심판과 재림 때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복음을 새 언약으로 설명하는 고린도후서 3-6장과 유대주의자들과 대비해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빌립보서 3장에 이 점이 잘 나타나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3: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게 변케하시리라.”(빌3:21)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인류는 다시 첫 아담이 범죄 이전에 가졌던 영광스러운 위엄과 존귀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이는 재림과 심판 이후 성도들의 완전한 부활 모습이기도 하고 또 지금 종말론적 유보 상태에 있는 성도가 불완전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첫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영광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다.(갈4:19)

인간은 범죄 이후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인 산 영에서(창2:7), 거룩성을 상실한 범죄한 육체적 존재로 전락되었다.(창6:3) 그러나 부활 이후에 죄와 사망, 그리고 사단이 이 세상에서 모두 제거됨으로 우리 육체도 다시 거룩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은 성도가 얻을 범죄 이전 하나님 대리통치자로서의 영광의 위엄을 미리 보여준다. 성도는 이것을 부활 때 완전히 얻을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맛보게 된다.

2. 지정의를 가진 자유 인격

2.1 자기 판단과 자기 행동을 책임지는 독립적 주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반사체라는 점과 함께 또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자유 인격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성, 감정, 의지는 인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지고 있다. 동물들에게 지정의라는 단어가 부적절하나 인간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다른 피조물들의 지정의는 생존을 위한 본능에 불과하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존의 본능 그 이상의 지정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어떤 사실을 보고 원리를 이해하며 추론하는 지성이 있다. 또 그것을 자기와 적용해서 받아들이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판단하고 감정으로 느끼며 행동으로 옮긴다. 즉 인간은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좋아하며, 자기가 직접 실행하는 자유 인격이다. 누구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는 자유 인격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그에게는 스스로 판단하는 지성이 있어야 하고, 좋고 나쁨의 감정과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은 자기가 결정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그 일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는 자유 인격이다. 물론 귀신들리거나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예외이나 이들은 특수한 경우들이다. 이들은 자유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격리된다. 자기 행동을 책임 질 수 없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에 의해 제한해두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영화 메트릭스처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 의지 없이 다른 영적 존재에게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그 어떤 책임은 없다. 그렇게 프로그램화하고 그렇게 조종하는 자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조종하지 아니하신다. 로봇은 자기 판단, 자기 감정, 자기 의지가 없다. 기계적으로 조종하는 자의 손발 노릇을 할 뿐이다. 잘한 일도 그가 한 일이 아니고 잘못한 일도 그가 한 일이 아니다.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게 된다. 이는 절대로 그릇되다. 하나님의 절대예정을 숙명적 결정론으로 오해하면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는 크게 오해한 것이다. 예정론은 죄인된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어 구원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셔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예정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는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사단도 인간을 로봇처럼 조종하지는 않는다. 아니 조종하지 못한다. 간혹 자기 지정의 없이 사단에게 지배당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귀신들린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이 세상에 분명히 있는 일이지만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경우이다. 사단이 인간의 지정의 없이 지배한다면 인간의 모든 범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아니라 사단에게 있게 된다. 성경은 절대로 인간 범죄에 대한 책임을 사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유혹은 사단이 했지만,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했기에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단언한다.

인간은 자기 판단과 자기 행동의 독립적 주체인 자유 인격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나 자기 책임 없는 중국 강시나 서양 좀비들처럼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에게도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자기 원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처럼 독립된 주체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실행하고 또 할 수 있는 자유 인격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자유 인격이 죄에 오염되서 인간이 판단하고, 느끼고, 하고 싶어하는 의지는 본성적으로 악한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이지, 인간은 자기 행동에 아무 책임이 없는 로봇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독립적 주체로서 자유 인격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2.2 선택의 자유가 있는 자유 인격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빵을 앞에 두고 뒤에서 총을 겨눈 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가지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북한의 투표는 100% 투표에 100% 찬성이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아무 제약 없이 하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자유이다. 사람이 자유 인격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인격이란 단어 속에는 필연적으로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자유가 없는 것은 기계, 정신질환자... 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격이란 단어는 대체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도덕적 품성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유 특히 선택의 자유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의미가 반복되어도 자유 인격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겠다.

2.3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징 중 이타심과 윤리의식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받지 않으면서도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건네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선 터무니없는 행동이다. 또 윤리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계산에 의해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만 하지 않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윤리적인 선택을 한다. 인간만 그렇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이타심과 윤리의식은 하나님 형상에서 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은 지정의의 판단에 의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인인데 그 결정에 있어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행동은 이성적 합리적 결정만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손해가 되더라도 해야 하는 일과 이익이 되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을 구분하는 존재이다. 특히 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 짐승에게는 이런 윤리의식이 없다. 인간만 가지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죄에 오염되어 언제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인간은 독립적이며 윤리적인 판단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특징이다. 그렇기에 인간만 윤리적 존재이며 윤리적 책임이 뒤따른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의와 거룩을 구분하는 기준을 부여받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인간에게는 윤리적 책임이 있다.

짐승에게는 이런 윤리적 판단 능력이 없다. 필요에 의해서 자기 새끼나 어미를 잡아먹는 살모사 뱀이 있고, 환경만 주어지면 새끼와 어미가 얼마든지 재교배가 가능하며, 오직 힘에 의해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 행동하는 생존본능만 있다. 짐승에게는 윤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직 본능에 의한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이 아닌 윤리적 존재이다. 죄의 본성은 하나님께는 비신앙적이지만 인간에게는 비윤리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성령이 오셔서 인간을 변화시키면 인간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새 사람은 하나님께 신앙적이 되고, 사람에게는 윤리적이 된다. 윤리가 신앙을 갖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윤리를 가져온다. 윤리가 절대 신앙을 앞서지 않지만 그러나 윤리는 언제나 신앙과 함께한다. 신앙은 윤리에 의해 진실성을 입증받고 윤리는 신앙에 의해 정당성을 보증 받는다. 성령받은 사람은 신앙과 윤리가 언제나 비례해서 성장되고 변화받는다. 그것이 인간에게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어가는 모습이다.

3.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3.1 창조주와 피조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시해준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적으로 탁월하고 신비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생겨난 자가 아니라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는 구조 자체가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야 제 모습이 나오게 되어있고, 세상 모든 피조물의 통치자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대리통치자이다. 그는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탁월한 영적인 능력이 있지만 그 위치는 피조물 곧 영적 피조물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피조물은 절대로 창조주를 넘어설 수 없다. 죄는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3.2 왕과 백성, 주인과 종

구약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당시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잘 설명해준다. 왕과 백성은 보호와 순종 관계를 나타내고, 주인과 종은 명령과 복종관계를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서 취해야 할 마땅한 모습이다. 순종과 복종은 인간에게 있어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적 차원이 아니다. 하면 좋고 하지 않으면 나쁜 윤리적 차원도 아니다. 삶과 죽음의 절대적 차원이다. 죄는 바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3.3 목자와 양

목자와 양은 우리의 생명 여부가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양은 자기 힘으로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없다. 목자의 보호와 인도가 없이는 물과 풀을 얻을 수 없고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없다. 양의 생사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있듯 인간의 존재와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해주심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비유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께 순종하고 복종하며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죄는 바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요약>

하나님 형상에 관한 일곱 가지 정의는 하나님의 성삼위일체와 함께 앞으로 이 글에서 전개되는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는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는 인간의 원죄, 칭의와 성화, 하나님 나라 회복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일곱 가지 특징은 앞으로 계속 반복되어 나오게 될 것이다.

「1부 하나님과 인간」은 창세기 1-2장의 창조원리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고,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킨 인간의 범죄를 살펴보겠다. 기독교 복음은 바로 이 죄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가르침이다. 「2부 인간의 범죄」는 「3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기술될 십자가 복음의 절대적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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