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4장 반역, 하나님을 거부함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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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반역, 하나님을 거부함

1. 열매하나 따먹은 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창2:17)

1.1 생명나무와 죽음나무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모든 땅 위의 식물,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므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기반을 먼저 조성하셨다. 그 다음, 그 기반 위에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그리고 땅의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셨다. 그런데 이런 움직이는 피조물들은 각기 자기 위치 내에서 제한된 어떤 역할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었다. 그것들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 완전함이었다. 그것들은 각각 바다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본능으로 살아가고 새끼를 낳고 대를 이어감으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오묘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조화롭게 이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를 만드시기로 하셨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반사체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인간이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도구였다. 피조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였다. 좀 더 섬세하게 말하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자기 역할을 해줄 때 모든 악기가 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들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듯,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피조세계가 아름답게 돌아가는 그 조화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독립된 자유인격이 자발적 순종에 의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격적 찬양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두신 생명나무와 죽음나무는 바로 인간의 순종여부를 가름하는 잣대였다. 자신이 피조물됨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었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나무 열매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생명나무 열매인 생명은 피조물 인간이 자신 곧 하나님을 절대의존 해야하는 피조물, 하나님의 대리통치자,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 존재임을 알고 그 위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얻게 되는 것이다. 죽음나무 열매인 죽음은 피조물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면 얻게 되는 것이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제19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1.2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의미

하나님은 죽음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말씀하셨다. 왜 선악을 알게되는 것이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일까?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왜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가?

이 세상의 선과 악은 모두 주관적이다. 선과 악은 개인, 나라, 종교, 문화, 시대에 따라 모두 다르다. 힌두교도에게는 소는 신성한 동물이기에 먹을 수 없다. 이는 그들의 신화와 연관이 있다. 우주 창조신 브라마,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 등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세 신이 모두 소와 연관이 있다. 시바신은 흰 암소 “난디”를 타고 다닌다. 비슈누도 세상에 자주 나타나는데 주로 소로 나타났다. 암소는 브라마신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 따라서 암소 살해는 사제계급 브라만 살해와 같게 여겨진다. 그래서 간디는 암소 보호가 모든 힌두교도들의 공통되는 믿음이며 힌두교와 다른 종교들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암소 숭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힌두교에서는 소, 특히 흰 암소가 절대적으로 신성시된다. 그러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들은 돼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이는 쿠란에 명시되어 있다. "알라가 너희에게 금하는 것이 이것뿐이다.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꾸란 2:173) 따라서 이슬람권에서 돼지고기는 절대적으로 금기가 된다. 그러나 소고기는 얼마든지 먹는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어왔다. 일제 점령기때 이토오 히로부미와 안중근의사가 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이토오 히로부미는 국가적 영웅이고 대 정치가요 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영웅을 죽인 살인범 테러리스트 대역죄인이다. 그러나 한국입장에서 보면 정반대가 된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한일합방과 민족 수탈의 원흉이요 그를 저격한 안의사는 민족의 의인이요 영웅이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같은 문화, 민족, 국가의 사람에게도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시대의 가치와 우리시대와 우리 아이들 시대의 가치관이 다르다. 여기서 오는 갈등을 일컽는 사회학적 용어가 바로 세대차이(Generation Gap)이다. 다른 나라 사람은 제쳐두고 같은 문화와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소통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에 남성과 여성의 가치관에서도 좁히기 힘든 큰 간격이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결국 옳고 그름, 선과 악은 누구에게 선이 되고 누구에게 악이 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 개개인의 입장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기 때문에 온갖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선과 악을 인간에게 기준을 두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는 이상 선과 악의 구분은 모두 주관적 상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선과 악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선으로 정하신 것인가? 하나님이 구분하시는 선의 개념은 창조질서, 창조원리와 연관이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들이 나온다. 여섯째 날 동안 창조질서를 세우시고 모든 피조세계가 인간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모습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선은 바로 이것이다. 피조세계가 창조목적대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경배하고 섬기는 그 본래의 모습이 선, 좋은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그 모든 조화의 핵심이다. 악이란 그 반대이다. 이 모든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악이다.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것이다. “선과 악은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창조목적에 맞는 여부가 선악의 기준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이란 자기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모든 피조세계를 관리하며 질서를 잡고 조화를 이루게 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선이고 옳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자기의 피조물됨을 인정할 때만 선과 악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게된다.

그런데 아담은 선과 악을 자기가 분별하기 시작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맞춰 옳은 것은 선, 틀린 것은 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자기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의 부패한 본성에게 좋은 것은 선, 싫은 것은 악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피조물 위치를 망각했다. 선과 악의 절대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에게 두었다. 인간이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개인의 부패한 본성에게 두는 한 이 땅은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이 발생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부한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의 현상들이다.

1.3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선택과 책임

앞장에서,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이란 자기 판단과 자기 행동의 독립적 주체, 자유 인격임을 언급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인간의 지정의에 의해 되어진다. 인간은 행동함에 있어서 스스로 판단하고(지성), 스스로 하고 싶어하고(감정), 자기가 스스로 실행한다(의지). 이것이 인간이다. 지정의는 그 자체의 단어적 의미보다 자유 인격이 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서 중요하다. 인간은 자기 행동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제약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의 중요한 의미이며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는 인간 고유의 특징이다.

선택과 책임은 지정의를 가진 자유 인격에게만 가능하다. 지정의가 없는 동물은 선택권이 없고 책임도 없다. 오직 생존본능에 의해 행동하도록 창조되었기에 그 행동에 대한 책임도 없다. 가끔 동물원의 사자가 먹이를 주러 들어간 사육사를 물어 숨지게 하는 사건이 보도된다. 여기서 사자의 부도덕함을 탓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기를 매일 돌봐주고 먹이를 주는 사육사를 어떻게 물어죽일 수 있느냐고 비난하는가? 사자에게 죄의 댓가를 치루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다. 사육사의 부주의만 탓할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프로그램화된 로봇에 의한 찬양을 원하지 아니하셨다. 공장에서 인쇄되어 나오는 성탄카드 문구보다 맞춤법이 틀린 어린 아이의 감사편지 한 장이 더 감동적이다. 바로 자유 인격에서 나오는 자발성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지정의는 자유선택의 근거가 된다. 누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자기가 행동한다. 그러므로 책임도 자기에게 있다. 마치 어떤 계약을 할 때 다른 사람이 온갖 이야기를 해도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은 자기이다. 주변 사람들의 말은 자기가 내리는 결정에 참고요소만 될 뿐이다. 판단은 자기가 하고 행동도 자기가 하고 책임도 자기가 진다. 이것이 자유 인격 곧 인간이다. 하나님은 자유 인격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원하셨다.

2. 인간의 범죄는 누가 책임져야 하나?

2.1 사단에게는 유혹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성경은 자유 인격 인간이 죽음나무를 선택했음을 계시한다. 그 원인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의도였다. 인간이 범한 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유혹자 사단부터 언급해본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사단은 절대로 인간 범죄의 책임 회피수단이 되지 못한다. 사단은 유혹했다. 그러나 유혹에 동조한 것은 인간이고 그 동기는 피조물의 위치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기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절대로 사단에게 전가할 수 없다.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동조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과 사단만 간단히 처벌하셨을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는 창조목적대로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범죄가 모든 피조세계를 고통으로 내몬 것이다. 인간은 일개 천사의 범죄를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반으로 끌어들인 결정적 책임이 있다.

사단은 첫 범죄자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한 유혹자요, 인간의 죄에 대한 참소자이다. 여기서는 사단의 존재보다는 사단이 유혹한 죄의 성격만 살펴보겠다. 이사야는 바벨론 왕의 교만을 사단의 범죄와 연결하여 언급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5)

마찬가지로 에스겔도 두로 왕의 교만을 사단과 비교하며 예언한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28:14-17)

사단의 범죄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위를 탐내는 교만이었다. 피조물로서 자기의 피조물임을 망각하고 창조주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불경함이요 참람함이었다.

2.2 하나님의 지위를 탐낸 인간의 죄는 사단에게 전가할 수 없다.

인간에게 찾아온 사단의 유혹은 달콤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창3:5)는 것이었다. 사단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범죄한 존재이다. 사단은 자기와 같은 범죄 속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려 했다. 자신이 당할 하나님의 형벌 속으로 인간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마약 중독자가 친구에게 가서 마약을 권하는 것과 같다. 온갖 이야기로 유혹할 것이다. “몸에는 해롭지 않다. 중독은 없다. 자기가 하기 싫으면 얼마든지 안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일단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것을 권한 사람처럼 비참하게 된다. 인간은 형벌 받고 사단은 형벌을 주는 자가 아니다. 사단도 형벌 받을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먼저 사단을 형벌하시고 그와 동조한 인간도 벌하신다.

인간은 실수로 죽음나무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나무를 선택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저지른 일도 아니다. 인간은 그 나무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인줄 잘 알고 있었고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 하신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단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인간은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사단의 고문과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 아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들린 상태에서 손이 저절로 가서 따 먹은 것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원해서 죽음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은 것이다.

사단의 유혹이 없었다면 인간의 범죄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인간을 유혹한 사단에게 분명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한 자로서의 책임에 불과하다. 인간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사단은 그에 대한 형벌을 당할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당할 형벌이다. 아무리 사단의 유혹을 이야기해도 그 유혹에 동조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위를 탐낸 것은 숨길 수 없다. 인간이 자유 선택에 의해 범죄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 역할을 거부하고 자기가 직접 통치자 되겠다고 선언 한 것이다.

2.3 교만, 불신앙과 불순종 뒤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의 본질이 숨어 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위를 탐낸 범죄에 대해 어거스틴은 교만(휘브리스)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죄가 교만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자기 주장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자리를 탐낸 것이다. 자기의 제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넘을 수 없는 창조주의 자리를 원한 것이다. 사단의 타락이 바로 그것이었고 인간이 원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죄의 속성 교만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범죄를 왜곡된 자기사랑(아모르 수이)으로 표현했다. 하나님께 대해 피조물로서 마땅한 위치를 거부한 교만은 죽음나무를 선택하므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는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아는데 하나님처럼 된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이롭게 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이기적이다. 교육은 “아모르 수이”하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휘브리스”(교만)는 죄의 본질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피조물의 교만을 설명하기 유익하고, 아퀴나스의 “아모르 수이”(왜곡된 자기사랑)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죄인된 성향을 이해하기에 유익하다.

칼빈은 죄를 불신앙으로 정의했다. 이는 죄가 아담의 불순종이었다는 바울의 로마서를 설명한 것이다.(롬5:19)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이었다. 피조물로서의 교만은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에 대한 불신앙을 가져왔고 그것이 죽음나무를 선택하는 행동 곧 불순종을 가져왔다. 그래서 칼빈은 죄란 신적 위엄을 무시하고 이에 거스르는 인간의 행동,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그 불순종의 뿌리는 불신앙이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피조물의 교만, 불신앙, 불순종은 모두 한 가지를 설명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범죄의 본질이다.

3. 인간은 분명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를 지었다.

3.1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인간의 피조물 됨을 거부함

아담의 범죄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열매 도둑질이 아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과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에 대한 불신앙이 빚어낸 불순종이었다. 죽음나무의 열매 선악과는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선을 말해준다. 사람은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자신은 에덴동산의 통치자이지만 대리통치자임을 늘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절대의존하고 영적인 존재이지만 피조물임을 날마다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모든 창조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행동하는 것이다. 물고기의 자유로움은 물속에서 있을 때인 것처럼 인간의 인간다움과 자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대리통치자일 때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절대 의존할 피조물,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인 인간의 본질이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사단의 유혹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했다.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자기의 피조물 됨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의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되었다. 자기가 피조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것이요 자기는 관리자임을 망각한 것이다. 관리자가 위임받은 물건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반역을 의미한다.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인간 스스로 자기에게 맞춰 결정하겠다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거부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차원의 범죄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가 지켜야할 국가를 전복하려한 반란행위였다. 용서될 수 없는 반역이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사단의 유혹은 사실이었다. 범죄 이후 인간은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자기에게 맞춰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이 선과 악을 자기가 구분하기 시작하면, 곧 자기의 피조물 됨을 거부하면 하나님과 단절되고 죄의 종이 되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죽음이 시작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선과 악을 자기가 구분하면 자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됨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단의 유혹은 사실이 아니고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3.2 모든 창조질서가 파괴됨

자신의 피조물 됨을 거부한 아담의 불순종은 모든 피조세계의 고통과 무질서를 가져왔다. 죽음이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작곡자의 악보와 전혀 상관없는 지휘를 할 때 악기연주자들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리통치자로 창조된 인간의 반역은 모든 피조세계의 파괴를 가져왔다. 지금 피조물들의 고통은 하나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범죄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가져왔다. 인간은 아담이 에덴에서 누렸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웠던 관계를 누릴 수 없다. 심판과 형벌만 존재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만 기다릴 뿐이다.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불가한데 그 죄 값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생명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기에, 죽음의 죄 값은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 갚을 수 없다. 인간 스스로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절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수많은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그중 가장 큰 고통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는 인간과 인간의 분리를 가져왔다. 내가 나를 보고 갈등하고, 내가 가족관계에서 갈등하고, 친구 사이에서 갈등하고, 지역적 국가적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을 느낀다. 창조질서 속에서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었기에, 인간은 모두 자기가 온 피조세계의 주인이다. 인간 각자가 선악을 자기에 맞춰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의 갈등이 시작된다. 아무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누가 이 갈등을 해결할 것인가? 인간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줄 자가 누구인가? 위로부터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는 인간과 피조세계의 분리를 가져왔다. 피조물들은 본래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인간을 따르고 인간의 지도에 순종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은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분리를 가져왔다. 짐승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인간이 그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짐승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사자가 아니고 인간이다. 동물의 멸종은 인간의 탐욕과 연관이 있다. 또한 짐승들의 세계도 치열한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살아간다. 죽느냐 사느냐? 먹느냐 먹히느냐?의 이분법적 명제만 남아있다. 인간의 범죄로 온통 죽음으로 얼룩진 피조세계를 누가 다시 회복시켜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곧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인간의 변화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3.3 남자, 여자, 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분리로 자연 귀결된다. 모든 피조세계는 인간의 범죄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반역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당하게 될 고통과 그 원인, 그리고 미래의 회복을 말씀해 주셨다.

남자는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가시와 엉컹퀴를 내는 땅에서 수고하여야 한다. 곡식은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어 생산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를 해야 겨우 적은 소득을 낸다. 남자의 일생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제활동을 위해 살아간다.

여자는 자녀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남자의 다스림을 받고 남자의 지위를 사모(desire)하게 되었다. 죄 때문에 내린 저주를 통하여 남자와 동등한 데서(창2:23-24) 벗어나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게 된다. 인류 역사는 여자의 일생이 억압과 핍박의 연속이었음을 증명한다. 모든 나라, 민족마다 여자의 지위는 존중되지 못했다. 이는 각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신의 부인에게 말을 많이 하지마라”(소크라테스), “여자는 남자에 의해 공동으로 소유가 되며 그들의 아이들은 국가에서 돌봐야한다”(플라톤), “만일 여성이 그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면 노예와 주인이 동등하게 되었을 때와 똑같이 사회가 완전히 문란해졌을 것이다. 여자는 못난 남성이다”(아리스토텔레스), “여자는 남자의 기쁨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루소), “비겁하고 비도덕적으로 산 사람들은 다음 세대에 여자로 태어난다”(티메우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이다. 이 억압의 다스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끝나게 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1-12)

뱀에 대한 형벌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미래의 예언에서 나온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의 패배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장엄한 대서사시를 보여준다.

<요약>

범죄는 피조물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피조물로는 있을 수 없는 교만이었고, 그 성격은 왕을 거부하는 반역이었다. 자기행동과 자기책임의 독립적 주체요 선택의 자유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조물 됨을 부인한 것이다. 이때부터 모든 피조세계에 고통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구원계시는 범죄한 인간이 다시 하나님 백성이 되어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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