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4장 성령, 그리스도와 연합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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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성령, 그리스도와 연합

1. 성령님은 누구신가?

1.1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사망 죄 사단의 문제,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계시하셨다. 누구든지 이천 년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형벌 받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첫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그런데 이때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이천 년 전에 이루어진 십자가 사건이 나와 상관이 있는가? 그 역사적 사건을 단지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질까? 구원받았다면 나는 정말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가? 내 의지와 결심은 부족한데 가능한가? 성경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 개개인 속에 적용하시고 완성시키신다고 계시하신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완전하다.

삼위일체는 초월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피조세계 속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주심이다. 이슬람이 추구하는 신은 높은 곳에 혼자 계셔서 인류가 찾아갈 수 없다. 인도종교에서 추구하는 신들은 인간 곁에 있으나 내재신(Pantheism)이기에 능력이 없다. 능력은 있으나 인간에게 내려오지 않는 초월신과 인간에게 내려왔으나 능력이 없는 내재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인류의 구원은 능력의 초월자가 피조세계 안으로 들어오실 때에만 가능하다. 초월자께서 인류를 만나주셔야 가능하다. 구원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인류 속에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계시하셨던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인류 각 사람에게 적용시켜주실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영으로 계신다. 그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거하시겠다고 약속되었다. 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배경으로 하는 예언들에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가져오실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실 성령 하나님에 관한 예언들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겔36:26-27)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8)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진리의 영 등으로 불리워지시는데 이는 성령 하나님의 본질과 하시는 일에 대한 명칭들이기도 하다. 성령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영광, 권능, 위엄, 본질에 있어 성부 성자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그래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고전12:3)으로 불리워지신다. 성령님은 예수의 영(행16:7), 그리스도의 영(롬8:9)이시다. 그러시기에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신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성령을 “예수 부재시 예수 현존” “예수님의 또 다른 자아”라고 표현하고 “예수 부활이후 성령론은 기독론과 동일하다”라고 가르친다. 예수와 성령은 다른 분이 아니시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심이시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16:13)으로 계시되었다. 이는 성령님은 오셔서 예수의 십자가 사역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갈4:6)으로 불리워진다. 죄인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이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사를 근거로 그 위에서 이루어진다.

1.2 보혜사와 거룩케 하시는 영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계시되어졌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예수께서 성만찬에서 하신 말씀은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속죄사역과 그 결과 죄 사함 받은 백성들에게 거하실 성령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약속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성취이며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었다.(행1:4) 예수는 자신의 승천 이후 제자들에게 오실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원 보혜사이셨던 자신의 뒤를 이어 성령께서 오셔서 자기가 하시던 보혜사의 일을 하실 분이란 의미이다.

보혜사(保惠師)는 보호해주시고(保) 은혜를 주시고(惠) 가르쳐주시는(師) 분이라는 한자 번역이다. 이는 마틴루터의 번역을 따라 파라클레토스(곁에 계셔서 도와주시는 분)에 대한 아주 좋은 해석이었다. 거의 모든 영어성경은 Comforter(KJV), Counselor(NIV), Helper(NASB), Advocate(NRSV) 이 네 표현 중의 하나로 번역되어진다. 이처럼 성령님은 예수 승천이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탄생되어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케 하시는 영(벧전1:2)이시다. 성경의 거룩은 물리적으로 구별됨이다. 예를 들어 여러 물건 중에서 그것들과 똑같이 사용하지 않고 구별해서 다르게 쓰는 것이다. 피아노를 일반 음악하는 곳에서도 사용하지만 교회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면 성물이 된다. 여러 빌딩이 있지만 예배드리는 장소로 구별하여 사용하면 성전이 된다. 이처럼 거룩의 본래 의미는 구별함이다. 이러한 거룩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더러움과 물리적으로 구별됨이란 의미와 함께 이차적으로 윤리적 개념이 따라오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서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대표되어지는 이방인과 구별됨을 개인 증표로 삼았다. 율법은 이방인과 구별되어 정결케 되는 규범이었다. 성전은 그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장소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이방인과 구별하셔서 정결케 하시고, 거룩케 하셨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 사함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구별되어 거룩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성도들이 육신을 따라 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을 비교하는 로마서 8장,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비교하는 갈라디아서 5장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백성들의 죄 사함이었다. 성령님은 십자가로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케 하신다. 그들이 세상과 구별되게 만드시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죄의 오염과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신다. 성도는 이미 거룩하게 구별되어졌지만 아직 천국에 완전하게 도달한 것은 아니다. 성도도 여전히 죄의 소욕과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성도를 “의롭다 칭함 받은 죄인”이라 말했다. 구원은 이미 받고 하나님 백성은 되었지만 아직은 여전히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때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단을 멸하실 재림과 심판 때이다.

자유는 거룩함에서 나온다. 죄는 절대로 자유함을 주지 않는다. 죄는 사단의 참소와 성령의 책망으로 양심의 가책을 가져온다. 자유는 죄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어야 얻어진다. 내일 시험을 앞두고 준비가 안된 학생은 해야 할 공부를 다 끝내야 비로소 자유해진다. 자유는 자유해지고 싶다고 자유해 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죄와 사단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죄의 종노릇과 사단의 참소로부터 자유이다. 이 자유는 죄의 세력을 이길 때에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성령님은 성도를 거룩케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사단의 유혹 속에 노출되어 살고 있지만 죄의 세력을 실제로 이길 힘을 주신다. 거룩을 사모하게 하시며 죄를 미워하게 하신다.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며, 거룩케하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며, 가르치시며, 격려하시며, 위로하시며, 은혜를 주시며, 진리로 이끄시며, 영원토록 함께하신다. 성도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해진다. 그래서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다.

1.3 은사를 주시는 분

성령님은 구원 얻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은사를 주신다.(고전12:11) 은사란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개개인에게 주시는 특별한 재능(달란트)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타락된 피조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창조하셨다. 그래서 구원은 재창조(새창조)이다. 십자가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를 이루어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회복시켜나간다. 이때 성도 개개인의 능력은 약하다. 여전히 부족하고 힘이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사이다.

성령님은 성도 개인에 관한 것부터,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일, 십자가 복음이 외부로 증거되는 일 등 모든 일에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피조세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주신 영적이고 윤리적인 은사도 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한 봉사의 은사가 있다. 특별히 전도 현장에서 나타나는 은사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다. 이 땅에 다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사도행전 16장의 마게도냐 전도 때 나타난 성령의 인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4장,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의 교회를 섬기기 위한 성령의 인도도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것이 성령의 인도라고 바울은 말한다.

성령의 인도와 은사는 하나님 백성인 성도가 이 땅에서 회복할 모든 피조세계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에게는 영적, 윤리적 은사가 필요하고, 교회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섬기는 은사가 필요하고, 전도현장에서는 사단과 충돌할 때 영적인 특별 은사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의 방향과 목적을 위함이지 은사를 가진 자들이 서로 우열을 나누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도원에서 영적은사를 추구하는 성도는 개인 윤리와 교회공동체에서 봉사함에 더욱 힘쓰고, 개인 윤리와 교회 섬김의 은사를 추구하는 성도는 전도현장에서 영적 능력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현장에서 영적능력을 추구하는 성도는, 개인 윤리와 교회 섬김의 은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모두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성도들이 세상을 복음으로 회복하도록 주신 은사이다. 어느 하나 우열이나 차별이 없다. 모두 동일하고 모두 필요하며 서로 보완적이며 서로 의존적이다. 그러나 은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이 보혜사이시며 거룩케 하시는 영이심을 근거로 주어진다. 은사는 절대로 십자가로 인한 개인의 변화보다 앞서지 않는다. 은사는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려 할 때 필요한 도구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에게서 출발한다. 개인의 변화 없이 세상을 변화시키려 함은 성경의 구원이 아니다.

2.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2.1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이루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믿음은 볼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사실로 인정하는 것과 그 사실에 대해 전 인격적 신뢰라는 기본 의미가 있다. 따라서 구원얻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이 나의 죄를 위함이라는 복음의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고 지정의 전인격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임이다. 이때 구원이 이루어진다. 성령님은 성도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신다. 로마서 10장에는 이러한 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9-17)

바울은 성도가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대하여 개인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먼저 어떤 경로를 통하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말씀이 개인에게 들려진다.(17절) 구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전도가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말씀을 들어야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기 전까지, 인간은 절대로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 전도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15절) 성령께서는 전도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게 하신다.(15절) 사람은 전도자가 전한 십자가 말씀을 듣게 되고, 그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여사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15절) 이 모든 일은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결정과 동의와 신뢰이지만 결국 성령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마음을 열어주실 때 일어나는 초자연적 사건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엡2:8-9) 이를 좀 더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 로마서 8장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다(예정).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다. 선택은 성도를 교만하게 하거나 방종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선택은 우리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고 안도감을 갖고 안심하게 하는 것이다.(엡1:3-7)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믿음의 확신 정도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라면, 구원을 확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에게 어느 때엔가 십자가 말씀을 통하여 부르신다(소명). 이 부르심에 거부할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완악한 우리의 마음도 열어주셔서 십자가 사건이 나의 죄를 위함이었음이 믿어지게 하신다. 이때 성도는 마음의 문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근본적인 삶의 방향 전환이다. 자신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굴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거듭 남이라 부른다(중생) 이는 원죄에 대한 회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나님 되어 살아온 모든 죄(창3:5)와 그의 열매들을 회개하게 된다(회개). 회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게 만든다.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는 회개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한탄과 뉘우침에 불과하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믿음). 이때 성령은 그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연합), 그를 의롭다 칭하시며(칭의), 하나님 자녀 삼아주시고(입양), 죄의 오염으로부터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성화.) 성령님은 성도가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끝가지 이르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견인), 죽음이후 부활에 이르러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신다(영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속죄사역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되어 아담의 범죄로 오염된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피조세계로 회복하는데 직접 간섭하신다. 개인의 구원과 교회 공동체를 통한 세상변화,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가져다준 십자가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전도사역에도 상황과 필요에 따라 특별한 영적은사를 주셔서 직접 간섭하신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되어 이루어진다.

2.2 성령의 내주, 인도, 역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좀 더 쉽게 개인에게 적용해보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 그의 전 인격으로 받아들인 사람 속에 내주하신다. 영원히 거하신다. 떠나지 아니하신다.(요14:16-17)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께서 성도 안에 내주 하시니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지금 살아 계시고 우리가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해볼 기회와 시간을 어떤 분이 계산을 해보았다고 한다. 전 세계 60억 인구가 10분씩만 대화를 해도 내게 돌아오는 기회는 지금 대화신청을 해도 내 손자 때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구원은 최소한 이스라엘로 갈 수 있는 비용을 가진 사람에게로 제한 될 것이다. 이처럼 최소 여행비용이라도 가진 사람만 예수님과의 만남 기회를 얻고 가난한 자들은 그런 기회조차 없다면, 가난한 자들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부자에게 구원은 낙타가 들어가야 하는 바늘귀(마19:24) 정도라도 있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께서 성만찬 때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가셔야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그리스도께서 다시 성령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그 후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내주하신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이다.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성령님의 우리 안에 거하심(내주)을 통하여 구원하신다. 그분이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고 안전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성령께서는 성도 속에 내주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신다.(요16:13)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로 오염되어 첫 아담이 가졌던 지식과 지혜의 많은 부분들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바로 내일 일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사망의 형벌과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이 현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유인격인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책임져야하는 수도 없는 많은 선택의 때를 만나게 된다. 그 선택은 오늘 저녁식사를 무엇으로 할까 같은 가벼운 것도 있지만, 진학, 결혼, 사업 등 자기 자신과 가족의 미래가 달려 있을 수 있는 중대한 것도 있다. 여기서 성도는 어떻게 올바른 결정을 하고, 어떻게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승리할 수 있는가? 성령의 인도가 바로 그 답이다.

성령의 내주가 구원의 시작과 미래 결과에 대한 완전한 보장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인도는 죄의 세계에서 지금 치열하게 살아가야하는 오늘의 삶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다.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거하시며(내주) 그들을 죄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인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정하고 성령께 자신을 맡길 때 성도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

성령께서는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기도응답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요16:24) 인간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피조세계는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를 내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자원이 부족하다. 늘 모자라고 결핍되어있다. 이런 세상에서 성도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실한 보증을 받고(내주) 삶의 모든 부분도 지도를 받으며(인도) 살아가며 필요한 부분도 공급받는다(역사).

성령께서는 기도응답을 사도 바울같이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해지기를 원하는 고귀한 기도제목(빌1:20)에서부터 소경 바디매오처럼 보기를 원하는 절박한 기도제목(막10:46)이나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사르밧 과부의 실질적인 기도제목(왕상17:16)까지 모두 이루어 주신다. 이는 기복종교의 소원성취가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자녀사이에 있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2.3 성령 충만 - 성령께서 전적으로 지배하심

성경에는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성령 충만이란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를 전적으로 지배하심이다. 그러나 충만은 주로 물이 컵에 꽉차서 흘러넘치는 물리적 상태로 이해되어지기에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을 비인격 능력으로 자칫 오해하도록 하기도 한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방언이나 질병치유, 귀신축출같은 특별한 영적인 은사의 나타남도 있다.(행13:9) 그러나 성령 충만이란 성령으로 가득참(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곧 성령께서 완전 지배하심이다. 은사는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완전 지배하심으로 필요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이지 은사 자체가 성령 충만은 아니다. 즉 성령 충만하면 은사가 나타날 수 있지만 은사가 나타나야 성령 충만인 것은 아니다. 은사는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해야할 사역 여부에 따라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의미는 성령의 전적인 지배이다. 은사의 나타남은 성령께서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시는 상황 속에 필요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이다.

성령 충만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인격과 마음과 감정을 모두 지배하셔서 자기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하심이다. 공회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선포한 베드로의 증거는 어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었다.(행4:12)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한 스데반도 자기 힘이 아니었다. 복음증거를 방해하는 박수 무당을 소경되게 해서 굴복시킨 것도 바울의 능력이 아니었으며(행13:9), 아시아 전도에서 유럽의 마게도냐로 방향을 바꾸도록 하신 분도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셨다.(행16:7) 이처럼 은사는 그가 처한 사역현장에서 개인의 능력 이상을 필요로 할 때 성령께서 지배하심으로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 그리스도 충만이다. 성령님은 자기 스스로의 사역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요, 예수께서 하신 속죄사역을 증거하시는 영이시다. 따라서 성도가 성령 충만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붙잡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죄인됨과 그리스도의 속죄함에 전적으로 붙잡혀 있으면 그는 분명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이다. 이때 필요 상황에 따라 은사는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성령 충만은 은사여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속죄사역에 대한 그의 태도에 따라 확인된다. 이것이 성령께서 그를 전적으로 지배하고 계심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3. 그리스도와 연합

3.1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십자가 사역과 그 사역을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시키는 성령님의 내주 인도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설명되어진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십자가 사역을 근거로 해서 우리와 연합해주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라는 용어보다 조금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내주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과 함께 우리의 영혼과 연합해서 직접 사역해주심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건을 매개로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연합은 혼합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혼합은 내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뒤섞여 내 개인의 특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때 나는 내가 아니다. 내 영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행동은 내가 한 것이 아니기에 책임이 없다. 그러나 연합은 내 개인의 영혼은 그대로 두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인도해주심을 말한다. 나는 그대로 있다. 나와 그리스도의 영은 따로 존재한다. 내 행동은 내가 한 것이고 책임도 내게 있다. 이때 성령님은 내 안에서 나의 영혼과 함께하시며 연합해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두 가지 성례가 있다. 세례와 성찬이다. 개혁교회는 이 두 가지를 참된 교회의 표징으로 삼고 지켜온다. 세례예식은 유대교에도 있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세례를 베풀었다.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차이점은 유대교의 세례는 죄 사함의 정결의식이었고,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롬6:3-4)에 더 의미를 둔다는데 있다. 물론 초대교회 세례는 죄 사함(고전6:11)과 그리스도의 몸(교회 공동체)에 일원됨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전12:13) 초대교회의 성찬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확인하며 그리스도와 연합을 기념한다면, 세례는 물속에 들어감으로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남을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내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5)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옛사람은 예수 십자가와 함께 죽고 예수 부활에 힘입어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때 성도는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을 이길 힘을 얻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도 속에 함께하셔서 연합해주심으로 이길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는 이 진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3.2 그리스도 안에서 - In Christ

신약성경 특히 바울서신에는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해서라는 뜻이고 십자가 사건을 매개로 해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에베소서 1장은 더욱 많이 나온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3-1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여 새사람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3절) 그것은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심이며(4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심이었다.(5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는데(7절),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회복되고 통일되는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심이었다.(10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구원을 얻었는데(11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12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 곧 우리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13절)

3.3 그리스도와 함께 - With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도 십자가 사건을 매개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여기서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라는 용어도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와 마찬가지로 모두 그리스도 사건과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 사건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본성을 가진 내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고 부활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과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신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영혼과 혼합이 아닌 연합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신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사람이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고 확실하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근거가 된다.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분은 성도 개개인 속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시고 그로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 이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성령으로 인한 영적 변화이기에 그의 물리적 모습은 바뀌지 않지만 그의 아담적 성향과 죄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 속에서 역사하사 그가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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