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5장 새사람, 칭의와 성화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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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새사람, 칭의와 성화

1. 칭의로 원죄의 죄책을 제거하셨다.

1.1 대표의 원리

인류의 고통은 사망의 형벌 때문이고 사망은 죄에서 왔다.(롬3:23) 인류의 조상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아담의 후손, 현 인류에게 원죄 곧 죄책과 오염을 가져왔다.

죄책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죄 값을 치뤄야 함, 죄의 댓가를 지불해야 함이다. 이는 법정적인 개념으로 첫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가 하나님 된 바로 그 첫 번째 죄에 대한 형벌이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것은 반역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부인하고 자기의 피조물 됨을 거부함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얻게 되는 생명나무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 되겠다고 죽음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창2:17)였다. 그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되는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이므로 사망은 법적으로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Adam's race) 개개인에게 전가되었다. 모든 인류는 첫 아담이 인류를 대표로 해서 하나님을 거부한 죄의 값을 가지고 태어난다.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 태어나 아담이 지은 죄의 댓가를 지불해야하는 상태에 놓여있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생명을 지불해야 하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사망의 형벌이었다.

오염은 아담의 죄책을 가지고 태어난 아담 후손들 개개인이 아담과 똑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남을 의미한다. 인류는 법적으로는 아담의 죄책을 치러야 하고 실제적으로는 아담의 죄로 오염되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류는 첫 아담 때문에 형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에 형벌을 당한다. 왜냐하면 첫 아담의 범죄한 속성이 자기 자신에게도 그대로 똑같이 있기 때문이다. 죄의 오염은 인류에게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을 가져왔다. 전적 부패라 함은 그의 본성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죄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전적 무능력이란 그렇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책과 오염이 바로 원죄이다.

여기서 성경이 계시하는 "대표의 원리"가 있는데 이는 바울이 증거한 십자가 복음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2-19)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5-47)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첫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내가 죄인 된 것처럼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하심으로 내가 의인된다. 이것이 대표의 원리이다. 첫 아담이 아담 자신만이 아닌 인류의 대표였던 것처럼, 예수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이시다. 그래서 예수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이제 인류는 어디에 속하느냐만 남아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아담의 현 인류 계열에 속해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인류 계열로 돌아올 것인가이다.

1.2 전가의 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사로 새로운 인류가 탄생되었다. 아담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이다. 십자가는 아담의 첫 범죄에 대한 죄책과 오염을 해결하셨다. 원죄의 해결은 “대표의 원리”와 함께 “전가의 원리”로 설명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이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의 죽으심을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인정하셨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속에 들어가셔서 그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신다. 마치 구약 속죄제사에서 봉헌자들은 자기가 데리고 온 희생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하는 것과 똑같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씀을 듣고 지정의 전 인격으로 받아들이며 믿을 때 성령께서 행하시는 신비한 사역이다. 이때 첫 아담으로 인한 죄의 책임은 모두 예수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는 소멸되게 된다.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예수에게 전가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신다. 이는 동시적 사건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둘로 구분된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죄를 제거함과 의인됨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제거하면 죄 없는 사람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아니다. 의인됨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의인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믿는 우리 속에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시는데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이다. 이 모두가 믿음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로마서는 칭의와 성화의 책으로 불리워지는데 이는 십자가에서 이룬 속죄사역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칭의와 성화를 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죄의 전가는 죄책을 제거하는 칭의로, 의의 전가는 오염을 제거하는 성화로 연결된다.

1.3 의롭다 칭하심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을 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담의 죄로 인한 죄책과 오염의 원죄에 빠진 인류가 어떻게 다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사망의 법적 선고받음과 지금 실제적으로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진 인류는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차분한 논리적 설명이 로마서이다.

인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들이다.(롬1장) 유대인들도 실상은 율법을 범하는 죄인들이다.(롬2장)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를 보내주셨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롬3장) 어떻게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아브라함이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롬4장) 어떻게 한사람의 십자가 죽음을 믿으면 구원에 이르는가? 대표의 원리처럼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다.(롬5장) 여기까지는 주로 구원의 근거가 되는 칭의에 대한 부분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로부터 거룩해지고(롬6장) 율법으로부터 거룩해져야 한다(롬7장) 그러나 칭의로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데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롬7:15-25)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롬8장) 여기까지는 주로 믿음으로 의로워진 성도가 실제로 죄의 세력을 이기는 성화에 대한 기록이다.

아담의 죄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을 나를 위한 죄 사함으로 믿을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킴으로 해결된다. 모든 인류가 반드시 짊어져야하는 첫 아담의 죄인 하나님과 단절되어 정녕 죽으리라는 형벌이다. 이 죄 값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책은 소멸되었다. 대표의 원리에 의해 아담의 범죄가 나의 범죄가 되었듯이 예수의 속죄사역도 나의 속죄사역이 된다. 전가의 원리에 의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죄를 전가하심으로 나의 죄책은 소멸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신다. 의롭다 칭해주신다.

여기서 기독교의 구원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십자가 대속사건을 믿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해주신다. 여기에는 행함이 들어갈 틈은 조금도 없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증거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왜 오직 은혜로만,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이여야 하는지는 앞서 이미 설명했다. 이는 죄는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우리가 해결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성자 예수를 보내주셨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게하셨다. 그리고 행함이나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사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받은 사람은 교만해지지 않는다.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참혹한 일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얻기 위해 행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께서 인치심으로 이루어진 선물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구원은 십자가 사건을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강조함이 로마 카톨릭과 개혁교회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복음은 행함을 전적으로 거부하는가? 율법 지킴이 전혀 필요 없다는 도덕 폐기론자 들이 옳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아직 인간과 원죄를 모르는 것이다.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 성화로 원죄의 오염을 제거하신다.

2.1 부패한 본성 - 죄에 오염된 육신

세상은 아직 죄의 세력과 사망의 형벌과 사단의 유혹이 여전히 남아있다. 재림과 심판이 이르러야 하나님께서 죄와 사단의 존재를 멸하시고 사망의 형벌을 완전히 제하신다. 재림과 심판때까지 죄와 사망과 사단을 그대로 두심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원죄는 죄책과 오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죄책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어 소멸된다. 이것이 칭의이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남아있다. 이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죄에 오염된 아담의 부패한 본성은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있다.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우리의 본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죄를 좋아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부패한 죄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죄악된 행위들을 즐기면서 자유하다 해방받았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다. 죄는 절대로 자유함을 주지 않는다. 죄는 자신과 타인에게 사망의 고통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롬6:23) 자신과 타인에게 죄로 인한 고통을 주면서 자유한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죄를 자기가 짓지 않을 수 있어야 죄의 종이 아니다.(롬6:16)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다. 죄에 오염된 본성의 요구를 이길 수가 없다. 내면적인 도덕법에 해당되는 것부터 사회법에 제지를 받는 범죄행위까지도 그렇다. 인간은 절대로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죄에 오염된 부패한 본성은 이미 우리의 타고난 성품이다. 이성으로 감성으로 의지로도 절대 이길 수 없다. 몸이 죄를 요구하고 이성이 죄를 합리화하고 감성은 죄를 원하며 의지는 죄를 지으러 가고 있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 함은 우리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바로 이 부패한 본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떻게 죄에게서 자유해 질 수 있는가? 자유는 내가 하지 않을 능력이 있을 때 얻어진다. 마약 중독이 무서운 것은 인간의 이성은 분명히 거부하면서도 몸은 그것을 요구하는데 있다. 중독은 하지 않을 자유를 뺏어가는 것이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죄는 여전히 짓고 있으면서 죄의식만 없애는 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자동차의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동차 수리소에 가서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원인은 해결하지 않고 경고등이 눈에 거슬리니 아예 경고등을 꺼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자동차를 고친 것이 아니다. 반드시 차에 큰 문제가 온다.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문제를 회피한 것이다. 양심은 죄를 억제하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죄를 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책망과 사단의 참소가 있어 고통스럽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아예 양심의 가책을 없애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죄에 대한 최소한의 억제장치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죄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을 이기는 것이다.

죄를 요구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죄의 세력을 실제로 이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반 종교는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대체로 잘 직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본성을 탐심 혹은 탐욕이라고 하며 이를 억제하라고 한다. 불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내면의 욕망을 억제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욕심에서 죄가 잉태되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약1:15) 그렇다면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가르침인가? 아니다. 죄의 근원에서부터 죄의 욕구을 이기는 방법까지 근본적으로 다르다.

2.2 거룩해지도록 하심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이다. 성도는 죄가 하나도 없는 성자가 아니라 죄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성령은 우리가 믿는 순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고 의롭다 칭해주신다. 이것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이다. 단회적 사건이다. 아담의 법적 죄책을 해결하심이다.

성령은 칭의를 얻은 성도를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성화를 통하여 거룩해지도록 도와주신다. 이것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성령님은 거룩케 하시는 영이시다.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법적인 죄책을 해결하실 뿐 아니라 실제적 죄의 오염도 치료하신다. 우리 본성이 요구하는 죄의 욕구는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지배하실 때 비로소 이길 수 있다. 우리를 거룩해지도록 하심(성화)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성화되는 정도에 따라 후에 구원을 결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구원얻은 성도가 죄의 세력을 이기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다.

의롭다 칭하심으로(칭의)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심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사역이고 인간의 사역은 전혀 없다. 그러나 성화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연합하여 도와주시지만 결국 거룩해지려고 해야하는 사람은 우리이다. 우리의 노력과 행동이 필요하다. 성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단 한 번에 믿는 순간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평생에 걸쳐 계속 이루어져 간다.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을 이기며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성화는 고통이 아니고 죄의 세력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무리 칭의를 통해 법적인 구원을 얻었어도 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현실에서 날마다 죄의 종노릇하면 사망의 형벌은 여전히 당하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다. 복음은 죄의식을 없애고 거짓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의 세력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죄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날마다 음행을 저지르는 신자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죄책감에 눌려있을 때 찾아가서 죄 사함 받았으니 자유하라고 말만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이 아니다. 죄의 세력은 여전히 놓아두고 죄의식만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 자유이다. 긴급히 맹장수술을 해야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놓아주고 되돌려 보내는 것과 똑같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도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8:11) 그 사람이 조금 힘들어 하더라도 죄의 무서움과 그 해결책인 십자가를 설명함으로 그가 다음에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절대로 음행을 저지르면서 자유할 수는 없다. 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복음이다. 물론 설명은 사람에 따라 직접적인 책망보다는 따듯한 위로나 권면 혹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음행을 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진정한 복음을 증거한 것이다. 거룩해져야 자유가 있다. 사단의 참소로부터 해방된다.

칭의는 믿음이기에 복음이고 성화는 행함이기에 율법인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가 있다. 이는 큰 오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주신 것은(칭의) 성도를 거룩하게 되어가게 만드심이었다.(성화) 칭의와 성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이다. 성화를 동반하지 않는 칭의는 칭의가 아니며, 칭의에서 출발하지 않는 성화는 성화가 아니다. 성화는 칭의의 연속 과정이고, 칭의는 성화의 정지된 단면이다. 칭의는 성화의 원인이요 성화는 칭의의 결과이다. 우리의 구원은 칭의에서 시작해서 성화로 완성되어 간다. 성화를 뺀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론에서 성화를 다루지 않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요한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한 하나님 은혜의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 둘을 함께 받기 때문이다. 곧 그 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 -요한 칼빈

그런데 이 성화를 성령께서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십자가 대속의 죽음 앞에 우리를 감격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못 잊어 죄의 욕구가 미워지게 하시며 이전의 모든 육신적이 가치관을 바꾸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 성화는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하다. 성화는 의무가 아니라 죄의 세상에서 성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성령의 능력이다.

2.3 죄와 사망과 사단에게서 해방됨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원죄의 죄책과 오염을 해결하사 칭의와 성화를 주신다. 이때 비로소 성도는 성화의 힘을 얻게된다. 사망의 형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죄의 세력에서 해방된다. 사단의 유혹에서 자유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이고 하나님 백성됨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와 사망과 사단에게 묶여 종노릇 하고 있다. 자유하지 못하다. 죄의 세력을 이기지 못한다. 사단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사망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일반 종교는 이것을 극단적인 노력과 금욕을 통해서 이겨보라고 한다. 일반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내심과 극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길 수 없다. 결국 아담의 죄의 본성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철학은 이성의 힘으로 이것을 극복해보려 한다. 그러나 본성은 바꿀 수 없다. 신비체험은 죄를 이기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귀신 들리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 복음만이 죄를 이기고 자유케 하신다.

결국 우리의 죄의 본성을 바꾸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주시는 칭의와 성화를 통해 얻어진다. 먼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칭의), 그 다음 구원의 능력을 누릴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성화). 성령은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도와주신다.

세상은 칭의와 성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변화시킨다. 성도의 무기는 거룩함이다. 죄의 세력을 이김이다. 요한 계시록의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로 세마포를 씻어 흰 옷 입은 순결한 주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백마를 타고 앞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정치적 핍박(열 뿔 짐승, 계13장)과 종교적 미혹(두 뿔 짐승, 계13장)과 세상적 쾌락(큰 음녀, 계17장)앞에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 죄 사함을 증거하며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계11:15)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요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살리는 방법이다.

3.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칭의와 성화의 구조로 되어있다.

3.1 갈라디아서

바울이 안디옥과 마게도냐와 로마에서 증거한 십자가 복음은 그의 서신서를 보면 잘 나와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증거된 확산 경로를 알리기 위해 기록되었기에 그가 전한 복음은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서신서에서는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구조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울 서신서에 잘 나타나있다. 칭의와 성화를 가지고 기독교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한 로마서는 이 글 맨 나중에 설명하겠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전도한 남쪽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유대주의를 퍼뜨린 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헬라인들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먼저 할례와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박이 갈라디아서이다.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인 할례와 율법에 묶이지 말고 자유하라고 말하면서 칭의와 성화로 설명한다. 갈라디아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1-2장)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세 가지로 반박한다. 내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직접 얻었다.(1:10-24)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 사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2:1-10) 베드로의 잘못을 직접 책망하면서도 인정되었다.(2:11-21) 이 부분은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의 싸움이라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공격받는 상황에서 바울이 답변하는 부분이다. 이 다음부터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확인시키는데 칭의와 성화를 가지고 가르친다.

먼저, 바울은 복음을 칭의로 설명한다.(3-4장) 바울은 칭의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는데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율법을 지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에서 얻었다.(3:6-25)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 자손이다.(3:16-4:7) 종인 하갈과 자유인 사라를 시내산 언약과 시온산 언약으로 비교함으로 약속의 자녀를 설명한다.(4:21-31) 결국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되어졌음을 이야기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칭의를 강조한다.

그 다음, 바울은 복음을 성화로 설명한다.(5-6장)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가 지금 해야 할 성화를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도 네 가지로 설명하는데 먼저 할례와 율법의 모든 종교적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하라.(5:1-12)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15)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 여기서 그 유명한 성령을 따르는 삶과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에 대한 비교가 나온다.(5:16-26)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한다.(6:1-10)

갈라디아서는 칭의와 성화를 자유의 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율법준수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 때문이었다. 바울 복음은 언제나 성화의 근거인 칭의와 칭의의 결과인 성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잘 보여준다.

3.2 에베소서

에베소서는 개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에 회람형식으로 쓰여졌다. 따라서 개인적인 안부서신이 아니라 일반적인 복음의 내용을 차분하게 잘 설명한다. 그래서 정열적인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좋아했고, 논리적인 요한 칼빈은 에베소서를 좋아했다. 에베소서도 크게 칭의와 성화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바울은 칭의를 통해 얻게된 구원을 설명한다.(엡1-3장) 에베소 교회 성도가 얻게된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1장)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받았다.(2:1-10) 그리고 모든 차별이 없이 한 몸 된 교회를 이루었다.(2:11-22)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역으로 일어난 이방인 구원의 역사를 회고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3장)

그 다음은, 칭의로 얻게된 구원을 이루는 성화에 대한 가르침이다.(엡4-6장) 먼저 바울은 성화를 개인적 측면으로 권면한다. 하나 되라(4:12-16), 새사람을 입으라(4:17-3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1-21), 다음은 성화를 관계적 측면으로 권면한다. 아내들에게(5:21-24), 남편들에게(5:25-33), 자녀들에게(6:1-3), 아비들에게(6:4), 종들에게(6:5-7), 상전들에게(6:8-9)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화를 영적싸움 측면으로 권면한다.(6:10-20)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복음의 신발, 말씀의 검, 믿음의 방패로 전신무장한 후 영적싸움을 한다.

에베소서도 역시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복음 설명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를 조화있게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이는 바울이 육체를 가진 인간의 본질과 죄책과 오염에 빠진 인간의 원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얻은 구원과 그 구원을 오늘 체험하는 거룩한 삶을 강조한다. 단 거룩한 삶은 절대적으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시작되고 구원은 반드시 거룩한 삶과 연결 되어진다.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3.3 골로새서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으로 불리우는 골로새서도 칭의와 성화의 구조이다. 에베소서는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구원의 기본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회람 편지이지만 골로새서는 교회내로 들어온 이단을 경계하기 위해 보낸 경계편지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우주론적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우리가 칭의로 얻게 된 구원과 그것을 오늘 확인하는 성화의 삶을 가르침으로 끝맺는다. 골로새서도 크게 칭의와 성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바울은 칭의를 주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골로새 이단들을 경계한다.(골1-2장) 바울은 우주론적 그리스도 찬송시를 선포하고(1:15-20), 그리스도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설명한다.(1:21-23) 바울은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우주론적으로 다시 한 번 설명하고, 골로새 이단들에 대한 경계하는데(8-15절) 유대교 율법주의(16-17절) 헬라 신비주의(18-19절) 헬라 금욕주의(20-23절)를 언급한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신 그리스도는 우상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그 다음,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그리스인답게 살라고 성화를 언급한다.(골3-4장) 성화를 개인적 측면에서 권면하며(3:1-3:17),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3:1-4),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3:5-17)라고 가르친다. 또 바울은 성화를 관계적 측면으로 권면하는데(3:18-4:1) 에베소서와 마찬가지로 아내들에게(3:18), 남편들에게(3:19), 자녀들에게(3:20), 아비들에게(3:21), 종들에게(3:22-25), 상전들에게(4:1), 실제적인 삶에서 해야할 일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기도부탁과 문안인사로 골로새서를 마친다

역시 골로새서의 기본 구조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육체를 가진 인간의 특성, 사망과 죄의 본질, 원죄의 의미, 사단의 역할, 죄와 사단의 관계등 창세기 1-3장을 알게 되면, 복음은 십자가 죄 사함과 오직 믿음으로 얻은 칭의와 성화를 통한 법적 실제적 구원에 도달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요약>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전인격으로 믿을 때 나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특징과 또 아담의 원죄는 죄책과 오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칭의와 성화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거룩함은 구원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구원 얻은 성도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는 성도가 이미 얻은 구원을, 지금 실제로 죄에 오염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죄에 잡혀 있어서는 절대로 자유함이 없다. 성령께서 탄식하시고 사단의 참소도 이기지 못한다. 죄의 세력을 이겨야 자유함이 있다. 자유함은 거룩에서 나온다. 우리 힘으로는 죄의 본성을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깊은 탄식이 있다.(롬7:15-25) 이때 성령께서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을 이기도록 힘을 주신다.

지금까지는 창세기 1-3장과 로마서 1-8장을 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는 순서에 따라 설명해왔다. 바울이 로마서에 기록한 복음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원죄와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개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함이었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죄인 된 개인이 구원받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구원의 길(행16:17)이라 불리운다. 여기까지는 읽어온 독자는 로마서에 기록된 기독교 복음의 개인구원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복음은 바로 개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칭함 받은 하나님 자녀 됨에서 시작된다. 여기가 바로 기독교의 시작이요 구원의 첫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출발되지 않는 가르침은 복음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개인의 죄 사함만 말하는가? 아니다. 십자가 복음은 개인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이었고 사도행전 제자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성취되어진 것이다. 십자가는 필연적으로 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백성인 교회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교회는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간다.

그러므로 4부에서는 십자가에서 얻은 개인구원이 어떻게 세상구원 곧 하나님 나라 회복으로 연결되는가를 기술하겠다. 이제부터는 개인구원을 위하여 2부와 3부에서 연결해서 설명되어온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의 본질, 원죄의 의미인 죄책과 오염,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믿을 때 발생되는 칭의와 성화의 로마서 프레임을 잠시 벗어나겠다. 그리고 1부인 창세기 1-2장의 창조원리로 다시 돌아가 그 유명한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인 교회의 탄생과 아담이 잃어버린 창1-2장 회복이라는 두 가지 큰 틀을 가지고 설명하겠다. 4부에서 기술되는 세상구원은 3부에 기술된 십자가 복음으로 개인구원 받은 자만 가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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