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3장 믿음,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임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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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믿음,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임

1. 구원의 방법

1.1 철학 - 신념, 사상, 이데올로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피조물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인간은 그 하나님을 찾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존재 인간에게 모든 피조세계의 대리통치자 역할을 맡기시고 지혜를 도구로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한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전혀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삶의 고통과 죽음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인간은 지적인 존재이기에 자신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또한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찾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이것을 종교심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철학과 종교가 발생한다. 철학과 종교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데서 발생했다. 죄로 오염된 피조세계의 고통을 체험하며 이 어려움의 시작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 세상을 창조한 신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철학은 신 존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이성으로 피조세계의 기원과 고통의 원인,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철학은 순수한 사유를 방법으로 하고, 과학은 실험과 증명이라는 객관적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과학은 실험과 증명을 원칙으로 하기에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 있는 물리세계의 진행과정을 밝히는 면에 있어서 객관성이 보장되나 그 한계는 물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종교는 신 존재를 인정하고 인간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구분된다. 철학은 처음부터 신 존재에 대해서 전제하지 않는다. 인간이 우선이고 신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있어야 할 대상으로 인정할 뿐이다. 종교는 철학과 다르게 인간보다 신을 우선한다. 이것이 종교와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기독교 복음은 계시에서 출발하는 점에서 일반 종교와 구분된다. 다른 종교의 신들은 그리이스 로마의 신들처럼 만들어지거나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복음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심을 인정한다. 이것이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기원과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기독교 복음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근거해서 믿고 따른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종교심이 만들어낸 자연신(Deism)과 내재신(Pantheism), 형상신(Idol) 흑 무신론(Atheism)을 의지해서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인간 사유의 방법으로, 과학은 보다 객관적 실험과 증명의 방법으로 인간의 문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즉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종교와 철학과 과학은 인간을 중심함으로 구분된다.

宗(마루 종) "마루"의 사전적 의미는 “등성이를 이루는 지붕이나 산 등의 꼭대기(산마루)” “어떤 사물의 으뜸, 기준, 근원, 근본”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宗敎)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고 근원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과학주의 세계관으로 교육받아온 현대인에게 종교라는 단어는 그리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과학은 사실이고 종교는 미신으로 느껴진다. 이는 종교라는 범주 속에 무속신앙과 신비종교까지 모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을 무속신앙과 비슷한 수준의 미신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라는 단어보다 “기독교 복음” 혹 성경의 용어인 “복음”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한다.

과학은 확인이 가능한 인과율이 있는 물리세계로 제한되고,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사유할 수 있는 형이상학 사유의 세계까지 지평을 넓힌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은 인간 자신에 대한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실험과 이성은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피조세계 이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리 사유를 해도 추론할 뿐이지 다다를 수는 없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에서 피조세계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인정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종교라고 부르는 기독교 복음이란 성경 계시에 의하여 물리세계나, 형이상학 사유세계 이상의 초월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 삶의 이유, 죽음과 그 이후 등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포괄적인 가치체계를 세움으로 하나님 백성인 인간이 오늘의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가르침이라고 정의하겠다.

철학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철학은 인간이 이성을 통하여 세상의 존재원인과 고통의 문제 등에 대한 총체적 논리적 사유 체계를 갖추도록 해 줄 뿐이다. 철학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신념, 사상, 이데올로기를 확립시켜준다. 인간은 철학을 통하여 허구와 감정에 빠지지 않고 종합적 논리적 사고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철학이 제시하는 인간 구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다. 사망의 형벌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구원을 제시하려한 철학자가 있었다.

칼 마르크스는 20세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혁명 철학자였다. 그가 주창한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계급의 불평등에서 시작됨으로 보았다. 자본가들의 착취가 인간을 소외와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데 해결방법은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와 인류 구원의 단계적 발전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제시함으로 수많은 사람을 열광시켰고, 그가 제시한 공산주의는 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막강한 인류구원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지나간 한 세기는 마르크스 철학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가를 보여주었다. 인류의 대형학살 뒤에는 언제나 공산주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도 공산주의가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주의는 공상주의였다.

1.2 종교 - 지식, 선행, 신비

신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과는 달리 종교는 신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인간 문제를 해결하려 함에는 철학과 동일하다. 종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각 종교가 추구하는 구원방법을 따른 구분이다.

첫째, 지식(깨달음) 종교이다. 이 종교는 깨달음을 통해서 인류는 자신의 고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불교와 힌두교 등 인도종교이다. 인도종교는 플라톤 이원론과 유사한데, 플라톤은 현상계와 이데아계를 구분하였다. 영원과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계와 그 그림자 모조품 가짜의 세계인 이 세상으로 나눈다.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현상이 허상이고 실체는 현상 너머에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에 속고 있고 집착하며 고통을 느낀다. 이것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이다. 깨달음의 종교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불교는 세 가지를 기본적 진리로 따르는 종교이다. 불교용어로 삼법인이라 불리우는데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다. 즉 모든 존재의 현 모습은 변하기에 실체가 아니다.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 하는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 모든 존재 배후에도 실체가 없다. 이것이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의 독특한 점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여기에 있었다. 힌두교는 우주적 실체인 브라만과 개인적 실체인 아트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 둘 모두를 부인한다. 힌두교는 현상계 배후에 존재하는 실체를 깨달으려하고 불교는 그것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 종교이다. “열반적정”은 모든 괴로움(苦)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즉 불교는 모든 현상계의 실체와 이데아계의 실체가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불교의 깨달음이이다. 이런 깨달음은 육체의 욕구를 억제함으로 이루어진다. 불교와 힌두교의 고행은 여기에서 나온다.

둘째, 선행(행함) 종교이다. 선행은 대부분 종교의 구원 조건이다. 물론 선행만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하는 종교는 거의 없다. 나름대로 제시하는 구원 방법이 있다. 선행은 그런 구원방법과 함께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중요한 한 방편이다. 예를 들어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와 힌두교에도 선행은 구원의 수단이 된다. 불교에서 공을 들이고, 공덕을 쌓는 것이다.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지식종교, 선행종교, 신비종교로 나눠진다.

이슬람은 다섯 가지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무슬림들은 날마다 그의 입에서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사자다”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 일 년에 한 번 라마단에 낮 동안은 금식을 한다. 무슬림들은 일 년 수익의 2.5%를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종교세로 낸다. 무슬림은 평생 한 번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이처럼 이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해 다섯 가지 계율을 삶에서 실천적으로 지키는 행함 종교이다.

셋째, 신비 종교이다. 깨달음이나 선행실천보다 신과의 신비적 교류를 통한 구원에 도달하려는종교가 있다. 인도종교에서 나온 뉴에이지운동이 가장 대표적이다. 인간은 자기 속에 내재되어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계발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신이 된다. 여기서 신이란 하나님 같은 절대적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주의 실체와 하나된 존재라는 의미이다. 뉴에이지의 신관은 범신론이다. 그래서 뉴에이지 신비종교가 범아일여(梵我一如) 곧 브라만(梵)과 아트만(我)의 일체를 주장하는 인도종교에서 나왔다. 이들은 요가, 유체이탈, 점성술 같은 의식으로 신비를 체험하려 한다.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은 신비체험으로부터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불교와 같은 지식 종교와 다른 것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이 고행과 노력이라기보다는 신비적 종교의식을 통한 체험이라는 데 있다.

종교는 신 존재와 초월의 세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다르다. 그러나 깨달음, 선행(행함), 신비체험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에서는 철학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 복음은 구원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점에서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1.3 기독교 복음 - 믿음

일반 종교가 구원의 방법으로 지식, 선행, 신비적 체험을 주장하는데 비해, 기독교 복음은 오직 믿음 하나만을 제시한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독특한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에서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먼저 믿음의 기본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고 그 다음 그 믿음이 어떻게 구원의 수단이 되는지를 알아보겠다.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신념과 동의어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의미한다.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되어진다 혹 성취된다는 강력한 확신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차이는 일반인들은 신 존재 없이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 긍정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고, 종교인들에게는 신 존재를 의지해서 할 수 있다는 낙관적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니다. 먼저 믿음의 기본적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믿음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믿음이란 실체를 내가 확인하지 못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서 내가 인정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중 아무도 줄리어스 시이저가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들 중 누구도 네로가 로마를 불태울 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매일 아침 출근길 자동차에서 듣는 라디오 뉴스가 있다. 뉴스는 수많은 소식들을 쏟아낸다. 나는 그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근처에도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믿어서 아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을 믿는 것이고, 뉴스 아나운서의 진실성을 믿고 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신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둘째, 믿음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 인격적 신뢰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주체 자유인격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자신의 지성으로 인식하고 감정으로 동의하며 행동으로 순종하고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전 인격적 행위이다. 이 네 가지 행위(지식, 동의, 순종, 의탁)가 포함된 것이 믿음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믿음을 지식적 인식으로 생각하고 조금 더 관대한 사람은 감정적 동의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낙하하는 스카이 다이버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낙하산이 펴진다는 지식과 그것은 안전하다는 감정적 동의 확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낙하산을 메고 직접 뛰어내리는 의지적 행동으로 옮겨질 때 그가 낙하산의 안전성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의 전인격을 그 대상에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내가 보지 못한 사실에 대해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그 사실에 나의 지정의 전인격으로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런 두 가지 믿음의 기본적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믿음이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믿음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야기한다. 아빠는 자기 생일 때 자전거 사줄 것으로 믿는다고 확신있게 말한다. 이것도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아빠가 자전거를 사줄 것을 믿는 믿음이다. 아무 것이나 인정하고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구원의 길로 제시한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고 전인격적 신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가 어떻다는 것인가? 예수가 남자라는 것을 믿는가 아니면 유대인이라고 믿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조건 예수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십자가 죄 사함이 내 죄를 위함임을 믿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 죄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예수를 믿게 된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온 우주와 나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 때 인간은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 된다.(시111:10)

나는 누구인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의 본성에 묶여 지금도 내 뜻대로 살며 계속 실패하고 있는 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 싶으나 절대로 거룩해질 수 없고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나... 그 결과 사단의 참소와 내 양심의 정죄로 인해 죄의식과 죄책감에 눌려 살고 있는 나... 사는 동안 사망의 고통 고난과 육체의 죽음 이후 완전한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나... 구원의 소망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 이러한 죄인된 자기 모습을 발견할 때 인간은 처절한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아담의 법적인 죄책과 지금 내속의 부패한 죄의 본성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분...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사단의 참소와 공격을 이길 수 있게 하신 분...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하나님의 대권을 가지고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의 주가 되셔서 그들을 보호 인도하시며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

성령님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룬 완전한 구원을 지금 내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분...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 요구하는 더러운 죄를 미워하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 사함으로 거룩케 하셔서 죄의식뿐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분...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사단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도록 법적 실제적 의로움을 가져다주시는 분... 또 귀신 사단과의 직접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내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나의 든든한 보호자... 비록 우리가 아직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미 얻은 구원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신 분...

구원받은 성도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새로워진 거룩한 무리들의 공동체, 교회... 자기의 죄인 됨을 시인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한 새로운 백성들... 죄인을 거룩케 하는 십자가 복음으로 죄악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치유하는 흰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들... 전도현장에서 귀신과 사단의 실제적인 공격과 싸워 이기는 복음의 영적 능력을 가진 거룩한 백성들...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들은 세상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진 자들이 죄로 더러워진 온 세상을 주의 거룩함으로 변화시켜 나가고, 후에 영광의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모든 죄와 사망의 세력이 끝나 사단이 무저갱에 갇히게 될 날, 더 이상 눈물이 없고 고통도 유혹도 죄의 저주도 사망도 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통치하시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또한 예수 피로 거룩해진 영적 아브라함 자손, 새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는 반드시 죄와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사단과 싸워 승리할 것이다. 그래서 주의 재림 전까지 이 땅은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창조질서가 점차 회복되어 갈 것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범죄로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해진 성도가 회복해 나간다.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지정의 전인격으로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이 구원얻는 믿음이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나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인데 성자 하나님께서 오셔서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내가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을 믿는다. 이것을 좀 더 요약하면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라는 것을 믿는다. 이것을 그냥 간단하게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한다. 더 줄여서 “오직 믿음”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의 방법은 한 단어로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2.2 회개 - 주권 전이, 가치관의 변화, 전 인격적 의탁

구원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임을 알게 된다. 지금도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자기가 주인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자기 속에는 부패한 죄의 본성이 가득차 있고 어디에도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어있고 지금 모든 삶이 사망의 연장이며, 얼마 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육체가 썩음과 해체가 되며, 그 후 영원한 심판이 그 앞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은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알게 된다. 십자가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 복음을 지정의 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아왔던 지나온 자신의 모든 죄를 뉘우치게 된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엎드려 예수의 속죄제물 되심을 감사하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생을 드리게 된다. 여기서 회개도 지적 감정적 뉘우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전인격을 모두 드리는 전 인격적 행동이다. 마치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먼 도시로 가서 다 허비해버린 탕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했듯이, 회개는 감정적 뉘우침에만 그치지 않고 전인격적 결단을 의미한다.

다시 정리해보면, 회개란 무엇인가?(행2:38) 예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구원 얻기 위해 행해야 하는 어떤 통과의례 절차가 아니다. 회개는 성경이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나를 알게 될 때 내게 일어나는 당연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왕 되심 앞에, 또 나를 위해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무릎 꿇는 것이다. 이 복음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죄인됨이 인정되고 거기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나온다. 의도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억지로 쥐어짜내는 회개가 아니라 자발적인 죄 용서를 구하는 회개가 내 속에서부터 고백된다. 나의 부패함에 대한 처절한 통회와 본성적 악함에 대한 탄식이 나오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가 반드시 나온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 성도들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구원 이후에도 짓는 죄도 당연히 회개하게 된다. 회개는 필연적으로 세 가지를 동반하게 된다.

첫째, 주권 전이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온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하여 또 예수를 주로 섬기고 살겠다는 고백이 나온다.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과 예수님께 드리게 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의 피조물 됨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시작된다. 회개는 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 선 자는 반드시 주권전이가 일어난다.

둘째, 가치관의 변화이다. 아담적 자아로 살아온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를 위하여 살아왔다. 세상 모든 가치가 자기 중심적이고 또 육체적이요 정욕적이다. 에베소서는 이를 두고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대로 사는 삶(엡2:3)이라고 말한다. 예수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 모든 인간은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변하게 된다. 자기를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육체의 부패한 소욕을 따르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그의 삶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이 된 것이다.

셋째, 전인격적 의탁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삶을 의탁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예수의 주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께 의지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보다 감사와 신뢰가 가득차게 된다. 그의 삶은 그의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것이 된다. 감격하게 된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고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도록 만든다. 하나님 앞에 섰는데 여전히 교만하고 자신의 아담적 자아에 대한 회개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회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회개가 죄 사함을 구하는 부정적 측면이라면 믿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긍정적 측면이다. 회개가 자신의 아담적 자아를 뉘우치는 소극적 태도라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을 붙잡는 적극적 태도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회개와 믿음을 회심(Conversion)이라는 한 용어로 설명한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없는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 없는 회개는 구원 얻는 회개가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성경의 회개가 아니다. 다른 종교에도 있는 뉘우침에 불과하다. 반드시 믿음은 회개를 동반하고, 회개는 믿음을 수반한다. 동전의 양면이다. 이때 구원이 발생된다.

회개는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는가? 만약 내가 다 회개한줄 알았는데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것이 남아있다면 구원 못 받는가? 이런 질문은 원죄의 회개와 자범죄의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다. 회개는 근본적인 방향 돌이킴을 의미한다. 즉 원죄의 회개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적 자아에서 하나님께로 삶의 근본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이다. 원죄에 대한 회개가 되어지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자범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난다. 인간은 평생의 죄를 다 회개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범죄의 회개는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까지만 하면 된다. 생각나는데 회개 안하는 것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이고, 생각 안나는데 억지로 짜내는 것은 종교적 자학이다.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지 못하고 원죄의 회개를 자범죄의 회개에 적용할 때 성경과 상관없는 종교적 책망과 자책에 빠지게 된다.

2.3 믿음 - 십자가 사건을 나의 전 인격으로 받아들임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듣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게 되고 또 하나님 떠난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알게 된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죄인된 자신을 위하여 친히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된다. 구원은 예수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적 죽으심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성립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정결하게 되고, 의로움 얻게 되고, 거룩해지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

여기서 믿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확인 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임이요, 그 사실에 내 전 인격으로 신뢰하고 의탁함을 의미한다.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없는 이천년 전에 한 번 발생한 역사적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거부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속죄제사였다는 사실을 내가 지정의 전 인격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나의 죄를 회개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나라가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이러한 믿음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이 말은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될 때 자신의 피조물 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로 반응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또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회개와 믿음의 행위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독립적 주체요 자유인격인 인간의 주체성을 거부함이 아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아담적 자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의 인격을 가지고 고백함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수 있도록 도와주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기계적 피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4 영접 - 믿음으로 받아들임, 주로 시인함, 거룩함이 나타남

이러한 믿음은 전도현장에서는 영접이란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 영접은 믿음을 포함해서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믿음(요1:12)이다. 예수 십자가 대속을 나를 위한 사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역사적 사건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건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요1:12절에서 영접의 다른 이름은 믿음이라고 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아무거나 믿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고, 강하게 믿는 것도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둘째, 주로 시인함(롬10:9-10)이다. 나의 주인 됨을 거부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나의 피조물 됨을 거부하는데 있었다. 내 속에 실제하고 있는 아담의 범죄한 속성인 자기가 주인 됨을 회개하고 나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 나를 위한 대속제물이셨음 그대로 인정하며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의 주되심을 말함으로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화형으로 죽임을 당했다.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의 주 되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셋째, 거룩함이 나타남(고전1:2)이다. 이것은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새사람 된 모습이다. 성령충만은 확신으로도 나타나지만, 그 확신은 필연적으로 교만이 아닌 겸손을 동반하며 그의 삶에는 거룩함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정결케 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새사람 되게 만든다. 이전에는 본능적으로 죄를 좋아하고 즐기며 따라갔지만, 의와 거룩의 영이신 성령이 내안에 들어오신 후부터 의를 좋아하고 거룩을 기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거룩함에서 오는 참된 자유, 죄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기쁨...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접이다.

잠시, 영접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영접(迎接)은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 곧 믿음을 의미하는 기독교 용어이다. 본문은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했지만 누구든지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과 연결되어 설명되곤 하는데 이는 영접(迎接)이라는 한자번역과 예수님이 문밖에서서 문을 두드리는 그림이 일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자칫하면 영접(迎接)의 본래 의미가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을 듣고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성령과의 접촉을 의미하는 영접(靈接) 좀 더 직설적 표현으로 접신(接神)과 비슷한 상태로 생각되기 쉽다. 이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셨기에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 같아 전도현장에서 일반인에게 설명하기가 쉽고, 일반인도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해이다. 영접은 접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접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지 접신이 아니다. 무당의 접신은 내 인격이 없어지고 귀신에 붙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접은 내 인격은 그대로 있고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성령충만도 내 인격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성령께서 완전하게 지배하심으로 내 능력 이상의 힘이 나옴을 의미하지 무당의 접신처럼 내 인격이 없어지고 성령의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심은 성령과 접촉되었다고 이해될 수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성령은 내 인격을 없애지 않으시기 때문에 무당의 접신과 같은 상태로 설명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영접을 접신으로 생각하면 복음설명 혹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임보다 영접기도, 영접행위 자체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영접은 앞에서 계속 언급해온 것처럼 십자가 복음을 믿고 나의 죄인됨을 인정하며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모셔들이는 전인격적 믿음행위이지, 이것 없이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인격으로 믿고 받아들여 영접(迎接)하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 없이 아무리 영접(靈接)해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 이는 영접기도 영접행위를 따라한 것이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기에 영접(迎接)한 것은 아니다. 영접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전인격으로 받아들이는 유무가 영접여부를 결정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0-12)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십자가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다시 말해 십자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필연적으로 위의 세 가지 열매가 맺어진다. 물론 이런 열매가 100% 완벽하게 맺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절대로 완전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열매가 맺어지는 쪽으로 결과가 나온다.

3.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3.1 오직 믿음으로

중세 천 년은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베드로의 후계자로 불리우는 교황들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제도화된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권위가 무시되는 때였다. 성경보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가 더 높았다. 성경은 교회가 허락했기에 사용되어지는 책이었다. 성경이 교회를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을 결정하고 사용한다. 로마교회가 결정한 수많은 칙령과 가르침들이 성경보다 더 강조되고 가르쳐졌다.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성경에 계시된 원리보다 로마 가톨릭의 결정이 더 상위에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 특별계시로서의 권위가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은 구원에 관하여 성경의 계시를 따르지 않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행함을 추가한 것이다. 만약 행함의 잣대에 의해 구원여부가 결정되면 인간은 구원에 대해서 전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늘 불안해하며 할 수도 없는 행함에 힘들어했다. 십자군전쟁과 면죄부사건은 로마 교황청이 구원을 불안해하는 일반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해줌으로 가능하게 했다. 중세는 정말 모든 면에서 어둠의 시대(Dark Age)였다.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반박이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성경을 근거로 구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원에 행함이 포함된다는 것은 아직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성경적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아담의 원죄가 지금 모든 인간에게 법적으로 실제적으로 미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 부패하고 전적 무능력하다. 이런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인 십자가 죄 사함과 그것을 선물로 받는 믿음밖에 없다. 구원은 행함없이 오직 믿음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본성에 내재 되어있는 원죄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이어야 했다. 이것이 성경의 절대적 계시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구원에 관하여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세 가지 표어로 대표된다. 이 모든 것을 한 가지로 하면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라 할 수 있고, 구원론을 포함하여 종교개혁 전체를 포괄적으로 요약하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로 이해될 수 있다.

3.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구원에 대한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수도사 마틴 루터에게 구원을 확신 시켜준 성경은 로마서였다. 로마서는 죄로 인해 사망에 잡힌 인간(1-2장), 십자가 대속(3장),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칭의(4-5장), 성령의 역사, 그리스도와 연합, 성화(6-8장)를 말하고 있다. 사망에 잡힌 인간의 원죄를 이해하고 십자가 죄 사함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칭의와 성화를 통해 구원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의 대주제 곧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였다.

원죄를 이해할 때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을 알게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가 얼마나 큰 은혜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독교 복음은 행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행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고 행함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다른 종교처럼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방법에 첨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아직 잘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십자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해가 덜 된 것이다. 이 복음이 오늘의 기독교가 있게 만들었다.

3.3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9)

성경이 계시하는 구원이란 아담이 잃어버린 창조의 축복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다시 하나님 백성 되고 하나님의 대리통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막은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죄였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의 형벌을 치러야 하는 죄책과 죄의 오염 곧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부패한 죄의 본성 문제였다. 이 두 가지가 원죄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죄책과 오염의 원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절대로 인간은 자기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는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지정의 전인격으로 받아들임, 신뢰함, 의탁함이 곧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백성됨을 회복시킨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요약>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죄 사함을 인정하고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그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근본적인 삶의 방향이 바뀐다. 나를 위한 삶에서 돌이켜(회개)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된다(믿음).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절대로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 해주셔야만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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