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7장 회복, 하나님 나라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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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회복, 하나님 나라

1.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

1.1 개인 회복

모든 피조물들을 이끌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아담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의 나라를 세우려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 반역함이다. 이때부터 모든 피조세계는 죄의 세력에게 지배당하고 파괴되기 시작했다. 고통과 고난이 찾아왔다. 이는 피조물들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의 죄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의 핵심부품인 중앙처리장치(CPU)가 오작동을 함으로 컴퓨터가 틀린 데이터를 쏟아내는 것과 같다. 첫 아담의 범죄는 피조세계내의 모든 단절을 가져왔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세계의 단절이다. 이것이 사망이다. 그러나 십자가 죄 사함은 이 모든 단절을 회복시켰다. 사망권세를 깨뜨렸다.

개인의 고통은 하나님과 단절에서 온다. 영적 피조물 인간은 그의 본능 속에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되어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철학에서는 진리에 대한 갈망, 일반종교에서는 실체(신)에 대한 추구 등으로 표현하지만 그 모든 갈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영적본능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파스칼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물리세계 속의 진공상태를 발견하고 압력에 관한 원리를 발표하였다. 그는 범죄한 인간의 마음을 진공상태로 묘사하였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담의 범죄 이후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만큼 공허(진공상태)가 있는데, 이 공허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 채울 때만 만족함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공허와 내적 갈등을 가져온다. 인생은 모자라고 부족하다. 세상은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세상의 물질적 자원은 그에게 만족을 줄만큼 풍요롭지 못하고, 설령 물질을 다 가진다해도 그의 부패한 본성은 만족하지 않는다. 육신의 쾌락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공허감을 가져다준다. 이를 정신적 만족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철학적, 종교적 시도는 고도의 지성과 극단적인 수행을 요구한다. 정신적 만족도 그에게 안식을 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존재이다. 그에게는 동물과 다르게 정신세계도 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이 모든 것들의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한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고 우리 주위에도 실제로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시달림으로 고통을 당한다. 정신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 혼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주변에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는 너무도 많다.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이요, 그 현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모든 것을 회복하셨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자녀의 위치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죄의 세력에서 놓여나며 사망의 형벌에서 벗어나고, 사단의 유혹에서 해방된다. 자유를 얻게된다. 그래서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처럼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시124:7)

1.2 사회 회복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표현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성경이 먼저였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지 않도록 함께 살 수 있는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창2:20) 가족은 사회의 최소단위이며 세상은 이런 가족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

사회의 고통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에서 온다.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언한 인간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 원죄의 특징은 자기가 하나님 됨이다. 한마디로 자기 중심성이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위하며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른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들의 나라는 세계인구 수만큼 구성된 “자기 왕국”들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이 찾아온다.

죄에 오염된 인간은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산다. 사랑이 없다.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스의 말처럼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이런 인간사회에서 다른 것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가장 순수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고 그중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가장 하나님의 사랑과 근접한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도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는 비견될 수 없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가 다른 사람을 돌아볼 수 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는 자기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줄 알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귀한 자임을 알게 된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힘이 생기고 사랑을 받을 때 용기가 생긴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는 지나온 과거의 모든 열등감과 비교의식이 사라지고 건전한 자아로 바뀐다.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사랑받은 자만이 줄 수 있다.

십자가 복음이 들어간 곳마다 사람들이 살아난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모든 종교적 억압과 사회적 차별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심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기독교 복음을 가장 핍박하는 나라중 하나이다. 이는 복음이 인간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산 혁명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또 함부로 제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상과 기독교 복음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하나님과 그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는 기독교와 하나님 없는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이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면 공산주의 사상은 무너진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혹하게 핍박하는 것이다.

인도에는 카스트 신분제도가 있다. 힌두교 신화에 따르면 신의 몸에서 네 개의 카스트가 나왔다고 한다. 브라만은 신의 입에서 나왔는데 사제와 학자가 될 수 있다. 크샤트리아는 신의 팔에서 나왔는데 무사나 왕족같은 통치자들이 될 수 있다. 신의 넓적다리에서 나온 바이샤는 생산 활동을 맡고, 신의 발에서 나온 하층민 수드라는 다른 카스트를 섬겨야 한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카스트에도 속하지 않는 최하층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절대 접촉해서는 안되는 불가촉 천민 달릿(Dalit)이다. 힌두교에서는 이 카스트 제도가 우주의 진리요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카스트 제도는 절대로 신분 변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 주어진 카스트로 살아간다. 카스트 안에는 수없이 많은 직업이 있는데 그 직업을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카스트에 충실해야 힌두신이 다음 세대에서 좋은 카스트로 태어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세탁, 청소, 도살 같은 험한 일은 달릿이 한다. 도비가트라는 공동빨래터에서 하루 16시간씩 손으로 세탁물을 빨며 살아가는 달릿이 있다. 이들이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것은 한국 돈으로 3천원이다. 평생 하수구와 화장실만 청소하는 달릿도 있다. 이들의 자녀도 부모와 똑같이 그 일만 해야 한다. 비록 카스트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인도에는 전체인구의 15%에 해당하는 1억명 이상의 달릿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십자가 복음만이 이들을 자유케 한다. 복음은 인간을 종교적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이 하나님 자녀로 존엄하게 살아가도록 만든다.

1.3 문화 회복

십자가는 인간과 피조세계의 단절을 회복한다. 피조세계는 인간을 무서워한다. 피조물들은 인간이 더 이상 자기들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도와주던 대리통치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가는 곳마다 피조세계가 파괴된다. 사자와 호랑이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무섭다. 맹수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배고플 때만 사냥을 하지만 인간은 배고픔과 상관없이 재미로 한다. 짐승이나 물고기도 법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인간은 무차별 파괴한다. 동물은 자연질서에 의함보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멸종되어가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인간은 죽이기를 즐기고 또 죽이고 싶어한다. 바로 죄의 파괴적 속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피조세계도 사랑한다.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반종교의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주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다. 피조세계는 인간의 범죄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인류가 다시 나타나 자기들을 다스려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19-23)

십자가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류는 자기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피조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갖게 된다. 죄에서 벗어 낫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류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대리통치자 사명은 인류 사회를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법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창1:28)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아담이 잃어버린 문화를 회복해간다. 인간사회뿐 아니라 피조세계 전반에 걸쳐 그들을 다스리고 살리는 문화를 만들어나간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새로운 인류, 새로운 하나님 백성이다.

복음이 들어간 곳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꽃피우게 된다. 죄의 세력이 꺾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없는 곳의 문화는 죄와 육체의 문화이다. 타락의 문화이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사단주의자 크라울리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행하라. 그것이 곧 법칙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살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삶이고(엡2:1), 공중 권세잡은 자를 따라 사는 삶이고(엡2:2),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며 이것이 바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삶이라고 말한다.(엡2:3) 하나님 없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심판과 타락의 문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죄의 타락적 속성 때문이다. 오직 새로운 하나님 백성만 죄의 이 타락적 속성을 이기고 거룩한 문화를 회복한다. 첫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십자가가 전파된 곳은 죄의 세력이 무너지기 때문에 거룩한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한다. 개인의 도덕적인 삶에서부터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이 지배한다. 경제적 정의가 세워지고, 정치적 억압도 없어진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존엄성이 중시되고, 음악과 미술도 인간의 육체적 자극이 아닌 하나님 나라 회복에 맞춰 표현된다. 문학도 인본주의 가치관을 주입하거나 또는 죄의 욕구에 의한 왜곡된 사랑의 글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회복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회복하는 글이 쓰여진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문화가 회복된다.

2. 성전회복 예언과 하나님 나라

2.1 이스라엘의 멸망

구약성경의 후반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는 선지자들의 예언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금하셨다. 성경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은 우상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세계위에 초월하여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세상에는 여러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신다. 나머지는 피조세계 내에 있는 우상에 불과하다. 사람보다 능력이 있어 보이기에 사람들이 신으로 오해하고 섬기는 것뿐이다. 그들을 신이라 부른다면 하나님은 신보다 더 높은 단어로 구분되어져야 한다.

우상은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한 대상이다. 자기의 필요욕구가 밖으로 투사된 것이다. 성경은 우상을 너를 위하여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출20:4) 우상을 위하여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우상이 존재한다. 우상은 순종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다. 우상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아담들이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과 비슷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대리 만족하는 것이다. 자기 하나님 됨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움은 받고 싶고 그러나 자기 하나님 됨을 포기하기 싫은 죄의 본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하나님께 인간의 격을 의미하는 인격이란 용어가 부적절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더 쉬운 표현이 없기에 인격으로 표현한다. 신격이란 표현은 인격보다 쉽게 이해되지 못한다. 성경은 인격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몇 가지로 표현한다. 창조주와 피조물, 왕과 백성, 주인과 종, 목자와 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이 관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격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주시고,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

우상은 비인격이다. 섬김이 없다. 자기 필요만 추구한다. 마치 어떤 아이가 부모와 전혀 대화하지 않고 자기 방에만 있다가, 필요할 때만 방에서 나와 부모에게 요구조건을 나열하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과 똑같다. 그 아이에게 부모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자기 욕구충족의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우상종교의 특징은 구복행위만 있고 윤리가 없다. 그러나 우상의 해악성은 윤리부재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상이 인간의 죄 본능의 산물임에 있다. 하나님께 대해 우리의 순종은 빼버리고 도움만 요청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욕심만을 채우기를 본능적으로 더 좋아한다. 자기가 하나님 됨은 그대로 가지고 싶어한다. 윤리의 부재는 죄로 인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에 불과하다.

죄에 오염된 인간은 그대로 두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점차 우상을 숭배하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함보다 자기 필요만 채우는 우상이 훨씬 매력적이다. 계속 경계하고 조심시키지 않으면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시 첫 아담의 범죄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사망의 고통을 당한다. 원죄로 오염된 부패한 본성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옛날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늘날도 형태와 양상만 달리할 뿐 본질은 똑같다. 심지어 교회내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과 우상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강력하게 금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주의와 질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상국가로 변질되어갔다. 그래서 바벨론과 앗수르의 포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유대교와 초대교회의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차이를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자세한 것은 새 언약 부분에서 언급한다. 유대교와 초대교회는 포로기 선지자들이 선포한 새 언약(렘31:31-34)의 성취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체험한 초대교회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구약을 신약의 눈으로 바라본다. 구약의 아브라함 자손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하나님 나라가 혈통적이 아니라 영적임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태어난 모든 인류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 아브라함 자손, 영적 이스라엘 백성임을 선포하고 구약의 이스라엘에 관한 모든 축복과 회복의 예언 등을 교회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갈라디아서이다.(갈6:16)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기에 아직도 새 언약의 도래와 이스라엘의 육신적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2.2 이사야와 다니엘의 하나님 나라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한다. 이사야서의 회복부분은 40장 이후부터이며 여기에는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메시아, 그리스도)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묘사한다. 그 중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회복하시는 나라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사49:6-8)

이사야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한다.(6절) 여기서 야곱지파와 이스라엘은 신약교회를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새로운 백성들이다.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한한 전 인류 가운데서 탄생됨은 이방의 빛이라는 유명한 예언에서 알 수 있다.(6절) 바울은 이 구절을 이방인 전도의 근거로 삼았다.(행13:47)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은 그가 새로운 백성을 일으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다.(8절)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말한 이방의 빛으로 오셔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일으키는 분이셨다.

다니엘도 새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예언한다. 느브갓네살 왕의 금신상 꿈을 해석하며 다니엘이 하는 설명이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느브갓네살 왕의 꿈은 큰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 우상의 머리는 금, 가슴과 팔들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그 종아리는 철, 그 발은 얼마는 철과 진흙으로 섞여 있었다.(단2:33)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뜨인 돌이 날아와 그 신상을 산산이 부수고 우상을 친 돌들은 태산을 이루어 세상에 가득해지는 것이다.(35절) 이에 대해 다니엘은 큰 신상은 앞으로 일어날 세상 나라의 네 왕들이며 뜨인 돌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로 설명한다.(44절)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하고 세상 인간이 주인 되는 아담의 왕국들을 다 무너뜨리고 영영히 설 것으로 말한다.(44절) 이 예언은 7장에 가서 더욱 선명해진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7:13-18)

다니엘이 밤에 환상을 보는데 인자 같은 분이 하늘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온다.(13절)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의미이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은 분명 신적인 권위의 하나님이신데 인자로 표현되는 것은 그분의 모습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체로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대제사장이 예수를 참람하다고 말하며 죽이기로 정한 것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바로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인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막14:62) 하나님께서는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시고 열방의 주로 삼으셨다.(14절)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영원하고 폐하지 않는다.(14절) 그리고 다니엘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거룩한 백성들이 나라를 얻고 그 누림은 영원함을 예언한다.(18절) 두 구절을 연결해서 자세히 보면, 앞 구절의 인자가 다스리는 나라와 뒷 구절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얻은 나라는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임을 알 수 있다.(18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이셨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대권을 받으시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새로운 하나님 백성인 교회는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게 된다.

2.3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 성전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보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한 선지자이다. 그의 마른 뼈 군대환상(겔37장)과 성전환상(겔40-48장)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겔36:26-28)과 연관된 일련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예언이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6-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에는 새로운 영을 주심으로 그들에게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26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게 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다.(27절) 이스라엘의 문제는 율례를 실제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룩의 모양만 있었지 실상은 아니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고 인간의 원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사 그들이 죄를 이김으로 율법을 실제로 지키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 될 것으로 말씀하신다.(28절) 그리고 에스겔은 바로 마른 뼈들이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을 본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37:11-14)

멸망한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심이다.(11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큰 군대를 이루셨다. 그들은 포로된 곳에서 돌아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게 된다.(12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이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13절)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가 된다. 성령께서 그들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14절) 여기서 구약선지자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이 나온다. 남은 자는 멸망한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께서 일으켜 새로운 하나님 백성을 삼으시는 그루터기이다. 구약의 렘넌트는 회복된 하나님 나라, 신약교회를 의미한다.(롬9:27-29) 마른 뼈 군대환상 이후 에스겔은 다시 성전환상을 본다.(렘40-48장)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47:1-12)

새로 태어난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긴다.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했던 죄인임을 회개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때 죄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은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모습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 이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큰 강물을 이루고(5절) 그 물이 들어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회복된다.(9절) 세상은 그들을 통하여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 하나님 백성들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됨을 고백하는 “여호와 삼마”이다.(겔48:35)

3. 요한계시록과 기독교 세계관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가?

사람들에게 그 내용에 있어서 가장 많이 오해받은 성경이 있다면 요한계시록일 것이다. 일반인들은 요한계시록을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같은 미래 점쟁이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어떤 신학에서는 요한계시록을 현재 이스라엘 나라의 현실과 맞추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떤 분들은 먼 미래에 하늘에서 이루어질 신비적인 사건으로 말한다. 어떤 분들은 666은 컴퓨터 바코드요, 열 뿔 짐승은 유럽연합국가(EU)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봉(5-6장), 일곱 나팔(8-9장), 일곱 대접(15-16장)의 심판이나, 붉은 용(계12장), 열 뿔 짐승(13장), 두 뿔 짐승(13장), 붉은 짐승을 탄 큰 음녀(17장) 등은 그 표현이 어렵기만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나님 나라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개괄적으로만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은 지상교회가 죄와 사망과 사단이 현존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나가는지 보여주는 대단히 아름다운 책이다. 이 책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예언에서 시작하여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 예언한, 십자가를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질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총괄적으로 그려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감동적이며 총체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보여준다.

먼저 요한계시록의 기록배경과 상황을 보면 요한이 왜 하나님의 계시를 비유와 은유로 기록했는지 알게 된다. 당시는 AD 95년경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였다. 이레니우스는 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졌다고 기록하였다. 도미티안은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였다. 이전 로마 황제도 신으로 추앙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나 또는 사후에 신으로 높여진 것이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는 즉위 초기부터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다. 그는 자신을 주(Kyrios)로 부르기를 요구했다. 모든 로마 지배지까지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황제를 하나님이신 주님(Kyrios)로 부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초대교회가 황제숭배를 거부하자 이때부터 도미티안은 교회를 무섭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교회 내에 순교자들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박해가 계속되자 어떤 교회(공동체)는 황제와 타협하여 주님을 거부하고 완전 세속화되고, 어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고, 어떤 교회들은 세상과 주님을 동시에 섬기며 타락해나갔다. 요한은 이런 상황 속에서 핍박받는 교회 공동체들을 격려하고 믿음을 잃지 않도록 주의를 주며 십자가 복음이 세상을 어떻게 정복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비유와 은유가 나오는 것은 교회를 공격하는 대적들이 현재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도 로마의 실명을 거론하며 기록할 수 없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대반역이며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1-3장은 서론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직접 돌보시고 계신다.(1:20)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교회의 주님이심을 보여준다. 일곱 교회는 계시록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일곱 개의 교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곱이라는 상징성은 모든 지상교회를 의미한다. 그들은 오늘의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정통은 고수하나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종교적 행위만 남은 교회도 있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핍박을 참고 십자가 복음을 붙잡는 교회도 있다. 풍요로 인하여 완전 세속화된 교회도 있으며, 거짓 음녀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단 교회도 있다. 영적으로 침체되어 복음이 종교로 전락된 교회도 있고, 믿음을 잘 지킨 칭찬받는 교회도 있고, 세속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교회도 있다. 이들에 대해 그리스도는 칭찬과 위로와 경고를 보내며 계속 십자가 복음을 지킬 것을 격려하신다.

계시록 4장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도들의 대표인 이십사 장로들(열두 지파, 열두 사도)과 모든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에 둘려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 생물은 각 분야에 가장 탁월한 짐승들을 의미하며 모든 피조물들의 대표이다. 사자는 맹수 중 으뜸, 독수리는 새들 중 으뜸, 소는 가축 중 으뜸,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 이는 이 구절에 대한 유대인 미드라쉬 해석이다.

계시록 5장은 죽임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만유를 위임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어린양에게 돌려드리는 새 노래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을 얻으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새로 회복된 하나님 나라가 영원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5:9-10)

계시록 5-16장의 일곱 인봉(5-6장), 일곱 나팔(8-9장), 일곱 대접(15-16장)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사건을 일일이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구속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종말적 정황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일곱 인봉,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스물 한 개의 별개의 재앙이 아니라 계시록 5장의 예수께서 떼신 인에 대한 일곱 인봉 심판을 점차 세밀하게 중복 발전시켜 기록하는 것이다.

계시록 7장과 14장은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의 성도를 보여준다. 이들은 어린양의 보혈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 백성들이다. 십사만 사천의 숫자는 완전수 신구약 성도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상징한다. 이는 모든 민족가운데서 태어나게 된 신약교회 큰 무리를 표현하는 숫자적 상징에 불과하다. 9절에 나오는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흰 옷을 입은 큰 무리가 바로 십사만 사천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9-14)

“이 사람들은 여자로(음녀 바벨론)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4-5)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 비유는 외면적으로는 핍박을 당하나 내면적으로는 주님의 보호를 받는 교회의 모습과 그들의 증거사역을 나타낸다. 두 증인이 증거사역을 마치고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과의 싸움에서 죽는 것은 물리적 죽음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부활함으로 기술되기 때문이다. 아마겟돈 전쟁(계16장), 백마 탄 주님의 전쟁(계19장), 곡과 마곡의 전쟁(계20장)은 사단과 교회공동체가 치루게 될 종말적인 영적전쟁을 물리적인 전쟁의 표현기법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 전쟁의 결과는 사단, 용, 짐승의 거짓선지자의 패배로 끝난다. 교회는 사단의 공격으로 극도의 고난과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과 패배는 잠정적 한시적 모습에 불과하다. 교회 공동체는 에스겔의 마른 뼈 군대 환상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이스라엘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난다. 이때 일곱째 천사의 나팔과 하늘에 큰 음성이 들린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

계시록 12장의 여자와 용은 창세기 3장 15절 예언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될 신약교회와 이를 막으려는 사단의 공격을 나타낸다. 여자가 메시아인 아이를 낳은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을 의미하며 결국 여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성취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신구약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아우르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바로 아들의 탄생이었다. 여기에서 사단의 정체가 드러난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9)

계시록 13장의 두 짐승은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와 함께 용(사단)이 신약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의존하는 세 동료이다. 열 뿔 짐승은 박해자 로마, 두 뿔 짐승은 미혹자 로마, 큰 음녀는 타락자 로마를 말한다. 로마는 오늘의 불신세상 전반으로 적용 해석된다. 세상(사단)은 가혹한 핍박이나, 거짓 미혹이나, 육신적 향락을 주며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십자가 복음을 버릴 것을 유혹한다. 그러나 교회는 어린양을 따라 계시록 14장의 새노래를 부르며 굳건하게 믿음을 지킨다.

계시록 18장은 큰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교회를 유혹하던 사단과 그 무리를 심판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지어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계18:4-5)

계시록 19장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교회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군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짐승과 땅의 군대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모두 패배시킨다. 거룩한 전쟁이다. 영적 전쟁이다. 십자가 복음으로 죄와 사단의 세력을 이기는 것이다.

계시록 20장은 천년왕국을 보여주는데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실현된 천년왕국”(무천년설)을 주장한다. 무천년설이란 천년왕국은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 이루어질 천년의 통치기간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성도들을 통치하신다는 주장이다. 지금이 천년왕국시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성도들의 주님으로 성도들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만유의 통치자로 다스리고 계신다.

이는 초대교회의 말세 개념만 봐도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주의 날,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되었다고 설명한다.(행2:17) 이는 초대교회가 종말로 기다리던 구약의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성취된 새로운 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히1:2, 히9:26, 벧전1:20). 신약은 지금을 말세라고 부른다. 신약의 종말은 미래에 주님이 재림하실 심판의 날만 의미하지 않는다. 종말은 예수님 초림부터 예수님 재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십자가 복음은 먼 미래가 관심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이다. 미래의 천국은 당연히 다가오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받게 된다. 복음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 통치를 받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 수는 없다. 죄 때문이다. 죄와 사망과 사단이 존재하는 한 이 땅에서 지상천국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하지만 세상을 회복해 나간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form) 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나라가 되었다.(deform) 우리는 세상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나간다.(reform)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세상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계시록 21장은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 성 건물과 결혼하시는가? 그럴 리가 없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한다.(고후11:2, 엡5:32) 새 예루살렘 건물의 묘사만 보아도 그렇다. 성의 열 두 문에는 구약 성도의 대표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있고,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는 신약성도의 대표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새 예루살렘성 안에 성전이 있는데 그곳은 해와 달이 필요 없으니 주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토록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성은 미래에 우리가 들어갈 공간의 천국보다 지금 이 땅에서 주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기는 새롭게 회복되어진 하나님 나라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계시록 22장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준다. 에스겔의 성전에서 나온 물과 똑같다. 그 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공동체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십자가 복음을 말한다.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생명나무 열매가 맺히고 만국이 소생한다. 죄로 오염된 세상은 그들로 인해 새롭게 살아난다. 요한 계시록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 십자가로 회복해나가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요약>

교회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고 회복된 하나님 나라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회복하였다. 십자가 속죄사역을 오직 믿음으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칭의와 성화를 통해 구원을 얻은 성도는 개인구원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구원받은 새로운 공동체 교회를 이루어 세상을 변화시킨다. 십자가 복음을 받은 성도는 개인과 사회와 문화 전 영역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한다. 구약 예언서와 요한계시록은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세계관을 보여준다. 교회가 십자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다음은 예수께서 설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신약의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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