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8장 예수와 하나님 나라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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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예수와 하나님 나라

1.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

1.1 미래에 완전히 얻지만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체험하는 것(눅19:9)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을 가르치시는 방법이 대상자와 상황에 따라 설교, 치유, 귀신축출, 비유 등으로 달라지지만 예수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하나님 나라 한 가지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복음, 천국복음(마4:23, 눅4:43)이라고 불리운다. 예수의 사역시작 첫 메시지는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이었다. 제자들을 전도파송 하실 때도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10:9),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 앞에서도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왔나니”(요18:33-38)말씀하셨다. 예수의 십자가 명패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였다.(요19:19)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1:3)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증거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고 세례를 주었다.(행8:12) 바울이 증거한 복음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하는 여인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한 죄명은 로마사람인 자기들이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는 것인데(행16:21) 그것은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를 왕(주님)으로 섬기라는 것이다.(행16:31)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제자 야손을 잡아 관청에 고발한 죄명도 야손이 다른 임금 곧 예수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과 동조했다는 것이다.(행17:7)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했고(행19:8) 삼 년간 에베소에서 눈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행20:25) 바울이 로마에서 이 년간 자기 셋집에 유하며 사람들을 영접하고 가르친 것은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이었다.(행28:23, 30-31). 이처럼 예수의 메시지와 초대교회 메시지는 동일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주셨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를 말하되 그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주신 십자가 사건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초대교회 사도행전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구원이라는 기독교 용어와 바꿀 수 있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이다. 앞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언약의 눈으로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 나라 자체, 즉 구원의 의미를 중심으로 알아보겠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과 관계 회복됨”이라는 “구원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하나님 나라를 모두 구원이란 용어로 대체해서 생각하면 빨리 이해하게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실 때 제일 먼저 부딪힌 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존 관념이었다. 바벨론 포로와 로마 속국에 있던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예언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눅2:25, 눅2:38) 이는 이사야의 예언에도 기록되어 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사2:1-2)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위에 우뚝 서고 열국이 이스라엘을 섬기러 나아오는 예언이다. 유대인들은 모두 이 예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이 예언을 성취하실 분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대사회는 네 개의 분파로 나누어져 있다. 사두개파(현실주의), 바리세파(보수주의), 엣센파(금욕주의), 셀롯파(과격주의)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는 각각 다르지만 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크게 나눠 육신적인 하나님 나라와 신비적 하나님 나라 두 가지로 분류함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하도록 쉽게 설명하겠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육신적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다. 이들은 현실주의자들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었던 예수의 제자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자기에게 예수의 좌우에 앉는 높은 지위를 보장해 달라고 부탁하였다.(마10:2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근심한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눅24:21) 이들은 현실을 위하여 미래를 포기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들어가게 될 천당이다. 이들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중에서도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가 그들 공동체에만 임할 것으로 믿고 유대사회로부터 떨어져 극단적 신비의식과 금욕적 삶을 유지하는 자들이 있었다. 유대교 분파와 상관없이 개인의 성향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이루어질 천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실을 포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사람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 받아들였다. 어떤 이는 현실세계의 이스라엘 국가회복으로 받아들였고 예수를 그런 정치적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빨리 예수가 백성들의 지도자가 돼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것을 기대했다. 이는 자신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요6:15)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초자연적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신비한 기적을 보고 추종하였다. 귀신을 축출하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오병이어의 기적과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그들에게 미래에 들어가게 될 천당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똑같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 구원을 지극히 현실적 육신적 욕구충족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무시하고 먼 미래에 들어가게 될 천당으로만 집중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말씀하셨지만(마24:14)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시며(마12:28) 현실에서 맛보게 되는 구원의 성취를 강조하셨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곧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바로 이것이다. 미래에 들어갈 영원한 공간의 천국이 있지만 미래에 들어갈 공간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는 것이다. 또한 현실의 응답을 누리지만 세속적인 육신의 욕구충족은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가르치시려 예수는 많은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보다 역동적(하나님 통치) 개념이 먼저이다. 이는 미래에 들어갈 공간적 천당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들어갈 공간적 천당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미래의 천당은 오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들어가는 곳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들어간다. 미래에 들어가게 될 천당을 위해 오늘에 누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예수는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이 엄연히 현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예수께서는 불의한 세리였던 삭개오가 회개하는 모습 속에서 구원이 그 위에 임했다고 말씀하신다. 삭개오도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죄와 사단의 통치 속에 있던 죄인 삭개오가 지금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1.2 윤리적이기도 하지만 죄와 사단과 싸우는 영적인 것(마12:28)

하나님의 임재는 개인을 윤리적이 되도록 만든다.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특징은 확신과 기쁨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내면적 삶은 윤리로 나타난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바울은 먼저 온갖 불의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미래의 천당과 지금 이 자리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할 것을 말하고,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그 모습은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는 삶이고 그 결과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개인 내면의 도덕적인 가치이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신비체험, 확신과 기쁨에 의해서만 판단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들과 함께 최종적으로는 윤리적인 삶으로 검증 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신비체험, 확신, 기쁨, 도덕적 삶의 순서로 성령 충만 여부를 판단하지만 성경은 윤리적인 삶, 기쁨, 확신, 신비체험 순서로 성령 충만 여부를 설명하고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16-26)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9-11)

우리는 윤리적 경건의 삶을 말하면 율법주의자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지난 날 어떤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복음가진 자의 윤리적 삶을 먼저 배운 나머지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 없이 행함에 눌려 있곤 했다. 이것은 형식에 치우친 바리새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에게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전의 그리스도 없는 경건의 삶을 율법으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이는 적절한 지적이었고 바울과 종교개혁자들도 모두 그렇게 복음을 전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 쉽게 이해되고 복음으로 말미암는 큰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된다. 그러나 바울과 개혁자들은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복음 때문에 자유 얻은 자들이 누리는 경건의 삶까지 정확하게 가르쳤다.(갈5:13) 그래서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는 교회 내에서 절대로 복음과 율법이 충돌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만 좋아하고 행함으로 누리게 되는 구원을 싫어한다. 죄의 본성이다. 그래서 교회도 성도들의 요구에 따라 믿음으로 얻는 축복만 강조해주다 보니, 믿음은 복음, 행함은 율법이라는 이분법적 공식이 성립 되게 되었다. 이는 큰 오해이다. 분명한 것은 복음 없이 삶만 강조하는 것은 바리새 율법주의자이지만, 최고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자이다. 최고의 복음주의자는 그의 은사, 능력, 확신과 함께 반드시 윤리적인 삶을 기반으로 해야한다. 윤리적인 삶은 성령으로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으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이게 되어있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면 어떤 개인이든 단체든 사회이든 국가든지 도덕지수가 높아지게 되어있다. 성령의 열매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윤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사단의 세력을 이기는 영적인 나라였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의 25%는 귀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초대교회 제자들도 귀신축출을 통해 큰 전도역사를 일으켰다. 구원은 윤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 귀신과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귀신축출의 역사가 나타난다. 이처럼 기독교는 일반 윤리종교가 아니다. 사단 귀신과 싸우는 영적인 능력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귀신만 쫓아내는 일반 신비종교가 아니다.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영적 능력의 종교이다. 귀신축출 하는 것은 능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복음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거룩한 삶에서 나온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추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윤리적인 하나님 나라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귀신의 세력이 꺾이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였다. 구원은 윤리적이면서 영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먼 미래 천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영적인 능력의 하나님 나라가 임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1.3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구원 얻을 성도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것(마18:20)

구원은 단체로 받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부부 어느 한쪽이 기독 신자라고 내가 패키지 묶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일대일 만남이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개인구원에서 시작한다. 개인이 하나님과 만난 변화없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성경적이 아니다. 죄는 개인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소속해 있기 때문에 그 집단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인간의 나라, 죄인의 나라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모든 출발은 개인구원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은 개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구원얻은 성도들의 모임인 공동체를 이룬다. 반드시 그렇다.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셨다.(마16:18) 그 교회는 건물이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의 일인지배 종교조직도 아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나”와 “구원받은 너”가 모여있는 “구원받은 우리”의 공동체였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마태복음 18장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십자가 속죄제물 되심으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다.(마1:21) 죄 사함 받은 거룩한 무리들이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벧전2:9)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한 자들이었다.(출19:5-6) 이들이 신약교회이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는 신약교회는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다. 여기에 교회의 공동체의 특징이 나온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2-3)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든다. 공동체를 이룬다.(2절) 둘째, 교회는 거룩하여져서 성도(거룩한 백성)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해주신 자들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2절) 셋째, 교회는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3절) 예수 그리스도는 내 개인만의 주님이 아니시다.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구원받은 우리”의 공동체이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자의 공동체를 말씀하셨다. 자신이 만드실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가르킴이다. 교회는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이다. 여기서 두 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단위이다. 한 사람은 개인이지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2.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 주시는 분

2.1 하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을 통해서,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기드온과 사무엘 같은 사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 같은 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셨다. 가나안에 들어간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게 그들이 기거할 땅을 분배하고 경계선을 정하였다.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까지 열 두 지파 집단 동맹체제였다. 각 지파에는 지도자가 있고 하나님은 제사장과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무엘과 같은 사사를 통해 그들을 통치하고 계셨다. 이스라엘은 평상시에는 열 두 지파로 구분되어 생활하다가, 어느 한 지파라도 외부로부터 침공을 당하면 열 두 부족이 하나로 결속되어 함께 대항했다. 그런데 사무엘은 늙고 그의 아들들은 사무엘과 같지 아니하고 불의했다. 이들은 가나안 나라들의 강력한 왕을 부러워하기 시작하였다. 늙은 사무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보다는, 보이는 강력한 사람을 왕으로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해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이런 가운데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심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행13:22) 이처럼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새로운 나라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사역은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 유대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하라 하셨다.(마10:6)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위해 간구해도 예수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고 말씀하셨다. 이는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 시간의 부족으로 전도의 범위를 우선 유대인으로 제한하시려는 현실적인 의도가 있으셨고, 또 선택받은 아브라함 자손에게 구원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는 구속사적인 의미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 받아들였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이사야 61장예언의 성취 그대로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9) 그들은 모든 것이 가난해서 심령조차 가난한 자들이었다(마5:3)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백성의 감성에 호소하려 예수를 가혹하게 채찍질 한 후 백성들 앞에 내세웠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자기가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예수를 놓아주려 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예수의 왕 되심을 거부하였다.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이스라엘 대표자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다”고 선언하였다.(요19: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로부터 이스라엘 왕임을 배척 받으셨다. 예수는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요1:11) 하나님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가이사를 왕으로 모시는 나라였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요19:12-16)

2.2 새로운 시대의 도래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말씀하셨다. 이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죄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힌 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사역을 최종 정리하고 싶었다. 그는 예수께서 오실 메시아이신줄 최종 확인하고 싶었다. 이는 그가 요단강에서 예수께 세례를 줄 때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과 성령의 강림하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하시는 가르침과 사역들이 자기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례요한도 유대인으로 당시 사람들의 그리스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예수는 요한의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이는 메시아가 이룰 이사야서 61장이 성취됨을 이야기 하시며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세례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칭찬하신 후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1-14)

11절은 세례요한을 책망하는 구절이 아니다.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정확하게 나와 있다. 12절의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이 침노를 당하는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는 말은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을 보면 선명하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세례요한은 구약예언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할 선지자는 앞으로 더 이상 없다. 그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했던 구약 제일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의 바로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돌이키는 엘리야였다.(말4:5-6)

이제 새로운 세대가 도래했다. 더 이상 혈통적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모든 이방인을 포함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복음은 구속사적으로 먼저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거부했다. 그래서 일단 유대인들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이 이사야가 예언한 “남은 자”였다.(롬9:27-29) 그리고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퍼져나갔다. 바울이 이것을 가장 잘 깨달은 사람이다. 후에 유대인들도 모두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지만 지금은 이방인이 먼저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다.(롬11:25)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 전파되었지만 그들의 거부로 인해 이방인에게 전파된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고 놀라며 그들도 복음을 받아들인다. 이때 열방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없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된다는 것이 바울이 깨달은 신비요 하나님의 경륜이었다.(롬11:33-36) 예수는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빗대어 장터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11:16-19)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의 증거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였다. 금식하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귀신들린 자의 소리로 간주하고, 금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예수의 메시지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세속적인 사람의 소리라고 배척했다. 한마디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세례요한의 말도 거부하고 예수의 말도 무조건 거부한다는 말이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도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거부한 세 고을을 대표적으로 책망하시며 말씀하신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이는 예수의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 전체를 책망하심이다. 그리고는 예수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이방인과 가난한 자 죄인 등 연약한 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맨 마지막에 선포하신다. 당시 유대교의 율법과 종교에 눌려있는 모든 자들이나 또는 어떠한 어려움으로 고통당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과 종교의 시대가 지나가고 십자가에서 구원얻은 복음의 새로운 세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2.3 새로운 하나님 백성을 삼으심

예수는 이러한 말씀으로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선포하시고(마11장), 또 자신이 가져올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좀 더 상세하게 비유로도 가르치셨다.(마13장) 그 후 예수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탄생은 하나님께 범한 아담의 범죄를 해결해야 함을 말씀하시며 자신이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막10:45)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를 드리는 나라이다. 구약과 성막과 성전의 가장 중요한 일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포로기에 등장하는 회당은 제사장의 부재로 인해 제사중심에서 율법중심의 장소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 때문에 제사를 계속 드려야 하는가? 제사는 백성들이 자기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은 죄가 없고 의로운 것인데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아담의 원죄 때문이다. 그렇다고 죄를 지은 것마다 벌을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 살아남을 자는 하나도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 사함 받을 제도장치를 주신 것이다. 그것이 제사제도였다.

죄 사함은 하나님 백성이 되는 필수조건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담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거부한 첫 아담의 죄의 책임과 죄에 오염된 부패한 본성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가 바로 죄 문제였음을 가르치시려 이스라엘에 제사제도를 주셨다. 제사는 그들이 죄가 없는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출24:8)

3. 교회,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3.1 성령께서 거룩한 변화를 주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성령께서 개인에게 임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은 거룩하신 영이시기에 죄인에게는 거주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죄 사함이 성령강림보다 먼저 오셔야 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이 하나님을 거부한 아담(Adam' race)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위하여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전인격으로 받아들이면 그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한다. 성령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대(말세), 새 언약 시대(신약)에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부어주실 하나님의 신이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8)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6-2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세대가 도래했다. 이것이 에스겔과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 곧 신약이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때는 백성의 마음에 영으로 새겨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새 언약이 도래하는 시대를 주의 날,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말세라고 부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는 말세를 기다리지만 초대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베드로는 요엘서 2장을 인용하며 지금이 피와 불과 연기가 일어나는 말세라고 증거한다.(행2:19) 이는 지금 하늘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예언자들이 예언한 주의 날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일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피와 불과 연기는 주의 날을 상징하는 구약의 비유언어이다.

무엇이 유대인들이던 제자들에게 이런 엄청난 시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는가? 예수의 가르침을 삼년간 배웠던 그들도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철저하게 유대인이었다. 이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예수의 가르치신 모든 내용을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요16:14)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요일2:27) 이때 그들은 예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참혹한 십자가야말로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역이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십자가 구속을 믿는 이방인을 포함한 자신들이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구약의 모든 예언의 성취이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아브라함 자손의 축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갈3:29)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들이다.

3.2 예루살렘과 안디옥교회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가 사도행전에 성취되었다. 그들은 예수 십자가로 죄 사함 받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새로운 하나님 백성들이었다. 신약교회였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임재하고 계셨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들은 각기 다른 방언으로 전도하기도 하고 질병을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나타나고 큰 확신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임재였다.

예수께서 가져다 주신 구원은 날마다 초자연적인 능력 행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전도현장에서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필요한 상황따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였다. 사도에게만 제한된 것도 아니고 빌립 집사에게도 나타났다. 꼭 필요한 상황에는 어김없이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항상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 증거라는 필수상황 속에서 성령께서 간섭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은 커다란 능력 행함보다는 큰 기쁨과 확신이 더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들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교통하심(코이노니아)이 특징이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거룩한 변화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들의 나라 속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을 보여준다. 주로 교회의 확산을 위하여 전도를 중심으로 기록된 사도행전은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 나라 내용과 그들이 그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증거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4:32-5:14)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형태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서로 떡을 떼며(성찬, 애찬) 교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사도들로 인해서는 능력이 나타나고, 교회 안의 성도들은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 나눠주며 날마다 하나님 백성 됨을 기뻐하며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는 칭찬이었다.(행2:47, 5:14) 여기서 기독교는 물건을 서로 공산주의처럼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했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어디에도 무소유 공동생활이 기독교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니 교회 내의 가진 자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사랑해서 자신의 재산 중 필수적이지 않은 것을 팔아 그들을 도왔다는 것이다. 구원의 공동체 속에는 서로를 돌보고 아끼는 진정한 교제가 있다. 이것이 예수가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구원이었다. 공산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뺏어내지만 복음은 가진 자들이 사랑으로 물건을 내어놓게 만든다.

초대교회의 하나님 나라 확산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몇 가지를 기본 배경으로 알아야 한다. 먼저 예루살렘 사람들은 단일민족 히브리 유대인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모두 구약이 예언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삼 년 동안 예수님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도 잘 알고 있었다.(눅24:18) 단지 예수 부활은 의심했겠지만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없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다.(마28:15)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이었다. 가깝게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친구 이웃 사람 아니면 그와 연관된 자들이었고, 멀게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히브리 민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찼다. 그들에게 일부는 초자연적인 능력도 나타났지만 그런 능력은 다른 종교에도 있던 것이다. 그들은 칭송을 받을 만큼 모든 면에서 바뀌어 있었다.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내면적 거룩함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이 넘쳐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변화는 주변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쁨과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들을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이 궁금해 할 때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시라고 복음을 설명했다. 혹 필요하다면 질병치유의 역사도 있었다. 귀신축출도 때에 따라서 나타났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간다.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 행하심을 듣는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속죄제사였다는 것과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 성령으로 임재하심만 모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예수 복음이 증거되었다. 그들이 삶에 나타난 거룩한 변화로 확인되었다. 초대교회는 삼천 명 오천 명씩 날이 갈수록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칭송한다. 주께서 구원 얻는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하시게 된다.

물론 윤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가 윤리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은 복음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인 줄 모른다. 십자가 외에는 죄용서가 없음을 알지도 못하고 결코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없다. 구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을 들어야 발생한다.(롬10:17) 단 삶의 증거가 없는 전도는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 두번 통하지만 내 주변에서 전도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를 알기 때문이다. 안디옥 성도들이 체험한 거룩한 변화도 그와 같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0-24)

비록 그들은 성경을 가진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선교의 발판을 삼으시려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다. 그들에게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보였고 예루살렘 성도들에게까지 좋은 소문이 들렸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났다. 주께서 큰 무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해주셨다.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 소식을 듣고 구제헌금을 보낸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구원은 성경을 아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에게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이 있는 세상에서 완전함이란 있을 수 없다. 외부의 핍박(4장), 내부의 시험(5장), 성도간의 갈등도 있다(6장). 순교의 열매도 있다.(7장) 비록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사실이었고 놀라운 것이었기에 불신자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조차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3.3 마게도냐와 소아시아 교회들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일어난 하나님 나라는 안디옥교회에서도 그 변화의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미래에 완성될 구원이지만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변했지만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는 영적인 능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개인의 변화가 있었지만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복음을 거부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에게 나타난 거룩한 변화가 그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었다.

이때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마게도냐와 소아시아에 확산시키기를 원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다. 예수는 승천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십자가 복음이 가깝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온 유대지방으로 사마리아 지역으로 그리고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갈 것을 말씀하셨다.(행1:8)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 헬라인들이었고 예루살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성경지식도 없고, 언어도 달랐고, 아는 연고자도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음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사람 바울을 보내사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셨다.(행9:15)

바울은 제일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갔다. 이는 회당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구약을 읽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도착한 지역마다 회당을 찾아가 그들이 읽고 있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에게 성취되었다고 증거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또한 성경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의 지역 루스드라에 가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킴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다. 또한 바울은 아테네 지역에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철학용어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했고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몇 사람을 열매로 얻었다. 바울은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그 어떤 대상자에게라도 그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십자가 복음을 대상자에 따라 접근 방식을 달리하며 복음을 전했다. 성경을 아는 자들에게는 성경을 가지고(행17:2), 성경을 모르는 학문이 없는 일반 불신자에게는 치유의 기적으로(행14:10), 학문이 깊은 불신 지성인들에게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행17:22)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했다. 복음을 설명하는 방식은 대상자의 눈높이에 맞추고 복음의 내용은 오직 예수여야 한다. 교회 내에서 장년예배 설교와 초등부 설교의 용어와 예화는 다를 것이다. 직장 신우회중 과학자 교육자 의료인 법조인등 전문인들의 모임에서 설명하는 용어와 일반 구역예배에서 사용하는 예화는 다르고 또 달라야한다. 이는 그들이 일상 접하는 세계가 다르고 또 관심사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똑같이 십자가이어야 한다.

예루살렘과 안디옥과는 달리 마게도냐와 소아시아 지역에는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곳 이었기에 아무 연고자도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문이 열리는 대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만남을 열어주셨고 그 작은 만남 속에서 복음 받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말씀을 나누고 그 집의 권속(가족 노예까지 포함한 그 집에 속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가져다주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각 지역 지역에 세워진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이었다. 이들 이방인 교회는 성경적 뿌리가 얕아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도 종종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들에도 예루살렘이나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구원이며 사도행전에 임재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십자가 복음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행28:32)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일어난 전도와 마게도냐와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전도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는 그들이 처한 배경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안디옥은 이미 교회가 형성된 후 기존성도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전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게도냐, 소아시아는 교회가 전혀 없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전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예루살렘 안디옥은 기존성도 중심의 교제와 나눔이 기록되었지만, 마게도냐 소아시아 지역은 교회를 처음 설립한 제자와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에 마게도냐의 교회들과 소아시아 지역교회들도 후에 개인 가족(권속)중심 모임 형태를 벗어나게 되면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처럼 기존성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도형태를 띠게 된다.(살전1:7-8)

<요약>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구원과 같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이다. 구원은 미래에 들어갈 장소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것이었다. 구원은 윤리적이지만 사단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능력이었고, 철저히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지만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 구원이 사도행전 제자들에게 그대로 나타났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성인이나, 학문이 없는 자나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까지도 증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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