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19장 이미와 아직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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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이미와 아직

1. 하나님 나라의 세 시제

1.1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천국에 도달하지 아니하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현재와 과거, 미래의 세 가지 시간적 요소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시기를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세계의 종말이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이미 이르러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너희”는 우리말의 “너희들”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 가운데 임하여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영어번역은 in your midst, within you, among you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구절이고 또 시기적으로는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를 일겉는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지금 사람들 가운데 도래해 있다. 구원은 지금 맛 볼 수 있다. 이미 이루어졌다(마12:2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7-50)

또 예수는 마지막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는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가라지와 못된 물고기는 골라내어 불에 태우거나 내어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미래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도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이야기 한다. 심판과 종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래의 것이다. 이 두 가지 구원의 시제는 요한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신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아직” 심판의 때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1.2 아직 천국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구원의 맛을 보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들어갈 천당이 현재 하나님의 통치의 연속임을 이미 언급했다. 미래는 오늘의 당연한 결과이다. 오늘과 내일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미래는 오늘의 연속이며 오늘은 미래의 근거이다. 예수는 자신이 가져온 하나님 나라를 지금 맛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많은 치유의 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들의 나라는 죄와 사망과 사단에게 고통을 당하는 나라이다. 그곳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망의 현상들이 온갖 고통들로 나타난다. 개인의 영적 정신적 육신적 질병에서 시작해서, 가족이나 친족 관계에서 오는 갈등, 이웃과 사회에서 오는 고통, 자연과 환경에서 오는 사건 사고 등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이 모든 고통의 시작은 한 가지였다. 피조물 아담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기의 나라를 세우려 한 죄 때문이다. 바로 그 원죄가 지배하고 있기에 죄로 오염된 세상은 사망의 고통이 넘쳐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것을 해결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하심으로 그 구원을 지금 맛 볼 수 있다. 비록 죄의 세력이 아직 남아있고 사단의 실체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먼 미래에 이루어질 소망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맛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내용이다.

사도행전에 응답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모두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렸다. 비록 그들이 천당에 아직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들 개인과 공동체는 죄의 나라,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관계회복에서 오는 진정한 자유가 넘쳐났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맛보는 것이다.

1.3 이 세대와 오는 세대, D-day와 V-day

신약성경은 구원의 현재를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종말론적 유보상태로 설명한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21)

영어성경은 KJV은 헬라어 성경에서 구분된 서로 다른 단어 코스모스(세상 World)와 에이온(세대 Age)을 World(세상)으로 통합 번역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와 함께 세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온”은 원래 일정한 기간을 말하는 단어이며 여기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가 Age이다. World는 공간적 장소개념이 강하고, Age는 시간적 개념이 강조된다.

영어성경의 번역을 사용한 한글성경은 이 세대(This age)와 오는 세대(The age to come)를 이 세상(This world)과 오는 세상(The world to come)으로 번역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현재와 미래에 함께 병립할 수 없는 공간적 장소로 오해시킨다. 미래에 임할 공간적 천당이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으면 이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되지 못한다. 또 만약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했으며 이 세상은 천당이지 죄와 사단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간적 이해는 예수께서 지금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을 오해하게 만든다.

신약성경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원문의 단어 “에이온” 그대로 기간을 나타내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같은 이 세상이라는 공간 속에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죄와 사단의 나라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다. 죄와 사단의 지배를 받는 죄인들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맛보는 새로운 백성들이 있는 것이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는 예수의 초림부터 예수의 재림까지 중첩되어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시간개념의 핵심이다. 예수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먼저 지금 죄와 사단의 나라 속으로 가져오셨다. 비록 아직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이 현존함으로 사망의 고통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하나님 백성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의 구원을 맛 볼 수 있다. 죄와 사단의 나라에서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맛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 얻을 구원은 완전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죄와 사단의 나라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는 성도가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D-day와 V-day의 사이기간으로 종말론적 유보상태라고 부른다. D-day와 V-day는 스위스 신학자 오스카 쿨만의 저서 “그리스도인과 시간”에 나오는 명쾌한 설명이다.

D-day는 2차 세계대전당시 연합군이 유럽을 점령하고 있는 독일 동맹군을 공격하기 위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 날이다. 이날 이후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연합군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후부터 독일군은 노르망디 해안을 통해 프랑스로 밀려드는 연합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은 D-day에 승패가 결정났다. 그래서 Decision Day(승리를 결정짓는 날)이다. 그러나 D-day이후에도 간헐적인 전투는 계속 있었다.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고 독일로 진격할 때도 독일군 패잔병들은 퇴각하며 계속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 저항은 독일 총통 히틀러(1945.4.30)가 자살하고 그의 후계자 Karl Doenitz가 항복문서에 서명(1945.5.7)후 다음 날 독일국민에게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공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D-day(1944.6.6)에 결정되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1년 뒤인 V-day(1945.5.8)에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단은 그 세력이 완전히 꺾였다. 사단은 그 머리가 깨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패잔병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성도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나 아직 죄와 사단과 싸움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겨놓은 싸움이다. 성령께서 성도 속에 함께하시며 도와주시는 싸움이다. 성도가 패배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사단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등뼈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2. 고린도 열광주의자, 데살로니가 종말론자

2.1 이미와 아직에 대한 오해

성경은 예수의 구원을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시간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죄의 나라 속에 지금 동시에 중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히브리의 시간적 이원론이다. 그런데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이 있다. 이것은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나누는 이원론이다. 이 세상은 현상계요 무지와 거짓의 세계, 없어질 세상이다. 그러나 저 세상은 이데아의 세계요, 진리의 세계, 영원한 세상이다. 이처럼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에서 이세상과 오는 세상은 중첩될 수 없고 하나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시간적 이원론과 공간적 이원론의 차이는 하나님 나라가 죄의 나라 속에 지금 동시에 임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이다. 성경은 죄와 사단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 세대 속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가르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싸움을 설명하고 있다. 성도는 D-day와 V-day사이에 살고 있다. 이미 얻은 구원이지만 아직 죄와 사단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아직 천당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맛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이방 헬라세계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헬라세계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나누는 히브리 시간적 이원론을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구분하는 헬라 공간적 이원론 개념으로 오해해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오해가 신앙생활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를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그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였다.

2.2 고린도 열광주의자

고린도인들은 전형적인 헬라인들이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현재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임을 알지 못했다. 이는 바울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순회전도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고린도 지역의 온갖 우상숭배와 타락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 가지를 오해했다. 바로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구원을 얻을 줄 알았다. 그들은 이미 천당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의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설명을 헬라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죄와 사단이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언어인 방언을 구원 얻은 증표로 생각하고(고전12-14장), 또 그들이 이방인의 제사에 참여하여 우상제물을 거침없이 먹는 것을 구원 얻은 확신이 있는 것으로 자랑하였다.(고전8-10장) 더욱이 그들은 영혼만 귀중하고 육체는 아무 쓸모가 없고 버려질 것이라는 헬라적 사고 때문에 창기 집을 드나드는 육체의 음행도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저지르게 되었다.(고전6장) 심지어는 이방인도 저지르지 않는 자신의 아비의 아내(계모)를 아내로 취하고 교회에서는 그들을 묵인하게 되었다.(고전5장)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구원 얻었으나 아직 천당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여전히 죄와 사단의 세력이 현존하므로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하는 치열한 영적싸움이 존재한데도 이를 망각하였다. 그들이 맛보는 구원은 완성된 열매가 아니라 첫 열매로 완전하지 않음을 알지 못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재림과 심판후 죄와 사단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이루어짐을 놓쳐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 폐기론자(방탕주의자)가 되었다.

우리도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린도 열광주의자처럼 방탕주의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완성될 것을 보장받은 것이지 지금 완성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실재로, 미래에 얻을 구원의 첫 열매, 첫 맛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방탕주의자들은 바울의 질책처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6:9-10)

2.3 데살로니가 종말론자

고린도 열광주의자와는 정반대의 오해가 생겨났다. 그들이 데살로니가 종말론자들이다. 이들은 공간적 하나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예수께서 구름타고 오시며 모든 세상을 심판하실 천당과 심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이 곧 도래할 것으로 오해했다.

데살로니가 종말론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그들의 윤리적 삶과 영적인 능력으로 임하여 있고 또 지금 개인과 공동체 속에 임하여 있음을 잊어버리고 미래에 도래할 공간적 천당만 사모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천당이 곧 도래함을 확신하였기에 오늘의 삶을 포기하고 미래만 사모하였다.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이 오늘을 위해 미래의 천당을 포기한 것과 정반대였다.

그들은 현실이 아직 죄와 사단의 나라임은 잘 알았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가 그들 속에 도래함은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 가져오신 구원이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중복되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나누어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의 타락과는 다르게 재림만 기다리는 현실도피자가 되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들에게 임하여 있음을 상기시키며 현실 삶에 충실할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은 미래를 기다리며 현실에 충실하게 만든다. 복음은 현실에 충실하며 미래를 사모하게 만든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3:10-12)

3.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

3.1 육체와 영혼의 관계

창세기는 범죄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은 생령 곧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 존재였다.(창2:7) 인간에게 육체는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육체가 죄에 오염되어 부패한 본성을 가졌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이다. 그 이전에 인간의 육체는 거룩하고 아름다워 천사도 흠모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천사나 사단보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범죄 이전 인간의 능력은 지성이나 피조세계를 다스림의 모든 면에서 천사나 사단에게 결코 뒤지지 아니하였다. 거기에 인간은 거룩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범죄 이전 인간의 육체는 피조세계 내에 있었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오늘날만큼 제약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 육체는 아직 사망의 형벌을 받지 않아 죽지 않는 몸이었고 그의 지성도 직관에 의해 모든 것을 알아낼만한 대단한 것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하나님 대리통치자의 영광이었다.

인간의 육체는 물리적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근거가 되었다.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물리적 피조세계를 다스릴 존재는 물리적 육체를 가진 인간밖에 없다. 천사나 사단은 육체가 없는 영물이기에 그들은 세상을 직접 간섭할 수 없다. 그들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을 통하여만 세상에 관여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 대리통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지성과 영혼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육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은 영혼과 육체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는 하나님 대리통치자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 중요하고 귀중하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육체에서 하나님 형상이 왜곡되었다. 그 모든 기능이 훼손되었다. 지성의 능력도 오늘의 수준으로 전락해버렸고 육체의 질병과 노화도 막을 수 없었다. 더욱이 죄의 오염은 인간의 육체를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한 죄의 욕구와 본성을 가지게 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떠나셨기 때문이었다.(창6:3) 이때부터 육체는 인간에게 모든 면에서 부담이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속에 두 존재가 있다고 표현하는데 하나는 성령의 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원함과 그것을 거부하는 육체의 자아(죄의 본성)가 있다고 한다.(롬7:15-20) 이는 인격의 분열을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내 인격이 아닌 또 다른 인격 즉 사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 육체의 죄의 본성을 의인화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자아가 나를 선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부패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것을 원죄라고 말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 육체는 타락하여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의 욕구를 따라가는 죄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육체는 헬라 이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가치 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죄에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죽음으로 완전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소중한 인간의 구성요소이다. 범죄한 지금도 그렇다. 만약 육체가 없다면 우리는 피조세계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 인간이 천사보다 더 나은 것은 육체를 가진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처음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또 미래 부활 심판 이후까지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육체와 영혼의 중요성을 비교해보라는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가 더 중요하느냐는 어리석은 질문과 같다. 둘 다 똑같이 중요하고 상호의존적이다.

부활이후 우리의 육체는 다시 죄의 모습에서 벗어나 영혼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거룩한 몸이다. 죄의 오염에서 벗어난 육체이다.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몸이다. 죽지 않는 몸이다. 가장 완벽한 몸이다. 우리 육체가 버려지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즉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거룩성이다. 우리 몸은 함부로 더럽혀서는 안된다. 물론 이는 물리적 더러움이 아니라 죄의 오염에 순종하며 더럽히지 말라는 의미이다. 육체가 요구하는 본성을 따르면 죄의 권세로 인해 사망에 이르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다.(엡2:3) 이는 우리 영혼은 육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음행을 강력하게 질책한 것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기에 육체는 어떤 일을 하여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으려 함이다. 인간의 영혼은 반드시 육체의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육체의 음행을 따르면 그 영혼도 음행에 영향을 받아 음란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사단의 통치를 받게 되어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육체가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것이니 거룩함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음행자들에게 질책하며 가르친 내용이다.(고전6:12-20)

하나님은 인간을 주어진 상황에서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로 만드셨다. 이는 짐승과 다른 하나님 형상의 한 부분이다. 구원받고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면 인간은 첫 아담이 잃어버린 상태를 회복한다. 아니 피조물에서 하나님 자녀가 되는 더 나은 상태가 되어진다. 이때 인간은 윤리도 회복된다. 죄의 세상에서 완전하지는 않다. 윤리가 구원의 수단이거나 도구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받으면, 성령충만 받으면,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으면 성도는 점점 윤리적이 되어진다. 왜냐하면 성령은 거룩케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은사는 필요에 따라서 나타나지만 윤리는 반드시 나타난다. 죄의 나라에서 인간은 언제나 선택을 해야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격이다. 이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육체의 소욕대로 죄의 선택을 하지 않고 윤리적 선택을 한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삶이다.(갈5:16-24)

3.2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바울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구원상태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이루라”는 한글 뉘앙스에 의해 마치 오늘의 삶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처럼 자칫 오해하기 쉽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오늘 구원을 이루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없다. 신약성경 전체에도 없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 받을 때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다. 이 구절은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구원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설명해온 이미와 아직의 개념 속에서 쉽게 이해된다.

첫째, 성도는 이미 구원 얻었지만 아직 천당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와 사단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육체가 원하는 죄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단에게 참소를 당하고 죄의 삯인 사망의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성도는 아직 천당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의 열매를 맛 볼 수 있다. 비록 죄와 사단과의 거룩한 싸움은 계속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미래에 얻을 구원을 지금 누리게 된다.

셋째, 미래는 오늘의 연속이다. 미래의 구원은 오늘의 누리는 구원의 당연한 결과이다. 죄와 사단의 거룩한 싸움에서 오늘을 이기면 미래는 당연히 주어진다.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하나님 백성의 축복을 누려라. 이 글은 오늘을 잘 살라는 권면이지 미래 구원이 불안하다는 경고가 아니다. 여기서 오늘을 못살면 내일이 구원이 없다고 확대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다. 단 두렵고 떨림이란 부분은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음을 강하게 조심시키는 것이다.

바울서신의 특징은 전반부의 복음부분에서 믿음으로 이미 얻는 구원(칭의)을 설명한 후 후반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천당을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있도록 하기위해 성도가 해야 할 일은 권면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등을 경고하며 조심시키는 것이다.(성화) 이는 성도가 얻은 구원이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3.3 죄와 싸우는 영적싸움

세상은 자기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고(사망) 죄에 오염되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원죄), 거기에 유혹자 사단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 사람은 스스로 죄의 세력을 이기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하다. 그래서 죄의 삯인 사망의 고통을 당하고 죽어 영원한 심판에 이른다.

성도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단의 유혹에 놓여 있다. 성도의 구원받음은 완벽하게 보장되었으나 구원 상태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아직도 사단의 유혹이 존재한다. 성도도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단은 유혹하는데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하나있다. 이는 그들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죄의 세력을 이길 힘을 주심이다. 거룩케 하신다. 거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죄를 미워하게 하시며 거룩을 사모하게 하신다. 그래서 성도는 죄를 이길 수 있다.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고 “영생”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오는 생명나무 실과를 맛본다.(계2:7) “생명”은 죽음 이후에만 얻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아담이 범죄 이전에 누렸던 하나님과 관계회복에서 오는 “생명”을 체험하고, 죽음 이후 천당에서 영혼의 상태에서 “생명”을 맛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육체와 함께 다시 부활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사는 동안 “생명”을 누림이 불완전한 것은 그에게 아직도 현존하는 사망의 형벌, 죄에 오염된 육체, 사단의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또 신자가 누리는 죽음 이후, 부활 이후의 “생명”이 완전한 것은 그에게 죄에 오염된 육체와 사단의 유혹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이 미래에 천당에서 영원히 누릴 “생명”을, 아직은 죄로 오염되어 “사망”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맛보게 하려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죄의 핵심인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 됨을 거부함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자신이 피조물 됨을 고백하고 그분께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내가 첫 아담처럼 에덴에서 생명나무와 죽음나무의 열매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인류의 조상 첫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단절에서 오는 사망을 당했지만, 아담의 후손이지만 한 개인 실존으로서 아담인 나는 지금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죽음나무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을 선택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하나님 대리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백성 되는 생명을 맛본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와 죽음나무는 역사적으로도 실재했고 지금 내게 의미적으로도 실재한다.

죄로 오염되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죄인)이 어떻게 자신의 죄의 본성을 이기고 또 사단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지금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도자에 의해 전해 듣고 자신의 죄인 됨을 회개한다.(롬10:17) 복음을 듣게 되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 죄의 내용, 죄를 해결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도가 필요한 것은 누군가 복음을 직접 전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이 하나님 피조물임을 알 수 없고, 따라서 절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롬10:9-10)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인격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믿음이라 부르며, 이것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의미이다. 이때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성향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려는 근본적인 마음 성향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사람을 거듭났다고 표현한다.

셋째, 십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회개와 믿음)하는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다.(엡2:8-9) 성령께서는 그 사람에게 계속 역사하사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사람되어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통해 생명(구원, 하나님 자녀됨)을 맛보게 하신다. 생명(하나님께 순종함에서 오는 생명나무 열매)은 칭의와 성화를 통해 맛볼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해온 점이다. 인간이 하나님 자녀 되는 길은 오직 이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십자가이다.

이미 구원 받았으나 아직 천당에 도달하지 못한 성도는 아직 천당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이미 구원(생명)을 맛보고 있다. 이는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을 이길 때 얻게 된다. 인간은 자유 인격이기에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스스로 책임진다. 그는 선택의 자유가 있고, 윤리적 선택을 할 능력도 있다. 비록 죄의 오염과 사단의 유혹은 성도가 극복하기 힘든 것이지만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도우시고 힘주신다. 영적싸움을 싸우게 하신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도우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도 임한 것이다.

<요약>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는 일반적 종말을 기다리며 개인적 종말을 앞두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기독교 구원을 이해시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얻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고 이미 구원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사단의 유혹이 여전히 존재하고 또 죄의 욕구가 그대로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고린도 열광주의자나 데살로니가 종말론자가 된다. 방탕해지거나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D-day와 V-day의 사이에 놓여있다. 죄와 사망과 사단은 예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 날에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눈물도 유혹도 없는 기쁨의 날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죄와 사단의 패잔병들이 도망가며 저항하고 있는 세상이다. 여기서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영적싸움을 싸워나가야 한다. 이 싸움이 쉬운 것은 성령이 도우시기 때문이고 어려운 것은 우리 육체의 본성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성령을 선택하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서 오는 생명을 이 땅에서 맛보게 될 것이다. 육체를 선택하면 사망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다. 에덴동산의 유혹이 지금 내게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시켜 주심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전체 그림을 개괄적으로나마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구원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죄 때문에 사망의 형벌에 놓여 사단에게 종노릇 하고 있는 인류에게 십자가는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는 소식이 바로 기쁜소식 곧 복음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 예수 그리스도 예언의 성취요 사단의 머리가 깨어진 모습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며 이천 년 기독교가 신앙고백해온 내용이다. 우리는 이것을 전하고 이것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5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에서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 몇 가지를 십자가 복음의 관점에서 정리해보겠다. 지금까지는 “십자가 죄 사함을 믿을 때 얻게 되는 구원”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앞장과 연결해서 설명해왔지만 이제부터는 기도, 복음과 율법, 옛 언약과 새 언약이란 주제를 개별적으로 다룰 것이다. 따라서 다음 장부터는 앞장과 연결된 주제가 아니라 별도로 독립된 주제가 된다. 개별 주제를 다루기 위해 앞서 해온 설명이 일부 반복됨을 이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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