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21장 복음과 율법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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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복음과 율법

1. “복음과 율법”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1.1 언약 - 범죄한 우리에게 다시 우리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

언약이란 하나님이 아브라함 직계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의 피조물 됨을 거부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사단과 함께 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 사는 동안의 극심한 고난과 고통, 죽음 이후 육체의 해체, 그 이후의 영원한 지옥 형벌을 향해 끌려가고 있는 절망에 빠져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그대로 형벌가운데 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약이란 다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이 회복되는 것이다. 다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 구원받는 것, 이 약속이 바로 언약이고 기독교의 구원이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1.2 아브라함 - 하나님 백성 만드시기 위한 믿음의 첫 조상

아브라함은 범죄한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 만드시기 위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여자의 후손(창3:15)으로 예언된 인류구원의 시작은 아벨의 축복을 받은 셋의 후손(창5:3)으로 연결되어지며,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실 것을 말씀하셨다.(창9:26-27)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창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무조건으로 선택하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는데(창12장), 자식이 없던 그에게 네 자손이 땅에 편만해질 것과 네 자손이 거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15장)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하나님 백성인 증표로 할례언약을 주셨고(창17장), 아브라함의 후손은 인간의 자손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백성임을 나타내시려, 100세인 아브라함과 경수가 끊어진 90세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게 하셨다.(창21장)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특별한 출생을 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백성임을 선포하기 위한 계획이셨다. 이삭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과 영적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는데 여기서 아브라함 자손 곧 이삭의 혈통을 따라 출생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백성을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육신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보는 것이 유대교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영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의 대주제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갈3:7)

1.3 할례 - 이방인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흔적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된 표징으로 주시어 하나님의 언약을 그 살에 있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하신 것이다.(창17:13)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언약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지니며 날마다 하나님 백성임을 확인하게 하셨다. 우상 숭배하는 이방백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몸의 흔적을 통해서 확인시키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방인과 구별됨”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태어난 아브라함 자녀, 이삭의 직계 후손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점차 번성하였는데 야곱은 이스라엘을 열 두 지파로, 요셉은 열 두 지파가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사용된 인물들이다. 애굽에 내려가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칠십여 명의 가족형태에서 벗어나 대략 이백만 명이 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1.4 율법 -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위한 구체적 규범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위한 구체적 규범이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시내산에서 자신이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언약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출19:5-6)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킴으로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한다.(벧전2:9)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시며 언약을 직접 맺으신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모두 백성 앞에서 낭송한 후 백성들 앞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언약을 맺는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백성된 증표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출20-23장) 이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 이방인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할례와 율법의 공통적 특징은 이방인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됨이다. 할례는 몸에 흔적을 남겨 “거룩하게 구별됨”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이고, 율법은 거룩함을 위한 구체적인 규범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스라엘의 어떤 행위와 조건을 보고 하나님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 곧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은혜였다. 구약의 옛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듯 신약의 새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은혜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1.5 거룩함 -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되어지는 것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율법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상숭배하는 가나안 이방인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거룩해져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니 거룩해지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 백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 되었으니 그 결과 거룩한 삶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철저하게 강조하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이다. 일반 종교는 윤리가 구원의 조건이지만, 복음에서 윤리는 구원의 결과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11:45)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사62:12)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필연적으로 사단을 섬기며 우상숭배하게 되어있다.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 아니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의 특징은 더러움이다. 여기서 더러움은 영육간의 더러움을 모두 말한다. 이는 사단은 그 속성이 도덕적으로 더러우며, 인간은 부패한 죄의 본성을 태어날 때부터 원죄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18장은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구체적인 계명들 중 음행과 연관된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미, 계모, 자매, 손녀, 이복누이, 고모, 이모, 백숙모, 형수, 제수, 조카 등을 범하지 말라고 하시고, 또 간통, 동성연애, 수간(짐승과 관계함) 등의 온갖 부끄러운 일들을 금지함이 하나하나 언급되어 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런 불의한 내용을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하셨을까? 과연 당시 세계는 의로운데, 하나님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니 미리 주의하라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당시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이런 문제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와 그 결과인 이러한 범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더러운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성별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더러움은 그 당시에만 있던 내용일까?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거부하여 죄인된 모든 인간세계는 영육간에 더러움으로 꽉 차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전혀 닮을 수 없는 더러운 영이기 때문이며 인간은 아담의 범죄함으로 사단의 속성인 부패한 본성을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더러움을 주로 도덕적인 타락으로(롬1:18-32) 형상우상과 귀신들림은 특수한 상황으로 설명한다.

이런 범죄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인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백성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구별된 자, 거룩한 백성 곧 성도(고전1:2)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얻어 세상과 구별되어진 거룩한 자이고 그 다음이 복음의 능력과 성도의 거룩함으로 사단을 이기는 영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여전히 더러움에 있을 수 있는가? 사단을 섬기며 죄의 본성대로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가 여전히 더러운 생활을 좋아하며 즐기는 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바울은 결단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6: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화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필연적 변화이다. 성령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로 법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고(칭의), 실제적으로도 거룩하도록(성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1.6 율법의 한계 -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백성을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못함

율법은 우상을 섬기며 죄에 빠져있는 이방 민족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의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절대로 율법은 구원의 방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구원의 열매를 누리고 보존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릴 것이고, 어기면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는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받아 하나님 백성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 숭배하는 부정한 이방인들과 영적인 측면, 육적인 측면, 도덕적인 측면 등 모든 면에서 구별되라고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삶이고 결과이다. 그러나 율법은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한계, 즉 죄와 사망 사단에게 노출된 육체를 지님으로 인해 어느 정도 죄의 행동을 억제하고 외형적 의로움은 유지해도 근본적인 죄의 본성을 억제하지는 못하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억제되지 않는 죄의 본성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죄의 행동으로 언제든지 나오게 되어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거룩함을 얻도록 기준은 제시해 주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율법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롬8:3) 율법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까지 제어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룩한 것처럼 잠깐 포장시킨 것뿐이지 실제 그 내면을 전혀 바꿀 수 없다. 율법은 사람들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거룩한 종교행위는 하게 하지만 그 마음에서 솟아나는 미움, 시기, 정욕 등 근본적인 죄의 본성은 전혀 제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하는 바울이 탄식이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지켜보지만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외적 행동은 그럴 듯하지만 육체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계속되어지는 죄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한 형식주의자만 만든다. 이런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견해는 율법자체가 아니라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십자가의 대속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복음은 죄가 무엇인지 이해되어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죄가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 그리스도,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은 막연할 수밖에 없다.

1.7 십자가 복음 -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심

정결케 됨은 죄 사함에서 오는데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얻게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거룩함은 죄 사함에서 오는 것이다. 더러움을 벗어남, 죄 사함, 의롭게 됨, 정결케 됨, 거룩해짐, 구원받음, 하나님의 자녀 됨은 모두 같은 용어이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 인간이 거룩해질 수 없는 것,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 내면에 본성으로 자리잡은 원죄 때문이다. 사단은 죄에 빠진 인간을, 인간 밖에서 유혹하고(고후11:14), 위협하며(벧후5:8), 참소하는(계12:10) 존재이다.

원죄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되는데 이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값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고(죄책),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오염)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의로워지고 거룩해 질 수 없다.

우리가 갚아야할 법적인 죄 값은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사망형벌이다. 이 값을 치룰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값을 치루려는 것은 살기위한 것이 아닌가? 죄 값이 사망이라면 내 스스로 죄값을 갚을 수도 없고, 만약 갚는다면 사형 집행으로 모든 상황이 끝이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는 법적 형벌인 사망의 죄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절대 불가능하지만 혹시 인간이 법적 죄책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원죄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실제적인 문제로 지금 우리 속에 가지고 있는 아담의 부패한 본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은 인간 내면에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이 바로 원죄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원죄가 아담이 지은 것으로 나와 상관없는 옛 범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아담의 옛 범죄는 지금 내게 그대로 본성적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원죄이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아담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아담의 부패한 죄의 본성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처한 원죄의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첫째, 하나님 앞에 날마다 우리의 법적인 죄책을 참소함으로 죄값을 지불함 없이는 형벌집행 정지를 불가하게 하며, 둘째, 우리 개인에게는 부패한 죄의 본성을 유혹함으로 죄의 종노릇 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전무하게 한다.(롬6:23)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죄 사함 받음”, 지금까지 언급해오던 용어로는 “거룩해짐”, 바울의 로마서 용어로는 “의로워짐”, 복음의 일반적인 용어로 “구원받음”, 언약의 용어로 “하나님 백성됨”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처한 이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해결하여 주신 것이다. 첫째,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순간 아담의 죄책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칭의이다. 둘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의 본성을 이기게 된다. 이것이 성화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문제가 해결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이제 사단은 우리를 더 이상 참소할 수도, 위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그 누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이라 확신해도, 십자가 죄 사함과 그것을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됨을 말하지 않는 십자가는 성경의 십자가가 아니다. 거룩함(칭의와 성화)이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다.

1.8 바울이 거부한 율법 -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의식법

바울이 설명한 복음을 한마디로 정의해 보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적 죽음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음(=죄 사함, 거룩해짐, 의로워짐)”이다. 바울은 사역현장에서 언제나 이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부딪혔기에 그의 서신은 이들의 공격에 맞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바울과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똑같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되기 위하여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거룩해짐을 다른 말로 하면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방법에 있어서 바울과 유대인들은 다르다. 원죄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우리 힘으로 지키면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력인 원죄를 인정하는 바울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인간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오직 믿음이라고 한다. 거룩해지는 것을 배제한 오직 믿음이 아니라 거룩해지기 위한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으로 거룩해지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칭의로 인한 법적 죄 사함과 성화로 인한 실제적 죄의 세력을 이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기독교의 거룩은 영적인 거룩, 또 실제적인 삶에서의 거룩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삶의 거룩은 이 땅에서 완전 거룩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울이 오직 율법이 아닌 오직 복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율법은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거룩하게 못하나, 복음은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따라서 복음은 율법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옛 언약, 복음은 새 언약이라 말한다.(렘31:33)

율법은 통상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구약의 의식법(제사법), 둘째, 시민법(당시 이스라엘백성에게 해당되는 희년법 토지법) 셋째, 도덕법(윤리법)이다. 이중 바울이 거부했던 율법은 의식법이다. 구약의 의식법을 지켜야 하나님 백성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과 교회내의 유대주의자들에 맞서서 바울은 끝까지 율법(의식법)을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된다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폐지되고, 시민법은 그 정신만 남아있으되, 도덕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1.9 바울이 주장한 복음 -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복음

바울과 초대교회가 전도했던 사람들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알고 지키던 히브리 유대인들과 헬라화된 유대인, 또 율법을 지키며 유대교를 믿던 이방인들이 일차대상이었다. 나머지 이방인들은 그 다음이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복음전파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대한 수정이 필요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공격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 복음 이해에 가장 걸림돌이 바로 구원의 수단으로 지켜왔던 율법관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과 비교하여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구원얻은 자의 삶의 기준으로, 구원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도구로 설명하였다.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유대인의 율법관을 공격했지, 구원 얻은 자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을 배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칭의(믿음)로 구원얻은 성도들에게 더욱 성화(행위)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서신서들은 주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율법과 복음을 설명한다. 간단하게 몇 구절만 적어보겠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살전4:3.7)

그 외의 일반서신에서 몇 구절 적어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이러한 거룩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또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화를 통해 점차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인간은 절대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거룩해질 수 없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오직 예수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적으로 이미 거룩해졌고, 육적으로는 지금 거룩해져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그리고 죽으면 당연히 천국 간다.

2. “복음과 율법”은 구원론적 용어이다.

2.1 믿음과 행위의 구원론적 용어로만 사용할 것

복음과 율법을 구원론적 용어로 사용하면, 복음은 전적 부패한 본성을 가진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죄 사함 받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원죄를 거부하고 인간의 힘으로 율법의 계명을 지켜 의로워 질 수 있음을 주장는 것이다.

복음과 율법 용어는 “죄인된 인간이 죄 사함 받고 의인되어 하나님의 백성됨”에 있어서 “죄 사함 받고 의인 되는 방법”이 하나님의 선물인 그리스도 대속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십자가 대속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질 수 있느냐에 대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입장을 비교할 때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행위”라는 용어는 인간이 구원 받음에 있어 십자가 대속으로 주신 칭의와 성화를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십자가 대속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의로워져, 다른 표현으로는 죄문제 해결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로 대비되는 기독교와 일반종교의 입장 비교할 때 사용한다. 따라서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위”는 인간이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구원의 방법”을 설명할 때 바울이 사용한 용어이다.

2.2 용서와 정죄의 신앙적 용어로 사용하지 말 것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위를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론”이 아닌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행함이 없이 믿음만을 강조하는 도덕 폐기론자(방탕주의자)가 되기 쉽다. 어떤 범죄를 저지르든 무조건 덮는 것은 복음이고, 잘못을 지적하고 말하는 것은 율법으로 단정하는 것은 흑백논리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야고보서에 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가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은 율법 자체의 부정적 의미가 아닌 개인의 부패한 죄성을 언급하는 말이다. 율법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는 비인격인 법률이다. 이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는 것은 개인의 죄인된 성향이다. 야고보는 율법 자체가 악하다고 하지 않고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 정죄하는 개인의 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 구원론에서 바울이 율법을 공격한 것은 “죄 사함을 받고 의로워지는 도구로서의 율법”은 안된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가 신앙생활에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서신 후반부는 성령을 따라 살며 율법을 지키는 성화의 삶이 기록되어있다. 바울이 율법이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 자체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원죄 때문이다.(롬7장) 구원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데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어야 한다. 복음으로 의로워진 성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율법을 지키며 의롭게 살아가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규범이요 의의 기준으로 유효하다. 율법에 매이는 것과 율법을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주어진 칭의와 성화를 모른다는 점에서 똑같다.

2.3 교회 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복음과 율법을 신앙적 용어로 사용할 때 오는 문제는 교회 내에서 문제가 발행하였을 때 나타난다. 단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보아도 분명한 범죄가 저질러질 때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일이 반복적으로 저질러진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복음이고 정죄하는 것은 율법인가? 교회 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성경의 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성도 개인은 자신이 직접 율법의 재판자가 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필연적으로 정죄자가 되기 때문에 이를 주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은 개인이 율법을 가지고 타인을 정죄하지 말라고 한다. 즉 율법은 자신에게 적용하고 타인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야고보(약4:11-12)와 함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둘째,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다르다. 성경은 성도의 범죄에 대한 교회의 대처 방법을 말하고 있다. 교회 전체의 리더는 이 문제를 교회를 세우는 쪽으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와 가혹한 형벌은 인간을 모른다는 점에서 똑같다. 무조건적 용서는 부패한 인간 본성 때문에 안되고 가혹한 형벌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안된다. 좋은 부모, 교사, 코치는 칭찬과 체벌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는 용서와 형벌이 모두 들어있다. 무조건 용서는 사람을 방종하게 만들고, 무조건 형벌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범죄를 무조건 묵과하면 교회의 성결이 훼손되고, 범죄를 가혹하게 형벌하면 범죄한 성도가 영영 돌이킬 수 없이 실족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리는 신자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교회의 성결이 유지되고, 그 성도가 실족되지 않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은 절대 어느 한쪽만 말하고 있지 않다. 교회의 성결과 그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다. 이것은 절대 무조건 그냥 덮어 성도들의 죄와 의의 기준을 허무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파헤쳐 그로 영원히 고통받도록 공개하는 것도 아니다. 한 번의 범죄는 실수라고 인정되지만 반복되는 범죄에 대하여 언급함이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5:1-13)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살후3:14-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요약>

인간 육체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원죄 곧 죄책과 오염을 이해시키고, 칭의와 성화, 이미와 아직, 사단의 유혹과 영적싸움, 하나님 나라 회복 등과 연결되어, 결국 신앙생활에서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 준다. 구원은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바울은 도덕 폐기론자가 아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바울이 거부한 율법은 도덕법이 아니라 구약의 의식법이었다. 율법은 지금도 구원얻은 성도에게 삶의 규범으로 존재한다. 바울은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강조했다. 또 이와 함께 교회 내에서 “복음과 율법”이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 혼동이 많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구원론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용서와 정죄”의 신앙적 용어로 사용된다. 이 사이에서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함으로 큰 고통이 찾아온다. 성경은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의 성결을 유지하고 그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 가혹한 형벌은 복음이 아니듯이 무조건 덮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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