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7장 죄, 사망의 원인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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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죄, 사망의 근본원인

1. 나는 구원받아 원죄에서 자유 해졌는데 왜 고통이 계속되는가?

1.1 원죄는 죄책과 오염이다.

인류의 고통은 사망의 현상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육체에 남은 생명의 흔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이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육체가 썩음과 해체되기까지 극심한 노동과 삶의 갈등 속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사망형벌이다.

사망의 형벌은 죄에서 왔다.(롬6:23) 아담의 불순종이 사망을 가져온 것이다.(롬5:12-14) 죄란 피조물의 하나님에 대한 휘브리스(교만)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이며, 하나님의 지위를 탐낸 반역이다. 이 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고 사망의 형벌아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죄의 내용은 인간이 피조물 됨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모든 피조세계의 타락을 동반시킨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자기 역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하여, 자기 탐욕을 위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피조세계의 모든 고통은 직간접적으로 인간에게 원인이 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죄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아담의 첫 범죄는 아담 자신과 아담 후손인 모든 인류를 죄인되게 하였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말하는 원죄이다. 원죄는 두 가지 곧 죄책과 오염으로 설명한다.

1.2 죄책 - 아담의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유일한 금지 명령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존재였다. 자유인격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고 자기가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하는 점이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이유이다.

인간은 유혹자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다.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의심했다. 선악을 하나님께 의존해서 판단하는 것은 생명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 스스로 피조물임을 거부해도 죽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이다. 이 범죄는 아담의 대표성으로 인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했고, 사단의 유혹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아담 자신이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댓가는 아담 자신이 치러야 하고 아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구원의 시작은 죄 사함을 위한 개인의 회개와 믿음으로 시작된다.

둘째, 아담은 언약체결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것이다. 아담은 개인이지만 오늘날 우리와 다르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생물학적 조상임과 동시에 언약적 조상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한 사람으로만 생각지 아니하신다. 모든 아담의 후손을 포함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아담 개인의 반역과 동시에 모든 인류의 반역이 된다. 이것이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가 된다. 구원은 개인의 죄 사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다시 하나님 백성 되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 역할을 회복함이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 개혁신학의 핵심이다.

죄책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이다.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담에게 사망의 형벌이 내려졌다. 사망 형벌은 법적 책임이다.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고 회복은 불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기분따라 내려진 체벌이 아니다. 법률에 명시된 형벌이다. 만유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려진 형벌이다.

죄책도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죄책은 아담부터 시작된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아담 자신이 사망의 형벌을 받음은 당연하다. 범죄자가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둘째, 아담은 개인이지만 언약의 대표자이다. 이것이 아담과 우리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죄의 책임이 있다. 아담 후손인 모든 인류도 아담처럼 사망의 형벌을 받는다. 대표의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구하시는 것은 새 언약의 대표자로서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때문이다.(롬5:19)

중요한 것은 아담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책 곧 하나님과 단절되는 사망의 형벌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이것이 원죄의 첫 번째 부분인 죄책이다.

다시 한 번 이해해보자. 죄책이란 무엇인가? Do(죄를 짓다)의 반대에는 Do not(죄를 짓지 않다)과 Undo(죄를 짓지 않은 원상태로 돌리다)가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Undo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기 때문이다. Undo는 컴퓨터 가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만약 Undo가 현실세계에서 가능하다면 세상은 재미있어질 것이다. 조금 살다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Undo버튼을 눌러 결혼 이전 상태로 돌아가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하고, 사업을 하다가 손해를 보면 Undo버튼을 눌러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컴퓨터 게임과 SF(공상과학)소설에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에서 Do의 반대는 Do not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Do not은 지금 죄를 짓지 않고 있음을 말할 뿐이지 그 이전에 지은 죄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죄를 짓지 않고 있다고 해서 이전에 지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죄책은 바로 이런 것이다.

가끔 신문에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잡힌 범인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살인강도 죄를 지은 후 15년 정도를 숨어 살았는데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공소시효 하루 전날 잡혔다는 것이다. 죄책은 그 15년 전에 저지른 그 범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다. 15년 전에 저지른 그 살인강도 죄에 대한 책임이다. 지금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냐, 변화되었느냐를 묻지 않고 15년 전에 저지른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다.

1.3 오염 - 아담의 실제적 부패한 본성

원죄의 두 번째 부분은 인간 본성의 부패한 오염이다. 죄책이 추상적인 법적 책임이라고 한다면 오염은 인간에게 일어난 실제적 변화를 말한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 본성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인간은 처음부터 아담처럼 하나님을 거부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담은 인류에게 죄의 책임만 전가해준 것이 아니라 부패한 자신의 본성까지 물려주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조물 됨을 부인한다. 이것이 죄의 성격이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아담의 욕망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지), 하고 싶어하고(정), 행동한다(의).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죄악들을 기록한다. 로마서 1장은 23개의 죄악 목록들을 기술한다. 우상숭배와 매춘과 동성애, 또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거역, 배약, 무정함, 무자비...(롬1:18-32) 인간 사회에서도 용인되지 못하는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불의가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롬1:21.24.26.28)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온갖 자기중심적 욕심을 발생시킨다. 그 욕심이 각 상황에 따라 모습을 변화한 것이 위의 죄악 목록들이다.

아담은 의와 거룩함의 존재에서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원죄의 두 번째 부분인 오염이다. 죄의 오염으로 아담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오염도 죄책과 똑같이 대표의 원리에 따라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가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을 거부한 후부터 자기가 하나님 되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아담에게 일어난 실제적 변화이다. 그의 본성은 하나님 형상의 의와 거룩함이 사라지고, 불의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탐욕과 욕망의 본성을 갖게 되었다. 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죄는 소극적으로 보면 어거스틴의 설명처럼 의의 결핍이고 좀 더 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의도적 거부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도적 거부는 인간 스스로 자기에게 맞춰 선악을 판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의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 개개인에게 두게 되었다. 선과악의 절대기준이 상대기준으로 바뀌었다. 모두 자기, 특히 자기 육체의 부패한 욕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한다. 온 세상이 큰 혼란에 빠진 이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내가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성경의 핵심은 이것이다. 내가 바로 아담이라는 것이다. 물론 첫 아담과 나는 다르다. 내가 에덴동산의 첫 아담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담의 후손이지 아담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담이다. 아담처럼 하나님을 거부하는 본성이 있다. 내가 나에게 맞춰 세상의 선과 악을 판단한다. 그 첫 아담의 부패한 본성이 내게도 똑같이 그대로 있다. 그래서 내가 아담인 것이다. 나는 아담으로부터 외모만 물려받아 태어난 것이 아니다. 첫 아담의 영적 범죄 유전인자(DNA)까지 물려받았다. 아담이 잘못해서 내가 형벌 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범죄하고 있기에 형벌받는 것이다. 그 범죄의 성격은 하나님을 거부한 첫 아담의 범죄와 똑같다. 그래서 내가 아담이다(Adam's race) 이것이 원죄 곧 죄책과 오염의 의미이다.

2. 오염은 죄책의 해결로 끝나지 않는다.

2.1 자범죄는 원죄의 오염 곧 부패한 본성에서 발생된다.

온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온 죄는 인간들 사이에 정해진 법률 어김이나 반인륜적 행위, 부도덕함이 아니다.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함이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난 종교적 문제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함은 인간이 피조물 됨을 부인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본성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맞춰 판단하고, 하고 싶어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다. 자기가 하나님이다.

자범죄가 발생되는 매커니즘이 있다. 외부나 내부에서 유혹이 다가온다. 그때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진 부패한 아담의 본성이 반응한다.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해서 하고 싶다는 욕구 감정이 먼저 생겨나고 이성은 뒤에서 그것을 합리화해준다. 합리화 과정이 끝나면 의지가 작용해서 행동으로 옮긴다. 개인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범죄가 실제로 실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욕심(약1:15), 탐욕(롬7:8), 정욕(골3:5)에서 자범죄의 시작을 찾는다.

욕심, 탐욕, 정욕 등이 바로 인간의 부패한 본성 곧 원죄를 표현하는 말이다. 자기가 하나님 되어 선과 악을 자기에게 맞추기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들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선이고 하기 싫은 것은 악이다.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절대기준이 없다. 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제한이 없어졌으니 욕심이 무한대가 된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명 안에서 움직이는 자이지만, 하나님은 제한이 없으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시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하나님의 절대기준 없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것은 절대로 의롭거나 거룩하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의로움과 거룩함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성향이다. 모든 사람이 절대로 사망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죄책이요, 모든 사람은 실제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오염이다. 이 모든 것이 첫 아담이 하나님을 거부한 범죄에서 시작되었다. 아담이 먼저 죄책과 오염을 가졌고,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다 아담과 똑같은 범죄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결국 모든 사람이 아담처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며(원죄의 근원), 하나님을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고(죄책), 실제적으로 부패한 본성으로 태어난다(오염)는 것이 원죄이다. 자범죄는 부패한 본성이 유혹을 받아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범죄는 원죄에서 나온다.

2.2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성경은 죄와 죄들을 구분한다. 한글성경은 죄 속에 죄들을 포함해서 죄 하나로 기록하지만 영어성경은 sin과 sins으로 정확하게 구분한다. 헬라어 성경도 “하말티아”(죄)와 “하말티아이”(죄들)이다. 여기서 죄와 죄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죄(sin)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하나님 된 부패한 본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원죄이다. 죄들(sins)이란 죄의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들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서 맺혀지는 죄의 행동들이다. 자범죄이다. 그래서 죄의 열매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나무이다. 죄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나무 자체를 바꾸지 않는한 죄의 열매는 계속 맺히게 된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이 말은 인간이 죄의 행동들을 하기 전에 이미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도덕적 또는 사회법률적인 죄의 행동들은 한 가지도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 사람이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을 선하다, 훌륭하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를 하나님을 거부하는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죄의 행동을 하지 않을 뿐이다. 아니면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주인됨으로 발생하는 죄의 욕구들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회법률적, 인륜도덕적 모든 악한 행위들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선과 악을 기준두기 때문에 욕망은 끝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짓고 싶은 욕구들을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고 태어나고,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이기적이다. 성경은 이것을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었다고 말한다. 피조물임을 부정함에서 오는 자기 주인 됨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가치들이 내적 욕구로 발생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무엇이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말하고, 들을 때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인다. 긴 이야기를 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들은 것도 이기적으로 왜곡해서 듣는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보고도 잃어버린 사람의 애타는 심정보다는 내게 유익하지 않으면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주워 자기 소득으로 간주한다. 길거리 상점이 저녁이 되어 문을 닫게 되면 왜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가? 밤에 문을 열어두고 지키지 않는다면 상품들이 없어진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자 입에 손을 넣고 사자를 믿는 것과 똑같다. 인간을 아직 잘 모르는 것이다.

죄들(sins) 곧 죄악된 행동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죄(sin)이다. 그러한 죄의 행동들을 할 수 밖에 없는 본성 상태이다. 원죄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자기가 하나님 되어있다. 여기에서 모든 죄들이 발생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3 이성은 감성을, 감성은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죄의 욕구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부패한 아담의 본성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내적으로 이미 각인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자라나면서 환경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었다고 표현하고 세상 표현으로는 이기적 자기중심적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따끔한 충고보다 칭찬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적인 것 같다. 우리가 교육을 받는 것은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내려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해도 감성이 더 먼저이다. 이성은 거부하고 감성은 원할 때 사람은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손해인줄 알면서도 결국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은 감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정도와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는 비율이 어느정도 연관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대단한 교육과 훈련, 수양이 필요하다. 스토아 철학의 최고 덕목은 아파테이아(무감정)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철저히 이성(지성)으로 판단하고 행동함이다. 그러나 이성은 감성을 이기지 못하고 감성은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륜관계로 고통을 당한다. 이성은 거부하지만 감성으로는 끌려간다. 결국 모든 관계가 깨지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나서야 겨우 어쩔 수 없어 멈추게 된다. 멈추고 싶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멈출 수밖에 없으니 멈추는 것이다. 도박, 알콜, 마약, 성도착 등 모두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

그런데 감성보다 몇 배나 더 강한 것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인간의 본성이다. 배고플 때 음식에 대한 욕구, 하루 이틀 잠을 자지 못했을 때 오는 수면욕구... 막을 수가 없다. 개인의 교육정도, 사회적 위치, 남녀차이, 종교 유무에 상관없이 인간은 이겨내기 힘들다. 몸이 요구하는 데는 어쩔 수가 없다. 이성과 감성은 절대로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이런 본성은 고상한 축에 들어간다. 인간의 본성은 그리 고상하지 않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우화작가인 라 퐁텐의 우화가 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이다.

전갈이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수영을 할 수 없어 개구리에게 가서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개구리가 말했다. "내가 널 등뒤에 태우면, 넌 날 찌를 거잖아." 전갈이 대답했다. "아냐, 만약 내가 널 찌르면 너뿐 아니라 나도 죽을텐데, 내가 왜 그래." 개구리가 생각하기에 맞는 말 같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전갈을 태우고 강을 건너갔다. 그런데 중간쯤 가다 물살이 거세지자 전갈이 꼬리를 뒤틀더니 개구리를 찔렀다. 둘은 물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개구리가 전갈의 독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가며 외쳤다. "왜 날 찔렀니? 이제 우리 둘 다 물속에 빠져 죽잖아." 물에 가라앉으면서 전갈이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런데 꼬리가 저절로 가서 찌르는데 어떡하니, 나는 전갈이고 찌르는게 내 본성이거든."

이 우화의 핵심은 이것이다. 개구리에 올라탄 전갈은, 자신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찌르면 자신도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이 이성이다. 이성은 분명한 판단을 한다. 그러나 개구리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다는 이성의 결론보다 가지고 태어난 전갈의 본성은 개구리를 찌르고 함께 죽는다. 타고난 본성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동물원에서 호랑이 새끼가 어미 양의 젖을 먹고 크고 있는 모습이 가끔 보도된다. 그것은 새끼 호랑이일 때나 가능하다. 성장한 호랑이는 어미 양의 젖을 먹지 않고 어미 양을 먹는다. 본능이다. 아무리 자기를 키워준 어미 양이라 할지라도 상관이 없다. 호랑이는 반드시 어미 양을 잡아먹는다. 다 커서도 어미 양을 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이다.

죄는 본성에 관한 문제이다. 죄악된 행위들은 부패한 본성에서 나온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어 살아간다. 모든 인간의 본성이다. 아담 범죄의 결과이다. 원죄이다. 인간 본성은 절대로 인간에 의해 스스로 제어되지 않는다. 이성이 본성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이성을 끌고 간다. 필연적이다.

3. 인간 내면에 있는 죄의 본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3.1 교육으로도 제어할 수 없다.

교육으로 인간의 죄의 욕구를 억제해본다. 교육은 주로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것과 해야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오랜 교육을 받으면 분명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변화가 되어진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교육 차이는 사회의 치안과 범죄율 제어에 영향을 준다. 어려서부터 도덕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범죄 발생률이 낮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치안이 통제되고, 개인이 극한 상황이 처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전쟁같은 위기나 긴장이 풀리는 상황에 처하면 도덕의식은 절대로 인간의 죄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다. 치안이 무너진 LA 폭동 때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약탈이었다. 치안이 무너지면 사람은 도둑으로 돌변한다. 해외에 나가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인간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못 갈 곳이 없고 못 할 일이 없다.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음란매체는 익명성을 전제로한 인간 내면의 표출이다.

교육은 사람의 부패한 인간 본성을 절대로 바꾸지 못한다. 비록 교육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체면의식이 그를 조심하게 만들고, 도덕과 신념 사상이 그의 본성을 억제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너무도 나약하다. 인간의 이성과 교양으로 잠시 죄의 본성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름도 한계가 있다. 어떤 상황에 의해 조금만 느슨해지게 되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반드시 죄악을 요구한다. 이겨낼 장사가 없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있다.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의 갈등에 관한 부분을 잘 묘사한다. 성실하고 명망있는 과학자 헨리 지킬박사는 모든 인간 내면에 갈등을 주고 있는 선과 악을 분리함으로 인간은 자유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선한 인격과 악한 인격을 분리하는 약물을 만들어내고 자신에게 투여했다. 그는 이 약물로 자기 속에 있는 악의 화신을 분리해 내었다. 그가 바로 에드워드 하이드였다. 선한 지킬박사의 악한 내면이 인격으로 나타난 모습니다. 그런데 약물을 통해 하이드를 분리해낼수록 지킬박사는 점점 작아지고 악한 하이드의 본성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하이드로 변하면 명망있는 지킬박사로서 감히 행동할 수 없는 반사회적 행동들을 저지르며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 정기적으로 하이드로 변한다. 그러나 약물은 점차 중독이 되어가고 하이드는 지킬이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하이드가 살인을 저지른 후에, 지킬은 약물을 먹기를 그만두기로 하지만, 지킬은 약물 없이도 하이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지킬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이드로 죽게된다.

이 소설은 청소년에게 약물중독의 폐해를 알리는 계몽소설이 아니다. 인간성에 관한 심리소설이다. 소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과 악을 분리해 보지만 결국 하이드가 이긴다.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이긴다. 지킬박사는 죽어서야 하이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스티븐슨은 인간본성 문제를 예리하게 간파했다.

3.2 형벌로도 제어할 수 없다.

인간의 죄성은 개인의 도덕의식에 맡겨둘 수 없기에 국가기관에서 엄한 법률로 제어한다. 그러나 법의 형벌로도 죄의 욕구는 제어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된 행위들을 제어하기 위해 엄한 법률을 만들고 형벌 기관을 둔다. 사람들은 형벌의 무서움과 고통스러움을 보고 솟아오르는 죄악의 욕구를 억제한다.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마음대로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안전 때문이 아니다. 속도를 내면 즉시 경찰에게 스티커를 발부받고 벌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벌금을 내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어떤가? 똑같다. 그 물건을 가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둑질하다 잡혀 감옥에 가는 것이 더 고통이기 때문이다.

형벌은 인간의 죄악된 행동을 제어한다. 그러나 한정적이다.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 새사람 되어 나오기보다는 더 노련한 범죄자가 되어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한번 감옥에 다녀온 사람은 다음에는 더 담대하게 범죄를 저지른다. 감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전과자에 대한 사회시선 때문에 자포자기 한다. 전과가 자꾸 누적된다. 법률의 형벌도 인간의 죄악을 근본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세상이 이만큼 통제되는 것은 국가라는 강력한 체제가 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정부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들어간다. 대통령이 불교신자든, 무슬림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정의의 칼로 사람들의 죄의 욕구들을 어느 정도까지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고민은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또 엄한 형벌을 만들어도 인간의 죄의 행동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세상 사회는 계속되는 인간의 죄악들에 대해서 막을 방법이 없다. 완전하지 않은 줄 알지만 교육을 통한 의식변화와 법률의 형벌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정도로 통제하는 것도 성공이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한계다.

3.3 부패한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사회는 인간의 죄악된 행동들로 넘쳐날 것이다. 이것을 억제하기 위한 교육비용과 치안유지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범죄율은 낮아지지 않고 점점 더 높아만 간다. 죄는 행위가 아니고 본성문제이다. 죄의 행위들은 죄의 본성에서 나온다. 인간의 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가능하다.

<요약>

인간의 삶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다. 성경은 이것을 사망이라고 하고 그 기원을 죄에게서 찾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인 죄악의 행위들이 아니다. 죄형법정주의에서 나오는 법률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반사회적 행위들도 아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종교적인 죄다. 모든 인류 속에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는 성향이다.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고 여기에서 모든 죄악들이 발생한다. 아담의 첫 범죄이기 때문에 원죄라기보다는 아담의 범죄한 성향이 모든 인류에게 그대로 내재되어 태어나기 때문에 원죄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 내가 아담이다. 아담의 죄책과 오염이 내게도 그대로 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원죄이다. 자범죄는 여기서 발생하는 모든 자기중심적 행동들이다. 원죄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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