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9장 죄와 사단의 관계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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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죄와 사단의 관계

1. 죄인가? 사단인가?

1.1 죄로 오염된 인간과 그를 유혹하는 사단

인간은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먼저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또 얻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굉장한 갈등을 느끼며, 알 수 없는 질병과 뜻하지 않은 사고로 어려움을 당한다. 또 인간은 영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할 수 없는 육체의 썩음과 해체를 맞이한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사망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결과이다. 인생은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죽었으되 잠시 육체에 남겨두신 생명의 흔적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사망은 죄에서 왔다. (원)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표현되고 좀 더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의 부패한 속성이 모든 인류에게 지금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죄하면 형벌 받아야 한다는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 곧 죄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원죄는 그 죄책으로 인해 지금 사망의 형벌 받고 있는 인간의 실제적 모습이 중요하다. 오염이다. 그래서 원죄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부패한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 내부에 있다. 부패한 본성은 나와 별도의 독립된 인격인가? 아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자유인격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왜곡되어진 나 자신의 본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나 자신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죄는 비인격이다.

사단은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보다 먼저 하나님께 범죄했고 자신이 받을 형벌 속으로 인간을 끌어들였다. 사단은 죄를 가지고 인간을 참소하고 비난하고 정죄한다. 사단은 이미 부패한 본성(원죄)을 가진 인간에게 죄(자범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그 죄에 대해서 고소하는 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자. 지금 사단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 외부에 있다. 지정의를 별도로 가진 독립인격이다. 원죄는 지금 사단이 짓게 하는 것이 아니다. 원죄는 이미 우리 본성 속에 가지고 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이 피조물 됨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었다. 그 이후 아담 자신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이 원죄이다. 지금 사단이 인간의 원죄상태에 개입할 틈이 없다. 첫 아담을 유혹했을 뿐이다. 지금 사단 때문에 인류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사단은 원죄와 상관이 없다. 원죄 상태에 있는 나에게 자범죄를 짓도록 유혹할 뿐이다.

원죄는 인간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삐뚤어진 자아이다. 자기 스스로 별도로 움직이는 독립인격이 아니다. 나 자신의 부패한 본성이다. 사단은 누구인가? 인간 밖에 있는 범죄한 천사이다. 나 자신과 구분되는 별도의 인격이다. 나의 부패한 본성(원죄)을 자극해서 죄(자범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유혹은 사단이 하지만 죄는 내가 짓는다. 책임도 내게 있다. 죄는 사단과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죄와 사단의 관계가 혼동되면, 사단에게 잡혀있는 것을 원죄로 오해하게 된다. 이는 사단을 꺾으면 죄가 사해지는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1.2 죄인과 귀신들린 자의 차이

성경은 인간을 무엇이라 정의하는가? 죄인이라고 한다.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자유인격인데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의하여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이라고 부른다. 성경의 죄는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이다. 인간의 반역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인간에게 사망의 형벌을 초래한 원인이다. 죄는 바로 인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의 반역으로 초래된 문제이다. 여기에는 사단이 개입할 공간이 없다. 사단은 첫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유혹했을 뿐이다.

기독교는 바로 이 죄를 해결하는 계시이다. 사단은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을, 인간 밖에서 유혹하고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도록 고소 정죄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부패한 본성에 관한 문제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한 원죄이다. 인간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지정의를 가진 자유인격이다. 누가 나를 억압해서 나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내가 하고, 행동도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진다. 내가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단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지정의를 가진 자유인격인데,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마다 악한 죄의 열매들이 맺힐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자유스럽게 자기가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죄의 오염으로 본성자체가 자기중심적이다. 이것이 아담이 선악과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원죄의 상태는 몇 가지로 다르게 표현해 볼 수 있다.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의 피조물 됨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중심적, 이기적 존재가 되었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를 가지고 우리는 원죄란 인간 본성의 부패해진 상태라고 표현한다. 뿌리는 하나님을 거부함이고, 나타남은 자기중심적 성향이다. 이것이 원죄의 오염이고, 죄책은 모든 인간은 이런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 법적으로 단절(사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지정의가 없는가? 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프로그램화된 기계도 아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행동도, 생각도, 감정도 스스로 하는 자유 인격이다. 자유인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에 오염되어 태어나기에 죄에게 노예화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죄가 요구하는 데로 끌려간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부패한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판단하고 원하며 행동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죄가 내 인격을 지배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죄를 짓기에 나는 책임이 없고 죄가 책임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죄란 무엇인가? 나 이외의 다른 인격이 아니다. 나 자신의 본성, 결국 죄에 오염되어 있는 나 자신이다.

로마서는 비인격인 죄가 그 속성상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폭군으로 의인화해서 설명한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기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비인격 죄를 인격적 존재인 사단과 동일시하는 오해하기 쉽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죄의 자아와 싸우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내 속에 다른 존재 다른 인격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만 본성적으로 죄를 선택하는 내 자아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죄를 의인화해서 설명한 것이지 죄가 나와 다른 별개의 존재, 사단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마음에 종교의 씨앗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고 선한 것을 바라는 양심이 있다. 그러나 죄에 오염된 본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것을 거부하고 더럽고 불의한 것을 선택하게 한다. 생각으로는 거룩하고 싶어 하지만, 행동은 결국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의로운 생각은 언제나 죄를 따라가는 자기 행동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용할 뿐이다. 죄악된 결정과 행동을 누가 하는가? 사단이 시키는가? 자기가 하는가? 인간 스스로 한다. 바로 죄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죄에 오염된 자신 곧 자신의 부패한 본성이 그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사단은 그를 유혹할 뿐이다. 이것이 기독교 인간관이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별개의 문제이다. 귀신들림이란 지정의가 귀신에게 완전히 장악된 상황이다. 자기 인격이 아니다. 다른 존재 귀신의 인격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이 분명히 있음을 기록하고 우리 주위에서도 분명히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들린 사람에게 주된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반인들에게 관심을 둔다. 귀신들린 사람은 소수의 특수한 상황으로 설명한다.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꽉 차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들로 꽉 차있다. 귀신들린 사람은 하나님 떠난 죄인들 중에서 자발적으로 귀신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본인은 거부하지만 귀신에게 장악된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소수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그들 중 일부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고 계시한다.

1.3 사단이 공중권세 잡은 자라는 의미(엡2:2)

사단은 거짓의 아비(요8:44), 이 세상 신(고후4:4), 세상 임금(요16:11), 공중권세 잡은 자(엡2:2)로 묘사된다. 성경은 사단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읽지 않으면 마치 세상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는 사단의 영역이고 인간은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염라대왕이 지옥을 관장하고 있고 인간은 그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그림처럼 말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없는 사단의 통치영역인가? 이 세상은 우리가 빼앗겨버린 북녁 땅같이 사단에게 완전히 빼앗긴 나라인가? 하나님은 사단의 능력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오실 수가 없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 사단 하나 제어하실 능력이 없는 분이신가? 사단은 하나님과 대등한 힘의 균형을 유지할 만큼 대단한 존재인가?

사단은 하나님의 지배 밖에 있는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받을 피조물이다. 이 세상에서 신이라 불리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사단은 신이 아니요 거짓 우상에 불과하다. 사단이 죄의 세계의 지배자라는 것은 모든 인류가 사단의 유혹과 참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지 사단이 하나님처럼 창조주가 되어 온 세상을 마음대로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단이 세상 임금, 이 세상 신, 공중 권세잡은 자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거부하여 범죄한 때부터이다. 인간이 사단의 말을 듣고 범죄하기 이전에 사단은 공중으로 내어 쫓겨났을 뿐 아직 세상을 장악한 것은 아니다. 피조세계에 사단의 범죄한 속성이 들어오고 큰 혼란이 온 것은 에덴에서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부한 범죄 이후이다.

사단이 이 세상 신, 세상 임금이란 것은 범죄한 모든 피조세계의 지배자라는 의미보다 범죄한 인간들 속에 있는 죄성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며 또 인간은 절대 이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쓰여진 말이다. 사단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처럼 창조자가 되어 피조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다. 피조 물리세계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사단의 통치에 들어가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이지, 사단이 하나님처럼 피조세계를 지배해서 사단의 폭정 밑에서 고통 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피조세계는 인간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상태 유무는 인간과 함께 하도록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조세계도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의 신분과 상태의 변화로 인해 함께 고통을 받게 되었다.(롬8:22)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가 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다. 최고 신 '아후라 마스타'를 신봉하는 유일신교라고 하지만 그 대칭 되는 악신으로 '알리만'의 존재를 인정하고, 세계를 선신과 악신의 싸움터로 규정하는 이원론 종교이다. 또한 마니교가 있다. 창시자 마니의 이름을 딴 종교로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되었다. 그 교리는 광명(선)과 암흑(악)의 이원론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동일한 힘의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룬다는 이원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영지주의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 두 종교는 모두 이 세계 내에서 선과 악의 동등한 두 세력을 인정하는 공통점이 있다.

사단을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로 올려놓는 것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와 같은 사상이다. 악의 신 사단이 선의 신 하나님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가?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들어와 인간의 원죄(하나님을 거부하는 부패한 본성)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어 파멸로 끌고가는 도적이요 강도이지, 하나님과 견주는 악한 세계 만물의 지배자는 아니다.

사단이 공중권세 잡은 자, 이 세상 임금이란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사단은 지정의가 완전히 귀신들린 사람들의 주인이란 의미이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있으나 성경은 소수 특수한 상황으로 언급한다. 둘째, 사단은 의와 진리와 거룩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의 욕구대로 사는 모든 인간들의 우두머리로서의 일컬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사단에게 잡힌 것이다. 인간은 죄의 정욕대로 살며 사단과 함께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단이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한 본성인 죄가 사단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사단이 잡고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본성(원죄)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중요한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사단은 “이 세상 신”(요16:11)과 “이 세상 임금”(고후4:4)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도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단이 이 사악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이스 벌콥-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사단의 영향력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아직도 남아있는 죄이다. 죄는(심지어 신자들의 경우에도) 우리의 삶 안에서 마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영역에 지속되는 죄의 모습이 있다면, 그 죄에 대한 우선적인 책임은 바로 그 신자에게, 또는 그와 같은 잘못된 행태를 지속하려는 그의 선택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인 그루뎀-

불경건한 자들의 눈이 먼 것과 이로써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사단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단의 나라의 토대 즉 죄의 토대가 된다. -요한 칼빈-

1.4 예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는 의미(요일3:8)

사단은 형벌받을 피조물로서, 감히 하나님께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직접 점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교회 내에서 죄를 의도적으로 짓는 자에 대해서 경계를 하고 있다.(4절) 요한은 예수께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하고 그가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으로 설명한다.(5절)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도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 하셨기 때문이다.(6절) 그러므로 지금 성도들중 죄를 의도적으로 짓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한 자이기 때문이다.(7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타나신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으로 결론 내린다.(8절)

여기서 마귀의 일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물리적으로 사로잡은 것인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 인한 죄인가? 이것은 마귀 자신도 아니고. 마귀가 인간을 사로잡은 것도 아니고, 마귀의 유혹으로 인한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 문제를 위하여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이다.(요일3:4) 원죄를 해결함으로 사단의 유혹에 의한 자범죄에서 벗어날 힘을 주셨으니 죄와 싸우라는 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뒤이어 나오는 요한일서 3장 9절의 지지를 받고, 요한일서 전체와 앞뒤 근접문맥을 볼 때 지지를 받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6-10)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2:12)

1.5 예수께서 마귀를 없이하시며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 주셨다는 의미(히2:14-15)

사단이 인간을 직접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께서 마귀를 없이 하시며,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이 구절은 한글 성경으로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없이 하시므로 마귀에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이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이는 인간이 일생에 매여있는 대상주체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생기는 오해이다. 영어 번역을 읽어보자.

“Since the children have flesh and blood, he too shared in their humanity so that by his death he might destroy him who holds the power of death--that is, the devil-- 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NIV)

여기서 예수는 십자가 죽으심(by his death)의 목적을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destory), 그리고 그 결과 사망의 공포에 노예화(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 되어있는 자들을 놓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좀 더 자세히 해보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한다는 구절은 사단에게 물리적으로 잡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잡혀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글 성경번역을 살펴보자. “또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 하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현대인의 성경)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공동번역) 따라서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순차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십자가 사건은 사망을 거짓 무기로 해서 인간을 지배하던 사단의 권세를 없이하는 사건이었다(14절) 마귀 존재가 없어졌는가 아니면 마귀가 인간을 지배한 거짓 무기인 사망의 세력이 꺾어졌는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간은 사망의 공포가 없어졌다. 사망에 대한 공포심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국 사단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이 마귀가 없이 된 것이다(destory). 이 구절은 마귀의 존재가 파괴되어 지금 흔적도 없음을 이야기 하지 않고 마귀의 권세가 꺾였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이기셨으니 인간이 이제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로인해 사단이 더 이상 인간에게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둘째, 사망의 공포에 잡혀 종노릇 하던 인간을 놓아주셨다.(15절)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했다. 성도들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모두 부활할 것이다. 육체의 썩음과 해체는 잠깐이며 다시 부활한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다. 그때 아담으로 인한 사망의 형벌이 완전히 끝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불완전하지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축복을 누린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망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 형벌은 끝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요5:24) 사단이 인간을 물리적으로 잡고 있다가 예수 부활로 인해 놓아준 것이 아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인간을 잡고 있지 못하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의 본성에 묶여 있는 것이다. 단 인간은 사망을 두려워하기에 사단이 사망의 공포심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두 구절을 연결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해석하면 사망에 관한 내용은 없어지고, 사단이 인간을 잡고 있어 인간이 사단에게 종노릇 한다는 의미로 쉽게 보여진다. 그래서 사단을 꺾으면 인간이 해방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이기셨기에 성도들이 사망의 고통과 공포에서 해방되고 그로인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사단에게서 해방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이 사단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두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사망은 사단의 무기가 되지 못한다. 무기란 자기는 피해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줄 수 있을 때 무기라고 한다. 총이 무기가 되는 것은 총을 쏘는 자신에게는 전혀 피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망은 사단의 무기가 되지 못한다. 사망은 사단 자신이 당하는 형벌이지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 마치 불교식으로 사단이 사망을 손에 들고 사람들을 치면 사람들은 꼼짝없이 죽어 지옥으로 간다든지, 아니면 기독교적 오해로 사단이 사람을 잡고 있어 하나님 자녀되지 못하고 사망의 형벌 속에 묶여 있는 식은 아니다. 사단은 사망을 무기로 갖고 있는 대마왕이 아니라 사망의 형벌받고 있는 인간과 똑같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둘째, 사망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 사망은 사단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때 사망은 사단의 진짜 무기가 아니라 거짓무기이다. 인간이 죽음의 공포에 잡혀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죽음의 공포가 없는 사람에게는 전혀 무기가 되지 못한다.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는 사는 동안 사망의 고통, 죽음 이후에는 사망의 공포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육신의 썩음과 해체가 되어지는 사망의 종착점이다. 사망의 내용이 너무도 처참하다. 자기가 살고 있던 정든 곳을 떠나야하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며, 어둡고 차가운 땅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야 하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혼자 맞이해야 하며, 그 이후에 되어질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따라서 사망 앞에 서면 인간은 두려움으로 떨게 된다. 사단은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사망의 공포심을 이용해서 인간을 속이고 있다.

사단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하는 것은 사망을 가지고 인간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멸망 받을 죄인들의 우두머리요 그 범죄의 첫 시조라는 점에서 사단이 인간에게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이것은 현재 인간이 죄에 오염된 육체를 가진 아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망의 고통과 사망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십자가는 인간을 사망의 형벌에서 자유케 하셨다. 사망의 고통은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사망의 공포는 부활의 능력으로 이기게 하셨다. 따라서 사단은 사망을 가지고 더 이상 인간을 속일 수 없다.

일제시대에서 8.15 해방이 되었지만 산골마을은 광복이 된 줄 아직 모르고 있다, 그곳에 살며 그들을 지배하던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두려워 떤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그들은 아직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때 일본사람들이 도망갈 기회를 엿보며 여전히 이전처럼 한국사람을 협박하고 지배한다. 모르고 그 협박에 당하는 사람만 바보인 것이다. 착한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죄수 Man에게 그 감옥에 오래 갇혀있던 죄수 Satan이 거짓말을 한다. “나를 잘 모시지 못하면 간수에게 말해 벌을 줄거다.” 처음 들어온 죄수 Man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말에 속는다. 죄수 Satan은 죄수 Man을 벌 줄 권세가 없다.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다. 즉 죄수 Man의 무지와 공포심을 가지고 지배할 뿐이다. 죄수 Satan은 희대의 사기꾼이며 감옥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감옥사정을 전혀 모르는 죄수 Man은 그 말을 의심하거나 거부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죄수 Satan의 벌준다는 거짓말은 죄수 Man에게는 큰 두려움이 된다. 즉 벌준다는 말은 죄수 Man에 대한 죄수 Satan의 거짓 무기가 된다. 이것이 사망을 가지고 인간을 공격하는 사단의 모습이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거짓말장이 이다(요8:44)

1.6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을 꺾으려고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단을 꺾으시려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하실 필요가 없었다. 사단 때문이라면 무엇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피조세계에 있는 사단과 그 귀신들을 잡아 지옥에 가두실 수 없는가? 알라딘이 요정 지니를 요술램프 속으로 불러들이듯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전 우주의 모든 범죄한 천사들을 조그마한 호리병 속으로 다 불러들인 후 그것을 불 속으로 집어넣으실 수 없으신가? 얼마든지 있다. 그 정도는 하나님께 아무 일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단과 귀신들을 잡아 모두 벌해도 사단과 함께 반역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이는 사단을 멸한다고 인간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단의 형벌은 피조세계의 심판을 의미하고 인간도 자기 죄로 인해 구원의 기회가 없어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가 인간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이 사단의 나라여서 하나님이 못 들어오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사단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단 형벌이 아니라 인간 구원이었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오직 십자가이어야 함은 인간의 죄 사함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속죄제물로 죽으셔서 백성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는 인간의 구원이 사단 꺾음에 있지 않고 죄 사함 받아야 함에 있기 때문이다.

2. 두 종류의 영적싸움

2.1 불신세계 전도현장에서 사단과의 직접싸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단과의 영적전쟁이었다. 세례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첫 아담은 에덴에서 사단의 유혹에 실패했으나 예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신 것이다. 베드로가 신앙고백후 십자가를 만류할 때 예수는 단호히 자신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사단의 공격을 물리치셨다. 예수의 치유 사역중 25%는 사단과 직접 연관이 있다. 성경이 그들을 직접 귀신들려 질병에 걸린 사람들로 기록하고 예수는 그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질병을 치유하셨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이나, 일곱 귀신 쫓아내신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적이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사역도 귀신과 직접적인 싸움이 있었다. 빌립이 사마리아성에서 전도할 때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갔다.(행8:7) 대표적인 것은 바울의 빌립보 전도시 귀신들려 점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다.(행16:16) 이것 말고도 사도행전은 귀신과 직접적인 싸움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다. 그래서 성경의 이런 부분을 보면 기독교는 귀신만 쫓아내는 종교 같다. 복음의 능력은 귀신 쫓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오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은 서신서에 기록된 영적싸움과 비교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행전 제자들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신다는 의미로, 언약이라는 용어와 함께 복음을 설명하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들로 가득차 있다. 인간은 사단의 범죄에 동참해서 죄인 되었고, 그 죄 때문에 지금 사단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다. 사단이 인간을 잡고 있어서 못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사단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은 사단의 나라이다. 그래서 사단은 세상 임금, 이 세상 신으로 불리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막1:15)이요 구원(막10:52)이다. 복음은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사단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 발악한다. 기독교는 귀신축출하는 단체가 아니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 백성되게 하는 종교이다. 귀신축출은 죄 사함 받는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는 사이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귀신축출은 복음의 목적이 아니고 결과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귀신에게 지정의가 완전히 잡힌 귀신들린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될 때 나타났다. 제자들은 복음 전하러 다녔지 귀신축출하러 다닌 것은 아니다.

예수와 사도들의 귀신축출은 귀신에게 지정의가 장악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행한 사역이었다. 일반인에게 귀신을 쫓아낸 적이 없다. 자연현상 풍랑을 잠잠케 하실 때 귀신 쫓으신 것도 아니다. 죄인이었던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도,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도,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실 때나, 백부장의 종, 야이로의 딸, 혈루증 여인을 고치실 때도 전혀 귀신축출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사단 귀신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혹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토색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을 때 예수는 귀신과 사단에 대한 한 마디 언급 없이 그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다(눅19:1-10)

2.2 성도들의 교회생활에서 사단과의 간접싸움

서신서의 영적싸움은 복음서, 사도행전과 양상이 다르다. 사도행전이 귀신과의 직접적인 싸움인 것에 반해 서신서의 영적싸움은 간접 싸움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행전은 불신자 전도 현장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기록이고, 서신서는 복음을 받고 교회 내로 들어온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귀신들린 자가 아니라 일반 불신자처럼 죄의 본성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랑하고 용서해주는 것이 사단에게 속지 않는 영적싸움이라고 한다.(고후2:10-11)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것이 사단이 틈타지 않도록 하는 영적싸움이라고 한다.(엡4:26-27) 마귀와 싸우기 위해 입는 전신갑주는 십자가 복음 진리에 대한 무장이었다.(엡6:10-12) 베드로도 염려를 주께 다 맡겨버리는 신뢰와 믿음이 우는 사자처럼 덤비는 사단과의 영적싸움으로 말한다.(벧전5:7-8)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에 위치한 아주 유력한 교회였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을 사역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중요한 교회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온 후 고린도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다. 이런 문제에 대한 내용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고린도 전서 후서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큰 문제가 여러 개가 생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교회 내의 성도간의 파당문제(1장), 음란문제(5장), 소송문제(6장), 결혼문제(7장), 우상제물문제(8-10장), 예배때 무질서문제(11장), 은사문제(12-14장)...

이런 문제를 접한 바울의 대답은 분열의 영을 꺾어라, 음란의 영을 꺾어라, 소송의 영, 무질서의 영... 이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복음을 위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서로 용납하고... 라고 말한다. 만약 바울이 영적싸움을 귀신들림과 직접 싸우는 것으로 정의했다면 교회로 보내는 서신서들에 어떤 식으로든 사단과 직접 싸움을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달랐다. 바울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 교회를 부탁하고 목회를 가르칠 때도 사단과의 직접 싸움을 말하지 않는다. 세 가지를 부탁하는데, 십자가 복음 내용을 잘 전달할 것, 공정하게 직분자를 세울 것, 경건함을 유지해서 성도들에게 영적권위를 잃지 말 것이었다. 바울이 제시한 이 세 가지가 사단이 교회를 틈타지 못하게 하는 영적싸움이었다.

서신서의 영적싸움 부분들은 그 앞에 기록된 성도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과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주로 전반부는 십자가 대속과 예수의 주되심을 말하는 복음의 내용을 확인시키고, 그 다음 그 복음을 받은 성도의 실제적인 삶에 관한 부분을 언급한 후, 그 삶의 현장에서 나 자신의 죄의 본성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사단과의 영적싸움임을 일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사단과의 직접 싸움에 대한 구절들로 가득 차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 설명과 그 복음을 가진 성도들의 실제 삶에 관한 부분으로 가득 차있다. 로마서에는 맨 마지막에 “주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라는 단 한구절만 있는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성도의 치열한 성화의 삶이 바로 영적싸움임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사단과의 직접 싸움이 아니고 간접싸움이다.

2.3 톱과 망치의 교훈

사단과의 영적전쟁을 직접싸움과 간접싸움으로 구분해 보았다. 직접싸움이란 사단의 인격을 의식하고, 대면하며 먼저 사단을 대적하고 직접 싸우는 것이다.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축출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간접싸움은 사단의 인격성을 의식하되 사단의 통로가 되는 나의 삶의 불경건함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화와 경건의 삶으로 표현된다. 쉽게 말하면 파리를 막으려 지켜 서있지 말고 파리가 좋아하는 쓰레기더미를 치우는 것과 같다.

사단과의 영적싸움인 귀신축출과 경건의 삶은 두 가지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비 성경적이거나 잘못되지 않았다. 두 가지 모두 성도의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가?

톱과 망치가 언쟁을 벌이고 있다. “망치는 늘 때리고 부수기만 한다.” 듣고 있던 망치가 화가 나서 말했다. “톱은 늘 자르고 분열만 시킨다.” 이때 목수가 나타나서 톱이 잘라준 나무를 가져다 망치를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

성도는 영적싸움의 두 부분을 모두 인정하고 활용해야 한다. 먼저는 개인의 경건의 삶을 먼저 살피고 사단의 틈탈 통로를 제거하는 것이 영적싸움이다. 서신서는 이것을 기록한다. 사단과의 직접 싸움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사단을 대적해도 문을 다 열어놓으면 사단은 들어온다. 죄악된 삶은 사단이 역사하는 통로이다. 그 다음은 사단의 실제성을 인정하고 틈타지 못하도록 조심한다. 이것이 교회내로 들어온 성도의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그러나 불신자 전도현장에서는 강조점이 약간 달라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 떠난 죄인들로 가득차 있고 그중 일부 어떤 사람들은 귀신에 직접 잡혀있다. 그런데 귀신들리거나 그 직전의 상황에 있는 사람의 수가 제법 되고 또는 사단을 섬기고 있거나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무척 많다. 이러 사람을 만나보면 사단과의 직접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는지 알게 될 것이다.(마10:1)

성경에 나타난 불신자 전도현장에서 사단과의 직접싸움과 교회 내 성도들의 간접싸움을 잘 이해하고 개인에게 적용해야 한다. 복음서의 귀신축출을 영적싸움의 전부로 이해해서 교회 내의 신앙생활을 귀신축출에만 집중해서도 안된다. 확신은 넘칠지 모르나 신앙생활이 메말라지고 상대방에게는 비판, 자신은 정죄의식에 잡히게 될 것이다. 서신서의 경건 생활을 영적싸움의 전부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전도 현장에서 힘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두 가지 모두를 활용하되 교회생활은 서신서의 경건의 삶을 중심으로, 전도현장은 사도행전의 귀신축출과 같은 사단과의 직접 싸움을 활용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요약>

죄와 사단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복음의 내용과 신앙의 색깔이 달라진다. 컴파스의 첫 중심축을 어디에 두고 그리느냐에 따라 원이 달라지는 것과 똑같다. 처음에는 두 개의 원이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중심축에서 멀리 가면 갈수록 두 개의 원은 달라진다. 모두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중요한 것이 달라진다. 똑같이 십자가를 붙잡고 오직예수 하는데 뭔가 다르다. 전혀 다르지는 않고 뭔가 다르다.

죄인가? 사단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 죄 사함 때문에 사단의 권세가 꺾였는가? 아니면 십자가는 사단의 권세를 꺾음으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가?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죄인인가? 사단에게 포로로 잡혔는가? 인류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인가? 사단에게 잡혀있기 때문인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 죄와 사단의 관계 중 어디에 강조점과 무게중심을 두었느냐는 질문이다.

물론 죄와 사단을 완전 분리할 수 없다. 죄만 있고 사단은 없고, 사단만 있고 죄는 없고가 아니다. 흑백논리의 이분법적 질문이 아니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질문이다. 죄 사함이라 대답하는 신학에도 사단꺾음이 있고 사단이라 대답하는 신학도 죄 사함을 말한다. 그러나 강조점과 무게중심은 확연히 다르다. 죄 사함을 강조하는 신학은 죄 사함에 무게중심이 있고 그로 인해 사단이 꺾임을 말한다. 사단을 강조하는 신학도 죄 사함을 말하지만 그것은 부요소이고 분명 사단꺾음이 주된 핵심이 된다.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 죄인가? 사단인가? 죄이면 십자가는 죄 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될 것이고 죄책과 오염, 십자가 대속,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와 성화, 죄 사함 받음으로 인한 감사 감격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만약 사단이면 십자가는 죄 사함이 아니라 사단 꺾는 능력이 될 것이고, 부패한 죄의 본성, 죄 사함, 칭의, 성화 등 이런 것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죄 사함 받음으로 인한 눈물의 감격보다는 확신 있다는 고백이 주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2부는 창세기 3장과 로마서 1-2장 중심으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의 죄를 길게 설명해왔다. 이는 막연하게 하나로 설명되는 것을 세밀하게 구분함이다. 이는 사망, 죄, 사단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이해가 3부에서 설명될 기독교 복음인 십자가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죄와 사단의 관계를 명확하게 함이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한다. 이제부터 3부에서는 2천년 기독교가 믿어오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지켜온 십자가 복음을 살펴보겠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고, 로마서에 기록된 복음이다. 이것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따라서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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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영광"에 나오는 모든 글 인용 출처와 각주들이 아래한글 파일을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모두 지워져 버렸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복음은 어느 개인과 교회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초대교회와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입니다. 어거스틴, 칼빈등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지켜온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지금도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을 통해 가르쳐지고 있고, 어릴적 교회 목사님들과 우리 부모님들을 통해 배워온 복음입니다. 이 복음 이외에 다른복음은 없습니다.(갈1:8)

본 내용은 복사방지탭이 걸려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사랑하고, 후대들에게 가르치려는 의도라면, 상업적 의도와 도용,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일만 없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셔서 사용해도 좋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널리 전파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