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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he Lord Presbyterian Church</title>
		<link>https://gospel323.com</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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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2026. 8. 30. 온라인 실시간 예배 - 이기은 목사]]></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5]]></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FJNfQadyyc?si=MB0rwyejBZf2795H"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strong>우리가 주목하는 것 (고후4:7-18)</strong>

예수를 믿었던 삶을 그저 겉으로 비춰졌던 모습으로서만 표현해 본다면 끊임없는 수고와 고생의 연속이었던 삶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부요한것도 아니었고 내가 원했던 일들을 성취했다거나 어떠한 성공의 스토리도 없어 보이는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러한 나를 본다면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것이 없어보이는 사람들 중에 한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strong>그런데 왜 나는 오늘도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주님을 전하고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strong> 문득 이러한 나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받은 은혜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감사하게 하는 것일까?

현실은 늘 부족하고 나의 모습은 세상과 비교해서 늘 나약해 보이는데 무엇이 은혜가 되기에 오늘도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

19세기 공산주의자 칼 막스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종교가 현실의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서 그 아편 같은 종교는 고통을 잊게 해주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환각제라 한 것입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한 말이지만 <strong>노동자들이 현실의 불평등의 문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현실에 순응하고 인내하며 기도하게 하기 때문에</strong> 종교가 지배계급에게는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보면서 했던 말이었지만 혹시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모습도 세상 사람에게는 아편에 심취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strong>혹시 현실의 문제가 나로 하나님을 더욱더 열심히 붙들게 하고 기도하게 하며 예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strong>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strong>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strong>.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질그릇이라 고백하면서 그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는 것으로 증거하였습니다.

<strong>1.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strong>
<ul>
 	<li><strong>보배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strong> 이는 예수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것으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li>
 	<li>그런데 그 보배를 존귀한 그릇에 담아두지 않으시고 보배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담게 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요 구원의 섭리임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li>
 	<li>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li>
 	<li>이는 처음부터 존귀한 자든 질그릇과 같이 무능력해 보이는 자든 상관이 없이 <strong>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분명히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strong></li>
 	<li>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비방하지 아니하고</li>
 	<li>바울은 자신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현실의 수고와 고난을 능히 막아내고 이겨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저 질그릇과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 일뿐이지만 현실 앞에 있는 문제들이 바울 자신의 삶을 불행과 고통으로 이끌고 있지는 아니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고 이는 자신과 성령의 능력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문제가 안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li>
 	<li>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li>
 	<li>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삶을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능동적인 삶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의 고백처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히는 삶으로 증거한 것입니다.</li>
 	<li>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li>
 	<li>바울은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우리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li>
 	<li>이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li>
 	<li>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증거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증거합니다.</li>
</ul>
<ul>
 	<li><strong>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 지도다. </strong></li>
 	<li>바울은 자신의 현실의 삶의 어렵고 힘들며 어쩌면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힘든것이 맞고 또한 수고스러운 것이며 어쩌면 늘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하는 문제들이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현실의 문제들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직면한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낙심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li>
</ul>
<ul>
 	<li><strong>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strong></li>
</ul>
우리가 구원의 서정을 논할 때 칭의, 성화, 영화의 단계로 설명을 합니다. 이때 최종 단계인 영화(glorification)는 부활과 영화의 때에 주님 앞에 서는 순간 모든 신자는 예외 없이 완전하고 흠 없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화의 순간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남아있던 죄성의 남은 찌꺼기 들은 완전히 제거하시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을 덧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거나 주님 앞에 설 때 <strong>우리는 영화를 통해 한 순간에 완전해질 텐데 왜 굳이 성령께서 이 땅에서 힘겹게 우리의 성화를 도우시며 왜 이 땅에서의 성화가 반드시 필요한가?</strong>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화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할 종교적 의무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며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시고 주안에서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strong>2. 그렇다면 성화란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strong>
<ul>
 	<li><strong>성화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관계의 회복 과정입니다. . </strong></li>
 	<li>하나님께서는 레위기서를 통하여 “<strong>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레19:2)</strong>고 말씀하셨습니다.</li>
 	<li>거룩하지 않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영적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으로 이끄시는 이유는 단순한 규칙 준수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과 숨 쉬듯 친밀하게 사귀고 사랑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성화가 깊어질수록 신자는 주님의 임재와 평안, 기도를 통한 살아있는 교제를 깊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li>
</ul>
<ul>
 	<li><strong>성화는 깨어진 원래의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strong></li>
 	<li>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단지 죄의 형벌의 면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strong>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시 빚어내어 창조의 원래 질서를 회복시키고 계십니다.</strong></li>
 	<li>우리가 천국에서 영화의 모습으로 온전히 변화될 때 그 변화는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완전히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li>
 	<li>고린도 전서3장 12-15절은 신자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 각자의 삶과 공적이 불로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때에는 불타 없어지는 것이 있고 영원히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strong>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와 싸워 이긴 성화의 열매들, 복음 때문에 종 된 모습으로 헌신한 사랑과 희생들은 불타지 않고 영원한 상급과 영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strong></li>
 	<li>우리의 죄성은 완전히 소멸되지만 성령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의 끊임없이 나아갔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영적 성장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상급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li>
</ul>
<ul>
 	<li><strong>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됩니다. </strong></li>
 	<li>천국에는 복음을 전해야 할 죄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죄로 인해 타락하고 어두운 이 땅에서만 가능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전도입니다.</li>
 	<li>세상 사람들은 성경이나 교리를 직접 읽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살아있는 책을 읽습니다. 세상이 돈, 권력, 쾌락을 좇아 탐욕스럽게 살아갈 때 절제하고 손해보며 사랑을 베푸는 성화된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strong>‘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 구나’</strong>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빛과 소금이 됩니다.</li>
 	<li>성령께서는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 우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를 오늘도 거룩하게 다듬어 가고 계십니다.</li>
</ul>
이처럼 성화는 숙제가 아니라 생명 있는 자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생명의 호흡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령께서 우리의 성화를 도우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거운 종교적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부모가 갓난 아이를 낳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칭의라고 한다면 성화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걷고, 말을 배우고,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나 부모와 깊은 대화를 나누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과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성숙한 존재로 자라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주를 경험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strong>성화는 이러한 거룩을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입니다</strong>.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방향을 맞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모습으로 비유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는 노를 저어 항해할 수는 없습니다. 잠시는 노를 저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금세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무풍지대를 만나게 되면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성도는 배를 저을 수 있는 노도 없고 힘도 없어 보이지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방향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strong>성화는 점점 더 정확하게 하나님과 방향을 맞추어 가는 과정입니다.</strong> 하나님과 방향을 정확하게 맞출수록 나의 힘은 점점 더 적게 들고 수고도 덜 하게 될 것입니다.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30 Aug 2026 16:59: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8"><![CDATA[교육과 사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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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8. 30.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3.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98"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30 Aug 2026 10:55: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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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2026. 8. 23.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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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3 Aug 2026 16:15: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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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3) - 안식일과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들 (레23:1-14, 골2:16-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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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iJ85WYTeWw?si=Z8P7YmVA45X3TYC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3) - </b><b>안식일과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들 </b><b>(</b><b>레</b><b>23:1-14, </b><b>골</b><b>2:16-17)</b>

<b>1. 구약의 절기 </b>

(1) 하나님 나라 구원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짐

-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개인절기)와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등(국가절기)은 개인과 나라가 의미를 부여한 중요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구약성경의 절기는 다르다. 구약의 절기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구원계시이다. 성경에는 시내산 구원계시가 아닌 유대민족만의 역사기념일도 있다. 부림절과 수전절이다.

-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키리라”(출5:1) 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이 절기를 지키도록 위함이라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 율법 속에 성막규례, 제사제도, 대제사장 역할...그리고 절기지킴을 중요한 종교의식법으로 명하셨다. 오늘은 구약절기에 대해서 살펴본다.

<b>2. 안식일과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들</b>

(1) 구약절기 –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 구원의 전 과정

- 구약절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 구원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걸쳐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광야40년, 가나안 정착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언약 이루심을 기억하고 확인한다.

- 구약의 절기는 출애굽 구원을 기억하는 종교적 절기이다. 날짜로 보면 1월과 7월을 기점으로 거의 정확히 반복되고 봄 추수감사와 가을 추수감사의 의미도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구약절기를 통칭해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수감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며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레23:10) 그러므로 유월절에서 초막절에 이르는 시내산에서 주신 절기들은 통칭해서 구원절기라고 말함이 옳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구원받아 가나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구원의 전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1월(아빕월,니산월, 태양력의 3월경) 출애굽 구원을 기억하는 유대 종교력의 시작이다. 1월 1일 유월절 구원절기를 시작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고, 1월 10일 유월절 양을 선택하여 준비해두고, 1월 14일 유월절 저녁식사(페사흐 세데르)를 준비하고 1월 15일을 시작하는 저녁에 유월절 양을 잡고 저녁식사를 하며 무교절기(일주일)를 지낸다.

- 또한 무교절기 일주일에 있는 안식일 후 첫 날(주일)을 초실절로 지내고, 초실절부터 날짜를 계산해서 50일째 되는 주일을 오순절로 정하고 일주일을 지킨다. 오순절 이후 여름을 보내며 약 4개월 지난 후 가을절기가 정확히 반복된다. 감사하게도 초실절과 오순절은 이스라엘 곡식농사인 보리와 밀 추수와 겹친다. 하나님은 초실절과 오순절에 곡식의 첫이삭을 바치며 구원을 감사하는 절기가 되게 하셨다.

- 7월(태양력의 9-10월)은 이스라엘 민간력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에서 한 해의 시작은 7월부터이다. 7월 1일 나팔을 불며 유대 농사와 민간력의 한 해를 시작한다.(나팔절, 로쉬 하샤나) 7월 10일 대속죄일로 지키고,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초막절기(장막절,수장절)로 지킨다.

-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초막절기 일주일을 마친 후 여덟째 날이다. 이날은 “여덟째 날의 성회” 또는 “여덟째 날의 집회”(쉐미니 아체레트) 이다.(레23:39) 이날은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이 바로 초막절(숙곳, 수꼬트) 일주일을 마친 후 여덟째 날을 뜻한다.

- 우리는 이 여덟째 날(쉐미니 아체레트, 큰 날)을 기억해야 한다. 이 날은 유월절에서 초막절로 끝나는 일 년 구원절기를 마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큰 날이다. 첫창조의 7일을 완성하고 제8일을 시작하는 그리스도 새언약과 새창조의 날이다. 그래서 “큰 날”이다.

- 시내산 구약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교회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죄와 사망,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구원받았다.(유월절,무교절) 무교절기 안식 후 첫날(주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오십일째 성령으로 강림하셨다(초실절,오순절)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강림(재림)하시길 기다리며 지금 성령내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살아간다(나팔절)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제사를 이루시고 성소휘장을 여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피로만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대속죄일) 마지막날 주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심판하사 자기백성을 천국창고 곧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 새에덴에 모으시고 천국잔치를 여신다.(초막절,수장절)

(2) 안식일 –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속량구속을 기억

- 하나님은 일년 동안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며 또한 일주일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강력하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십계명의 넷째 계명으로 주셨고, 심지어 안식일을 고의로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엄히 말씀하셨다.(출31:15,출35:2) 성경에는 안식일에 나무하다 붙잡혀 율법대로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다.(민15:35)

-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음을 기억도록 위함이라 말한다.(출20:11) 신명기는 출애굽 구속을 기억하도록 위함이라 말했다.(신5:11)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바라보게 주셨다. 동일한 의미이다.

-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신5:12-14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억하도록 주신 절기이다. 창조의 안식과 구속의 안식은 동일하다. 회복해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됨(구원)을 기억하고, 회복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첫창조의 하나님 나라 안식을 사람의 죄 때문에 잃어버렸음을 기억하며 창조의 안식일을 지키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구원받아 시내산에서 언약백성이 되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구속으로 다시 하나님 나라 에덴을 회복완성 시켜주심을 바라보며 구속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 이처럼 안식일 하루 속에 구약의 절기가 말하고 있는 구원의 모든 의미가 담겨있다. 유월절에서 초막절까지 한 해 동안 지키는 구원절기의 의미를 일주일 마다 한 번씩 안식일에 기억하고, 또 7년째 안식년과 50년째 희년의 의미도 역시 일주일마다 안식일에 기억한다.

-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노동금지이다. 누구를 불문하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멈추라는 것이다. 물론 안식일 노동금지는 종과 하인, 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쉼을 주며 삶을 보호해 준다. 주인과 부자, 권력자는 직접 일하지 않고 종과 일꾼들에게 노동을 시킨다. 그러나 안식일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날이 아니다. 노동금지는 약자들의 삶을 지켜주는 것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노동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사람은 잠시 죄의 탐욕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안식일을 노동금지의 날로 만들어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으면,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계속 일하고, 또 종에게 일을 시킨다. 종업원이나 가난한 약자들도 생활문제 두려움 때문에 쉬지 못한다. 사형규정을 두고 강제금지 시켜야 죄인의 탐욕과 두려움으로 인한 일(노동)을 멈출 수 있다. 권고사항이면 사람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구속을 기억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마12:8 막2:28 눅6:5) 예수님은 첫창조의 안식을 가지신 여호와셨다.(창조중보자, 창조실행자)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안식일 계명을 주신 분이시다.(계시수여자) 예수님은 안식일이 가리키는 실체이시다.(구속사역으로 안식을 주시는 분) 예수님은 왜곡된 안식일을 바르게 정의해주시는 결정자시다.(계시해석자) 예수님은 옛창조의 안식일을 새창조의 안식일로 바꾸시는 주권자시다.(계시성취자)

(3) 절기와 안식일... 장래일의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음식정결법(레11장) 절기지킴, 안식일 등의 구약율법의 모든 종교의식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들로서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그림자와 모형 되는 구약율법(종교의식법)은 그 역할을 다하고 종결폐기 되었다.

- 신약교회는 더 이상 구약절기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지켜서도 안 된다. 지킨다면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주제이다.

- 금요일저녁 혹은 토요일에 드리는 샤밧예배와 메시아닉쥬를 주장하는 기독교 시오니스트, 현대이스라엘 회복주의자들이 있다. 이는 세대주의 두왕국 두백성 신학에 근거한 잘못된 주장이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교회를 성취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 믿어야 하나님 백성이 된다. 이것이 신약이며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이다.

<b>&lt;</b><b>결론</b><b>&gt;</b><b>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절기를 성취하셨다</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3 Aug 2026 16:14: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8. 16.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1.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93"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6 Aug 2026 16:53: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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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2) - 대속죄일의 거룩, 죄사함과 칭의 (레17:10-16)]]></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0]]></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c-fzmf_KV0?si=u-l0z-R0aKwZm_i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2) - </b><b>대속죄일의 거룩</b><b>, </b><b>죄사함과 칭의 </b><b>(</b><b>레</b><b>17:10-16)</b>

<b>1. 구원은 거룩하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b>

(1)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벧전1: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이스라엘 히브리 성경에서 시작된 복음이 헬라세계로 전파될 때 발생한 오해는 영육이원론이다. 하나님 나라 구원을 죽어 영혼이 천당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의 이유(죄와 사망) 구원의 방법(그리스도 복음) 구원의 결과(하나님 나라 백성됨)를 복음(교리)으로 가르치고 그 다음 이 땅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자세히 가르친다. 영육이원론으로는 신약성경의 서신서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 구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얻는 것이다. 거룩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라 에덴의 창조경륜을 회복완성 함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하시고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됨이다.

- 왜 구원의 목적과 결과는 거룩함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시려면 거룩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거룩한 백성 되는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레위기와 성경 전체는 거룩함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다.

<b>2. 대속죄일의 거룩</b><b>, </b><b>죄사함과 칭의</b>

(1) 대속죄일과 피의 의미 (레16장 - 17장)

- 레위기는 세밀히 나무를 살펴보면 매우 복잡해서 길을 잃기 쉽지만, 전체 숲을 보면 말하는 바가 명확해서 그리 어렵지 않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세우시고 언약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규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책이다.

- 대속죄일 규례(16장)와 피의 의미(17장)가 레위기 전체의 중심이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나라 전체를 거룩케 하는 절기이다. 이는 속죄제사 염소의 피, 지성소와 번제단 정결, 아사셀 염소 추방으로 나라 전체의 죄를 제거하는 세 단계로 구성된다.

- 대속죄일 규례는 구원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송아지로 속죄제사를 드리고 지성소 휘장 안에 분향의 연기를 가득하게 피움으로 시작된다. 분향의 연기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죽지 않도록 가려주는 구름과 같다. 이는 대속죄일 규례를 진행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다.

- 대속죄일의 본론은 두 마리의 숫염소에 있다. 먼저 대제사장은 두 염소 중 선택한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드리고, 그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 덮개인 속죄소(은혜의 보좌) 위에 뿌리고 또한 언약궤 앞에 일곱 번 뿌린다. 이는 백성의 죄로 인해 더렵혀진 지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후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나와 염소의 피를 번제단 네 뿔에 바르고 피는 번제단 아래 쏟는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은 두 번째 숫염소에게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전가하고 광야 먼 곳을 내쫓는다. 대속죄일 규례는 거룩을 위한 세 가지 단계를 보여준다.

- 첫째, 속죄이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사 염소의 피는 속죄를 가져온다. 속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키프르는 “죄를 덮고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다”는 의미이다. 즉 속죄란 하나님께서 염소의 피를 보고 죄인이 이미 저지른 나의 죄책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구약에서 수없이 드려진 희생제물의 피는 죄책형벌로서 죽음을 대신 담당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심이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죽음)을 보고 내 죄를 덮고 가리며 간과하시는 것이다. 이는 짐승의 피가 실제 죄를 제거하는 효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짐승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주신 것이다. 대속죄일 염소의 피는 혹시 남아있을 수도 있는 지난 1년 동안 백성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모두 치루고 이스라엘 진중에는 더 이상 죄가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거룩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인 속죄의 뜻이다. 속죄는 죄책을 면제한다.

- 둘째, 죄책이 제거되었다고 거룩해짐은 아니다. 죄로 더러워진 것을 깨끗케 해야 한다. 정결함이다. 염소의 피는 죄로 더러워진 부정과 불결을 정결케 한다.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로 드린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속죄소 위에 뿌리고, 다시 지성소에서 나와 분향단 네 뿔에 바르고, 번제단 네 뿔에 바른다. 이는 죄로 더럽혀진(부정, 불결) 지성소와 분향단 번제단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말한다. 죄로 더러워진 기물은 피를 뿌리거나, 발라서 정결케 된다.

-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물론 어떠한 짐승의 피도 사람의 죄를 속하지도(죄책제거), 부정한 것을 정결케도 못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 그렇게 예표로 정해주신 것일 뿐이다.

- 셋째, 죄를 제거함이다. 대제사장이 두 번째 수염소(아사셀)에게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모두 전가한 후 광야 먼 곳으로 내쫓는 것은 이스라엘 진중의 죄를 완전히 제거함이다. 광야로 내쫓긴 아사셀 염소가 다시 집을 찾아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죄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므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사셀 염소는 결코 진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광야 무인지경 먼 곳으로 내쫓는다. 아사셀 염소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는 것은 성경이 아닌 유대교 전승 미쉬나의 기록이다. 물론 아사셀 수염소는 곧 다른 짐승에 의해 죽었을 것이지만 성경은 돌아올 수 없는 광야 먼 곳으로 내 쫓았다 라고만 기록한다.(레16:21-22) 아사셀 수염소는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나가신 그리스도에게 성취되었다.

- 이로서 대속죄일(욤키프르) 대제사장이 하는 일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거룩함을 세우는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속죄, 정결, 죄를 제거함이다.

(2) 정결법(=더러움과 접촉을 피함, 레11-15장), 성결법(=죄를 제거, 레18-20장)

- 레위기 11장부터 20장까지는 거룩을 이루는 방법으로 속죄, 정결, 성결(죄를 제거함)에 대해서 보여준다. 먼저 정결과 성결의 차이를 잠간 살펴보면 정결은 내가 부정한 것과 접촉하므로 부정(불결) 더럽혀진 경우에 해당한다. 성결은 내가 죄를 행함으로 나와 공동체와 땅을 부정(불결) 더럽혀진 경우에 해당한다. 죄는 인격존재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이다. 자연재해, 질병... 은 분명 악이나 죄는 아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악이다. 성결은 사람의 죄로 인한 부정함은 제거하라는 것이고, 정결은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용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사용하면 혼동되지 않는다.

- 첫째, 레위기 11장부터 15장까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 위하여 더러움과의 접촉을 피하고 정결법이다. 음식 정결법(11장) 산후 정결법(12장), 나병과 피부병, 의복과 가죽에 핀 곰팡이의 정결여부 판별과 정결법(13장-14장) 남녀 유출병 정결법(15장)이다.

- 레위기의 각종 정결법을 보면 하나님은 너무 세밀하고 엄격하게 요구하신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특히 음식 정결법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일일이 규정해주시는 것, 비늘 없는 물고기와 토끼, 돼지 같은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나, 산후 정결법 등을 보면 이런 것들이 거룩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이런 율법들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알려주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초보적으로 주신 것들이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초등선생님이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들이다. 유치하지만 초등학생 때 기초로 배워야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선생, 초등학문이다.

- 이런 구약 정결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가 거룩해져야 함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추상적 아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먹는 것과 접촉하는 것들 중 조금이라도 부정하고 불결하며 더러운 것이 있어는 안 된다. 우리의 부정(불결)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실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레위기 18장부터 20장까지는 사람이 저지르는 죄에서 거룩케 되는 성결법이다. 내가 죄를 행함으로 자신과 공동체와 땅을 부정(불결)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내게서 죄를 제거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행장(18장, 가나안 음행 금지), 언약백성의 성결한 삶(19장, 십계명과 생활규범, 레위기의 성결법전) 성결을 범한 자 형벌(20장, 몰렉제사, 우상숭배자, 신접한 자, 음행자... 반드시 죽이라) 이다.

- 원죄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아담의 후손, 아담들)가 범죄했으므로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함께 사망형벌에 처했고(죄책)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죄인으로 태어남을 말한다.(오염) 자범죄는 죄로 오염된 사람이 죄의 본성으로 살아가며 자기 생각과 의지적 행동으로 저지르는 모든 행위들이다.

- 거룩은 나를 더럽히는 외부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정결), 또 내가 저지르고 있는 더러운 죄의 행위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마치 아사셀 염소를 광야 먼 곳으로 내쫓듯, 나와 공동체 속에 있는 부정한 것들과 내 속의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기 위함이다.

- 유독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범죄가 있다. 우상숭배와 음행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하나님과 결혼관계로 비유되는 언약백성의 타락을 지적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남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남편(우상)과 행음하고 있는 음녀라는 것이다. 이 두 범죄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의 자기중심성을 충족시켜주는 결과들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경외함 대신 자기를 섬겨줄 하나님(우상)을 만들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자신의 성적 탐욕을 채워줄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죄사함)와 부활(성령강림, 칭의)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는다.

- 히10:4,10,1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성막제사와 대제사장 규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사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거룩함을 얻고 온전하게 되었다. 매년 대속죄일(욤키프르)에 거룩함을 위한 속죄, 더러움 제거(정결), 죄의 제거(성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 얻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더 명확하게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 십자가는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셨다.

- 첫째, 십자가 죄사함이다. 속죄이다. 형벌면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아담 안에서 범죄했던 나의 죄책을 담당하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사망형벌은 다 지불된 것이다. 더 이상 아담의 원죄로 정죄함이 없다. 이것이 히브리어 키프르 죄를 덮어 가리다는 뜻의 속죄이다. 죄사함이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속죄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마지막 심판 날 우리를 죄 없다 형벌 없다고 선포함이다. 결국 내가 지을 미래의 죄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죄 없다하심을 얻는다는 필연적 결론에 이른다. 이는 신학적으로 옳고 100%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하심은 정확히 이해돼고 사용돼야 한다. 오해하면 구원파 무율법주의 이단으로 빠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인인 우리에게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심은 미래에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용이 아니다.

- 둘째, 부활하심으로 성령을 보내주셨다. 십자가 죄사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내주,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주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날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인하고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죄를 이기고 거룩해질 수 있다.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으며 죄를 제거함으로 성결함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죄사함과 성령내주로 거룩함을 얻는다.

죄사함과 성령강림은 우리 구원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두가지 요소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말함이다. 죄사함을 강조하되 성령강림까지 포함시켜야 하며, 성령충만을 강조하되 죄사함을 약화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복음의 능력이다.

<b>&lt;</b><b>결론</b><b>&gt;</b><b>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b><b>(</b><b>칭의</b><b>) </b><b>거룩해지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동행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자</b><b>.</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6 Aug 2026 16:5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8. 2.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7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89"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2 Aug 2026 16:14: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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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1) - 예수 그리스도, 우리 대제사장 (레8:1-35)]]></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77]]></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o1RpkA9Mb5Y?si=t9MRGoTOAeuYmkVR"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

</strong><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1) - </b><b>예수 그리스도</b><b>, </b><b>우리 대제사장 </b><b>(</b><b>레</b><b>8:1-35)</b>

<b>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b>

(1) 성막구조(출35-40장)와 희생제사(레1-7장)

- 출애굽 이스라엘은 시내산 광야에 머물러 1년을 보낸다. 하나님은 그곳 시내산에서 강림하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을 향한 하나님 나라 계시를 주셨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과 성막규례들이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구원하신 후 그들에게 이방죄인들 특히 가나안 일곱 족속들과 구별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신 여러 규례들을 자세히 말씀해주신 것이다.

- 특히 성막구조와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 성막은 지성소와 내성소로 구별해 각각 언약궤와 분향단 떡상 등잔대를 두고, 성소 밖인 성막뜰에 번제단과 물두멍을 두는 이중구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제사장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 정결예식을 하고 번제단에서 속죄제사를 드린 후 내성소로 들어가 무교병을 진설하고 등잔대 불을 밝히고, 성소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 언약궤 앞에서 분향하는 것이다.

- 이러한 성막구조와 예배방식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예수 그리스도 계시였다. 아담의 죄로 타락한 죄인이 죄용서 받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은 이 계시를 모든 인류에게 전달하도록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다.

- 참고로 구약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난 새언약 백성 신약교회(=그리스도인들)의 조상이다.(고전10:1, 갈6:16) 지금 이란과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은 유대민족 세속국가일 뿐 선지자들이 예언한 새언약의 성령을 받은 이스라엘 회복이 아니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성막의 구원계시는 성막구조물, 희생제사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오늘은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다.

<b>2. 예수 그리스도 우리 대제사장</b>

(1)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보자이다.

- 구원계시로 보면 대제사장의 직무는 성막에서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집례 하는 종교인들의 대표가 아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대표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 성막계시를 위해 세우신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예표하는 특별한 직분자이다. 대제사장의 중보사역으로 제사가 드려지듯, 예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성막과 희생제사,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구원계시이다. 이는 절대로 변형하거나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은 다른 불로 분향하던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셨다.(레10장)

-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을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 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 구원계시를 아버지로부터 정확히 받았고 그대로 믿었기에 양을 드린 것이다. 믿음 없이 양만 드린다면 하나님은 기름타는 냄새가 역겹다고 하신다. 믿음 가지고 다른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는가? 그럴 수가 없다. 아담이 전해준 여자의 후손 구원계시를 믿는다면 양의 첫새끼로 희생제사를 드려야한다. 다른제물을 드리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 성막규례와 제사는 하나님 구원계시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변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왕처럼 대접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드리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번제단의 거룩한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진노하심을 받고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계시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양의 첫새끼를 드린 아벨의 희생제사처럼 속죄의 피로 거룩해진 번제단의 불이 아니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 솔로몬 이후 다윗왕국이 분열될 때, 여로보암은 10지파로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그는 분명 선지자로부터 북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나라를 세운 후 우상숭배를 시작한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고, 임의로 절기를 정하며,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이다. 아론의 금송아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성경기자들은 이것을 여로보암의 죄라고 했다.

- 벧엘의 금송아지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나라 구원언약을 주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벧엘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중보자가 될 수 없다. 모양만 흉내 낸 거짓복음 거짓종교 거짓교회인 것이다.

- 하나님은 유다의 한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 벧엘산당이 요시야에 의해 파괴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 예언은 약 300년 후에 정확히 성취된다.(BC622) 북이스라엘은 요시야가 오기 100년 전에 멸망했다.(BC722) 무지막지한 예후는 바알산당을 변소로 만들어 더럽혔지만, 점잖은 요시야는 사람의 뼈(시체)를 불태워 벧엘을 부정케 했다. "다윗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이 날 것이라.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왕상13:2)

(2) 속죄의 피로 정결케 하고 관유(기름)를 부어 성별하고 대제사장을 위임하다.

- 대제사장은 성막구원계시의 필수직분이기에, 모세는 성막 제사장의 임직 및 위임예식을 거행한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물로 씻어 정결케 한 후 속옷을 입힌다.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겉옷을 입히고 제사장 에봇을 입히며 띠를 띄운다. 아론의 아들들에게는 속옷 위에 띠를 띠게 하고 제사장의 관(모자)를 씌운다.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금패가 붙은 거룩한 관(모자)을 씌우고, 우림과 둠빔을 넣은 열 두 보석 흉배를 에봇 위에 붙인다.

-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수종할 때 흰 예복을 입고 띠를 띠고 제사장 모자(관)를 쓴다. 대제사장은 제사장 예복 위에 에봇을 입고 흉배를 붙이고 대제사장 모자를 쓴다. 이는 일반인과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이며 특히 짐승의 피를 다룰 때 흰옷은 쉽게 피로 물든다. 그들이 성막에서 수종들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중보자로서 사역함을 분명히 구분시키는 것이다.

- 위임예식은 제사장에게 피를 바르고 관유를 붓는 것이다. 모세는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사를 드리며 위임예식을 시작한다. 모세는 수송아지를 잡고 피를 받아 제단 네 뿔에 발라 거룩케 한 후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쏟아 붓는다. 또한 모세는 숫양을 잡고 역시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단 사면에 뿌린다. 제사장의 의복에도 관유와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한다.

- 모든 희생제사는 짐승의 피로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기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속죄제사는 특별한 의식이 있다. 속죄제사만 유일하게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른다. 이러한 속죄제사의 피는 대속죄일에 내성소의 분향단의 뿔, 지성소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까지 뿌려 성막 전체를 정결케 한다. 제사장들의 몸에 피를 바르는 위임예식이나(레8장) 시내산에서 백성의 대표들에게 피를 뿌린 언약체결예식(출24장) 역시 피로 죄를 씻는 속죄제사를 기초로 해서 거룩한 구별하는 것이다.

- 참고로, 속죄제사와 속건제사는 모두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이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속죄제는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제사이며,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속죄와 함께 배상 하는 제사이다. 따라서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중복하지 않고, 죄의 성격에 따라 둘 중 하나만 드려진다. 속건제사를 제2의 속죄제사 또는 배상적 속죄제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 왜 성경은 피로 죄를 씻는다고 강조하는가? 어떻게 짐승의 피가 죄를 씻어 죄인을 정결케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 말씀하셨고(레17:11) 히브리서는 모든 기물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말씀했다.(히9:22) 피가 죄를 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언약체결예식이나 제사장 위임예식 때 사람에게까지 피를 바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 피를 발라 죄를 씻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도로 계시해 주신 속죄방법이다. 사람이 만든 속죄방식이라면 많은 돈을 내거나 그 종교집단에 유익을 주는 다른 것을 바치게 할지언정, 짐승의 피로 죄를 씻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 피로 죄를 씻는 방법은 그 종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흘림의 속죄제사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계시임이 분명하다.

- 피로 죄를 씻음은 희생제물이 내 대신 죽음으로 내 죄의 형벌이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내가 받아야할 죽음을 희생제물이 내 대신 담당했으므로 내가 받을 죄의 형벌이 없어졌기에 내 죄가 씻겨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계시하는 것이다. 죄로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죄값이 지불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피로 내 죄가 씻겨졌다는 의미이다. 형벌면제이다.

- 짐승의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할 뿐 아무런 능력이 없다. 짐승이 피로 제사를 드리면 죄용서 받아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제거되나 죄의 권세는 이기지 못한다. 짐승제사로는 죄인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아무리 희생제사를 드려도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죄인은 계속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고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마다 염소와 송아지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가야 한다.

- 대제사장 위임예식은 희생제사의 피와 거룩한 기름이 필요하다. 속죄제사의 피를 발라(레8:23) 죄를 씻어 정결케 하고, 관유를 부어(레8:12, 출30:26-30) 성령으로 거룩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 모두에게 원리적으로 일치한다. 비록 제사장의 피와 기름부음은 왕(이미 피를 부은 언약백성이기에 기름만)과 선지자(기름 혹은 직접 성령임재)에게 의식적으로는 동일하지 않지만, 신학적 원리로는 동일하다. 모든 직분은 속죄를 전제로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구별되고,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위임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사 죄형벌을 없애주시고, 부활승천 하사 하늘보좌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어주셨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로 얻게 된 죄사함과 칭의의 구원이다. 이것이 기록한 것이 바울의 로마서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속죄일(욤키프르)에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온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는 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사역이 있어야만 이스라엘은 거룩해지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게 되기 때문이며, 그 일은 오직 대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록한 신약성경이 히브리서이다.

-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심을 증거 하는 책이다. 예수님은 천사보다(1-2장) 모세보다(3장) 여호수아보다(4장) 뛰어난 대제사장이시다.(1-4장) 예수님은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5-7장) 이후 세 장이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본론이다.

- 예수님은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8-10장)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8장) 더 좋은 성소(9장) 더 좋은 피(9장) 더 좋은 제사(10장)를 드리시는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8-10장) 마지막 세 장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삶이다.(11-13장) 믿음(11장) 인내(12장) 거룩한 삶(13장)이다.

- 첫째, 대제사장 예수님은 새언약의 중보자시다.(8장)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을 통해 새언약을 말씀하심은 옛언약이 흠이 있어 낡고 쇠하며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언약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언약을 위하여, 새언약이 올 때까지, 새언약을 기다리며 바라보라고 주신 것이다.

- 히8:8-12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둘째,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땅의 성소보다 더 좋은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9장) 땅의 성소는 하늘성소의 그림자요 모형과 예표이다. 옛언약 성소에는 매년 속죄일마다 대제사장이 들어가야 했다. 백성의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언약 성소는 온전한 장막의 하늘성소 대제사장이 올 때까지 잠시 맡겨둔 것이다.

- 히9: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셋째, 예수님은 더 좋은 예물을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이시다.(9장) 옛언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언약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히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넷째, 예수님은 짐승제사보다 더 좋은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셨다. 매년 드리는 짐승제사는 백성의 죄를 없애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케 하시며(10:10) 온전케 하셨다(10:14.) 이로서 염소와 황소로 드리는 옛언약의 모든 제사는 영원히 종결되었다.

- 히10:10,14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 히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b>&lt;</b><b>결론</b><b>&gt;</b><b>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2 Aug 2026 16:13: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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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7. 26.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7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002-3.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82"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6 Jul 2026 16:22: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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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7. 26. 온라인 실시간 예배 - 이기은 목사]]></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7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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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strong>아담이 세번째 나은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다 (창4:25 – 5:8)</strong>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일반적으로 자녀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담아 이름을 짓습니다. 어쩌면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인물의 이름을 보면 이에 더해서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의 신앙과 배경이 그대로 담겨 있음도 보게 됩니다.

아담이 세번째 아들의 이름으로 지은 <strong>“셋”</strong>이라는 이름의 뜻은 “대신 주시다, 정해지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으면서 <strong><em>“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씨를 주셨다</em></strong>”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셋의 이름속에는 셋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아담과 가인, 아벨의 사건과 영적 배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새롭게 시작하기위해서 지난날의 상처를 다 지워버리거나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번째 낳은 아들에게 이전에 있었던 가정의 상처들을 그 이름 안에 모두 담아 아들이 절대 잊지 않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담이 두 아들을 잃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번째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고 지은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담이 셋을 낳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그 배경으로 알아야 합니다.

<b>1. “</b><b>셋</b><b>”</b><b>이라는 이름의 뜻은 </b><b>“</b><b>대신 주시다</b><b>, </b><b>정해지다</b><b>”</b><b>는 뜻입니다</b><b>.</b>

아담이 에덴을 떠나서 낳게 된 첫 아들의 이름은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strong>얻음, 소유</strong>” 라는 뜻입니다. 이는 첫 아들을 해산의 고통속에 낳았던 하와가 “<strong><em>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em></strong>”라고 하면서 기쁨과 기대감으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실패를 딛고 새롭게 회복할 메시야 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두번째 낳게 된 아들의 이름은 아벨이라 지었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strong>“숨, 입김, 안개, 허무</strong>”라는 뜻이었기에 가인의 이름과는 정 반대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전도서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헛되다는 뜻과 동일한 단어”<strong>헤벨</strong>”입니다.

<strong>그렇다면 가인을 낳은 후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 즉 허무라고 지은 것일까요?</strong>

아담이 가인을 낳을 때에는 아직 하나님을 떠난 땅에서의 삶의 수고와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다시 얻어내기만 한다면 잃어버린 에덴을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낙관주의가 가인의 이름을 짓게 된 배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가인을 낳고 땅의 수고를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아무리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땅을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코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깊은 좌절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비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strong><em>“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찌니라”</em></strong>는 말씀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삶이 한낱 사라지는 입김(헤벨)에 불과 하다는 탄식과 더불어 겸손한 자각이 담기게 된 이름이 바로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벨의 이름은 단지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는 절망적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의 이름안에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살수 없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밀인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생기를 다시 얻어야 함을 잊지 않도록 지어준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고로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의 결론도 이와 같았습니다. “<strong><em>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12:13)</em></strong>

<b>2. 아벨의 죽음 </b><b>- </b><b>가인의 곡식제사와 아벨의 희생제사</b>

아담은 처음부터 아벨에게 농사일을 맡기지 않고 양을 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삶을 위해 수고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좀더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러한 아버지의 결정이 그리 탐탁치 않았습니다. 아벨이 감당하는 목축은 척박한 땅을 일구며 농사해야 살 수 있었던 환경에서는 생존에 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보자면 땅을 일구어야 하는 고된 노동의 환경에서는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데 가인의 눈에 비친 아벨의 모습은 그저 시원한 나무 그들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은 이러한 불만을 마음으로 품고 있다가 드디어 스스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독립하게 되었을 때 그동안 자신이 원했던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방식은 양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농사와 목축으로 일손을 분산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여 얻은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진심을 다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다 좋은 결정이라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라 여겼던 자신의 제사는 첫번째 제사에서 하나님의 거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있어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고 자신의 진심을 거절한 것에 대한 아주 심한 분노가 일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하나님을 향한 분노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하나님이 인정하여 주셨던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게 되었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 다시 세번째 아들을 주셨을 때 그 이름을 아벨을 대신한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셋이라 지었습니다. 이는 셋은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아벨이라는 의미였습니다.

<b>3. 셋은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아벨이라는 의미였습니다</b><b>. </b>

자신이 아벨의 이름을 지으면서 했던 그 신앙의 고백이 죄로 인하여 그렇게 무너져 버린 가인을 바라보면서 더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고 역시 인간의 모습은 아벨과 같음을 다시한번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은 105살이 되었을 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strong>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strong>”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아벨이라는 이름과 다르지 않은 의미를 지녔지만 그보다 더더욱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히 깨달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셋이 100년이 넘게 살면서 겪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 아담이 왜 자신의 이름을 셋이라 지었는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창 5:3 ”아담은 백 삼십세에 <strong><em>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em></strong>”

셋은 자신의 모습이 아버지에게 유전된 죄로 부패한 모습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아들에게 영적 대물림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고백하는 이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닫게 된 영적 배경이 드디어 아담의 후손의 공동체의 영적 배경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드디어 셋으로부터 이어졌던 아담의 공동체는 비로서 여호와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는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strong><em>“</em></strong><strong><em>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렇더라”</em></strong>

돌이켜 보면 아담의 가정이 예배 공동체 되기 까지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잃고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이룰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셋이라는 이름을 짓고 새로운 시작을 했다는 것은 지나온 과거를 부정하거나 숨긴 것이 아니라 죄로 부패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한 모습에서 출발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아담의 기도는 그 아들 셋과 함께 100년이 넘는 기간을 하나님과 함께 예배하며 은혜를 구했을 때 마침내 온 가족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strong>우리의 자녀의 이름안에 셋이라는 의미의 영적 배경이 심겨져서 그 셋을 통하여 그 다음 세대에는 하나님을 향한 에노스의 고백의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도합니다. </strong>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6 Jul 2026 15:52: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8"><![CDATA[교육과 사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7. 19.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7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002-2.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79"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9 Jul 2026 18:55: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오경(30)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레1:1-9)]]></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73]]></link>
			<description><![CDATA[<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wYkLVpxNMFI?si=XCkJfWL0Zkj-8dGE"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span style="width:0px;line-height:0;" class="mce_SELRES_start">﻿</spa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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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오경</b><b>(30) - </b><b>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b><b>(</b><b>레</b><b>1:1-9)</b>

<b>1. 성막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함</b>

(1) 금송아지 사건 – 율법(십계명)과 성막을 주신 이유

-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성막을 주신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은 애굽에서 속량구속 되어 나왔지만 여전히 애굽의 관습과 종교에 젖어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열 가지 기적과 유월절, 홍해를 건넌 지 불과 50일 밖에 안됐다. 그런데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기들 수준으로 하나님을 만들고 믿는다.

-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구원의 길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도 없다. 그들이 가진 종교심은 죄의 욕구를 투사하는 우상을 만든다. 자기의, 자기소견, 자기주인됨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사람이 만든 모든 종교는 예배 형태와 구원 방법 등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사람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도달하려 함이고, 그 위에 소원성취라는 달콤한 매력이 가미된다. 거기에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제사장 희생제물 절기를 구원의 길로 주신 이유다.

<b>2.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b><b>예배</b>

(1) 구약제사의 기본은 희생제사이며 그 의미는 속죄이다.

-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하나님께 예배(제사) 드리는 법이다.(1-10장) 하나님은 제사를 명하셨다. 백성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오고 삶에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하게 살아간다. 예배 중심의 삶이다.(1-7장). (대)제사장(8-10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적 제사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예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셔야 한다.

- 둘째,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법이다.(11-27장)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거룩함이 없다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 피조물 개인에게 거룩함은 부정결한 더러운 환경에서 벗어나는 정결법(11-15장)과 내면적 더러운 죄에서 벗어나는 성결법(18-20장)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거룩히 드리는 헌신법(21-27장)으로 유지한다.

- 레위기의 중심은 16장과 17장이다. 그것은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와 그 속죄제사에서 뿌려지는 피의 의미다. 피흘림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거룩을 유지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 히브리서는 레위기 17장 11절을 인용하며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말한다.

- 봉헌자가 직접 짐승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하고 죽인다. 성막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들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봉헌자가 안수한 후 직접 짐승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죄의 결과인 죽음의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봉헌자는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과 자기 대신 죽은 대속제물의 의미를 깊이 체험하게 된다.

-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단에 뿌리고 제물을 태운다. 희생제물은 봉헌자가 죽이지만, 제사장은 봉헌자가 죽인 짐승의 피를 받아 제사예식에 따라 번제단 사면에 피를 뿌리고 제물을 제단에 태운다. 제사의 핵심은 피뿌림에 있으며, 이 피뿌림은 제사장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피뿌림에 의해서만 속죄가 이루어진다. 중요한 점은, (대)제사장은 죄인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보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함이다.

- 하나 더, 로마카톨릭에서 미사(예배)는 레위기 희생제사의 연속이고 사제는 레위기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한다. 그러므로 사제의 중요한 역할은 제단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나타내는 성체성사를 집례 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성체성사가 십자가 희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현재화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카톨릭 예배의 중심은 전례와 성찬례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제가 집례 하는 성찬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체성사를 집례 후 그 의미를 해설하는 요소일 뿐이다.

- 개혁교회는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과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희생으로 레위기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는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제사장도, 새로운 희생제사도 필요치 않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라 말씀과 성례를 맡은 교회의 공적 사역자이다. 이미 완성된 십자가 희생을 말씀을 통해 선포하고 성례(세례와 성찬)를 통해 그 은혜를 교회에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개혁교회는 말씀강론(설교)이 예배의 중심적인 은혜의 방편이다. 목사는 새로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말씀으로 선포하는 사역자이다. 이것이 개혁교회가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는 이유이다.

(2) 구약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완성되었다.

- 번제는 제물의 모든 것을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번제는 제물의 모든 것을 태워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듯이 봉헌자가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까지 온전히 드림을 나타내는 헌신의 제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번제물로 드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 속죄제는 하나님께 죄용서를 받기 위해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이다. 그 특징은 피뿌림의 방식이 다른 희생제사처럼 단사면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향단 뿔에 바르고 성소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거나(제사장, 회중), 번제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밑에 쏟는 것에(족장, 평민) 있다.

-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 첫째, (속죄제) 예배는 죄용서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이다. 하나님은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용서 받은 자들의 예배를 받으신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 둘째, (속건제) 죄용서를 구함은 하나님께 대함만이 아니다. 이웃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 그에게 손해 입힌 것의 1/5을 더하여 120%를 갚는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고 거룩해진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이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 셋째, (번제) 예배는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삶을 성령을 따라 죄를 이기며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 넷째, (소제) 예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헌신만이 아니라,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모든 소산물과 소유까지도 구체적으로 함께 드린다. 헌금은 은혜주신대로 최선을 다해 감사함으로 드리되 마음에 부담이 되는 정도가 되면 안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 다섯째, (화목제)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케 될 뿐 아니라 이웃과의 화목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우리와 이웃 사이에 막혀있던 모든 담을 제거하신 화목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은 예배 전 먼저 이웃과 화해하라고 하신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b>&lt;</b><b>결론</b><b>&gt;</b><b>그리스도 안에서</b><b>, </b><b>그리스도와 함께</b><b>, </b><b>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b><b>.</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9 Jul 2026 18:54: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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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7. 12.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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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002-1.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76"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6:12: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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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29) -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다 (출40:34-3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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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adaNfXMmiI?si=nGEQbiF-ol7LuMP8"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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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29) - </b><b>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다 </b><b>(</b><b>출</b><b>40:34-38)</b>

<b>1. 새언약을 예표하는 십계명</b>

(1) 구약 이스라엘의 역할

- 구약 이스라엘은 아담의 죄로 오염된 죄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구속경륜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회복하도록 예표적으로 세우신 하나님 백성의 모델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구약 이스라엘의 탄생은 출애굽 구원과 시내산 언약체결로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인류들을 향한 구원계시를 주셨다. 율법과 성막/성전을 주시며 하나님 나라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계시하셨다.

- 율법은 하나님 백성이 행해야할 의(옳고 맞고 바른 것)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율법은 에덴에서 잃어버린 의로움을 제시하며 구원받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준다.

- 하나님은 십계명을 친히 두 돌판에 새겨서 모세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성막 지성소에 그 십계명 돌판을 두시고 언약궤라 부르셨다. 아담의 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고 상실한 죄인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내면적 성품을 하라 하지말라는 열 개의 계명의 형태로 말씀해주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새언약의 성령을 부어주셨다. 구약 이스라엘은 구속사적인 역할을 다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의 하나님 나라 신약교회가 출범했다.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신약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도는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 율법은 윤리도덕법, 국가사회법, 종교의식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영원히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십계명(윤리도덕법)이 바로 그것이다. 십계명은 죄인들에게 하나님 형상을 요구하는 율법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둘째아담 이전에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에게 십계명(윤리도덕법)은 영원히 유효하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마5:17) 예수님 믿고 성령 받으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게 된다.

- 국가사회법(시민법)은 십계명을 BC 15세기 출애굽 신정국가에 적용한 율법으로 오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노비해방법, 토지보존법, 동형보복법 등의 율법은 이웃사랑의 정신만 남고 종결폐지 되었다. 종교의식법은 십계명을 지키며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려다 죄를 짓게 될 때 죄용서 받도록 하신 율법이다. 율법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성령강림)으로 죄인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 신약교회가 탄생되었으므로 종교의식법은 그 역할을 다하고 종결폐지 되었다.

<b>2.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다</b><b>.</b>

(1) 성막을 주신 이유

- 출애굽기 열세 장에 걸쳐 모세가 받은 성막의 식양과 성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계시 받은 내용을 기록하고(25-31장) 모세가 그대로 만들었다고 기록을 중복한 것은(35-40장) 그만큼 성막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성막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신 그대로 만들었다. 사람의 어떠한 조언이나 도움도 개입될 수 없다.

- 이스라엘은 정월(아빕월) 15일 고센을 떠나 출애굽하고 오순절에 시내산에 도착한 후 율법을 받고 하나님 백성으로 언약체결예식을 했다. 이스라엘은 계속 시내광야에 머물러 있었고 모세는 그들에게 율법과 성막규례를 가르치며 1년을 보낸다. 금송아지 사건은 바로 그 시내광야에 머물 때 벌어진 일이다.

-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지 1년이 되었다. 그동안 성막의 구조물과 성막에서 사용될 기물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자 하나님은 성막을 세우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대로 준행한다. 드디어 출애굽 한 다음해 정월 1일에 성막이 세워진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다.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도록 구름기둥 불기둥이 성막 지성소 위에 항상 있었다.

-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증표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는 개인적으로 함께해 주셨지만 이제부터는 구약 이스라엘을 하나님 언약백성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 증표가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성막을 세우시고 그곳에 거하시는 것이다.

- 한마디로, 구약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성막 지성소에 임재하셨고, 백성은 성막을 중심으로 사면에 진을 치고 거주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중앙에 있었다. 열두 지파들은 성막을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에 각각 세 지파씩 위치했다. 그리고 백성의 이동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성막을 앞세우고 따라갔다.

- 성막과 성전이 완공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히 임했다.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심이 무엇인지 실제로 보여주시는 구약 하나님 나라 구원계시의 정점이었다. 성막은 백성들의 삶 중심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었다.

(2)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시고 성막/성전은 폐하여 졌다.

-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착 후 성막은 약 300년을 실로에 세워져 있었다. 실로의 성막은 엘리의 불량한 두 아들 제사장에 의해 큰 변화를 맞는다. 두 아들은 블레셋과 벌어진 아벡전투에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왔고 블레셋에 빼앗긴 것이다.

- 언약궤를 빼앗긴 이후 실로는 블레셋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훗날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파괴의 모델로 사용된다.(렘7:12, 렘26:6) 언약궤와 성막은 분리되어 약 100년 동안 다른 곳에 거하게 된다.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서 약 70년을 거한 후 최종 예루살렘 다윗의 장막에 거하고, 모세의 성막은 놉 땅의 제사장들에게로 갔다가 기브온 산당으로 옮겨진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하나님의 성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고"(대상21:29) 또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는데 거기에는 모세가 만든 회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하 1:3-6)

- 언약궤와 성막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데, 왜 하나님은 약 100년 동안 이중성소가 되도록 하셨을까?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에 거하셨고, 또 기브온 산당에 있는 성막제사도 받으셨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언약궤가 없는 기브온 성막에서 일천번제 드리는 것을 받아주셨다. 기브온 산당의 성막과 예루살렘 다윗의 장막의 이중성소는 시온산 예루살렘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로 발전하는 구속사의 전환기이며 과도기적 사건이다.

- 약 100년간 떨어져 있던 성막과 언약궤는 다윗에 소원대로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에서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이 완공되고 언약궤가 안치될 때 다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이로서 시내산 성막계시가 시온산 성전계시로 발전하여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로 더욱 선명하게 밝혀지게 된다.

- 왕상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 솔로몬 성전의 봉헌식은 언약궤를 안치하는 예식이었다. 건물건축이 모두 완성됐어도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니다. 건물성전은 지성소에 하나님이 직접 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모셔둔 건물일 뿐이다.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에 언약궤가 안치될 때 모세의 성막이 세워질 때와 동일하게 구름으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 이스라엘 멸망기에 솔로몬 성전은 점점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기 시작했다. 아하스가 그 시작이었다. 아하스 이전부터 우상숭배는 있었다. 솔로몬 말년에 이미 멸망산 산당을 세워졌고 그모스와 몰렉 아스다롯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왕하11장) 그러나 이 우상들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었다. 성전 자체가 우상숭배 장소는 아니었다.

- 그런데 아하스는 아무도 감히 하지 못하던 무서운 일을 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다메섹에서 본 앗수르 우상제단을 그대로 설치한 것이다.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놋제단을 치우고(왕하16:10-16) 하나님의 전의 기구를 모아 부수고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아버린다.(대하28:24)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공식적으로 우상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첫 사건이었다. 이후 우상숭배는 므낫세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므낫세는 성전 안에 우상을 세워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만든 왕이다. 이것이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참고로 아하스는 히스기야의 아버지였고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우상숭배의 절정을 달렸는데 유독 히스기야만 바른 신앙을 가졌을까? 히스기야에게는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선지자는 히스기야와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전함으로 종교개혁의 큰 배경이 되었다. 요시야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시야 때에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선지자가 있었다. 또한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어 왕과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되었 유다 역사상 가장 철저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3)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의 새성전 곧 신약교회에 임하셨다.

-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 오랫동안 권고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들이 계속 거부했고 하나님은 예루살렘 멸망과 솔로몬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시며 새로운 참된 성전을 세우시겠다 말씀하신다.

-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우상숭배 현장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시는 환상을 보여 주셨다.(겔11:23) 이후 성전은 바벨론 느브갓네살에 의해 파괴된다.

- 성전파괴 후 에스겔은 성령의 능력으로 회개하고 새로워진 이스라엘 백성이(36장) 마른 뼈에서 율법을 따라 죄를 이기는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나고(37장) 그들이 하나님의 큰 백성이 되는 것을 새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모습으로 예언한다.(겔40-48장)

- 에스겔은 예루살렘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심을 환상으로 보았고(겔11장) 새언약의 성령으로 새워진 새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심을 환상으로 본다.(겔43:1-10) 하나님의 영광은 스룹바벨 건물성전에 임하지 않았다. 헤롯이 증축한 성전에도 임하지 않았다. 스룹바벨성전에는 언약궤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임하지 않았다. 무슨 의미일까? 건물성전은 이미 솔로몬성전 하나로 끝났다. 스룹바벨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장소가 아닌 그리스도와 새언약의 성령을 기다리며 신약교회를 준비하는 이정표로서의 성전이었다.

- 에스겔이 예언한 하나님이 지으실 새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신약교회였다. 하나님의 성령은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임했다. 약 83년에 걸쳐 엄청난 규모로 화려하게 지은 헤롯증축성전에 임하지 않았다. 요세푸스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약 1년 6개월동안 성전본체를 개축했고, 부속건물은 약 8년 만에 완성했다. 그후 헤롯은 성전을 계속 크고 화려하게 확장공사를 했고 AD 63-64년경에 최종 완공되었다. 헤롯성전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완공 후 6-7년 만에 파괴된 것이다.

-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새예루살렘성전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예언한다. 그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였다. 곧 구원받은 성도들 신약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이 예루살렘 성을 어린양의 보혈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교회로 가르친다.(계21-22장)

<b>&lt;</b><b>결론</b><b>&gt;</b><b>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b><b>(</b><b>고전</b><b>3:1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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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6:07: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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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7. 5.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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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002.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71"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7:08: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오경(28) - 금송아지 하나님과 선악과 범죄 (출32:1-14)]]></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68]]></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mMuV2oILSL0?si=jsDCZJjoQBMJu714"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28) - 금송아지 하나님과 선악과 범죄 </b><b>(</b><b>출</b><b>32:1-14)</b>

<b>1.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b><b>.</b>

(1) 하나님만 섬기는 방법

- 첫째, 하나님을 형상우상으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을 형상우상으로 만들면, 내가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종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 케이스에 따른 임상결과가 아닌 모든 사람 본성에 있는 죄의 결과이기에 필연이다. 죄의 본성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부리려고 한다.

-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로 인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 존귀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 셋째, 하나님이 너의 창조주이심을 알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안식일 규례는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창조경륜 회복과 출애굽 속량구속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죄의 본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안식을 기억하지 않고 돈과 풍요를 좇아 끊임없이 다른 일에 몰두한다. 안식일 규례가 주로 노동금지에 맞춰있는 이유이다.

<b>2. 금송아지 하나님과 선악과 범죄</b><b>.</b>

(1) 백성들이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었다.

-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40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절)

- 금송아지 우상은 분명 그들이 애굽에서 섬겼던 황소 모양의 신 아피스(Apis)를 닮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들은 아피스를 다시 섬기려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화하되 그 모양을 당시 사람들이 신으로 추앙해오던 황소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 출32:4-6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 아론은 그 금송아지를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했고 내일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자고 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긴다고 생각했다.

- 백성들이 아론에게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라고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해줄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물과 양식을 제공하고 대적들로부터 보호해줄 신이 필요하다. 사실 그 신이 여호와든 바알이든 상관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자가 그들의 신이다.

- 그들은 불과 약 한 달 전에 언약체결식을 했다. 모세가 십계명과 율법을 낭송할 때 그들은 황소의 피를 뿌리며 순종하겠다고 분명히 서약했다. 그들은 십계명 제2계명이 하나님을 형상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 우상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주인이다. 나는 내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섬겨드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면, 하나님 보다 더 잘해주는 신이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버리고 그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게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과 보이는 형상우상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 칼빈은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 했다. 그 우상은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존재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피조물의 부족과 결핍을 채우려고 죄인은 단 한번도 우상 만들기를 멈추는 법이 없다.

- 아론의 금송아지는 모세에 의해 부숴졌지만 백성들 마음속에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우상은 가나안에 정착 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시대에도 계속 등장한다. 그후 분열왕국 시대에 국가적인 금송아지 우상이 또 다시 등장한다. 이는 광야 금송아지 이후 약 515년 이후의 일이다.

- 북이스라엘 열지파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성전으로 가서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제단을 만든다. 그리고 여호와라고 선포한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이라"(왕상 12:28) 성경은 여로보암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새로운 아론으로, 북이스라엘을 새로운 광야 반역 공동체로 말하고 있다.

- 광야의 금송아지와 벧엘의 금송아지는 하나로 연속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파기를 보여준다. 출애굽 이스라엘이 시작된 광야에서부터, 북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될 때부터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요구하고 만든다. 벧엘의 금송아지는 요시야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왕하23장) 약 309년이나 존속되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어느 선지자를 보내 다윗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이 태어나 벧엘의 금송아지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 말씀하신다.(왕상13장) 이는 요시야가 태어나기도 약 300년 전의 일이다.

- 지금도 아론처럼 백성들이 원하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을 여호와라고 선포해주는 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메시지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그들은 온갖 프로그렘으로 사람들의 종교욕구를 채워주고, 사람들의 죄욕구를 설교를 통해 합리화시켜 준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니다. 제단에 붙어 살며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먹고 사는 금송아지 벧엘 제사장들이다.

(2)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렸다. -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옛언약을 깨뜨렸음을 보여줌

-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며 뛰놀고 있을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금송아지를 여호와라 부르며 우상숭배하는 백성들을 보고 십계명 두 돌판을 던져 깨뜨린다.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깨졌음을 나타냄이다.

-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하나님 나라 에덴의 선악과 행위언약을 다시 재현하는 언약이다. 증표가 선악과(율법)에서 십계명(율법)으로 바뀌었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백성 삼으심이란 점에서 같고, 그 대상이 아담 한사람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 십계명(율법)은 선악과(율법)과 같이 하나님 나라 언약 백성의 순종여부를 나타내는 증표였다. 주의할 점은 선악과는 아담과 직접 맺은 행위언약이므로 아담의 순종여부에 따라 실패할 가능성이 있지만, 십계명(율법)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두고 맺은 은혜언약이므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내주로 말미암아 지킬 수 있게 되어 반드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단 십계명(율법)은 새언약의 성령을 부어주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십계명(율법) 두돌판은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확증하는 언약증표였다. 하나님께서 직접 두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시며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임은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증표인 십계명 두 돌판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오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2계명을 어긴 것이다.

- 금송아지 사건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아담의 선악과 사건과 비교되는 언약파기 범죄이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두 돌판을 직접 파괴했다. 개인의 분노감정이 아닌 이스라엘이 이미 언약을 깨뜨렸음을 선언한 예언적 상징행위이다. 개인의 감정폭발이 아닌 근거는 하나님께서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새 돌판을 준비해서 다시 시내산에 올라오라 하심에 있다(출34장).

- 아담처럼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졌다. 모세가 여호와께 속한 자는 나오라 하자 레위지파가 나온다. 모세는 그들에게 허리에 칼을 차고 이스라엘 진중에 들어가 범죄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한다. 이로 인해 범죄한 백성 약 삼천명이 죽임을 당한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부터 하나님은 백성이 범죄할 때마다 직접 징계하셨다. 금송아지 범죄 이전에는 율법수여가 없었으므로 징계기록이 없다.

- 광야 40년 동안 계속된 징계가 있었다. 민수기의 사건들은 모두 즉각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동반했다. 다베라에서 백성의 불평으로 진중에 큰 불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민11장)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백성이 만나를 불평하자 메추라기를 진저리 치도록 주시고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다(민11장) 미리암이 모세의 중보자 자리를 탐내자 문둥병에 걸린다(민12장)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으로 40년 광야생활이 형벌로 주어지고 그 기간 동안 출애굽 세대는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로 교체된다.(민14장) 모세의 사촌 고라가 회중의 지도자들을 모아 모세를 대적하자 고라와 그 가족은 땅이 갈라져 빠져죽고 반역에 동참한 백성의 지도자 250명은 분향하는 동안 여호와의 불이 나와 그들을 불사른다.(민16장)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압평지에서 바알브올 음행사건으로 24000명이 죽는다.(민25장) 이는 모두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 징계는 형벌이 아니다. 징계는 하나님 백성에 주어지는 성화의 과정이다. 징계가 없다면 자녀가 아니라고 했다.(히12:5-11) 여기서 징계는 형벌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다. 죄를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어가도록 교육, 훈련, 양육할 목적으로 징계하는 것이다.

- 성도는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모두 담당하셨기 때문이다.(롬8:1, 히10:14) 그러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징계를 배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를 훈련하시고(히12:6), 때로는 질병이나 고난, 삶의 결과, 공동체적 책망 등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함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징계는 남아 있는 형벌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자녀를 향한 언약적 사랑의 훈련이다.

- 이는 다윗의 밧세바 사건에도 적용된다. 다윗의 참회로 죄는 용서받았지만 다윗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고치시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는 시행되었다. 암논의 죽음,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그의 집안에 칼이 끊이지 않는 징계가 계속되었다. 금송아지 사건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중보로 언약백성임을 유지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버리도록 역사 속에서 징계를 시행하셨다.

- 바울은 이 사건을 예로 들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은혜를 받은 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경외함으로 살아야 한다고 교훈하며(고전10장) 동시에 징계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형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복음의 빛으로 해석한다.

(3) 하나님께서 새로운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새겨 주신다. - 새언약의 그리스도를 예표함

- 시내산 은혜언약은 십계명(율법) 순종으로 에덴의 선악과(율법) 행위언약을 회상시키고 재현하지만, 그 목적은 인간의 순종능력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십계명(율법)은 인간의 실패를 드러내어 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려함이다. 그래서 시내산 (옛)언약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언약을 예표하는 사건이 된다.

- 금송아지 범죄로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 나라 언약은 파기되고 이스라엘은 진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백성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방법이 없다. 이런 범죄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개인적으로 나라적으로 계속 반복된다. 전적부패 전적무능력한 죄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십계명(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 중보자 모세가 필요하다. 모세는 선지자로 불렸지만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그런 선지자가 아니다. 모세는 왕 선지자 제사장이 세워지기 전에 이 세 직분을 출애굽 구원중보자로서 모두 감당했다. 하나님은 그를 제사장이며 왕이며 선지자로 세우셔서 우리의 구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예표하게 하셨다.

-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직접 맺은 언약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모세를 중보자로 세운 은혜언약이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중보자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구원하신다. 모세가 백성의 죄용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담보로 중보기도 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담당하려 대속제물로 죽으셨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다시 주셨다. 자기 행위로 지키는 옛언약의 십계명(율법)이 아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능력으로 지키는 새언약의 십계명(율법)이다. 내용은 동일하지만 방법은 중보자 모세를 통해 죄용서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지키게 하시는 새언약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십계명이다. 돌판에 새겨졌던 옛언약의 율법이 성령의 법으로 마음에 새겨지는 새언약의 율법이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넉넉하게 지키게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새언약의 성령을 부어주시기 전까지, 십계명(율법)은 반드시 성막/성전와 함께 주어졌다. 성막규례(종교의식법)이 없이는 죄인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소극적으로 죄 없는 상태)을 유지할 수 없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또한 십계명(율법)은 결코 죄인이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적극적으로 의를 행함) 그래서 십계명(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의 결과로 주셨고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참고로 율법이란 십계명(윤리도덕법)과 성막규례(종교의식법)과 국가사회법을 모두를 일컫는 613개 계명을 뜻하지만, 지금 우리는 율법을 좁은 의미로 십계명 윤리도덕법으로만 말하고 있다.

<b>&lt;</b><b>결론</b><b>&gt;</b><b>십계명을 지켜보려 애를 써본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온다</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7:07: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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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6. 28.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6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6/image002-3.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66"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8 Jun 2026 16:19: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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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6. 28. 온라인 실시간 예배 - 이기은 목사]]></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65]]></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IU9nWNoJGIw?si=-rp5h3FfmSkOyTNs"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strong>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 (롬4:1-9, 롬5:1-11)</strong>

우리는 종종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이라는 구조로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조건과 대비되는 복음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구원을 얻는 믿음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증거함과 동시에 특별히 로마서 4장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어서 <strong>아브라함이 받은 구원의 은혜와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용서의 은혜를 다윗이 받은 구원의 은혜로 증거하고 있습니다.</strong>

바울은 죄인 된 인간이 얻게 된 구원을 은혜, 믿음, 칭의의 개념을 통하여 설명함과 동시에 이를 위하여 스스로 친히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사하여 주시고 가리워 주시는 은혜로 함께 증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 믿음, 칭의의 내용을 보자면

<strong>은혜는</strong> 어떠한 행위나 공로로 얻어내는 삯이 아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4,5절)로 설명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이 <strong>은혜는 칭의의 근본적인 원인</strong>이요 이유인 것입니다.

<strong>믿음은</strong>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수용하는 태도라 할 수 있는데 3절에 <strong><em>“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em></strong>고 증거하면서 이 <strong>믿음이 바로 칭의를 얻게 되는 통로요 수단</strong>이라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strong>칭의는</strong>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합법적으로 의롭다 선언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strong>믿음의 결과요 구원받은 자의 상태</strong> 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먼저 구약의 믿음의 본이 되었던 아브라함을 들어 복음을 설명한 내용을 살펴보면

<strong>1.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의 복</strong>

바울은 창세기 15장6절 “<strong><em>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em></strong>”를 인용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완벽했거나 위대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 아님과 더불어 <strong>아브라함이 의롭다 선언 받은 시점이 그가 할례를 받기 전 즉 무할례시이었음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strong>. 이는 구원과 칭의가 할례 같은 종교적 의식이나 율법준수보다 먼저 일어났음을 뜻하며 오직 믿음만이 칭의의 조건임을 명백히 증거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받았던 복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칭의의 복과는 다른 모습의 칭의의 복이 있음을 또한 보게 됩니다.

<strong>2. 다윗이 받은 죄사함의 복</strong>

아브라함이 칭의가 시작된 모델이라면 다윗은 실패와 죄 속에서도 주어지는 칭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시편 32편을 인용하며 <strong><em>“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em></strong>”을 설명합니다.

사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율법에 치명적인 죄를 지은 인물이었습니다. <strong>행위의 기준으로는 결코 의로울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불법을 용서하시고 그 죄를 덮어주셨던 것입니다.</strong>

이 사건을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만든 뒤 약 1년 가까이 자신의 죄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왕이요 의로운 자 인척 했지만 그의 영혼과 육체는 죄책감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로마서4장7-8절의 고백(시편32:3-4)을 하기 직전 자신의 당시 상태를 이렇게 스스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strong><em>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회개하지 않고 숨길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em></strong>.”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던 다윗에게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strong><em>‘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은 부자</em></strong>’의 비유를 들려주며 “<strong><em>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em></strong>”고 매섭게 책망을 합니다(사무엘하12장). 이때에 다윗은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최고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변명하지 않고 엎드리며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strong><em> “</em></strong><strong><em>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em></strong>

나단은 다윗의 회개를 듣고 즉시 <strong><em>“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em></strong>”라고 말해 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이러한 배경이 바로 바울이 다윗을 아브라함과 함께 소환한 이유였는데 다윗의 죄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고의적인 살인과 간음과 같은 죄는 제사(동물의 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속한 것이었기에 오직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strong>이처럼 다윗은 율법의 행위나 종교적 의식으로는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완벽한 사형수였던 것입니다.</strong> <strong>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즉 믿음만을 보시고 율법의 요구를 뛰어넘어 일방적으로 그의 죄를 덮어주신 것이었습니다.</strong>

그리고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듣게 되었을 때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 된 자신이 아무런 대가 없이 죄를 장부에서 지워주시는 하나님의 이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서 그 감격에 겨워 부른 노래가 바로 로마서 4:7-8절이었습니다.

<strong><em>“</em></strong><strong><em>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em></strong>

이처럼 아브라함이 아무 공로가 없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다윗은 율법에 의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구약을 대표하는 믿음의 두 사람을 세워 구원은 오직 인간의 행위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칭의)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우리는 칭의를 이해함에 있어서 오직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은혜만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윗의 경우를 통하여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 <strong>하나님의 먼저 된 사랑과 용서가 있었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strong>

우리는 우리의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얻게 된 구원이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 값없이 거저 받은 은혜라 고백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strong>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하나님 입장에서는 결코 값없이 거저 주신 은혜의 선물은 아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strong>이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생명을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요 용서가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가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내가 다시 살게되었다는 생명의 가치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더 크게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5:8

<strong><em>“</em></strong><strong><em>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em></strong>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인 된 상태에 있을 때 <strong>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베푸시는 주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로서, 자격 없는 자에게 먼저 내밀어지는 손길이라는 점에서 세상의 조건부 용서와 구별됩니다</strong>.

또한 하나님의 용서는 당신의 완벽한 거룩함과 공의를 결코 훼손하지 않으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엄격한 법적 요구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 스스로 그 삯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즉 <strong>정당한 대가가 완전히 치러진 합법적인 용서</strong>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멀리 옮기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용서 이십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기억에서 우리의 죄를 지우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strong>인간의 죄에 대한 법적 채무 기록을 완전히 지워버리시는 적극적이고 완전한 사면을 의미합니다</strong>.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우리를 단지 창조주를 거역한 반역을 용서받은 죄인으로만 남겨두지 않게 하시고 용서와 더불어 의롭다 칭해주시며(칭의)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완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회복시켜주셔서 <strong>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의 관계에서 생명의 관계로 옮겨지는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strong>.

로마서 5:10,11

<strong><em>“</em></strong><strong><em>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em></strong>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의 복을 단지 값없이 거저 받았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근거한 십자가의 대속의 값을 지불한 소중한 구원임을 증거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함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 하며 소망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됨도 증거합니다.

로마서 5:1-6절

<em>“</em><em>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strong>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strong> <strong> </strong><strong>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strong>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em>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8 Jun 2026 16:17: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8"><![CDATA[교육과 사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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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개혁주의 종말론(12) - 신약 사도들의 종말론 - 바울 베드로 요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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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Zd0BGxwT-hc?si=hhZFM1FDB37yC4pK"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div style="text-align:justify;"><strong>개혁주의 종말론(12) - 신약 사도들의 종말론 - 바울 베드로 요한</strong>

&lt;서론&gt;여호와의 날이 도래했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중첩(Overlap)

신약 사도들의 종말론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시기적 타임라인을 나열하는 미래학이 아니다. 신약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고 재림으로 완성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종말론이 구원론과 기독론, 교회론을 강력하게 규정한다.

<b>서론 </b><b>1. </b><b>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b><b>. </b><b>여호와의 날이 도래했다</b><b>.</b>

선지서의 일곱 주제 - "그리스도께서(By whom), 여호와의 날에(When), 남은 자들에게(To whom), 성령을 부어주시고 새언약을 출범시키심으로(How to), 이스라엘 곧 하나님 나라(신약교회)를 회복하신다(What)."

구약선지자들 예언 - “여호와의 날에 남은 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새언약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을 회복해주실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여호와의 날이다. 지금이 (구약선지자들이 말한 그) 말세다.

<b>서론 </b><b>2. </b><b>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중첩</b>

유대교 랍비들은 구약선지자들의 여호와의 날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 세대”(올람하제)와 “오는 세대”(올람하바)의 단절로 가르쳤다. 바울과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중첩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완전히 재해석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히브리어 올람하제(이 세대, 이 세상)와 올람하바(오는 세대, 오는 세상)는 구약성경 용어가 아니고 제2성전시대 탈무드와 미쉬나에 등장하는 정통파유대교와 랍비유대교, 현대유대교의 종말론 용어이다. 요즘 유대교 종말론 용어를 메시아닉쥬 운동가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세대주의적 이스라엘회복주의자/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다. 개혁신학에서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표현할 뿐 사용하지 않는다.

(1) 이 세대(This Age)와 오는 세대(The Age to Come)의 성격

바울에게 “이 세대”는 단순히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의 정죄가 있는 세상이며, 사단의 유혹과 참소가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나라이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고후4:4: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는 세대“는 죄의 세력(죄,사망,사탄)이 완전히 제거되고 성령의 충만함이 온전히 지배하는 의와 진리, 거룩과 생명의 종말론적 새창조가 이루어진 나라이다.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 새에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에베소서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중첩 –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델보스, 리차드 개핀

당시의 유대교 랍비들은 “이 세대”가 완전히 끝나고 “오는 세대”가 시작될 것을 가르쳤다. 즉, ‘이 세대’가 역사 속에서 지속되다가 여호와의 날에 메시아가 오시면 한순간에 종말을 맞이하고, 곧바로 ‘오는 세대’가 즉시 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는 중첩됨이 없다.

바울과 신약의 사도들은 유대교 종말론의 두 세대 분리구조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미래에 속해 있던 “오는 세대”가 오늘 우리의 삶 역사 한복판으로 들어왔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지상에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동시에 공존하며 중첩되는 긴장이 상태가 형성됨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구약의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이 신약의 사도들이 말하는 말세의 의미이다.

고전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본문에서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임은 한 개인의 인격 변화를 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주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미래에 완성될 오는 세대의 새창조를 현재 이 세대에서 미리 맛보고 소유한 자들이라는 선포이다.

<b>&lt;</b><b>결론</b><b>&gt;</b><b>개혁주의 종말론의 특징 </b><b>– </b><b>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b>

(1) 구원의 보증, 성령

엡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바울은 성령을 구원의 보증(계약금/선불)이라고 부른다. 이는 미래에 완전히 도래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성령을 통해 우리가 현재 이 땅에서 먼저 미리 선불로 받아 맛보며 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소유한 것이다.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은 ‘오는 세대’의 보증이자 첫 열매이다. 오는 세대의 보증을 이미 받았으나, 성도는 이 세대의 죄악과 부패를 보며 또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 속의 죄성을 보며 탄식한다. 우리는 이미 새 창조에 속했으나, 몸은 아직 이 세대의 썩어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 탄식은 절망이 아니라, 재림 때 임할 최종적 완성(몸의 구속)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다.

(2) 성령을 의지한 거룩한 삶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 사탄의 나라에 속한 이 세대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지금 이 땅에서 살지만 오는 세대(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므로 오는 세대 하나님 나라의 의와 생명,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고전7:29-31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 세대의 모든 가치관은 죄와 사망의 나라 것들로서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종말을 맞이한 것들이다. 성도들은 이 세상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오는 세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종말론적 거룩함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b>제</b><b>1</b><b>부 바울의 종말론</b>

<b>1. 데살로니가전서 </b><b>– </b><b>파루시아</b><b>(</b><b>주의 강림</b><b>)</b><b>와 휴거</b>

(1) 우리 산 자들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살전4:13-18)

살전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휴거의 근거본문이다. 휴거란 끌 휴(携)'와 '들 거(擧)'를 사용하여, “하늘로 이끌려 올라감을 의미한다. 영어 단어인 Rapture는 ”강력한 힘으로 붙잡다“ 또는 ”낚아채다“라는 뜻의 라틴어 랍티오(Raptio/Rapio)에서 유래했다. 휴거는 주의 재림 때 교회시대에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고 지상에 살고 있던 신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을 말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휴거 이후 땅에서는 7년대환란이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7년대환란때 죽은 신자의 부활, 유대인의 천년왕국, 곡마곡전쟁, 불신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의 진행된다. 한마디로 세대주의에서 휴거는 종말론 엔드타임의 시작점이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16절) 본문은 과연 세대주의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 살아있는 신자(이방인 교회)들의 휴거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주의 강림(Parousia)에서 헬라어 파루시아(강림)는 고대 헬라로마 세계에서 파루시아는 황제나 왕의 공식 방문을 가리키는 정치적 용어였다. 이는 왕이 도시를 방문하면, 시민들이 성 밖으로 나가 왕을 영접하고 왕과 함께 도시로 들어옴을 뜻한다. 이것이 주의 강림에서 사용된 헬라어 파루시아의 어원적 배경이다.

주께서 강림(파루시아)하실 때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살전4:17). 영접한다 헬라어의 신약 사용 예를 살펴보면 모두 귀빈을 맞이하여 함께 목적지로 돌아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부활한 성도가 부활한 몸으로 공중에서 7년을 머물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자들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을 "하늘로 철수하는 휴거"가 아니라 "재림하시는 왕을 맞이하여 영광스럽게 동행하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개혁주의는 재림과 휴거를 분리하지 않는다. 주의 재림 때 우리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 새하늘과 새땅, 새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2) 그날이 도둑같이 이르리니...(살전5:1-11)

살전5:1-1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세계종말에 관한 예언을 하시며,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고 하셨다. 이는 인간 스스로 계산하여 날짜를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예수님은 종말의 날짜를 지정해주시 않으시고, 재림의 때를 노아의 때와 도둑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 그날은 노아의 경고를 수없이 듣고도 무시하며 방탕하게 살다가 갑자기 홍수 맞아 죽게 된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그날은 도둑이 침입할 줄 모르고 잠을 자다 갑자기 도둑맞은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깨어있으라. 악한청지기(마24장) 열처녀(마25장) 달란트(마25장) 양과 염소(마25장)

바울은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를 그대로 인용하여 그날이 도적같이 이르리니 너희는 깨어 있으라(살전5:1-11) 말한다. 이는 주님이 도둑처럼 살금살금 오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자기의 때에 당당하게 오시지만 불신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주의 재림을 의식하며 늘 깨어서 빛 가운데 사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의 재림은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 그날은 기다리고 준비하던 날이 임한 날이기에 전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은 슬픔과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된다.

<b>2. 데살로니가후서 </b><b>- </b><b>불법의 사람과 배교</b>

(1) 종말의 징조 – 배교(살후2:3)

살후2: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바울은 재림의 임박성을 말하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시한부종말론자들을 경계시키며 종말의 징조를 말한다. 배교와 불법의 사람 출현이다. 개혁신학은 이 두 사건을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징조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이미 역사 속에서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배교는 하나님에 대한 공개적 반역으로 교회가 정통진리에서 벗어나 거짓교리를 따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개인적 실수가 아니라 교리적 작업을 거친 광범위한 신앙적 반란이다. 로마카톨릭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채택함으로 배도를 공식화했다. 개신교는 교리화까지는 아직 아니지만 자본주의 번영신학과 은사주의에 완전히 잠식당했고, 동성애 퀴어신학 정치신학 등으로 점점 배도의 길로 가고 있다.

(2) 종말의 징조 – 불법의 사람(살후2:3)

살후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불법의 사람” 혹 “멸망의 아들“은 바울 종말론에서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정체와 활동을 가장 선명하게 계시하는 핵심인물이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의 정면으로 거부하고 파괴하며 반역하는 인물이며 악의 결정체이다. 멸망의 아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향해 쓰셨던 명칭이다(요17:12). 이는 그의 본질이 멸망에 속해 있으며, 그의 최종적인 운명은 영원한 파멸과 지옥형벌로 정해져 있음을 말하는 종말론적 유기선언이다.

그들의 핵심 죄악은 하나님 보좌 찬탈하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운다.(4절, 신성모독적 자기숭배) 또한 그들은 사단의 능력과 거짓 표적을 나타낸다(9절) 그는 단순히 말 잘하는 정치가나 군사 독재자가 아니다. 사단의 초자연적인 권세를 직접 부여받아 대단한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써, 수많은 불신자와 배교자들이 자신을 추앙하게 만든다. ex&gt;작은뿔 넷째짐승, 열뿔짐승, 두뿔짐승...

바울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말한다.(7절) 적그리스도의 영과 악의 세력은 바울시대부터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며 배후에서 비밀리에 끊임없이 작동해 왔다. 적그리스도는 역사와 단절된 미래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흥하던 악의 세력들이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한 인격체 안에 최종적으로 압축되고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살후2:7-8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왜 이 불법의 사람이 지금 당장 온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전면적 등장과 발악을 막고 계시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이를 복음전파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으로 보며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일반은총적 법질서와 국가 권력으로도 해석한다. 하나님의 때가 차서 이 억제 장치를 거두실 때, 비로소 불법의 사람은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은 작은뿔 넷째짐승(단7:20-27)과 열뿔짐승, 두뿔짐승(계13장)의 예표적 인물들이다. 이는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 많은 불법의 사람이 예표적으로 계속 등장했으며 최후의 날에 그들 모두를 합친 것 같은 단 한 사람이 등장할 것이다.

(3) 종말론적인 삶 -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살후3:6-15)

살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잘못된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규모 없는 삶을 살게 한다. 성경적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오늘의 삶에 충실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b>3. 디모데전후서, </b><b>디도서</b><b>(</b><b>목회서신</b><b>) - </b><b>말세의 징조</b>

(1) 말세에 고통하는 때와 거짓 가르침(딤전4:1-5, 딤후3:1-9, 딤후4:3-4)

딤전4: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후3:1-9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b>제</b><b>2</b><b>부 베드로의 종말론</b>

<b>1. 베드로전서 </b><b>– </b><b>이미와 아직의 종말론</b>

벧전1:5,20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베드로는 종말을 단순히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종말로 이해한다. 이는 종말이 곧바로 온다는 뜻보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인류가 마지막 구속사 시대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이미 실현된 종말론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종말론이 함께 있는 것이다.

<b>2. 베드로후서 </b><b>– </b><b>재림과 심판의 필연성</b>

(1)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3:4)

불신자들은 주의 재림과 심판이 없다고 비웃지만, 베드로는 첫째, 창조가 실제였고 노아 홍수가 실제였던 것처럼 재림도 반드시 실제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즉 창조 범죄 홍수(심판)의 전례대로 노아방주 새인류, 범죄, 재림(심판)이 일어난다는 구속사적 구조를 제시한다.

(2)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3:8)

세대주의자들과 안식교는 이 구절로 재림 날짜를 계산하지만, 이는 예언적 계산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심이라"(3:9)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

(3)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벧후3:10)

첫창조와 새창조의 관계에 대한 두 견해가 존재한다. 첫째, 만유파괴론이다. 현재 우주가 완전히 소멸되고 새 우주가 창조된다. 첫창조 지구는 완전히 없어지고 새하늘과 새땅은 첫창조와 별개의 것이다. 둘째, 만유갱신론이다. 불은 소멸이 아닌 정화의 불이며 첫창조를 완전히 회복완성 하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더럽혀진 지구(첫창조)를 완전히 불로 태워 정결케 한 후 지구를 다시 새창조 하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지금 이 세상이 잘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불타고 없어지지만, 만유파괴론과 다른 것은 새창조는 첫창조 지구를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만유갱신론을 선호한다.

(4)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베드로 종말론의 절정으로 그 핵심은 새창조이다. 죄가 없고, 사망이 없으며 저주가 없고 의의 영원한 통치인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된다. 이는 이사야 65-66장의 새하늘과 새땅 새창조 예언을 인용하는 것이다.

<b>제</b><b>3</b><b>부 요한의 종말론</b>

<b>1. 요한일서 </b><b>- </b><b>적그리스도</b>

(1)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요일2:18)

요일2:18-23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한에 의하면 마지막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 요한은 1세기 초대교회 시대를 이미 "마지막 때"로 이해한다. "마지막 때"는 재림 직전의 짧은 기간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시대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요한에게 종말은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현실이다.

(2)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요일2:18)

요한서신은 신약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요일2:22)이다. 1세기 후반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간 배교한 이단이며, 니골라당의 무율법주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고, 교회 성도를 끊임없이 미혹한다.

요일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적그리스도의 영이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요한에게 적그리스도는 한 명의 미래적 인물만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의 영적 세력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해석은 대체로 이것을 말세의 거짓 교사들과 배교 세력의 총체적 현상으로 본다.

(3)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요일2:19)

이단은 교회에서 나간 배도/배교의 무리이다. 요한은 종말의 가장 중요한 징조를 전쟁이나 재난보다도 배교/배도에서 찾는다. 이단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바울이 말한 배교(살후2:3)와 동일한다.

(4)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3:2)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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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으나 아직 죄의 몸을 벗은 것은 아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나(구원) 아직 부활에 이른 것은 아니다. 주의 재림 때 완전한 부활영화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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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이미 시작되었다. 요한은 영생을 미래에만 얻는 것이 아니라 현재 누리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이는 요한복음 5:24와 동일한 사상이다. 성도는 이미 종말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완전한 부활생명은 아직 아니다.

<b>2. 요한이서의 종말론 </b><b>– </b><b>미혹하는 자</b><b>.</b>

(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요이1:7)

요이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이서는 짧은 서신이지만 종말론적 경계를 강조한다. 특히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한다. 그들은 미혹하는 거짓교사이므로 멀리하고, 진리 안에 거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한다.

요이1:9-11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b>3. 요한계시록의 종말론 </b><b>– </b><b>예수님</b><b>, </b><b>바울 베드로의 종말론과 동일</b><b>.</b>

요한에게 마지막 종말계시를 기록하라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종말계시는 복음서와 서신서의 종말계시와 다를 리가 없다. 건물성전을 자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에 놀란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파괴와 세계종말의 징조를 묻자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며 가까운 종말 성전파괴를 말씀하시되 미래에 있을 세계종말과 함께 겹쳐서 말씀하셨다(마24장,막13장,눅21장)

주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고, 인간의 죄로 인한 개인 간의 싸움, 나라와 민족 사이에 전쟁은 더욱 일어나고, 피조세계에서는 자연질서가 파괴되어진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끝이 아니라 재난의 시작이다. 요한계시록 종말예언은 예수님의 종말예언과 동일하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된다.(마24:14) 성전파괴 문맥 속에서 온 세상은 먼저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전역을 말한다. 바울이 로마제국 서편 끝인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한 이유다. 이 말씀대로 복음은 로마제국 전역 온 세상으로 증거 되었고 그 후에 AD70년 로마 디도장군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멸망한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성취되었다.

또 한편 온 세상은 교회의 복음증거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복음이 증거 될 것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음을 못 들어서 멸망에 이르도록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심판받는 것은 복음을 못 들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거부해서다. 사도요한은 교회의 두증인 사명(계11장)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로 증거 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것을 예언했다. 복음은 성도들의 핍박과 고난, 순교의 피를 밑거름으로 삼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될 것이다. 이 또한 교회의 두증인 환상과 동일하다.

더 나아가 바울은 온 세상에게 복음이 증거 되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고,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고 했다(롬11:25) 말세가 되면 복음은 온 세상에 증거 되고 그로 인해 이방인과 유대인(=모든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지금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고 있고, 지금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도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전 세계 모든 인류 100%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참고로, 메시아닉 쥬(유대인)과 메시아닉 젠타일(이방인)의 하나됨을 한새사람(엡2:15)이라 강조하는 신학은 매우 위험하며 주의를 요한다. 그들의 주된 사역은 한국교회를 대체신학이라 비판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교회가 유대인 전도를 금지할리도 없고 금지한 적도 없는데 한국교회가 대체신학에 잡혀 유대인 전도금지하고 있다고 엉뚱한 비판한다. 그들은 유대인 전도를 강조하기 위해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잘못을 저지르되 그것도 용어를 잘못 선택했으며 그 내용도 틀리게 비판 하는 삼중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유대인 전도는 소중한 일이나 그것은 팔레스타인 무슬림 전도와 동일한 가치이며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 중 일부는 선을 넘어 랍비유대교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을 무너뜨린 십자가 복음이 아니다.

불법이 성행하며 교회 내에 거짓선지자들이 생겨난다.(마24:24) 예수님은 말세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말씀하셨다. 실제로 성전파괴 전후로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며 유대인 회복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도요한은 용(사탄)의 대리자 두 짐승 적그리스도를 예언했다(계13장) 그들은 사탄의 대리자로 정치권력자와 종교권력자 거짓선지자들이다. 지금은 두뿔짐승 거짓선지자가 거짓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바울도 동일하게 교회 내에서 배교와 배도가 일어나 복음은 왜곡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다고 했다(살후2:3-4) 말세가 되면 교회 내에 배도가 일어나 십자가복음은 없어지고 다른복음 다른진리가 증거 되게 될 것이다. 거짓선지자와 이단들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온갖 것을 줌으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을 떠나게 될 것이다.

요한일서는 말세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함을 말한다. 이들은 교회에서 나간 이단들로 다른복음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이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요일2:18-20) 역시 요한계시록의 두뿔짐승 환상과 같다.

<b>&lt;</b><b>개혁주의 종말론을 마치며</b><b>&gt;</b>

<b>1. 주의 재림과 세계종말의 네 가지 징조</b><b>(</b><b>살후</b><b>2:1-12)</b>

(1)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짐.(마24:12)

불법은 하나님의 법 이외의 모든 것을 통칭한다. 하나님의 법은 구원진리이며 아담의 죄를 제거하는 진리이다.(엡1:13) 그래서 구원받고 죄용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은 말세가 되면 세상은 하나님의 법이 아닌 다른 진리로 가득차게 될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 결과 사람들은 아담의 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 죄에 사로잡혀 이웃사랑이 식어지고 더욱 자기사랑만(=죄, 아모르수이) 하게 된다.

불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법이며, 온갖 타락과 부패를 가져온다. 말세가 되면 세상은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는 불법으로 가득찰 것이다. 사람들은 철저한 무신론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 찬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은 객관적 절대진리가 없이 주관적 상대진리로 혼란해진다. 그 결 과 아무 것도 따를 수 없다는 회의주의가 판을 치고 허무주의의 막다른 골목에 갇히며 일부는 신비주의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들의 삶은 타락과 부패이다.

전쟁과 난리, 심지어 지진과 홍수, 천재지변, 하늘의 표적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죄로 피조세계가 고통을 받는다.(롬8:22) 죄는 피조세계를 더욱 훼손해서 홍수와 기근 등 온갖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이 죄의 본성을 따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말세 때 죄가 창궐 할수록 개인 간의 싸움,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 전쟁은 더욱 일어나고, 피조세계에서는 자연질서가 파괴되어진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며, 마지막에 가서는 하늘의 징조까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옴(롬11:25)

복음은 성도들의 핍박과 고난, 순교의 피를 밑거름으로 삼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될 것이다. 복음은 온 세계로 증거 되어 이방인과 유대인(=모든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지금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고 있고, 지금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도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전 세계 모든 인류 100%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2011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통계에 의하면 세계의 하루 출생 인구수는 383,040명이다. 하루마다 대략 38만명씩 불신자가 태어나는데 전 세계 모든 인구가 다 복음을 들어야 주의 재림이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말씀하셨지, 복음을 모든 인류가 다 듣고 난후에야 재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는 복음이 전 세계에 편만이 증거 될 것을 말함이다.(행19:10) 지금 복음은 거의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가고 있다. 주의 재림은 멀지 않았다.

또한 개혁주의는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돌아오는 “유대인 택자들의 총수”와 “이방인 택자들의 총수”가 연합된 “단일한 하나님의 언약백성(교회)”로 이해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돌아옴을 세대주의자들처럼 종말의 가시적, 정치적 징조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유대인이 돌아옴(알리야)을 제3성전 건립이나 백투예루살렘 같은 재림과 종말의 핵심 징조로 여긴다. 아니다. 유대인의 돌아옴은 바울의 가르침처럼 이방인 구원이 유대인을 시기케 하여 결국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유대인 남은 자들이 역사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성령의 점진적 구속사역이다.

(3) 교회 내의 배교와 배도 – 복음이 왜곡되고 변질됨.(살후2:3)

말세가 되면 교회는 십자가복음을 떠나 다른복음 다른진리를 따를 것이다. 거짓선지자와 이단들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온갖 것을 줘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교회 안에는 가짜 십자가(신앙과 교리)가 버젓이 서있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 니골라당의 교훈은 오늘날 사단신학의 영육이원론 방탕주의이다. 또한 바알 숭배 이세벨의 교훈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빠지기 쉬운 번영신학 우상숭배로 볼 수 있다. 로버트슐러의 적극적 사고나 조엘오스틴의 긍정의 복음은 인본주의 심리치유이지 죄 문제를 다루는 성경의 복음이 아니다. 이처럼 말세가 될수록 세상은 더욱 불법이 심해지고, 심지어 교회도 십자가 복음을 버리고 거짓진리인 다른복음을 따라가며 배교와 배도의 길을 걷게 된다. 동성연애 목사도 배도의 한 현상이다.

(4) 불법의 사람 - 적그리스도가 출현함.(살후2:4)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사단이 마지막에 놓인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단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더욱 발악하여 사람들을 미혹케 할 것이다. 세상에 불법을 성하게 하고, 핍박으로 복음전파를 막고, 배교를 통하여 교회가 타락하도록 하는 배후에는 분명 사단이 있다.

지금 세상에는 불법이 성행되도록 하는 리더들이 있다. 그들은 정치가, 과학자, 문화 예술인, 연예인, 종교지도자들로 활동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불법을 따르도록 각 분야에서 이끌어 간다. 그들의 이론과 사상으로 일반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의 법을 떠나게 된다. 세상에는 이런 슈퍼스타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 나타나는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화신인 한 지도자이다. 그는 직접 사단과 통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단의 힘으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며 모든 불신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지금의 불법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자기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모든 분야 모든 불신자들에 게 절대적 추앙받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불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더욱 세상을 따르도록 할 것이다. 바로 이 지도자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등장할 때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질 것이고 이때 세계의 종말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

지금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막고 계시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하나님이 막는 것/막는 자를 “복음 전파의 사명과 이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또는 정부의 법적 질서)”로 해석한다. 사단이 적그리스도를 통해 최종 발악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제도와 복음 전파를 통해 막고 계시다.

이는 더 많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도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가 점점 가까워 왔다. 우리는 복음을 떠나도록 수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수퍼스타들을 보면서 그의 출현을 예견해 본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사도요한이 말한 것처럼 “이미 역사 속에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고(요일2:18, 점진적 출현), 그 불법의 비밀이 마지막 날에 한 인격체(사단의 화신) 안에서 ”최종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날 것이다.

<b>2. 개혁주의 종말신앙과 오늘의 삶</b>

(1) 세계종말과 개인종말

세계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 있다. 모든 인류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때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들은 낱낱이 드러난다. 자기가 지내온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게 된다.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죄 없다 하심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는 모두 용서되고 무죄선고를 받는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 성령님은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가 제거된 거룩한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다. 본래인간의 축복이 회복된다. 지금 우리는 사망에 잡혀있는 몸이다. 선천적 장애, 사 고로 인한 불구, 질병으로 인한 쇠약함, 노화로 인한 퇴화... 이는 모두 아담의 죄로 인한 사망의 흔적들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죄가 제거되고 사망이 없기에 이런 모든 것들이 회복된다.

부활한 우리는 범죄이전 본래인간에게 주신 완전한 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내면적으 로나 외형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형상”(갈4:19) “하나님의 형상”(고후4:4) “하나님의 영광”(롬3:23)이 회복됨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죄와 사망이 없고 하나님 대리통치자로서 의 권위를 회복한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된다.

개인의 마지막 종말이 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모세는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강건함은 70대까지요 80대가 되면 육체의 수명이 다되어 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수명은 반드시 마지막이 있다. 우리는 시한부 인생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육체의 죽음은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우리주변에는 먼저 죽는 사람들이 있다. 사건 사고,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다. 이러한 죽음은 아무도 모르고 예상할 수 없다. 하나님 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구원의 기회는 우리 육체가 살아있을 때뿐이다. 구원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어디에도 죽음이후 하나님 백성 되는 길을 말하고 있지 않다. 죽음이후 후손들의 공덕으로 선조의 죄가 용서 받는다는 카톨릭의 연옥도 없고, 지옥은 자기 스스로 공덕을 쌓아 빠져나올 수 있다는 불교의 지옥도 아니다. 구원은 우리가 살았을 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만 있다.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백성 되는 구원을 얻는다.

(2) 주의 재림이 반드시 있음을 명심하자.(살전5:1-11)

그 날은 도적같이 이를 것이다. 사람들은 주의 재림을 무시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날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심판이 없다고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홍수심판을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주의 재림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죄악 속에 살아가다가 생각지 않은 날에 주의 재림을 맞이할 것이다.

재림의 징조들을 보며 지금 이 시대를 분별하자. 불법이 성해질 것이다.(마24:12) 세상 문화는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가고 처처에 전쟁과 난리가 일어나며 지진과 기근, 하늘징조까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이다.(마24:14) 교회 내의 배도와 배교가 일어나고(마24:24,살후2:3), 불법의 사람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마24:15,살후2:4)

(3) 그 날을 계산하여 정하지 말라. / 시한부 종말론을 조심하자.(마24:36)

성경은 어떠한 날자 정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을 오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날과 그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씀하시고 재림 날짜에 대한 모든 억측을 단호히 금하셨다.(마24:36) 이는 시한부 종말론 때문이다. 시한부 종말론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분리하는 지상 천년기 종말도식에서 나온다. 교회가 이스라엘 회복 예언의 성취요 완성이라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 현천년설에서는 절대로 시한부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

성경이 아닌 예언과 환상으로 받았다는 재림 날짜에 절대로 속지 말라. 몰몬교, 여호와증인, 안식교... 모두 시한부 종말론과 연관이 있다. 불건전 신비주의에 서 나온 시한부종말론은 성도들의 삶을 파괴한다. 이단들은 종말 때에 있을 큰 환 란(마24:10)을 협박수단으로 사용한다. 두려워 말라. 환란이 있겠지만 성도는 능히 이길 수 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4) 깨어 있어 근신하고 최선을 다하여 오늘을 살아가자.(살후3:8-13)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 규모 없이 행하는 모든 자에게서 떠나라. 바울은 올바른 종말신앙을 가진 성도의 규모 있는 삶을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수고하며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아니한 것이다. 성경적 종말신앙은 성도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더욱 규모 있게 살도록 한다.

살후3:8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있는 성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현실을 포기하여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주의 재림만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신앙은 교회내의 다른 성도나 주변 불신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교회의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살후3:10-11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올바른 종말신앙은 우리로 최선을 다하여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재림은 우리로 죄의 현실과 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가르친다. 주께서 종말의 시기를 정하지 말도록 엄히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살후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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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5 Jun 2026 07:04:2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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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Jun 2026 16:11:2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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