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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he Lord Presbyterian Church</title>
		<link>https://gospel323.com</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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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10. 11.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9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10/image002-1.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217"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1 Oct 2026 16:40: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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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8) – 가데스 이후 38년 동안 하나님은... (민16:1-3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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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8QCTzVpJfGI?si=g5Z42YyeYjhpHm5B"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8) - </b><b>가데스 이후 </b><b>38</b><b>년 동안 하나님은</b><b>... (</b><b>민</b><b>16:1-35)</b>

<b>1. 중보자 모세</b>

(1)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 가데스 불신앙 사건 이후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온갖 역경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라 안식을 체험할 믿음이 준비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광야 38년 동안 출애굽 2세대를 준비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모형 구약이스라엘을 세워가셨다.

- 금송아지 불신앙과 가데스 불순종 때, 하나님은 출애굽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백성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두 번 다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로 출애굽 백성은 진멸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이다.

-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예표 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고 계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구약이스라엘을 멸하고 너를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시겠다는 말씀도 모세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언약 이스라엘 곧 신약교회의 탄생을 미리 보여주심이다. 이처럼 구약의 모세는 그의 구원중보자 기도중보자 계시중보자 사역을 통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히 예표하는 특별한 사역에 쓰임을 받았다.

<b>2. 가데스 이후 </b><b>38</b><b>년 동안 하나님은</b><b>...</b>

(1) 고라와 백성들의 반역 – 백성이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나라로 세우려 함.

- 열정탐꾼 가데스 불순종 이후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게 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만 생각하며 출애굽 했던 백성의 마음속에는 모세에 대해 원망 불평 불만 분노가 있다. 그러던 중 고라가 백성의 지도자 250명을 모아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며 반역을 일으킨다. 그들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16:3)

-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며 레위인이다. 레위는 게르솜 고핫 므라리를 낳았고 고핫은 아므람 이스할을 낳았다. 모세는 아므람의 아들이며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다. 둘다 레위지파 고핫자손이며 사촌 형제이다. 이처럼 모세와 아론의 가장 가까운 사촌형제 고라가 모세의 중보자 직분과 아론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 레위지파 고핫자손은 성막의 지성물과 성소 기구를 운반하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민4:1–20). 레위지파 게르손 자손은 성막의 천과 덮개를 맡고,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골격 구조물을 운반하는 것에 비하면 그의 직무는 지성물을 담당하는 매우 거룩하고 소중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막 일에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는 구별되고 완전히 다르다. 고라는 성막일에 만족하지 않고 제사장 직분을 요구하는 것이다.

- 모세는 고라의 반역 의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사 여호와의 성막 일을 하게 하시며 …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도 구하는도다.” (민16:9–10) 고라의 죄는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예표로 세운 모세의 중보자 직분을 거부하고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요구한 죄이다.

- 고라는 르우벤 지파 유력한 지도자 다단, 아비람 형제, 그리고 온과 함께 백성 중에서 이름있는 각 지파의 중간 지도자(천부장·백부장·족장급) 250명을 모으고 백성들과 함께 모세와 아론에게 나아와 정식으로 제사장 직분을 요구하며 반기를 든다. 레위지파의 고핫자손은 르우벤 지파와 함께 성막 남쪽에 위치한다. 고핫자손 고라가 르우벤지파의 다단 아비람 온과 함께 반역을 꾀함은 성경기록에는 없지만 이런 진영 배치를 근거로 추론해 볼 수 있다.

- 하나님은 땅이 그 입을 열어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의 가족 및 모든 소유를 삼키게 하셨다. 또 250명 지도자들은 각자의 향로를 가지고 여호와께 분향하라 하시고 다음날 그들이 분향할 때에 그 향로들에서 불이 나와 250인을 태워버리게 하셨다. 이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치려 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온역(염병)을 내리셔서 14,700명이 죽었다. 모세와 아론이 향로에 제단 불을 담고 분향하며 속죄제사를 드리자 염병이 그쳤다.

- 하나님께서 고라와 250인을 벌하심을 보고도 모세와 아론을 치려 함을 볼 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의 좌절과 분노는 상당했던 것 같다. 이는 고라당의 반역은 가데스 사건 이후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이며 광야 38년 기간의 초기에 벌어졌을 것이란 뜻이다.

- 고라당의 반역은 사실 백성들의 반역이었다. 고라는 그들의 반역을 등에 업고 개인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가나안 입성이 좌절되자 출애굽 1세대는 고라를 지도자로 세우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한다. 이것이 고라당 반역 사건의 실체이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 에덴을 자기 나라로 탈취하려 함과 같다.

(2) 아론의 지팡이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선포하심

- 세상사람들은 구약 이스라엘은 유태민족의 역사와 나라고 신약교회는 유대교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구약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신약교회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녀 유태민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영적 자녀 곧 신약교회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다.

- 오늘날 초정통 랍비유대교(하레디, 하시딤)은 구약성경의 여호와 구원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자기 민족의 것으로 왜곡시킨 배타적 선민의식의 유태인 민족종교일 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교의 이단이 기독교가 아니라, 구약성경을 왜곡시킨 유대교가 기독교의 이단이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교회를 말하는 여호와 구원계시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약교회의 조상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낳은 자녀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이스라엘, 아브라함 자손이다. 그리스도 없이 이삭의 혈통만 강조하는 유태인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이다.

- 고라가 모세와 아론의 직분을 구함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 함이다. 그것은 구약이스라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구속사)를 가로막는 일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힘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중보자와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으로 성령의 은사를 얻고자 했던 마술사 시몬처럼, 고라는 백성들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 구약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탈취하려 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을 사촌형제로만 알았고 백성은 그들을 백성의 지도자로만 알았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죽는다.

- 하나님은 각 지파마다 하나씩 지팡이 가지고 지성소로 나오라고 하신다. 백성은 각 지팡이에 자신들의 이름을 쓰고 지성소 언약궤 앞에 두었다. 열두 지팡이 중에서 레위지파 아론의 이름이 쓰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아몬드) 열매가 열린다. 모든 백성은 하나님께서 레위지파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으신 줄 분명히 알게 되었다.

- “살구”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케드는 한국의 살구(Apricot)와는 완전히 다른 아몬드(Almond)를 가리킨다. 초기 한글성경 번역 당시 조선에는 아몬드가 없었기 때문에, 꽃과 열매 외형이 가장 유사한 살구나무로 번역한 것이 관습적으로 정착된 것이다.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아몬드)가 열린 것은 두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

- 첫째, 살구(아몬드)를 뜻하는 샤케드는 동사 샤카드(깨어 지키다, 파수하다, 경성하다)와 철자와 어근이 완전히 동일하다. 그래서 살구(사케드)는 히브리어 언어유희(Wordplay)로 “파수꾼”, “깨어 지키심”의 뜻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샤케드)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샤카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렘1:11-12) 그러므로 아론의 지팡이에 맺힌 샤케드 아몬드는 "하나님께서 두 눈을 부릅뜨고 깨어 계시며(샤카드), 자신이 세우신 제사장 언약과 말씀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선포하는 표징이다.

- 둘째, 살구(아몬드)는 성막(등잔대) 제의와의 일치한다. 내성소 안의 순금 등잔대(메노라)는 모양 전체가 “살구꽃(아몬드꽃)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출25:31-36) 아론의 지팡이가 아몬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그 지팡이가 성소의 거룩한 등잔대처럼 하나님의 성소와 제사장 직분을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거룩한 도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은 중보자(모세)와 대제사장(아론) 직분이 사람의 정치적 야망이나 다수결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임명에 의해서만 세워짐을 분명히 하는 결정적 징표였다. 특히 구약이스라엘에게 주신 왕과 제사장의 직분은 다윗(삼하7:12-16)과 비느하스(민18:19)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확정해 주셨다. 므낫세 같은 최악의 다윗후손이 있어도 엘리와 두아들 같은 타락한 제사장이 있어도 왕과 제사장 직분은 사람이 탈취할 수 없게 혈통으로 세습시키셨다. 이는 그 직분 자체가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단 선지자는 세습이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역을 위해 그때마다 기름 부어 세우신다.

- 모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언약궤에 넣어두게 한다. 이후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아론의 직계 자손에게 맡기신 고유의 직분임이 완전히 정착된다. 왕도 제사장의 직분을 함부로 넘볼 수 없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고(삼상13장), 웃시야는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문둥병이 걸린다(대하26:16). 제사장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3) 광야 38년 – 신실하신 하나님

- 민수기는 시내광야 출발 후 가데스 불신앙 전후의 약 1년과 광야 40년째 가데스를 떠나 모압평지 요단 앞까지의 여정에 있었던 1년 기간 곧 2년의 기록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광야 38년을 어디에 머물렀고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불순종 사건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냥 민수기 13장부터 20장까지 가데스 열정탐꾼(민13-14장), 고라당 반역(16장), 아론의 싹난지팡이(17장)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 지켜야 할 정결규례 율법(민15,18-19장)을 기록할 뿐이다. 이게 민수기에 기록된 광야 38년 동안의 기록 전부이다.

- 참고로, 민수기 20장은 광야생활 40년째의 기록이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므리바의 물 사건으로 광야에서 죽을 것임을 말해주고 이스라엘은 가데스를 떠나 요단 앞 모압 평지로 출발한다. 미리암과 아론이 광야에서 죽고, 모세조차 백성을 요단으로 인도한 후 광야에서 죽는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죽고 출애굽 2세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민수기 20장부터의 기록이다.

- 왜 민수기는 광야 38년을 간단히 기록했을까? 분명 백성의 불평과 원망이 많고 불신앙 사건도 많았을텐데 왜 민수기는 그 긴 38년 동안 고라당의 반역만 기록했을까? 민수기는 백성의 잘못을 지적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록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반역과 불신앙에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 나라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b>&lt;</b><b>적용</b><b>&gt;</b><b>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가 살아간다</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1 Oct 2026 16:39: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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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10. 4.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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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4 Oct 2026 17:36:4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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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7) - 출애굽 구원에서 가데스 불순종까지 (민14:1-1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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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jGeqDxJv_90?si=28wyWnBUPRUCxpY8"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7) - </b><b>출애굽 구원에서 가데스 불순종까지 </b><b>(</b><b>민</b><b>14:1-10)</b>

<b>1. 가나안을 앞두고</b>

(1)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며

-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여 가데스까지 대략 2-3개월이 걸렸다. 신명기에서는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하룻길(11일)이라 했지만(신1:2) 수많은 백성과 가축의 이동, 다베라, 기브롯 핫다아와, 하세롯 등에서의 체류(민11장) 및 미리암의 문둥병으로 인한 7일간의 지체(민12:15)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 소요된 기간은 약2~3개월일 것이다. 이때는 유대 종교력으로 출애굽 2년 4-5월경이다. 가나안에는 첫열매가 익는 포도 수확기이다.(민13:20)

<b>2. 출애굽 구원에서 가데스 불순종까지</b>

(1) 가데스(바네아)의 열정탐꾼

-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정탐꾼을 세워 가나안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이 상태와 땅의 비옥한 여부를 확인한 후 그 증거를 가져오라 한다. 열두 정탐꾼은 40일간 가나안 전역을 돌아보며 가나안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에스골 골짜기에서 베어온 풍성한 포도송이 가지를 두 사람이 메고 가데스로 돌아온다. 그들은 자기들이 확인한 객관적 사실을 모세와 백성들에게 알리고 자신들의 결론을 밝힌다.

- 첫째, 그 땅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곳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포도송이와 석류, 무화과를 보여주었다. 둘째,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있었다. 또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가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객관적인 사실 정보를 말했다.

- 그러나 결론에서 달라진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우리가 올라가면 그 땅을 취할 수 있다고 하나 나머지 열 정탐꾼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땅을 취할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는 네피림의 후예 아낙 자손 거인들이 있는데 우리는 메뚜기같이 작아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 열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온 백성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들은 가나안 거민들에게 죽느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며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가나안에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말하나 백성들은 그들을 돌로 치려 했다.

- 가데스의 사건은 출애굽 1세대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된다.

(2) 구원받은 백성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 가데스의 불신앙은 금송아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 않다.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어 계속 곁에 두고 소유하며 가나안의 복을 확실히 보장받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 약속에 대한 믿지 않은 금송아지 불신앙은 가나안을 보면서도 들어가지 못하겠다는 가데스의 불신앙으로 발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면, 언약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믿지 못한다.

- 그들은 불과 약 1년 전 유월절과 홍해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한 출애굽 백성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애굽바로가 항복하고 출애굽 했음을 직접 체험했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가데스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불신앙을 한다. 가데스의 불신앙과 가데스의 불순종은 구별할 필요가 없다. 내면적 불신앙이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 참고로, 선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축출해서 문제해결 한다는 세미베뢰아이거나 번영신학 성공복음을 전파하는 바알기독교이다.

-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사역이다.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혼자 하셨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치실 때 백성이 한 일이 전혀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고센을 떠나 출애굽 한 것 뿐이다. 그런데 구원 이후의 삶은 성도가 성령을 의지해서 순종하며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로봇이 아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데스로 보내고 요단 앞에 보내실때는 너희가 직접 가나안으로 요단강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출애굽 백성들의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심이다.

- 생명(구원)과 성장(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죄로 죽은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사역이다. 사람이 보조하거나 거들 일은 없고 거들 수도 없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시고 우리는 선물로 받을 뿐이다. 이 방법밖에 없다. 죽은 자는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셔야 한다. 생명을 주셔야 한다.

- 신앙생활은 조금 다르다. 믿음으로 생명을 계속 체험하며 성장해야 한다. 부활 전까지, 육체의 호흡이 끊어지기 전까지 구원받은 성도는 죄의 본성을 가진채 사탄의 유혹과 참소를 이기며 하나님 말씀을 믿고 성령을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 새하늘 새땅은 완전성화와 영화를 얻는 곳이기에 성도는 불신앙 불순종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이 땅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은 죄인으로 살아가는 수십년의 한시적 과도기적 중간(?) 상태의 삶를 말함이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믿음) 죄를 이기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살아가는 삶(성화/성장과 성숙)은 신앙생활이라 부르며 이 과도기적 중간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요구된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의 필연적 결과이다.

- 가데스의 불신앙은 그들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안식을 맛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체험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언약백성이지만 광야에서 죽고 출애굽 2세대만 가나안에 들어간다.

-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 성숙하기를 원하신다. 히브리서 11장의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생명)을 얻았지만 그 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스스로 능동적으로 살아갔다. 하나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에덴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발적으로 순종했지 순종할 수밖에 없는 로봇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특징이며 그것을 점점 체험해 나가는 것이 구원 이후의 삶 곧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 가데스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전혀 성장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함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출애굽 구원을 받았다. 그들의 구원여부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장하는 여부이다. 하나님은 자기 피로 구원하신 백성이 기쁜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동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보다 더 확실히 신뢰하며 행동했던 아담의 첫창조의 본래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 모든 성도는 반드시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일곱족속을 바라보며 서게 된다. 이 땅은 성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 모든 대적을 없애주지 않으신다. 여리고는 가나안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전투였다. 긴급할 때는 태양이 멈추게도 하셨지만 결국 직접 싸우는 자는 백성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대적과 싸워야 가나안의 안식을 체험한다.

- 일반적으로 가나안 입성은 애굽노예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구원으로 완성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히브리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나안을 하나님의 구원(안식)을 체험하는 신학적인 의미로 말해준다.

(3)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안식)을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 출애굽 1세대는 가데스 불순종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역사적, 언약적 심판이었다. 본문은 개인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광야에서 죽음을 개인구원 상실로 설명하면 너무 과한 것이다. 모세, 아론, 미리암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었는데 그들은 지옥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자동적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함도 과하다. 그들은 분명 형벌로 죽은 것이다. 가데스 불신앙과 가나안 입성금지는 개인구원을 말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 히브리서 3–4장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하나님의 안식(구원)에 들어가지 못함”이라는 신학적 의미로 해석한다.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구원 자체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히브리서는 배교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다. 이는 구원 받은 자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본문이 아니다. 배교자는 처음부터 불신자이다. 그래서 강하게 경고한다.

- 1세기 후반 초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직분을 가졌어도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의 안식(구원)에 참여하지 못한다. 구원의 복음 내용을 지식적으로 충분히 아는 사람이 십자가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욕한다면 그는 처음부터 아니다. 다시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

-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배교는 성령의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 성령에 참여하고 맛봤다는 표현은 그들이 교회 생활에 익숙한 아주 오래된 교인일 뿐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 히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구절도 낙심하여 교회를 떠난 신자가 아니다. 적극적인 배교자이다. 그들은 구원이 없다.

- 배교자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데스 불순종의 본문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안식을 체험할 수 있는 믿음의 성장을 가져와야 한다는 해석이 정확하다. 우리는 물질주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구원받았기에 성장해야 한다.

- 가나안의 안식은 부활이후 얻게될 구원의 완성이며 최종적인 구원도 의미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가나안의 안식은 가나안 일곱족속과의 싸움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때 얻어지는 안식이다. 이것이 풍랑 속에 있지만 제자들이 탄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안식이다.

- 예수님은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믿음을 지킨 빌라델비아교회에 너를 지켜 환란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고 하셨다. 주님이 환란의 때에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환란 없는 구원이 아니다. 휴거종말론이 아니다. 환란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시는 구원이며 안식이다. 부활이전까지 이땅에서의 가나안 안식은 그렇다.

<strong>&lt;적용&gt;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구원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안식이다.</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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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4 Oct 2026 17:35: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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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9. 27.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93]]></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9/image002-3.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211"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7 Sep 2026 15:54: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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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6) - 중보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민12:1-16)]]></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92]]></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_zKyX1soXQ?si=1-Zap8AYQwf2qP3J"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6) - </b><b>중보자</b><b>, </b><b>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b><b>(</b><b>민</b><b>12:1-16)</b>

<b>1.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다</b><b>.</b>

(1) 모세와 십보라의 결혼

- 본문은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삼은 일에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며 시작한다. 이방인과의 결혼은 표면적인 것이고 실제는 자신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니 선지자로서 모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 왜 갑자기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취했을까? 지금 출애굽 후 시내광야에 머물며 율법수여와 성막완공, 열두지파 조직, 백성의 민원해결... 시내광야 출발 후 다베라의 불, 기브롯핫다아와의 죽음 등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무엇보다 시내산 율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또 백성들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던 모세가 뜬금없이 십보라를 두고 구스여인과 중혼하는 것이 그리 매끄럽지 않다. 물론 여러 아내를 취하는 것이 고대사회에선 흔한 일이겠지만 십계명을 받은 지 1년 남짓한 시기에 또 백성의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을 모세가 특별한 이유 없이 구스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가 구스여인 취한 것을 과거시제로 쓰여 있다. 지금 막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구스여인을 십보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다.

- 유대교는 구스여인을 십보라라고 해석한다. 탈무드와 탈굼에는 구스여인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의역하여 미디안 여인 십보라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말했다. 실제로 구스(Cush)와 미디안(Midian)은 아라비아반도 홍해 연안의 인접 지역이며, 성경 용법상 종종 상호 호환적으로 사용된다. 하박국 3:7에는 구스와 미디안이 평행 대칭으로 쓰였다.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들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 개혁신학자들 중 칼빈과 메튜헨리 등 다른 여러 신학자들도 모세가 새로운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이 아니라 미디안 여인 십보라와 결혼한 과거 사건을 언급함이라 말한다. 물론 아니라고 말하는 개혁신학자들도 많다.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고 어떤 것을 선택하든 구원진리에 문제 될 것이 없다. 나는 구스여인을 십보라라고 해석한다.

<b>2. 중보자</b><b>, </b><b>모세와 예수 그리스도</b>

(1) 여선지자 미리암

- 미리암이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한 것을 비방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출애굽 이스라엘 진중에서 십보라와 그 인척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었다. 출애굽 초기에 십보라와 호밥 남매는 아버지 이드로를 따라 모세에게 왔고 이드로가 미디안으로 돌아간 후에도 백성 가운데 남아 있었다.(출18장) 호밥은 이드로의 아들이요 십보라와 남매였다. 그는 백성이 시내광야를 떠나 가데스로 출발할 때 미디안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모세의 요청으로 이스라엘 진중에 남아 백성의 길을 인도한다.(민10:31) 가데스로 출발할 때,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백성의 70인 장로를 조직한다(민11장)

- 민10:29-32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

-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했다고 비방한 것은 이런 일들과 연관 있는 것 같다. 모세가 십보라의 형제 호밥을 중용하고(민10장) 십보라의 아버지 이드로의 말대로 70인 장로를 세우자(민11장) 뭔가 불편한 마음이 생긴 것 같다.

-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된 최초의 여선지자였다.(출15:20) 성경에는 여선지자가 매우 드믄데 미리암 이후 약 250년 만에 사사겸 여선지자 드보라가 등장하고, 드보라 이후 약 550년 만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도운 여선지자 훌다가 나온다. 구약에서 여선지자는 이 세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중 미리암의 역할은 단연 돋보인다.

- 미리암은 강에 던져진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도록 연결했고, 공주에게 요청해서 어머니 요게벳을 모세의 유모로 삼게 했으며, 홍해 건넌 후 여인들을 이끌어 소고 치며 찬양의 노래를 부른 여선지자였다.

-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암은 오늘의 모세와 출애굽이 있도록 만들어낸(?) 모세의 누나였다. 미리암은 백성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실 때 모세 아론과 함께 세우신 지도자였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고 종 된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6:4)

- 참고로 마리아는 히브리어 미리암을 헬라어로 음역한 이름이다. 아론은 미리암과 함께 주도적으로 모세를 비방했기 보다는 미리암의 비방에 동조한 정도였을 것이다.

-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민12:2)

- 미리암은 모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서 그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도 계시를 주셨는데 모세가 자신의 말보다 십보라와 호밥을 더 중용한다고 불평했다. 그것이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했다고 비방하는 미리암의 실재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 모세를 비방하는 표면적 명분이 무엇이었든, 미리암의 죄악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교만이었다.(민12:2) 그녀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에게도 말씀하셨다고 하며 모세와 자신을 계시적 선지자로서 동일한 권위의 선상에 놓으려 했다.

-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2)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사역을 예표하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구약의 제사장 선지자 왕들은 모세에게서 시작되었다. 모세는 선지자로 불렸지만 대제사장 아론 이전의 제사장이었며 다윗 왕 이전에 출애굽 이스라엘의 왕적 통치사역을 감당했다. 이처럼 모세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삼중직)을 온전히 예표하던 유일한 인물이다. 모세 이후 모든 구약의 인물들은 모세가 담당했던 제사장 왕 선지자의 직분을 하나씩 전문화하여 담당한 것이다.

-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하나님 나라의 모형, 구약이스라엘을 세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신약교회를 세우심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약의 중보자 모세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 민12:6-8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 하나님은 모세의 사역이 일반 선지자와 다름을 미리암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일반 선지자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나타나 말씀하셨지만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은밀한 말이 아닌 명백한 말씀으로 계시하여 주셨다. 이는 구속사에서 모세의 역할과 사명이 매우 특별했음을 말씀하심이다.

- 하나님 나라 구속사에 있어서 모세의 사명(역할)은 일반 선지자들과 달랐다. 하나님은 모세만 사랑하고 다른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구약이스라엘을 세우는 모세의 사명이 특별한 것이다. 그는 구원중보자, 계시중보자, 기도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예표하는 사명이었다.

- 참고로 모세는 창조사건과 타락사건, 노아홍수 등을 직접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창세기를 믿을 수 있는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주의 비평학자들은창세기(1-11장)을 하나님께서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계시하신 기록이라기보다, 고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신앙과 세계관을 표현한 종교적·신화적 전승으로 본다. 그렇지 않다. 본문에는 하나님은 모세에게 직접 분명하게 말씀으로 계시를 전달해 주셨다고 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주신 내용을 모세의 문체로 기록한 것이다.

- 히3:5-6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집 구약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그들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중보자로서 위임받은 종(청지기)이었다. 이는 하나님 나라 신약교회를 세우시고 그 나라의 왕(대표자, 하나님의 아들)으로 다스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사역과 정확히 일치된다. 이러한 대조는 모세가 유일하며 히브리서는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한다.

-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사건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 신약교회를 회복완성 시키시는 예표론적 구속역사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출애굽은 그저 애굽노예에서 민족해방이요 모세는 그저 출애굽의 앞선 지도자 일뿐이다. 그녀에게 모세는 자신이 왕자가 되게 만든 동생에 불과했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권위도 모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약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 신약교회의 모형이요 모세는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담당하는 것임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 하나님은 모세를 비방하는 미리암과 아론에게 진노하시고 성막을 떠나셨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났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렸다. 아론은 급히 회개하고 모세에게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미리암의 치료를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은 미리암의 문둥병을 낫게 해주신다. 미리암은 진영 밖에 일주일 격리되었다가 후에 진영 안으로 돌아온다.

- 미리암의 문둥병 사건은 모세를 통해 이루시는 출애굽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즉 출애굽은 세계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민족이동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중보자(대리자, 실행자)로 보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 에덴의 모형을 세우시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며 호렙산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해 가나안으로 인도한다. 너는 가서....” 모세는 출애굽을 직접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에 불과했다.

-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땅에 유대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를 세우는 일반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대로 구약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이다. 세상나라의 역사가 아니다.

- 그래서 모세의 중보자 역할과 출애굽 사명이 특별하다. 그는 구약의 그 어떤 인물과도 역할이 다르다. 이는 모세 개인의 특별함이 아닌 그가 맡은 사역의 특별함이다. 모세는 예수님이 신약교회를 대표하시는 것처럼 구약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구속사의 역할을 맡았다. 구약에서 이러한 역할은 모세가 유일하다. 이것이 “모세가 내 온 집에 충성했다”(민12:7)는 말씀의 뜻이다.

- 참고로, 유럽에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4-6세기에 걸친 게르만 민족의 이동은 고대 로마제국의 지중해 세계를 해체하고 유럽 중세 시대의 막을 열었다. 게르만족은 서로마제국을 해체하고(476) 중세 유럽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체)을 세웠으며, 바다를 건너간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의 원주민 켈트족을 쫓아내고 잉글랜드를 세우는 기원이 되었다. 출애굽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다르다.

- 미국에는 인디언 부족의 이동이 있었다. 특히 체로키 부족의 이동이 대표적이다. 1830년 미국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이주법을 만들어 미시시피 동쪽에 사는 다섯 개의 부족 인디언들을 척박한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Trail of Tears, 눈물의 길,1838-1839년) 그중 애팔래치아산맥 남부 일대에 살던 체로키족 약 16,000명은 오클라호마 보호구역까지 1,300km가 넘는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으며, 굶주림, 추위, 질병으로 인해 전체 인원의 1/4에 달하는 4,000여 명이 사망했다. 체로키족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공식적으로 기념하고 추모한다. 출애굽은 이런 사건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구속사이다.

(3) “모세의 온유함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 모세는 불의를 보고 애굽사람을 쳐죽였고,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십계명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려 주동자들을 처단한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여리고 유약한 사람이 아니다. 온유(=겸손)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켜,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함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미6:8)

- 온유(아나브,gentle)함은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겸손(humble)함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아내(구스여인) 문제를 빌미 삼아 "여호와께서 너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며 그의 영적 권위를 비방했을 때, 모세는 스스로 변호하지 않았고 지도자의 힘으로 대항하지도 않았다. 그는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며 낮아졌다. 이러한 온유(gentle)함은 하나님은 주권을 믿고 신뢰할 때만 가능하다.

- 온유함은 분노나 열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담대하게 행동하면서도,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모세의 온유함이었다. 모세가 침묵하며 자기변호를 버리고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권위를 변호하셨다.

- 온유는 모든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모욕과 명예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 온유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것과 모세의 침묵과 상황이 다르다. 온유는 수동적 피동성을 말함이 아니다.(고전9장, 고후10–13장)

- 모세의 온유함은 예수님의 온유하심와 겸손하심을 미리 예표한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라고 선언하셨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말했다.

-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충성한 종으로서 온유함을 나타냈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온유와 순종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히3장) 비방자들 앞에서 침묵하며 하나님께 판결을 맡겼던 모세의 “온유함”은, 십자가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죄인들의 조롱과 채찍질을 묵묵히 견디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대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모형이다.

<b>&lt;</b><b>적용</b><b>&gt;</b><b>온유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언약을 믿는 신뢰에서 나온다</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7 Sep 2026 15:54: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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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9. 20. 온라인 실시간 예배 - 이기은 목사]]></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91]]></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MSn_BiRUI6U?si=WN5kSUtY-QUhuCD7"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strong>저는 다리로 하여금 고침을 받게 하라 (히12:1-13)</strong>

성화란 단지 성품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와의 단절이 가장 근본에 있습니다. 죄의 근원은 나의 주인됨에 있습니다. <strong>우리가 이러한 죄 문제를 실제적으로 인식하게 될 때 되어지는 고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strong>이 때문에 성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변화가 있다면 나의 작음과 하나님의 크심을 점점 더 크게 인식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함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성장과 성숙이라는 개념과 철이 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영적 변화와 그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성장'과 '성숙'은 사람이나 사물이 발전하고 나아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변화의 방향성과 성질에서는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strong>두 단어의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장은 '크기'의 변화이고, 성숙은 '깊이'의 변화입니다</strong>.

성장은 주로 눈에 보이는 양적이고 외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아이의 키가 크고, 몸집이 커지며, 지식이 늘어나고, 회사나 경제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모두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방향과 속도를 보자면 위를 향해(상승), 밖을 향해(확장) 직선적으로 뻗어나갑니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눈에 띄게 일어날 수 있으며, 빠를수록 좋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숙은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적이고 내적인 깊이가 더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아래를 향해(뿌리내림), 안을 향해(수용과 다듬어짐) 나아갑니다.

<strong>성숙은 결코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계절을 견뎌내야만 과일이 달콤하게 익듯, 오랜 시간과 경험의 축적, 즉 '시간의 뜸'이 필요합니다</strong>.

성장은 일정 기간이 되면 멈추고 한계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성숙에는 정해진 끝이 없습니다.  사람의 경우 청년기에 치열하게 '성장'을 추구했다면, 중년과 노년에는 내면을 '성숙'시키는 데 삶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게 됩니다. <strong>겉으로 더 이상 커지지 않아도, 안으로 끝없이 깊어질 수 있는 것이 성숙이 가진 힘입니다</strong>.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개념은 철이 든다는 의미입니다.

‘철이 든다'는 사리분별을 할 줄 알고, 생각과 행동이 나이에 걸맞게 성숙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어리석거나 자기중심적 인 태도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상태가 되었을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의 어원은 과거 농경 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철'은 춘하추동의 계절(사시사철)을 뜻합니다. 농사에서는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철)'를 정확히 아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습니다. 따라서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아는 어른이 되었다는 뜻에서 '철이 들었다'는 표현이 유래했습니다.

또한 '철이 든다'에서 '든다(기본형: 들다)'는 어떤 기운이나 생각, 상태가 몸이나 마음속으로 '<strong>스며들어 깊이 자리 잡다</strong>' 또는 <strong>'안으로 들어오다</strong>'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정이 들다, 나이가 들다, 정신이 들다, 습관이 들다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식으로 '철(이치나 때)을 알게 되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 <strong>'철이 들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머리로 아는 것과 존재 자체가 변하는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strong>. 또한 이러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절의 변화를 직접 몸으로 겪어내 야하는 시간의 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모진 사계절(철)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 시간들이 주는 의미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였을 때 비로서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앞서 설명한 성장과 성숙의 개념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과일의 경우 봄과 여름의 성장의 시간을 거치고 가을의 성숙의 기간을 거쳐야 비로서 온전한 과일이 될 수 있듯이 철이 들기 위해서도 이러한 시간의 뜸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숙의 기간은 어쩌면 외형적으로는 더 이상의 성장은 멈춘 것 같아 보이는 시간입니다.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계속됩니다. 나를 도와주고 함께하던 사람도 다 떠난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나만 남아 홀로 겪어내고 있는 시간처럼 보입니다.

<strong>이때에 느끼는 성도의 두려움이나 당황스러움이 있다면 이러한 시간의 뜸이 하나님의 침묵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strong>특히 성도가 당황스러움이나 두려움에 휩싸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시간의 뜸이 단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기다림의 시간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strong>성도의 환란과 고난이 하나님의 침묵과 겹쳐서 이때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strong>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은 후 25년, 모세는 40년, 사무엘도 20년, 다윗은 20년, 바울은 13년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strong>이들은 모두 부르심을 받은 직후에도 능력 면에서는 훌륭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곧바로 사역의 무대에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무언가를 더 채우려 발버둥 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와 사명이 그들의 인격과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들게(철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strong><strong> </strong>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과 시련의 계절을 통과하며 영적으로 철이 들고 ‘성숙’해지기를 바라십니다. <strong>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2장은 고난이라는 매서운 계절을 통과하는 성도가 어떻게 영적으로 깊게 익어가며, 마침내 곁에 있는 연약한 지체들의 ‘저는 다리’를 고치는 치유자가 되는지 그 아름다운 여정을 세 단계로 보여줍니다.</strong>

<strong>첫째,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며 나의 계절을 견뎌내야 합니다.</strong>

<em>“</em><em>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strong>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strong>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em>

<em>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절)</em>

여기서 ‘<strong>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strong>’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죄에 대해서는 4절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strong>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strong>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11장에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겪었던 그 일들을 확인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1장33절에서 37절의 내용을 보면 믿음으로 승리와 영광을 얻는 자들도 있지만 그 반대로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침, 톱으로 켬, 시험, 칼로 죽임당함,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을 당함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믿음의 결과를 맞는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고 싶습니까? 십자가의 영광입니까? 십자가의 고난입니까?

우리가 고난 속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육신의 아픔보다도 ‘<strong>하나님의 침묵’</strong>입니다. 솥 안에서 뜸이 들고 있는 캄캄한 시간 동안,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거나 버리신 것 같은 철저한 고독을 느낍니다. 이 고독 속에서 ‘이 길을 포기해 버릴까, 하나님을 원망할까’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얽매이기 쉬운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그 캄캄한 침묵을 온몸으로 겪어내셨습니다.

<strong><em>“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em></strong>

이 절규는 그저 육체적 고통의 신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 칠흑 같은 침묵 속에 철저히 홀로 버려진 자의 뼈저린 고독이었습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조차 고난의 시간표 속에서 그 극심한 버림받음을 통과하셔야만 했습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em>"</em><em>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em>

이처럼 영적 성숙의 출발점은 시선을 나 자신이나 환경이 아닌, 예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삶의 태도를 바꾸는 문제라면 삶의 본이 되는 수많은 위인들이 많이 존재하겠지만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문제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strong>이는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strong>

겨울의 찬 바람과 여름의 폭염 없이 달콤한 과일이 맺힐 수 없듯,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우리를 구원하실 기쁨을 내다보며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참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계절 한복판에 서 있을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유일한 이정표는 바로 먼저 그 험한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3절), 내 고난의 무게를 아시고 먼저 견뎌내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 이것이 철이 드는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strong>둘째, 고난을 ‘징계와 연단’으로 받아들여 내면을 푹 익혀야 합니다.</strong>

먼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난이라는 단어에는 자신의 잘못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지만 징계와 채찍질에 대한 단어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형벌이라는 의미가 명백하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고난이라는 단어대신 징계와 채찍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이는 성화의 과정속에서 죄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사회적 윤리와 자신의 양심에 근거한 죄의식이었다면 이제는 자범죄 이전에 이미 아담의 범죄함으로 부패된 자신의 실존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죄인됨에서 바라본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도 다르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은 자가 아니라 이미 죄인 된 자임을 알고 그 죄인됨을 인정함에서 나온 모습이 바로 고난을 징계요 채찍질로 맞이하는 태도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철이 든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온 시련을 불운 또한 하나님의 저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본문 5절부터 11절까지는 고난을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훈련)’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1절)

아이가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되듯, 성도는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아픔을 통해 성숙해집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당장’은 춥고 아픕니다. 눈물이 나고 슬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계절을 도망치지 않고 기도로 겪어낸 ‘후에’(시간의 뜸을 들인 후에), 우리 안에는 떫은맛이 사라지고 달콤하고 향긋한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부수기 위해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찌그러진 그릇에서 정금 같은 그릇으로 빚어내기 위해 연단의 불가마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strong>셋째, 내가 다진 고난의 길로 ‘저는 다리’를 고쳐야 합니다.</strong>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자, 영적 성숙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12절과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em>"</em><em>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strong>저는 다리로 하여금</strong>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em>

우리가 고난을 통해 철이 들고 성숙해져야 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맺힌 의와 평강의 열매는 나 혼자 따먹고 배부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strong>교회 공동체 안에는 늘 영적으로 다리를 저는 지체들이 있습니다</strong>. 세상의 풍파에 지쳐 발목을 삔 사람, 상처받아 걷기 힘든 초신자들입니다.

내가 겪는 고난 속에서 주저앉아 불평하며 삐뚤빼뚤 걷는다면, 내 뒤를 따르는 연약한 자들은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기도로 내 발걸음을 평탄하게 다지며(곧은 길을 만들어) 걸어갈 때, 내 뒤를 따라오는 다리 저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평탄하게 다져놓은 그 길을 밟으며 상처를 회복하고 고침을 받게 됩니다. <strong>나의 아픔이 누군가의 짐을 덜어주는 튼튼한 다리가 되고, 나의 눈물이 누군가를 살려내는 치유제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숙한 성도의 특권입니다.</strong>

<strong>말씀을 맺겠습니다.</strong>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어떤 철(계절)을 지나고 계십니까? 춥고 매서운 시련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으십니까? 지쳐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지금 통과하는 이 시련의 계절은 여러분을 ‘의와 평강의 열매’로 빚어내는 위대한 연단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로 다지며 걸어간 그 흔적이, 우리 곁에서 절뚝이며 아파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려내고 고쳐내는 생명의 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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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0 Sep 2026 16:10: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8"><![CDATA[교육과 사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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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9. 20.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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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0 Sep 2026 10:04: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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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9. 13.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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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9/image002-1.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205"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3 Sep 2026 16:11:4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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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5) - 백성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열심 (민11:1-3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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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PaF6_RN4reo?si=8mZ3ALICjR57Hbc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5) - </b><b>백성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열심 </b><b>(</b><b>민</b><b>11:1-35)</b>

<b>1. 순종과 불순종</b><b>, </b><b>복과 저주 선언</b>

(1) 율법을 선포한 후...(레26장, 신28장)

- 율법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주신 것이다. 죄인들이 613개의 하라 하지마라 명령을 통해 죄의 실체를 체험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함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만 율법을 지키고 거룩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죄용서(죄없다하심)와 칭의(의롭다하심)를 얻어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할 힘을 얻는다.

<b>2. 불순종의 백성과 하나님의 열심</b>

(1) 다베라의 불

- 이스라엘이 시내광야를 출발한 때는 출애굽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이었다.(민10:11) 그들은 약 1년간 시내광야에 머물며 성막을 만들고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시내산 광야를 떠나 바란광야로 향한다. 참고로 가데스와 가데스바네아는 동일지명이며 바란광야와 진(Zin)광야 접경지역에 있으므로 바란광야의 가데스(민13장)와 진광야의 가데스(민20장)는 모두 가능하다.

- 백성의 불평이 시작됐다. 다베라에서 그들은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불로 이스라엘 진영 끝을 사르게 하셨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자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불이 꺼진다. 다베라는 불사름, 불붙은 곳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원망하자 여호와께서 불로 징계하셨음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 다베라의 불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멸망의 불, 애굽에 내린 피 섞인 우박과 불처럼 여호와께서 직접 내리신 불이란 점에서 동일하나 이스라엘 전체를 멸망시키는 불은 아니었다. 언약백성의 원망에 대한 준엄한 징계였다.

- 지난 시간에 보았듯, 율법은 하나님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이지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으로 주신 것은 아니다. 율법을 지키면 아담이 에덴에서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체험하고 누리게 되고 율법을 어기면 에덴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백성이 되리라.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 백성 중에서 끊쳐지라 말씀하시는 의미이다.

- 다베라의 원망은 불과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후 1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들은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주신 십계명 두 돌판도 받았다. 그들은 온몸에 피를 뿌리며 언약체결예식도 했고, 제사장으로 세워진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것도 보았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다.

- 원망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로부터 나왔다. 삶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다. 광야의 삶은 애굽 노예 때보다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잠시 겪는 과정일 뿐이다. 광야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원망한 것이다. 자기주장 하려는 죄 때문이다.

(2) 탐욕의 무덤, 기브롯 핫다아와

- 다베라에서 불로 징계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얼마 후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만나에 대한 불평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죄의 욕구대로 하지 못함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배고픔 문제나 음식불평이 아니었다.

- 민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 만나는 출애굽 한 달 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져온 식량이 고갈되었던 신광야에서부터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었다. 만나는 그냥 먹기보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어 가마에 삶아 먹거나 과자나 떡(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곡물 같은 것이다. 만나는 광야생활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 첫해 농사의 소출을 얻을 때까지 약 40년간 주셨다. 이스라엘은 이 만나 밖에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 사실 이스라엘은 만나만 먹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메추라기도 주셨다. 만나처럼 매일 주신 것은 아니지만 분명 필요할 때마다 그들에게 고기도 먹게 해주셨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것이다.

- 출애굽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수르광야(3일간 물 찾아 헤멤) 하나님의 인도로 마라(쓴물을 단물로)와 엘림(오아시스)에 도착한다. 그들은 신(Sin)광야에서 식량이 없어 굶주린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다. 출애굽 한 달 후의 일이다. 참고로 한글성경에서 동명으로 기록된 가데스의 신광야(민20:1)는 시내산 가기 전의 신(Sin)광야와 히브리어가 전혀 다르다. 영어성경처럼 가데스의 진(Zin)광야라고 표기해야 혼동을 피한다.

- 불평은 식욕이나 음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나는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왕으로 살고 싶은데 지금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백성으로 살고 있다는 원망이었다.

- 그들은 애굽생활이 더 좋았다고 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이 되기보다 다시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율법)을 따라 죄를 버리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이 싫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을 거부하고 다시 죄인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아담의 반역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기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메추라기를 주신다. 그들이 하나님은 애굽의 신들처럼 고기 줄 능력이 없어 만나만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매일 메추라기가 하룻길 거리에 두 규빗 만큼 쌓였고 그들은 아무리 적게 거둬도 열 호멜을 거뒀다. 이는 한 사람이 몇 마리씩 거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메추라기를 매일 거뒀음을 말한다. 그들은 메추라기를 진 사면에 펼쳐놓았다. 아마도 고기를 건조시켜 대랑보관 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 고기를 대량으로 모으고 진 사면에 펼쳐놓은 이 행동은 단순히 부패를 막기 위한 삶의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자기를 보존하려 했던 불신앙의 행위였다. 그들은 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불신앙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자 그들은 탐욕스럽게 모았고 자신을 위해 쌓아두려 했다. 자신의 생명은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만나에 달려있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치셨고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들이라 부르게 하셨다.

- 참고로, 만나는 하루 먹을 분량만 거두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공급자이심을 알도록 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만나는 매일 새벽에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며 지상에 있는 식물의 열매(?)가 아니었다. 만나는 평일에는 하루 만에 부패하는데 안식일 전날 모은 것은 하루 지나도 부패하지 않는다. 이는 만나가 일반적인 양식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모세는 만나의 목적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케 함이라 말해준다.

신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님은 만나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떡이라 부르시며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하늘생명을 얻는다.(요6장)

(3) 하나님의 열심

- 구약의 역사는 범죄 하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참으시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열심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과 구원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거룩하고 적극적인 열정을 의미한다.

- 구원은 죄인의 반응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처음부터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고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방법이어야만 죄로 죽은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주심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규범으로 주신 것이다. 거룩의 기준을 제시하심이다.

- 구약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불신앙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하나님 나라 창조경륜을 회복완성 하시는 모형과 그림자로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이 바로 그것이다.

- 구약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 에덴을 회복완성 할 목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 구원계시를 담을 그릇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이스라엘의 실패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다.

- 범죄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참으시고 그리스도 구원역사를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열심이 너무나 크고 놀랍다. 하나님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전능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 바울은 오늘의 본문 사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한다.

- 고전10:1-5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 고전10:6-10 “그런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저희 중의 어떤 사람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우리는 악을 즐겨 하는 자가 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은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b>&lt;</b><b>적용</b><b>&gt;</b><b>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기억하고 감사드리자</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3 Sep 2026 16:10: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오경(34) - 순종과 불순종, 복과 저주 (레26:3-46)]]></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7]]></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uPM5MgjEVlU?si=mzBRWuD2OJiaQpET"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4) - </b><b>순종과 불순종</b><b>, </b><b>복과 저주 </b><b>(</b><b>레</b><b>26:3-46)</b>

<b>1. 아담에게 주신 행위언약 </b>

(1) 선악과 금령을 지키는 여부에 따라 상과 벌

-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에 두셨다. 에덴은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였다. 에덴은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의 원형이다. 하나님은 에덴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토브, 선)

-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 에덴을 경작하며 지키도록 명하시고, 에덴을 지키는(유지,지속) 방법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이 명하신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는 유무로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를 아셨다.

- 선악과 금령은 열매를 먹느냐 마느냐의 행동시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사람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다. 선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옳고, 맞고, 바르며, 악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틀리고 그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따르라”는 명령이며, 열매를 먹는 행위는 선과 악을 내가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명백한 의도를 나타내는 행위일 뿐이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당신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갈 것(=순종)을 명하신다. 그 명령은 가벼운 덕담이나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다. 그 명령은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준엄한 상벌 명령이다. 상과 벌은 왕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방법이다.

- 하나 더,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의 지속(생명)과 단절(죽음) 여부를 결정하는 행위언약이다. 이는 명령의 내용과 상벌의 성격으로 볼 때 첫아담(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아담(사람)의 후손들 곧 모든 아담들(인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선악과 금령의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설정한다. 이는 사람의 개별행동을 제약하거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떤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과 다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마땅히 갖추어야 해야 할 태도를 제시한 명령이다. 또한 선악과 금령은 지키는 여부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상과 벌로 주어진다. 생명의 상은 하나님 백성으로 에덴의 축복을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다. 벌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죽음의 지옥형벌을 영원히 받는 것이다. 

- 이처럼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단절을 결정하는 선악과 금령은 일반적인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람이 순종할 것을 명령하는 행위언약임을 말해준다.

<b>2. 순종과 불순종</b><b>, </b><b>복과 저주</b>

(1) 시내산 은혜언약 – 율법을 지키는 여부에 따라 상과 벌

- 구약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예표요 그림자였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죄인)들을 다시 하나님 백성 삼으시고(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새에덴)를 회복완성 하시려 구약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순종을 요구하시고 상과 벌, 복과 저주를 명하신다.

- 시내산 율법과 성막은 은혜언약이다. 그들은 성막을 완성하고(출35-40장), 성막제사를 배우며(레1-7장), 대제사장을 임직하고(레8-10장)정결법과 성결법(레11-20장) 절기규례(레23장) 등의 레위기 율법을 배운다. 레위기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레위기 율법을 주시며 거룩을 명하신다. 레위기에 명한 율법을 지키면 상과 복을 주시고, 어기면 벌과 저주를 내리겠다 말씀하신다. 레위기 26장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신명기도 동일하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시내산 언약과 신명기 율법을 다시 새롭게 확인시키고 신명기 율법을 지키면 상과 복, 어기면 벌과 저주를 명하며 신명기도 레위기와 동일하게 마무리 한다.(신28장)

- 레위기 26장은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언약백성은 땅에 비를 제때 내려주시고, 땅이 소산을 내며, 평안하고, 원수에게 승리하며, 가나안 땅에서 번성할 것이라 말씀한다. 또 불순종 할 때는 질병 기근 전쟁이 계속되고, 원수에게 패배, 땅이 황폐하고, 포로가 되며,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씀한다.

- 참고로,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는 축복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저주장이다. 신명기 28장은 축복구절(14절) 보다 저주구절(54절)이 4배 이상, 레위기 26장은 축복구절(10절) 보다 저주구절(32절) 분량이 3배 이상 더 많다. 에덴에서 아담은 1개의 율법조항(선악과 금령)만 지키면 됐지만, 타락한 죄인들은 613개의 긍정부정 율법조항을 지켜야 외형적으로라도 겨우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모세는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순종을 요구하고 마지막에 상벌주심을 강하게 선언하고 맺는다. 죄인인 사람에게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며(=죄)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강하게 명령하는 것이다.

- 선악과 금령과 시내산 율법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본래 거룩은 피조물과 분리/구별됨을 뜻하는 하나님의 절대속성이다. 피조물에게는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나타내는 거룩을 사용할 수 없다. 피조물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에덴에 창조하신 그 상태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죄가 없고 의가 있는 하나님 형상의 그 모습 그대로를 의미한다.

- 선악과 금령과 시내산 율법은 모두 피조물의 거룩을 명령하고 상벌을 규정함이 동일하다. 창조주께서 자유인격체 사람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악과 금령과 시내산 율법은 동일한 순종을 명하고 있지만 그 대상자가 다르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규정된다.

- 선악과 금령은 죄가 없는 아담에게 주신 행위언약이다. 아담은 죄가 없고 거룩했고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므로 자기 힘 자기 결정에 따라 행위언약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시내산 율법은 죄인에게 주신 은혜언약이다. 죄인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기에 율법을 자기 힘으로 지켜 의롭고 거룩해질 수 없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 모세가 상벌규정과 함께 강하게 명령한 율법은 죄로 죽은 사람들 스스로 지킬 수도 없다. 율법은 지은 죄는 속죄제사로 죄용서 받게 해주며, 죄와 의를 구별케 하고, 거룩함이 무엇인지 제시해 줄 뿐, 사람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없애지 못하고, 거룩케도 못하며, 의롭게도 못한다.

- 처음부터 율법은 은혜언약으로 주어졌기에 멸망계시가 아닌 구원계시가 된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람(죄인)과 직접 언약을 맺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고 맺으시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시고 죄인(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이루시는 언약이다. 참고로, 에덴에서 주신 선악과 금령을 제외한 성경의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이다.

(2)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의(칭의)를 힘입어 지킬 수 있다.

-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의 상벌규정 복과 저주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지키도록 주신 계명이다. 이는 사람 스스로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 아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 등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켜 거룩해진 사람이 없다. 구약의 모든 인물은 율법을 지키며 멀리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바라본(믿었던) 사람들이다. 히브리서가 그것을 증거한다.

- 시내산 율법(구약)은 우리를 새언약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선생)이다. 구약율법은 그 목적 자체가 사람에게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나아오도록 주신 것이다. 구약율법을 자세히 연구하고 진심으로 지켜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만나게 되어 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초정통파 유대인 하레디와 하시드는 성경이 계시하는 (원)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다.

-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얻는다. 성령께서 죄인을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의로 덮으사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렇고, 신약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체험과 고백도 그렇다.

- 시내산 율법(은혜언약)에 대한 축복과 저주는 에덴의 선악과 금령(행위언약)처럼 주신 것이 아니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구약율법은 자기 힘으로 지키라는 행위언약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지키라는 은혜언약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 죄사함과 성령의 의롭다하심을 힘입어 죄를 이기고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성도는 삶에서 정말 죄를 이기고 거룩해진다.

- 하나님의 의(칭의)는 죄인의 영혼만 거룩케 하고 실제 삶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영지주의 영육이원론에 근거한 무율법주의 구원파 이단들의 주장이다. 사도신경은 영혼부활이 아닌 육체부활을 강하게 명시한다. 구원을 영혼부활로 가르치며 육체의 타락을 정당화하는 오늘날 구원파 무율법주의 이단들 때문이다.

- 바울은 그의 서신들 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명확하게 언급한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의 대상자는 불신자가 아닌 성도들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믿으면 성령을 힘입어 삶에서 죄를 이기며 실제로 거룩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실제 삶과 무관한 종교적 의미의 거룩이 아니다.

- 고전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엡5:5-6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시는 사람을 언급하신다. 그들은 초신자들이 아닌 신앙이 깊고 주의 일을 한다는 교회의 지도자급 성도들이었다. 주님이 누군지 모름이 아니다. 주님을 그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수많은 권능을 행하나 의의 법을 따르지 않고 거룩함이 없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마7:20)

- 성경은 어디에도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켜 거룩해지라는 율법주의 말씀도 없고 예수 믿으면 거룩함의 율법을 버리라는 무율법주의 말씀도 전혀 없다. 복음은 십자가 죄사함과 성령의 의롭다하심으로 율법이 가르치는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하며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도의 삶을 거룩하게 만든다. 그래서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의 상과 복을 받게 된다.

(3) 내가 내 장막을 너희 가운데 세우리니...

- 율법을 지켜 거룩함을 유지한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성소를 두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성막/성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레위기 26장에 말씀하신 최고의 상과 복이다.

- 레26:11-12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언약적 임재의 장소이며, 거룩함의 상징이었다. 구약이스라엘과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복음과 하나님 나라 구원계시를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는 등경위의 등불, 산위에 세운 동네(마5:15)인 왕 같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다.(벧전2:9)

- 겔37:27-28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 마지막 날에 성도는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는 부활영화를 얻는다. 그러나 현재의 성도는 죄의 본성을 가졌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아 성령내주(칭의)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거룩함대로 살 것인가? 여전히 죄의 본성을 따라 살 것인가? 겉사람과 속사람이 싸우고, 옛사람과 새사람이 충돌한다.

- 구약의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우리의 순종만을 요구하지만, 신약의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요15장)와 갈라디아 5장, 6장은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 구약 역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 멸망하는 이스라엘로 끝난다.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죄인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이다.

-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b>&lt;</b><b>결론</b><b>&gt;</b><b>거룩함이 복음이다</b><b>. </b><b>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거룩함을 얻는다</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Mon, 07 Sep 2026 07:00: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9. 6.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9/image002.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201"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6 Sep 2026 15:54: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8. 30. 온라인 실시간 예배 - 이기은 목사]]></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5]]></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FJNfQadyyc?si=MB0rwyejBZf2795H"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strong>우리가 주목하는 것 (고후4:7-18)</strong>

예수를 믿었던 삶을 그저 겉으로 비춰졌던 모습으로서만 표현해 본다면 끊임없는 수고와 고생의 연속이었던 삶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부요한것도 아니었고 내가 원했던 일들을 성취했다거나 어떠한 성공의 스토리도 없어 보이는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러한 나를 본다면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것이 없어보이는 사람들 중에 한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strong>그런데 왜 나는 오늘도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주님을 전하고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strong> 문득 이러한 나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받은 은혜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감사하게 하는 것일까?

현실은 늘 부족하고 나의 모습은 세상과 비교해서 늘 나약해 보이는데 무엇이 은혜가 되기에 오늘도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고 있는 것일까?

19세기 공산주의자 칼 막스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종교가 현실의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서 그 아편 같은 종교는 고통을 잊게 해주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환각제라 한 것입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한 말이지만 <strong>노동자들이 현실의 불평등의 문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현실에 순응하고 인내하며 기도하게 하기 때문에</strong> 종교가 지배계급에게는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보면서 했던 말이었지만 혹시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모습도 세상 사람에게는 아편에 심취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strong>혹시 현실의 문제가 나로 하나님을 더욱더 열심히 붙들게 하고 기도하게 하며 예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strong>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strong>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strong>.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질그릇이라 고백하면서 그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는 것으로 증거하였습니다.

<strong>1.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strong>
<ul>
 	<li><strong>보배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strong> 이는 예수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것으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li>
 	<li>그런데 그 보배를 존귀한 그릇에 담아두지 않으시고 보배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담게 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요 구원의 섭리임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li>
 	<li>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li>
 	<li>이는 처음부터 존귀한 자든 질그릇과 같이 무능력해 보이는 자든 상관이 없이 <strong>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분명히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strong></li>
 	<li>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비방하지 아니하고</li>
 	<li>바울은 자신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현실의 수고와 고난을 능히 막아내고 이겨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저 질그릇과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 일뿐이지만 현실 앞에 있는 문제들이 바울 자신의 삶을 불행과 고통으로 이끌고 있지는 아니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고 이는 자신과 성령의 능력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문제가 안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li>
 	<li>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li>
 	<li>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삶을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능동적인 삶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의 고백처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히는 삶으로 증거한 것입니다.</li>
 	<li>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li>
 	<li>바울은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우리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li>
 	<li>이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li>
 	<li>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증거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증거합니다.</li>
</ul>
<ul>
 	<li><strong>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 지도다. </strong></li>
 	<li>바울은 자신의 현실의 삶의 어렵고 힘들며 어쩌면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힘든것이 맞고 또한 수고스러운 것이며 어쩌면 늘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하는 문제들이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현실의 문제들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직면한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낙심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li>
</ul>
<ul>
 	<li><strong>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strong></li>
</ul>
우리가 구원의 서정을 논할 때 칭의, 성화, 영화의 단계로 설명을 합니다. 이때 최종 단계인 영화(glorification)는 부활과 영화의 때에 주님 앞에 서는 순간 모든 신자는 예외 없이 완전하고 흠 없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화의 순간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남아있던 죄성의 남은 찌꺼기 들은 완전히 제거하시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을 덧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거나 주님 앞에 설 때 <strong>우리는 영화를 통해 한 순간에 완전해질 텐데 왜 굳이 성령께서 이 땅에서 힘겹게 우리의 성화를 도우시며 왜 이 땅에서의 성화가 반드시 필요한가?</strong>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화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할 종교적 의무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며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시고 주안에서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strong>2. 그렇다면 성화란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strong>
<ul>
 	<li><strong>성화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관계의 회복 과정입니다. . </strong></li>
 	<li>하나님께서는 레위기서를 통하여 “<strong>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레19:2)</strong>고 말씀하셨습니다.</li>
 	<li>거룩하지 않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영적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으로 이끄시는 이유는 단순한 규칙 준수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과 숨 쉬듯 친밀하게 사귀고 사랑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성화가 깊어질수록 신자는 주님의 임재와 평안, 기도를 통한 살아있는 교제를 깊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li>
</ul>
<ul>
 	<li><strong>성화는 깨어진 원래의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strong></li>
 	<li>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단지 죄의 형벌의 면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strong>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시 빚어내어 창조의 원래 질서를 회복시키고 계십니다.</strong></li>
 	<li>우리가 천국에서 영화의 모습으로 온전히 변화될 때 그 변화는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완전히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li>
 	<li>고린도 전서3장 12-15절은 신자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 각자의 삶과 공적이 불로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때에는 불타 없어지는 것이 있고 영원히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strong>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와 싸워 이긴 성화의 열매들, 복음 때문에 종 된 모습으로 헌신한 사랑과 희생들은 불타지 않고 영원한 상급과 영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strong></li>
 	<li>우리의 죄성은 완전히 소멸되지만 성령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의 끊임없이 나아갔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영적 성장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상급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li>
</ul>
<ul>
 	<li><strong>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됩니다. </strong></li>
 	<li>천국에는 복음을 전해야 할 죄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죄로 인해 타락하고 어두운 이 땅에서만 가능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전도입니다.</li>
 	<li>세상 사람들은 성경이나 교리를 직접 읽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살아있는 책을 읽습니다. 세상이 돈, 권력, 쾌락을 좇아 탐욕스럽게 살아갈 때 절제하고 손해보며 사랑을 베푸는 성화된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strong>‘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 구나’</strong>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빛과 소금이 됩니다.</li>
 	<li>성령께서는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 우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를 오늘도 거룩하게 다듬어 가고 계십니다.</li>
</ul>
이처럼 성화는 숙제가 아니라 생명 있는 자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생명의 호흡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령께서 우리의 성화를 도우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거운 종교적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부모가 갓난 아이를 낳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칭의라고 한다면 성화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걷고, 말을 배우고,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나 부모와 깊은 대화를 나누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과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성숙한 존재로 자라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주를 경험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strong>성화는 이러한 거룩을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입니다</strong>.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방향을 맞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모습으로 비유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는 노를 저어 항해할 수는 없습니다. 잠시는 노를 저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금세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무풍지대를 만나게 되면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성도는 배를 저을 수 있는 노도 없고 힘도 없어 보이지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방향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strong>성화는 점점 더 정확하게 하나님과 방향을 맞추어 가는 과정입니다.</strong> 하나님과 방향을 정확하게 맞출수록 나의 힘은 점점 더 적게 들고 수고도 덜 하게 될 것입니다.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30 Aug 2026 16:59: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8"><![CDATA[교육과 사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8. 30.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3.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98"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30 Aug 2026 10:55: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8. 23.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3]]></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2.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96"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3 Aug 2026 16:15: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오경(33) - 안식일과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들 (레23:1-14, 골2:16-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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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iJ85WYTeWw?si=Z8P7YmVA45X3TYC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3) - </b><b>안식일과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들 </b><b>(</b><b>레</b><b>23:1-14, </b><b>골</b><b>2:16-17)</b>

<b>1. 구약의 절기 </b>

(1) 하나님 나라 구원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짐

-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개인절기)와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등(국가절기)은 개인과 나라가 의미를 부여한 중요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구약성경의 절기는 다르다. 구약의 절기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구원계시이다. 성경에는 시내산 구원계시가 아닌 유대민족만의 역사기념일도 있다. 부림절과 수전절이다.

-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키리라”(출5:1) 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이 절기를 지키도록 위함이라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 율법 속에 성막규례, 제사제도, 대제사장 역할...그리고 절기지킴을 중요한 종교의식법으로 명하셨다. 오늘은 구약절기에 대해서 살펴본다.

<b>2. 안식일과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들</b>

(1) 구약절기 –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 구원의 전 과정

- 구약절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 구원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걸쳐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광야40년, 가나안 정착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언약 이루심을 기억하고 확인한다.

- 구약의 절기는 출애굽 구원을 기억하는 종교적 절기이다. 날짜로 보면 1월과 7월을 기점으로 거의 정확히 반복되고 봄 추수감사와 가을 추수감사의 의미도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구약절기를 통칭해 하나님 나라 구원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수감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며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레23:10) 그러므로 유월절에서 초막절에 이르는 시내산에서 주신 절기들은 통칭해서 구원절기라고 말함이 옳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구원받아 가나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구원의 전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1월(아빕월,니산월, 태양력의 3월경) 출애굽 구원을 기억하는 유대 종교력의 시작이다. 1월 1일 유월절 구원절기를 시작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고, 1월 10일 유월절 양을 선택하여 준비해두고, 1월 14일 유월절 저녁식사(페사흐 세데르)를 준비하고 1월 15일을 시작하는 저녁에 유월절 양을 잡고 저녁식사를 하며 무교절기(일주일)를 지낸다.

- 또한 무교절기 일주일에 있는 안식일 후 첫 날(주일)을 초실절로 지내고, 초실절부터 날짜를 계산해서 50일째 되는 주일을 오순절로 정하고 일주일을 지킨다. 오순절 이후 여름을 보내며 약 4개월 지난 후 가을절기가 정확히 반복된다. 감사하게도 초실절과 오순절은 이스라엘 곡식농사인 보리와 밀 추수와 겹친다. 하나님은 초실절과 오순절에 곡식의 첫이삭을 바치며 구원을 감사하는 절기가 되게 하셨다.

- 7월(태양력의 9-10월)은 이스라엘 민간력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에서 한 해의 시작은 7월부터이다. 7월 1일 나팔을 불며 유대 농사와 민간력의 한 해를 시작한다.(나팔절, 로쉬 하샤나) 7월 10일 대속죄일로 지키고,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초막절기(장막절,수장절)로 지킨다.

-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초막절기 일주일을 마친 후 여덟째 날이다. 이날은 “여덟째 날의 성회” 또는 “여덟째 날의 집회”(쉐미니 아체레트) 이다.(레23:39) 이날은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이 바로 초막절(숙곳, 수꼬트) 일주일을 마친 후 여덟째 날을 뜻한다.

- 우리는 이 여덟째 날(쉐미니 아체레트, 큰 날)을 기억해야 한다. 이 날은 유월절에서 초막절로 끝나는 일 년 구원절기를 마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큰 날이다. 첫창조의 7일을 완성하고 제8일을 시작하는 그리스도 새언약과 새창조의 날이다. 그래서 “큰 날”이다.

- 시내산 구약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교회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죄와 사망,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구원받았다.(유월절,무교절) 무교절기 안식 후 첫날(주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오십일째 성령으로 강림하셨다(초실절,오순절)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강림(재림)하시길 기다리며 지금 성령내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살아간다(나팔절)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제사를 이루시고 성소휘장을 여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피로만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대속죄일) 마지막날 주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심판하사 자기백성을 천국창고 곧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 새에덴에 모으시고 천국잔치를 여신다.(초막절,수장절)

(2) 안식일 –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속량구속을 기억

- 하나님은 일년 동안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며 또한 일주일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강력하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십계명의 넷째 계명으로 주셨고, 심지어 안식일을 고의로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엄히 말씀하셨다.(출31:15,출35:2) 성경에는 안식일에 나무하다 붙잡혀 율법대로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다.(민15:35)

-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음을 기억도록 위함이라 말한다.(출20:11) 신명기는 출애굽 구속을 기억하도록 위함이라 말했다.(신5:11)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바라보게 주셨다. 동일한 의미이다.

-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신5:12-14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억하도록 주신 절기이다. 창조의 안식과 구속의 안식은 동일하다. 회복해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됨(구원)을 기억하고, 회복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첫창조의 하나님 나라 안식을 사람의 죄 때문에 잃어버렸음을 기억하며 창조의 안식일을 지키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구원받아 시내산에서 언약백성이 되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구속으로 다시 하나님 나라 에덴을 회복완성 시켜주심을 바라보며 구속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 이처럼 안식일 하루 속에 구약의 절기가 말하고 있는 구원의 모든 의미가 담겨있다. 유월절에서 초막절까지 한 해 동안 지키는 구원절기의 의미를 일주일 마다 한 번씩 안식일에 기억하고, 또 7년째 안식년과 50년째 희년의 의미도 역시 일주일마다 안식일에 기억한다.

-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노동금지이다. 누구를 불문하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멈추라는 것이다. 물론 안식일 노동금지는 종과 하인, 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쉼을 주며 삶을 보호해 준다. 주인과 부자, 권력자는 직접 일하지 않고 종과 일꾼들에게 노동을 시킨다. 그러나 안식일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날이 아니다. 노동금지는 약자들의 삶을 지켜주는 것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노동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사람은 잠시 죄의 탐욕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안식일을 노동금지의 날로 만들어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으면,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계속 일하고, 또 종에게 일을 시킨다. 종업원이나 가난한 약자들도 생활문제 두려움 때문에 쉬지 못한다. 사형규정을 두고 강제금지 시켜야 죄인의 탐욕과 두려움으로 인한 일(노동)을 멈출 수 있다. 권고사항이면 사람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구속을 기억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마12:8 막2:28 눅6:5) 예수님은 첫창조의 안식을 가지신 여호와셨다.(창조중보자, 창조실행자)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안식일 계명을 주신 분이시다.(계시수여자) 예수님은 안식일이 가리키는 실체이시다.(구속사역으로 안식을 주시는 분) 예수님은 왜곡된 안식일을 바르게 정의해주시는 결정자시다.(계시해석자) 예수님은 옛창조의 안식일을 새창조의 안식일로 바꾸시는 주권자시다.(계시성취자)

(3) 절기와 안식일... 장래일의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음식정결법(레11장) 절기지킴, 안식일 등의 구약율법의 모든 종교의식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들로서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그림자와 모형 되는 구약율법(종교의식법)은 그 역할을 다하고 종결폐기 되었다.

- 신약교회는 더 이상 구약절기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지켜서도 안 된다. 지킨다면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주제이다.

- 금요일저녁 혹은 토요일에 드리는 샤밧예배와 메시아닉쥬를 주장하는 기독교 시오니스트, 현대이스라엘 회복주의자들이 있다. 이는 세대주의 두왕국 두백성 신학에 근거한 잘못된 주장이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교회를 성취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 믿어야 하나님 백성이 된다. 이것이 신약이며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이다.

<b>&lt;</b><b>결론</b><b>&gt;</b><b>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절기를 성취하셨다</b><b>. </b>

</div>]]></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23 Aug 2026 16:14: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8. 16. 주보]]></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1.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93"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6 Aug 2026 16:53: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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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2) - 대속죄일의 거룩, 죄사함과 칭의 (레17:10-16)]]></title>
			<link><![CDATA[https://gospel323.com/?kboard_content_redirect=1480]]></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c-fzmf_KV0?si=u-l0z-R0aKwZm_iL"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strong>온라인 예배 실황은 월요일에 주일설교 말씀만 남겨 두고 삭제됩니다.</strong>

<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2) - </b><b>대속죄일의 거룩</b><b>, </b><b>죄사함과 칭의 </b><b>(</b><b>레</b><b>17:10-16)</b>

<b>1. 구원은 거룩하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b>

(1)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벧전1: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이스라엘 히브리 성경에서 시작된 복음이 헬라세계로 전파될 때 발생한 오해는 영육이원론이다. 하나님 나라 구원을 죽어 영혼이 천당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의 이유(죄와 사망) 구원의 방법(그리스도 복음) 구원의 결과(하나님 나라 백성됨)를 복음(교리)으로 가르치고 그 다음 이 땅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자세히 가르친다. 영육이원론으로는 신약성경의 서신서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 구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얻는 것이다. 거룩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라 에덴의 창조경륜을 회복완성 함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하시고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됨이다.

- 왜 구원의 목적과 결과는 거룩함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시려면 거룩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거룩한 백성 되는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레위기와 성경 전체는 거룩함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다.

<b>2. 대속죄일의 거룩</b><b>, </b><b>죄사함과 칭의</b>

(1) 대속죄일과 피의 의미 (레16장 - 17장)

- 레위기는 세밀히 나무를 살펴보면 매우 복잡해서 길을 잃기 쉽지만, 전체 숲을 보면 말하는 바가 명확해서 그리 어렵지 않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세우시고 언약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규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책이다.

- 대속죄일 규례(16장)와 피의 의미(17장)가 레위기 전체의 중심이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나라 전체를 거룩케 하는 절기이다. 이는 속죄제사 염소의 피, 지성소와 번제단 정결, 아사셀 염소 추방으로 나라 전체의 죄를 제거하는 세 단계로 구성된다.

- 대속죄일 규례는 구원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송아지로 속죄제사를 드리고 지성소 휘장 안에 분향의 연기를 가득하게 피움으로 시작된다. 분향의 연기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죽지 않도록 가려주는 구름과 같다. 이는 대속죄일 규례를 진행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다.

- 대속죄일의 본론은 두 마리의 숫염소에 있다. 먼저 대제사장은 두 염소 중 선택한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드리고, 그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 덮개인 속죄소(은혜의 보좌) 위에 뿌리고 또한 언약궤 앞에 일곱 번 뿌린다. 이는 백성의 죄로 인해 더렵혀진 지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후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나와 염소의 피를 번제단 네 뿔에 바르고 피는 번제단 아래 쏟는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은 두 번째 숫염소에게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전가하고 광야 먼 곳을 내쫓는다. 대속죄일 규례는 거룩을 위한 세 가지 단계를 보여준다.

- 첫째, 속죄이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사 염소의 피는 속죄를 가져온다. 속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키프르는 “죄를 덮고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다”는 의미이다. 즉 속죄란 하나님께서 염소의 피를 보고 죄인이 이미 저지른 나의 죄책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구약에서 수없이 드려진 희생제물의 피는 죄책형벌로서 죽음을 대신 담당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심이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죽음)을 보고 내 죄를 덮고 가리며 간과하시는 것이다. 이는 짐승의 피가 실제 죄를 제거하는 효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짐승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주신 것이다. 대속죄일 염소의 피는 혹시 남아있을 수도 있는 지난 1년 동안 백성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모두 치루고 이스라엘 진중에는 더 이상 죄가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거룩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인 속죄의 뜻이다. 속죄는 죄책을 면제한다.

- 둘째, 죄책이 제거되었다고 거룩해짐은 아니다. 죄로 더러워진 것을 깨끗케 해야 한다. 정결함이다. 염소의 피는 죄로 더러워진 부정과 불결을 정결케 한다.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로 드린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속죄소 위에 뿌리고, 다시 지성소에서 나와 분향단 네 뿔에 바르고, 번제단 네 뿔에 바른다. 이는 죄로 더럽혀진(부정, 불결) 지성소와 분향단 번제단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말한다. 죄로 더러워진 기물은 피를 뿌리거나, 발라서 정결케 된다.

-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물론 어떠한 짐승의 피도 사람의 죄를 속하지도(죄책제거), 부정한 것을 정결케도 못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 그렇게 예표로 정해주신 것일 뿐이다.

- 셋째, 죄를 제거함이다. 대제사장이 두 번째 수염소(아사셀)에게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모두 전가한 후 광야 먼 곳으로 내쫓는 것은 이스라엘 진중의 죄를 완전히 제거함이다. 광야로 내쫓긴 아사셀 염소가 다시 집을 찾아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죄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므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사셀 염소는 결코 진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광야 무인지경 먼 곳으로 내쫓는다. 아사셀 염소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는 것은 성경이 아닌 유대교 전승 미쉬나의 기록이다. 물론 아사셀 수염소는 곧 다른 짐승에 의해 죽었을 것이지만 성경은 돌아올 수 없는 광야 먼 곳으로 내 쫓았다 라고만 기록한다.(레16:21-22) 아사셀 수염소는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나가신 그리스도에게 성취되었다.

- 이로서 대속죄일(욤키프르) 대제사장이 하는 일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거룩함을 세우는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속죄, 정결, 죄를 제거함이다.

(2) 정결법(=더러움과 접촉을 피함, 레11-15장), 성결법(=죄를 제거, 레18-20장)

- 레위기 11장부터 20장까지는 거룩을 이루는 방법으로 속죄, 정결, 성결(죄를 제거함)에 대해서 보여준다. 먼저 정결과 성결의 차이를 잠간 살펴보면 정결은 내가 부정한 것과 접촉하므로 부정(불결) 더럽혀진 경우에 해당한다. 성결은 내가 죄를 행함으로 나와 공동체와 땅을 부정(불결) 더럽혀진 경우에 해당한다. 죄는 인격존재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이다. 자연재해, 질병... 은 분명 악이나 죄는 아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악이다. 성결은 사람의 죄로 인한 부정함은 제거하라는 것이고, 정결은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용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사용하면 혼동되지 않는다.

- 첫째, 레위기 11장부터 15장까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 위하여 더러움과의 접촉을 피하고 정결법이다. 음식 정결법(11장) 산후 정결법(12장), 나병과 피부병, 의복과 가죽에 핀 곰팡이의 정결여부 판별과 정결법(13장-14장) 남녀 유출병 정결법(15장)이다.

- 레위기의 각종 정결법을 보면 하나님은 너무 세밀하고 엄격하게 요구하신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특히 음식 정결법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일일이 규정해주시는 것, 비늘 없는 물고기와 토끼, 돼지 같은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나, 산후 정결법 등을 보면 이런 것들이 거룩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이런 율법들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알려주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초보적으로 주신 것들이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초등선생님이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들이다. 유치하지만 초등학생 때 기초로 배워야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선생, 초등학문이다.

- 이런 구약 정결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가 거룩해져야 함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추상적 아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먹는 것과 접촉하는 것들 중 조금이라도 부정하고 불결하며 더러운 것이 있어는 안 된다. 우리의 부정(불결)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실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레위기 18장부터 20장까지는 사람이 저지르는 죄에서 거룩케 되는 성결법이다. 내가 죄를 행함으로 자신과 공동체와 땅을 부정(불결)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내게서 죄를 제거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행장(18장, 가나안 음행 금지), 언약백성의 성결한 삶(19장, 십계명과 생활규범, 레위기의 성결법전) 성결을 범한 자 형벌(20장, 몰렉제사, 우상숭배자, 신접한 자, 음행자... 반드시 죽이라) 이다.

- 원죄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아담의 후손, 아담들)가 범죄했으므로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함께 사망형벌에 처했고(죄책)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죄인으로 태어남을 말한다.(오염) 자범죄는 죄로 오염된 사람이 죄의 본성으로 살아가며 자기 생각과 의지적 행동으로 저지르는 모든 행위들이다.

- 거룩은 나를 더럽히는 외부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정결), 또 내가 저지르고 있는 더러운 죄의 행위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마치 아사셀 염소를 광야 먼 곳으로 내쫓듯, 나와 공동체 속에 있는 부정한 것들과 내 속의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기 위함이다.

- 유독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범죄가 있다. 우상숭배와 음행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하나님과 결혼관계로 비유되는 언약백성의 타락을 지적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남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남편(우상)과 행음하고 있는 음녀라는 것이다. 이 두 범죄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의 자기중심성을 충족시켜주는 결과들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경외함 대신 자기를 섬겨줄 하나님(우상)을 만들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자신의 성적 탐욕을 채워줄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죄사함)와 부활(성령강림, 칭의)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는다.

- 히10:4,10,1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성막제사와 대제사장 규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사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거룩함을 얻고 온전하게 되었다. 매년 대속죄일(욤키프르)에 거룩함을 위한 속죄, 더러움 제거(정결), 죄의 제거(성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 얻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더 명확하게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 십자가는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셨다.

- 첫째, 십자가 죄사함이다. 속죄이다. 형벌면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아담 안에서 범죄했던 나의 죄책을 담당하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사망형벌은 다 지불된 것이다. 더 이상 아담의 원죄로 정죄함이 없다. 이것이 히브리어 키프르 죄를 덮어 가리다는 뜻의 속죄이다. 죄사함이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속죄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마지막 심판 날 우리를 죄 없다 형벌 없다고 선포함이다. 결국 내가 지을 미래의 죄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죄 없다하심을 얻는다는 필연적 결론에 이른다. 이는 신학적으로 옳고 100%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하심은 정확히 이해돼고 사용돼야 한다. 오해하면 구원파 무율법주의 이단으로 빠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인인 우리에게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심은 미래에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용이 아니다.

- 둘째, 부활하심으로 성령을 보내주셨다. 십자가 죄사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내주,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주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날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인하고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죄를 이기고 거룩해질 수 있다.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으며 죄를 제거함으로 성결함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죄사함과 성령내주로 거룩함을 얻는다.

죄사함과 성령강림은 우리 구원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두가지 요소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말함이다. 죄사함을 강조하되 성령강림까지 포함시켜야 하며, 성령충만을 강조하되 죄사함을 약화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복음의 능력이다.

<b>&lt;</b><b>결론</b><b>&gt;</b><b>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b><b>(</b><b>칭의</b><b>) </b><b>거룩해지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동행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자</b><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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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16 Aug 2026 16:5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3"><![CDATA[주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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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 8. 2.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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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mg src="https://gospel323.com/wp-content/uploads/2026/08/image002.jpg" alt="" width="1200" height="1020"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189" />]]></description>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2 Aug 2026 16:14: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ospel323.com/?kboard_redirect=7"><![CDATA[주보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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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오경(31) - 예수 그리스도, 우리 대제사장 (레8:1-3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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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o1RpkA9Mb5Y?si=t9MRGoTOAeuYmkVR"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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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div style="text-align:justify;"><b>오경</b><b>(31) - </b><b>예수 그리스도</b><b>, </b><b>우리 대제사장 </b><b>(</b><b>레</b><b>8:1-35)</b>

<b>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b>

(1) 성막구조(출35-40장)와 희생제사(레1-7장)

- 출애굽 이스라엘은 시내산 광야에 머물러 1년을 보낸다. 하나님은 그곳 시내산에서 강림하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을 향한 하나님 나라 계시를 주셨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과 성막규례들이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구원하신 후 그들에게 이방죄인들 특히 가나안 일곱 족속들과 구별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신 여러 규례들을 자세히 말씀해주신 것이다.

- 특히 성막구조와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 성막은 지성소와 내성소로 구별해 각각 언약궤와 분향단 떡상 등잔대를 두고, 성소 밖인 성막뜰에 번제단과 물두멍을 두는 이중구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제사장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 정결예식을 하고 번제단에서 속죄제사를 드린 후 내성소로 들어가 무교병을 진설하고 등잔대 불을 밝히고, 성소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 언약궤 앞에서 분향하는 것이다.

- 이러한 성막구조와 예배방식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예수 그리스도 계시였다. 아담의 죄로 타락한 죄인이 죄용서 받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은 이 계시를 모든 인류에게 전달하도록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다.

- 참고로 구약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난 새언약 백성 신약교회(=그리스도인들)의 조상이다.(고전10:1, 갈6:16) 지금 이란과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은 유대민족 세속국가일 뿐 선지자들이 예언한 새언약의 성령을 받은 이스라엘 회복이 아니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성막의 구원계시는 성막구조물, 희생제사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오늘은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다.

<b>2. 예수 그리스도 우리 대제사장</b>

(1)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보자이다.

- 구원계시로 보면 대제사장의 직무는 성막에서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집례 하는 종교인들의 대표가 아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대표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 성막계시를 위해 세우신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예표하는 특별한 직분자이다. 대제사장의 중보사역으로 제사가 드려지듯, 예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성막과 희생제사,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구원계시이다. 이는 절대로 변형하거나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은 다른 불로 분향하던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셨다.(레10장)

-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을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 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 구원계시를 아버지로부터 정확히 받았고 그대로 믿었기에 양을 드린 것이다. 믿음 없이 양만 드린다면 하나님은 기름타는 냄새가 역겹다고 하신다. 믿음 가지고 다른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는가? 그럴 수가 없다. 아담이 전해준 여자의 후손 구원계시를 믿는다면 양의 첫새끼로 희생제사를 드려야한다. 다른제물을 드리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 성막규례와 제사는 하나님 구원계시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변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왕처럼 대접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드리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번제단의 거룩한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진노하심을 받고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계시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양의 첫새끼를 드린 아벨의 희생제사처럼 속죄의 피로 거룩해진 번제단의 불이 아니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 솔로몬 이후 다윗왕국이 분열될 때, 여로보암은 10지파로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그는 분명 선지자로부터 북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나라를 세운 후 우상숭배를 시작한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고, 임의로 절기를 정하며,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이다. 아론의 금송아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성경기자들은 이것을 여로보암의 죄라고 했다.

- 벧엘의 금송아지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나라 구원언약을 주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벧엘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중보자가 될 수 없다. 모양만 흉내 낸 거짓복음 거짓종교 거짓교회인 것이다.

- 하나님은 유다의 한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 벧엘산당이 요시야에 의해 파괴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 예언은 약 300년 후에 정확히 성취된다.(BC622) 북이스라엘은 요시야가 오기 100년 전에 멸망했다.(BC722) 무지막지한 예후는 바알산당을 변소로 만들어 더럽혔지만, 점잖은 요시야는 사람의 뼈(시체)를 불태워 벧엘을 부정케 했다. "다윗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이 날 것이라.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왕상13:2)

(2) 속죄의 피로 정결케 하고 관유(기름)를 부어 성별하고 대제사장을 위임하다.

- 대제사장은 성막구원계시의 필수직분이기에, 모세는 성막 제사장의 임직 및 위임예식을 거행한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물로 씻어 정결케 한 후 속옷을 입힌다.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겉옷을 입히고 제사장 에봇을 입히며 띠를 띄운다. 아론의 아들들에게는 속옷 위에 띠를 띠게 하고 제사장의 관(모자)를 씌운다.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금패가 붙은 거룩한 관(모자)을 씌우고, 우림과 둠빔을 넣은 열 두 보석 흉배를 에봇 위에 붙인다.

-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수종할 때 흰 예복을 입고 띠를 띠고 제사장 모자(관)를 쓴다. 대제사장은 제사장 예복 위에 에봇을 입고 흉배를 붙이고 대제사장 모자를 쓴다. 이는 일반인과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이며 특히 짐승의 피를 다룰 때 흰옷은 쉽게 피로 물든다. 그들이 성막에서 수종들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중보자로서 사역함을 분명히 구분시키는 것이다.

- 위임예식은 제사장에게 피를 바르고 관유를 붓는 것이다. 모세는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사를 드리며 위임예식을 시작한다. 모세는 수송아지를 잡고 피를 받아 제단 네 뿔에 발라 거룩케 한 후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쏟아 붓는다. 또한 모세는 숫양을 잡고 역시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단 사면에 뿌린다. 제사장의 의복에도 관유와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한다.

- 모든 희생제사는 짐승의 피로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기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속죄제사는 특별한 의식이 있다. 속죄제사만 유일하게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른다. 이러한 속죄제사의 피는 대속죄일에 내성소의 분향단의 뿔, 지성소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까지 뿌려 성막 전체를 정결케 한다. 제사장들의 몸에 피를 바르는 위임예식이나(레8장) 시내산에서 백성의 대표들에게 피를 뿌린 언약체결예식(출24장) 역시 피로 죄를 씻는 속죄제사를 기초로 해서 거룩한 구별하는 것이다.

- 참고로, 속죄제사와 속건제사는 모두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이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속죄제는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제사이며,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속죄와 함께 배상 하는 제사이다. 따라서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중복하지 않고, 죄의 성격에 따라 둘 중 하나만 드려진다. 속건제사를 제2의 속죄제사 또는 배상적 속죄제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 왜 성경은 피로 죄를 씻는다고 강조하는가? 어떻게 짐승의 피가 죄를 씻어 죄인을 정결케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 말씀하셨고(레17:11) 히브리서는 모든 기물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말씀했다.(히9:22) 피가 죄를 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언약체결예식이나 제사장 위임예식 때 사람에게까지 피를 바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 피를 발라 죄를 씻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도로 계시해 주신 속죄방법이다. 사람이 만든 속죄방식이라면 많은 돈을 내거나 그 종교집단에 유익을 주는 다른 것을 바치게 할지언정, 짐승의 피로 죄를 씻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 피로 죄를 씻는 방법은 그 종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흘림의 속죄제사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계시임이 분명하다.

- 피로 죄를 씻음은 희생제물이 내 대신 죽음으로 내 죄의 형벌이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내가 받아야할 죽음을 희생제물이 내 대신 담당했으므로 내가 받을 죄의 형벌이 없어졌기에 내 죄가 씻겨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계시하는 것이다. 죄로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죄값이 지불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피로 내 죄가 씻겨졌다는 의미이다. 형벌면제이다.

- 짐승의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할 뿐 아무런 능력이 없다. 짐승이 피로 제사를 드리면 죄용서 받아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제거되나 죄의 권세는 이기지 못한다. 짐승제사로는 죄인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아무리 희생제사를 드려도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죄인은 계속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고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마다 염소와 송아지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가야 한다.

- 대제사장 위임예식은 희생제사의 피와 거룩한 기름이 필요하다. 속죄제사의 피를 발라(레8:23) 죄를 씻어 정결케 하고, 관유를 부어(레8:12, 출30:26-30) 성령으로 거룩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 모두에게 원리적으로 일치한다. 비록 제사장의 피와 기름부음은 왕(이미 피를 부은 언약백성이기에 기름만)과 선지자(기름 혹은 직접 성령임재)에게 의식적으로는 동일하지 않지만, 신학적 원리로는 동일하다. 모든 직분은 속죄를 전제로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구별되고,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위임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사 죄형벌을 없애주시고, 부활승천 하사 하늘보좌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어주셨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로 얻게 된 죄사함과 칭의의 구원이다. 이것이 기록한 것이 바울의 로마서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속죄일(욤키프르)에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 온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는 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사역이 있어야만 이스라엘은 거룩해지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게 되기 때문이며, 그 일은 오직 대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록한 신약성경이 히브리서이다.

-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심을 증거 하는 책이다. 예수님은 천사보다(1-2장) 모세보다(3장) 여호수아보다(4장) 뛰어난 대제사장이시다.(1-4장) 예수님은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5-7장) 이후 세 장이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본론이다.

- 예수님은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8-10장)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8장) 더 좋은 성소(9장) 더 좋은 피(9장) 더 좋은 제사(10장)를 드리시는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8-10장) 마지막 세 장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삶이다.(11-13장) 믿음(11장) 인내(12장) 거룩한 삶(13장)이다.

- 첫째, 대제사장 예수님은 새언약의 중보자시다.(8장)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을 통해 새언약을 말씀하심은 옛언약이 흠이 있어 낡고 쇠하며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언약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언약을 위하여, 새언약이 올 때까지, 새언약을 기다리며 바라보라고 주신 것이다.

- 히8:8-12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둘째,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땅의 성소보다 더 좋은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시다.(9장) 땅의 성소는 하늘성소의 그림자요 모형과 예표이다. 옛언약 성소에는 매년 속죄일마다 대제사장이 들어가야 했다. 백성의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언약 성소는 온전한 장막의 하늘성소 대제사장이 올 때까지 잠시 맡겨둔 것이다.

- 히9: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셋째, 예수님은 더 좋은 예물을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이시다.(9장) 옛언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언약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히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넷째, 예수님은 짐승제사보다 더 좋은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셨다. 매년 드리는 짐승제사는 백성의 죄를 없애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케 하시며(10:10) 온전케 하셨다(10:14.) 이로서 염소와 황소로 드리는 옛언약의 모든 제사는 영원히 종결되었다.

- 히10:10,14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 히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b>&lt;</b><b>결론</b><b>&gt;</b><b>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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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OSPEL323]]></author>
			<pubDate>Sun, 02 Aug 2026 16:13:3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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