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샤다이 칼럼

죄와 사망, 의와 생명

Author
gospel323
Date
2018-07-11 11:32
Views
954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의 내용은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의 특징은 “죄와 사망” “의와 생명”이 계속 대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 사망, 의, 생명” 네 단어로 십자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첫째, 죄는 십자가 복음에 있어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나머지 세 용어는 “죄”와 비교된 다른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복음은 반드시 "죄"로부터 설명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은 얼마든지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복음을 설명한 것은 일반인들을 위함입니다. 일반인들은 "생명"보다 자기의 현실 속에 체험되는 "죄"가 훨씬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 심화된 이해를 위해 “의와 생명”에서부터 복음설명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피조물임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한 아담의 성향(원죄)이 모든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모든 고통(사망)의 원인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주인되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을 Human으로 부르지만 성경은 인간을 Adam이라 부릅니다. 복음은 바로, 모든 인간 속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의 죄를 제거하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사망은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5:12)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하는 인간의 죄는 필연적으로 사망을 가져옵니다. 사망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의 썩음과 해체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망은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본래인간의 축복과 사명을 잃어버림입니다. 육체의 썩음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망이 사람의 눈에 현실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합니다. 사망을 육체의 썩음으로 이해하면, 생명은 육체가 썩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기독교의 구원을 편협하게 축소시킴으로 복음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사망은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당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사망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은 제 글에서 지금까지 계속 설명되어 왔습니다.

셋째, 의는 죄가 제거되어 정결케 되었고 또 죄를 이김으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가가 죄사함은 우리로 죄인에서 의인되게 만듭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제거되어(정결, 거룩,)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인된 것은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가져다주신 의 때문에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인에서, 죄를 이기는 의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죄가 제거된 칭의와 죄를 이기는 성화의 관계입니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미숙한 이해가 신자와 불신자에게 십자가 복음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의롭게 되는 구원의 과정을 칭의와 성화로 설명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성경에 직접 기록된 용어는 아니지만 그 의미는 성경에 선명하게 나옵니다. 삼위일체(Trinity)가 성경단어는 아니지만 성경의 의미를 담은 신학용어인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신론에서 핵심이 “삼위일체”라면,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은 “칭의와 성화”입니다. 칭의와 성화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십자가 복음이요, 기독교 구원론입니다. 칭의 없는 구원론은 일반종교의 선행, 고행을 강조하는 공덕 구원론이 되고, 성화 없는 구원론은 일반종교의 현실을 무시하는 이원론적 신비 구원론이 됩니다. 칭의와 성화의 조화, 균형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구원론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중요성 같이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칭의 없는 구원론이 기독교 구원론이 아니듯, 성화 없는 구원론도 기독교의 구원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는 무엇입니까? 칭의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죄의 책임을 모두 제거시켰음이고 성화란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오염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기게 함입니다

즉 “의롭게 됨”(칭의)와 “의로워져 감”(성화)는 칭의로 인해 성화에 이른다는 영적원리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또는 칭의로 시작하여 성화에 이른다는 시간적 논리적 순서를 설명하기 위해 구분될 뿐,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되거나 별개의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동반하고, 성화를 동반해야 올바른 칭의임이 확인됩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넷째, 생명은 죄가 제거되고, 죄를 이기는 의인이 하나님과 관계회복에서 오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앞서 언급했듯, 일반인들은 사망을 육체의 썩음과 해체로 이해합니다. 그려면 생명은 육체의 썩음과 해체가 없는 현 상태가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본래인간의 축복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현 상태의 시간적 지속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닌 고통이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아름다운 모든 것들입니다. 이는 에덴에서 범죄이전 아담이 누렸던 본래인간의 축복입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함으로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죄가 인간을 하나님과 단절되시켜 사망의 가져왔습니다. 생명은 죄가 제거되고 죄를 이기는 의인에게 당연히 찾아오는 결과들입니다.

요한은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죄를 이길 때 주시는 축복을 기록합니다. 생명나무과실을 먹게함(에베소교회, 계2:7) 생명의 면류관을 주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하심(서머나교회, 계2:10-11) 감추었던 만나와 받는 자만 알 수 있는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심(버가모교회, 계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또 새벽별을 주심(두아디라교회, 계2:26-28)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을 것임(사데교회, 계3:5)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심(빌라델비아교회, 계3:12)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하심(라오디게아교회, 계3:21)

이는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생명”에 대한 다른 표현들입니다. 아담의 죄가 제거됨으로 피조세계에 가득찬 인간의 모든 반역이 끝나고 인간은 다시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대리통치자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망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사망열매를 먹은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생명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에덴의 생명나무와 죽음나무는 역사적으로 실재했고, 오늘 내게도 실존적으로 실재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의와 생명을 잃어버리고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에게,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의와 생명을 회복케 하는 가르침입니다.

죄는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함을 힘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