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샤다이 칼럼
구원은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함으로 받습니다.
Author
gospel323
Date
2018-07-11 12:53
Views
1279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의 본성 곧 원죄를 가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속죄 피로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이는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의 모든 죄까지 포함합니다. 아담의 본성(죄)에 지배받는 죄인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구원은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정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은 우리의 전인격적인 신뢰행위인 믿음으로 얻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미래에 들어갈 공간적 천당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먼저 말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그러한 삶이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미래의 천당을 의미합니다. 천당이 천당이 된 것은 죄와 사단이 없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이 죄와 사단에 매여 있는 삶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백성 됨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반드시 세가지 요소가 동반되는데 이는 인간의 기본 구성요소와 같습니다. 믿음은 지적인 인식과 감정적 동의, 의지적 행동을 포함하는 전인격적 신뢰 행위입니다.
믿음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올바른 지적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새 언약의 속죄제사였음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죄사함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민중 해방의 도구로 아는 것은 아예 기독교 진리와 상관이 없고, 십자가를 물질적 번영 수단으로 이용함은 자본주의 성공신학에 물든 타락한 기독교이며, 십자가를 귀신 쫓는 수단으로만 강조하는 것은 귀신 콤플렉스에 걸린 병든 기독교입니다. 이는 성경이 제시하는 십자가 복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한 하나님의 희생제사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십자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감정적 동의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 의지적 행동을 하게 합니다. 마치 차를 구입할 때 여러 차들을 비교분석한 후 자신에게 맞는 차를 알아내면(지적 인식) 그 차를 구입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하고(사실에 대한 감정적 동의) 그 후에 실제로 금액을 지불하고 차를 구입하는 이치와 같습니다.(의지적 행동) 이처럼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는 전인격적 신뢰행위입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은 죄사함으로 얻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 때문입니다. 인류 속에 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의 본성 원죄와 그로 인한 자범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 죄를 제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류의 과거 현재의 죄가 용서되었음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인류의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단 말인가?”
“십자가 죄사함”은 과거와 미래 시제 속에서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즉 아담의 원죄와 그로인한 모든 과거의 자범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제거되었고, 미래에 지을 죄는 죄를 짓지 않고 이기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함으로 원죄의 법적 죄책은 제거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원죄의 실제적 오염을 이기게 하신다" 입니다.
이를 쉽게 표현해보면,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는 제거되었고 미래에 지을 죄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심으로 죄를 이겨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죄사함이란 진리 속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말입니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미래에 짓게 될 죄는 “의인됨”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셋째, 구원은 의롭다 칭하심으로 얻습니다. 의롭다 칭하심은 죄를 짓지 않는 실제적(?) 의인이 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인은 미래 천국에서 되어질 것이며 이는 영화롭게 된 신자의 모습니다. 이는 죄를 가진 인간이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칭함받음"은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의롭다 칭하심”도 과거와 미래 시제 속에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과거의 원죄 자범죄가 용서된 의인이며, 미래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죄를 이기며 의롭게 되어갈 의인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칭하심을 얻었다는 진리입니다.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는 좀 더 깊은 신학적 논의를 할 때 하겠습니다.
참고로, 우리 속에 들어온 의에 대하여 "주입된 의"와 "전가된 의"가 있는데, 카톨릭의 “주입된 의”는 이는 내가 실제 의를 소유한 것이 됩니다. 개혁교회의 “전가된 의”는 나의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됩니다. 즉 죄인인 내 속에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를 이기며 의로워져 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입니다.
결국 “전가된 의”란 나는 내 힘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만 의롭게 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말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으로 의롭다 칭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정리해보면, 죄사함과 의인됨은 모두 같은 내용의 다른 부분을 설명하나 용어의 어감상, 죄사함은 십자가에서 과거의 모든 죄가 제거 되었음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장점이 있고, 의인됨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미래의 죄를 이겨나감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구원은 믿음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인격으로 받아들일 때, 죄사함 받아 원죄와 자범죄의 모든 세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의롭다 칭함 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며 의로워져 감으로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이는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의 모든 죄까지 포함합니다. 아담의 본성(죄)에 지배받는 죄인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구원은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정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은 우리의 전인격적인 신뢰행위인 믿음으로 얻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미래에 들어갈 공간적 천당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먼저 말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그러한 삶이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미래의 천당을 의미합니다. 천당이 천당이 된 것은 죄와 사단이 없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이 죄와 사단에 매여 있는 삶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백성 됨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반드시 세가지 요소가 동반되는데 이는 인간의 기본 구성요소와 같습니다. 믿음은 지적인 인식과 감정적 동의, 의지적 행동을 포함하는 전인격적 신뢰 행위입니다.
믿음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올바른 지적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새 언약의 속죄제사였음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죄사함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민중 해방의 도구로 아는 것은 아예 기독교 진리와 상관이 없고, 십자가를 물질적 번영 수단으로 이용함은 자본주의 성공신학에 물든 타락한 기독교이며, 십자가를 귀신 쫓는 수단으로만 강조하는 것은 귀신 콤플렉스에 걸린 병든 기독교입니다. 이는 성경이 제시하는 십자가 복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한 하나님의 희생제사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십자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감정적 동의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 의지적 행동을 하게 합니다. 마치 차를 구입할 때 여러 차들을 비교분석한 후 자신에게 맞는 차를 알아내면(지적 인식) 그 차를 구입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하고(사실에 대한 감정적 동의) 그 후에 실제로 금액을 지불하고 차를 구입하는 이치와 같습니다.(의지적 행동) 이처럼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는 전인격적 신뢰행위입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은 죄사함으로 얻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 때문입니다. 인류 속에 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아담의 본성 원죄와 그로 인한 자범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 죄를 제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류의 과거 현재의 죄가 용서되었음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인류의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단 말인가?”
“십자가 죄사함”은 과거와 미래 시제 속에서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즉 아담의 원죄와 그로인한 모든 과거의 자범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제거되었고, 미래에 지을 죄는 죄를 짓지 않고 이기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함으로 원죄의 법적 죄책은 제거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원죄의 실제적 오염을 이기게 하신다" 입니다.
이를 쉽게 표현해보면,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는 제거되었고 미래에 지을 죄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심으로 죄를 이겨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죄사함이란 진리 속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말입니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미래에 짓게 될 죄는 “의인됨”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셋째, 구원은 의롭다 칭하심으로 얻습니다. 의롭다 칭하심은 죄를 짓지 않는 실제적(?) 의인이 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인은 미래 천국에서 되어질 것이며 이는 영화롭게 된 신자의 모습니다. 이는 죄를 가진 인간이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칭함받음"은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의롭다 칭하심”도 과거와 미래 시제 속에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과거의 원죄 자범죄가 용서된 의인이며, 미래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죄를 이기며 의롭게 되어갈 의인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칭하심을 얻었다는 진리입니다.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는 좀 더 깊은 신학적 논의를 할 때 하겠습니다.
참고로, 우리 속에 들어온 의에 대하여 "주입된 의"와 "전가된 의"가 있는데, 카톨릭의 “주입된 의”는 이는 내가 실제 의를 소유한 것이 됩니다. 개혁교회의 “전가된 의”는 나의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됩니다. 즉 죄인인 내 속에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를 이기며 의로워져 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입니다.
결국 “전가된 의”란 나는 내 힘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만 의롭게 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말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으로 의롭다 칭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정리해보면, 죄사함과 의인됨은 모두 같은 내용의 다른 부분을 설명하나 용어의 어감상, 죄사함은 십자가에서 과거의 모든 죄가 제거 되었음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장점이 있고, 의인됨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미래의 죄를 이겨나감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구원은 믿음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인격으로 받아들일 때, 죄사함 받아 원죄와 자범죄의 모든 세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의롭다 칭함 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며 의로워져 감으로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