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20장 기도,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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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기도,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
1.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
1.1 본래 인간
히브리어 아담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고유명사로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아담이고 다음은 일반명사로 사람, 인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류의 첫 조상의 이름을 아담으로 정하시고 모세가 그렇게 기록한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2:7-8)
창세기 1장부터 여기까지 히브리어 아담은 한글성경에서 “사람”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실 때부터는 고유명사 “아담”으로 바뀐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기 이전에 많은 사람을 이미 만드셨고 아담은 그들 중 종교적으로 똑똑한 한 사람을 골라 에덴동산으로 데려가셨다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후에 아담의 후손 인류를 이야기 할 때도 한글성경은 사람으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모두 아담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6:3, 창9:6 등등) 창세기 1-3장은 첫 사람 아담 속에 그 후손인 인류 전체를 포함시켜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 창세기 1-3장은 첫 사람 아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아담은 그의 후손 인류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인류란 아담 류(類), 아담 혈통, 아담 종족(Adam's race)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의 창조목적은 전 인류의 창조목적이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전 인류의 범죄가 된다.
1.2 구원, 하나님과 관계회복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 형상의 일곱 가지 의미는 이미 언급했다. 하나님을 절대의존해야 하는 피조물, 하나님의 대리통치자,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 피조세계에서 그 위엄과 존귀함이 하나님의 영광과 같음, 자기 행동과 자기 책임의 독립적 주체, 선택의 자유를 가진 자유 인격,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이다. 이런 존재로 창조 받은 아담(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다. 자기의 피조물 됨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거부했다. 그 후 자기가 하나님 되었다.
아담의 원죄 곧 죄책과 오염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고 많이 훼손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의 자리를 상실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타락한 육체적 존재가 되었다. 피조세계에서 누렸던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 천사보다 훨씬 못한 존재가 되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단을 두려워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이런 일은 범죄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범죄 이전에는 천사가 인간을 섬기며 흠모하였다.
구원이란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어...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의 위치를 다시 회복한다.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로 회복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서 확인되었다. 그것은 먼 미래에 공간적 천당에 들어가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변화가 일어나고 사단의 세력을 이기는 영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공동체의 축복을 누린다. 이 구원을 지금 이 자리(Here and now)에서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 속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이미 회복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완성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죄와 사망과 사단이 현존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문제와 갈등 속에 있다. 죄의 욕구와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구원의 첫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뿐이다. 구원의 완전한 열매는 예수 재림과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을 이 땅에서 누리려면 육체의 소욕과 사단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싸움이 필요하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 모습이다.(고전15:20)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처럼 거룩한 몸으로 부활 할 것이다. 우리 육체는 버려질 것이 아니기에 소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그러기에 현재 사단의 유혹에 우리 육체를 내어맡기지 말고 경건한 삶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다.(롬8장, 갈5장) 죄의 오염으로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셨다. 얼마든지 죄의 욕구를 이길 힘을 주셨다. 거룩한 변화 속에 진정한 자유가 넘치게 된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죄를 이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1.3 복음, 하나님과 관계회복 되는 방법
성경에는 복음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복음(福音)이란 한자 의미로 복된 소식이다. 무엇이 복된 소식인가? 이단들은 배고픈 자들에게는 빵을 주는 것이 복된 소식이고, 물에 빠진 자에게는 건져내 주는 것이 복음이라고 설명한 후,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며 자기들의 교리를 복음의 내용으로 바꾼다. 이는 복음으로 번역한 한자어를 가지고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는 것이다. 복음은 복된 소식을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이다.
복음의 헬라어 단어는 유앙겔리온이다. 유앙겔리온은 처음부터 기독교 용어가 아니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였다. 유앙겔리온이란 특별한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쓰는 단어이다. 그중 특히 외국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로 이제 평화가 왔다는 소식을 전할 때 사용하였다. 1세기 헬라시대의 전쟁은 오늘날의 전쟁과 다르다. 그때 전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의 싸움이다. 이기면 노예와 재물을 얻고 지면 죽거나 빼앗기고 노예가 된다. 침략군대와 전쟁이 벌어졌다. 군대는 전쟁터로 나가 사력을 다해 싸운다. 본국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오늘과 같은 정보화시대가 아니다. 본국에서는 전장의 소식을 알 수 가 없다. 소문에 소문이 증폭되어 두려움을 더 가져다준다. 이때 마라톤 병사처럼 한 병사가 달려온다. 그리고 전쟁을 이겼다고 알려준다. 온 백성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이 소식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이었다.
초대교회는 헬라세계의 유앙겔리온 이란 단어를 그대로 쓰며 그 내용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즉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헬라어 유앙겔리온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전쟁에서 이긴 것 같이 가장 기쁜 소식인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정의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1-4)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롬1장),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이다.(고전15장)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내용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이것 외에 그 어떤 소식도 기독교 복음이 아니다.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지성을 만족시키는 그 어떤 내용도 복음이 아니다.(갈1:8-9)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왜 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은 사단이 아니라 죄 때문이었다. 인간은 죄만 없으면 사단과 결별할 수 있고, 사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죄의 형벌로 사단과 함께 사망의 고통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이었던 인간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사망의 형벌이 이미 법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예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아담의 모든 죄책이 해결된다. 이 구원은 바로 단회성, 한순간에 이루어지며 불변하다.(칭의)
그러나 우리가 구원은 얻었으나 아직 천국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사단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여전히 부패한 죄의 본성이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십자가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의 법적인 죄값(죄책)은 지불되었지만 여전히 지금 내 본성에 남아있는 부패한 본성(오염, 원죄)과 그 열매들(자범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끝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이미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성도)이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면 사단의 참소와 죄의 형벌인 사망의 고통을 당한다.(롬6:2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새사람이 되게 하셨다.(롬6:3-5) 새사람이 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 부활을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을 성령내주,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이전의 나는 죄의 본성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자였으나 이제부터 나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해서 죄와 싸울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 죽음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언약백성이다.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죄의 본성과 싸우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아브라함 자손, 참 이스라엘,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아무 죄의식이 없는 거짓 자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죄의 행동을 이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의식에서 해방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이다. 그러므로 죄와 사단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과 사단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고 믿음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죽음으로 지켜왔고 우리에게 전해준 십자가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갈1:8)
2.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
2.1 하나님을 신뢰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전5:17)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교회를 핍박했지만 지금은 새롭게 변화된 자신이 그러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인류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이 전달해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We believe in God."이다. 그런데 여기서 “Believe”는 “Trust"라는 단어로 상호 교환된다. 미국 달러에 새겨져 있는 표현 ”In God we trust."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We trust in God."에서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In God we trust."라고 어순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는 똑같은 표현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채우는 비인격 우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 그분의 백성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범죄이전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러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고 아담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랐다. 이 신뢰관계 속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아무리 혼이 나도 조금 지나면 금방 다시 회복된다. 다시 집에서 떠들고 장난치고 부모에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이다.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집의 자녀는 우리 집에 오면 아무리 편하게 해주어도 편하게 있지 못한다. 그들은 실수를 하나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있어도 자기 집만 같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기와 나의 관계에 신뢰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자녀가 아니고 나도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는 바로 이와 같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의탁한다. 신뢰함의 가장 좋은 표현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내어 맡김은 내어 버림과 다르다. 쓰레기는 내어 맡기는 것이 아니고 내어 버림이다. 내어 맡김은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게 집 한 채가 전 재산이라고 하자. 그런대 내가 잠시 해외로 나가야 하고 그 집을 잠시 누군가가 맡아주어야 한다. 심지어는 법적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고 하자. 그때 내가 나의 전 재산인 집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서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신뢰함은 나의 전 삶을 의탁하고 맡기는 것이다. 그분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책임지신다. 그분은 나의 삶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분께 나 자신을 내어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오늘을 최선 다해 살아가는 새로운 인류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2.2 하나님께 순종함
하나님을 신뢰함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타난다. 그분이 나의 창조자, 나의 왕, 나의 목자, 나의 주인, 나의 아버지 되심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신다. 그러나 때로는 엄하게 책망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신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칭찬과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책망과 질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의 죄의 본성은 자기를 높여주기만 원한다.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건, 하기 싫은 일이건 하나님께 순종한다. 이것은 인격적 신뢰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분이 내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길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순종은 복종과 뉘앙스가 다르다. 복종은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그냥 굴복하는 것이다. 전쟁포로들이 수용소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감옥에서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한다. 왜냐하면 시키는 명령을 거부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순종은 자발성이 들어있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게 무조건 굴복을 요구하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분은 얼마든지 그렇게 요구하실 수 있는 창조주시고 나의 주인이시지만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인격적으로 아끼신다.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2.3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신다. 그분은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자기 백성을 건져내신 분이시다. 홍해를 가르셔서 자기 백성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사십 년간 먹이고 입혀주신 분이시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심지어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고, 아말렉 군대가 공격할 때 승리의 깃발이 되어주신 분이시다. 요단을 가르시고,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기브온 전투에서 태양까지 멈추시고 큰 우박으로 아모리 족속을 멸하신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셨고, 신실한 하나님이셨고, 만군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만난 곳이다. 공의의 심판자가 백성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일은 그 어떤 종교에도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 얻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다.(고전1:23)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그분은 조그마한 잘못도 가차없이 벌을 주시는 무서운 폭군이 아니다.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시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목자이시다. 아주 하찮은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집을 나가 재산을 다 허비해버린 몹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그 아들이 돌아오면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하시는 분이시다.(눅15장)
이 아버지가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우리를 위기에서 보호하신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죄로 물든 세상은 무엇이든 부족하다. 늘 결핍되어 있다. 인생은 늘 모자란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신다. 보호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고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는 것이다.
누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가? 내가 자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의 미래도 책임질 수 없다. 내 힘으로는 넘어 갈 수 없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 찾아오면... 막을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면... 은행에 수십억 원을 가지고 있는가? 수백억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 인생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한다.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시편은 말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3. 기도란 무엇인가?
3.1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기도는 내 요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인격 우상종교이다. 기도가 아니고 소원성취이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분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이었는데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심을 감격한다. 나는 아무 공로가 없는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해주심을 감사한다. 나는 매일 삶 속에서 실패하고 아직도 죄의 본성을 따라 살고 있는 데도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감사한다. 위기를 만났을 때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기에 함께하셔서 보호해 주심을 감사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나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 백성 됨을 감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다. 모자라는 세상 속에 성도는 삶에서 필요한 것이 많이 있다. 당장 해결해야할 긴급한 내용이 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필요를 기도로 채움 받은 증인들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호흡은 생명유지의 필수조건이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죄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은 사망의 형벌이 그대로 남아있고 사단의 유혹 또한 실재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로 날마다 영적인 호흡을 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있다. 내 속에 본성으로 뿌리내려 있는 죄의 세력과 내 밖에서 유혹하는 사단을 이길 수 없다. 다시 사망의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성도는 죄와 사단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인 능력이다. 기도할 때 귀신의 세력이 떠나간다. 예수님께서도 기도 외에는 이런 류(무리 類)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막9:29) 전도현장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사단의 나라로 진격해 들어간다. 죄와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건져내러 들어간다. 자기 노예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단과 그들을 해방시키려 들어가는 교회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성과 논리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의 화려한 언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이어야 한다. 기도만이 이일을 가능케 한다.
3.2 나라가 임하옵시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주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주기도는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할 하나님, 우리가 구해야 할 내용, 그리고 마지막 송영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 구원이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한 가지 기도제목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처음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가르킴이다. 기도는 우리 위에 계신 초월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자기 내면의 성찰이 아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전능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만 할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임을 회개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이다.(요3:5)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이다.(롬8:15)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는 자이다.(고전12:3)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시키심을 마음에 믿음으로, 예수께 자기의 전 인생을 내어맡기고 그분을 주님으로 시인한 자이다.(롬10:9-10) 이런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주기도의 첫 번째 부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관용적 찬양어구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구절의 반복 어구이다. 이 부분은 한 가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나라는 영토의 개념보다 주권의 개념이 먼저이다. 미국은 어디까지가 미국인가? 미국 대통령의 명령이 미치는 곳까지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미국대사관은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천당의 임재를 기도하는 것보다 지금 이 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빨리 세상이 종말 되어 천당이 임하여 달라는 의미보다 먼저 죄의 세력에 눌려있는 사단의 나라에 지금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당의 도래도 기다리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1-13)
주기도의 두 번째 부분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생활에서 필요한 부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임재하시는 하나님 나라 구원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부분에서 보호를 받기 위함이다.
첫째,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일용할 양식이란 하루 쓸 양식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아침에 나가 하루 분 만나를 얻은 것과 같다. 하나님은 왜 하루 분 양식만 주셨는가?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심이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보이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좋아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외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다. 우상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일용할 양식은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되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날마다 죄 사함이 필요하다. 인간은 죄에 오염되어 있다. 죄의 세력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죄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죄 짓기를 좋아하고 죄를 계획하고 죄를 실제로 짓는다. 그것이 내면의 도덕적인 것이냐 아니면 사회법에 저촉되는 것이냐 정도 차이일뿐 모든 사람은 죄를 짓는다. 이때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하고 심판받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 이름 붙잡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줌 같이”는 너무 복잡한 의미가 아니다. 누가 내게 거짓말을 함으로 금전적인 손실을 입혔다고 하자. 그는 내게 죄를 지은 것이다. 이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용서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은 끝난다.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날마다 시험을 이기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나의 죄의 본성을 자극하여 넘어뜨리려는 시험으로(유혹 temptation) 가득차 있다. 시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부에서 올 수도 있고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길 수도 있다. 사단이 외부에서 줄 수도 있고, 죄의 본성이 내부에서 요구할 수도 있다. 이때 시험 자체를 탓하거나 외부의 유혹자 사단을 탓해서도 안된다. 유혹은 주어지지만 그 유혹에 반응하여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형상의 의미이다. 우리의 죄의 본성에 지지 않고 유혹을 이기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넷째, 우리는 날마다 악(Evil) 혹 악한자 (Evil one)에서 건짐 받는 것이 필요하다. 악과 악한자의 구분이 본 절의 의미를 다르게 할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악은 악한 자 사단을 지칭한다. 우리가 세상 나라의 종이 된 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 그리고 유혹을 주는 사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도록 날마다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할 네 가지 “물질, 죄, 유혹(시험), 사단”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죄에 빠져있는 우리가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하나님 통치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다. 이 네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조심하고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다. 주님은 이것들을 구하며 하나님 나라가 지금 나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임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마지막 송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여기서 “대개”는 “왜냐하면”(For, Because)으로 번역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가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 구원의 임재를 구하고, 또 이것을 가로막는 네 가지 요소들을 이기도록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 구원이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는 한 가지 기도제목이다.
3.3 기도의 실제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신다. 먼저, 예수는 주기도를 가르치시고 그 다음, 친구를 위해 밤에 찾아가 떡을 구하는 사람을 비유로 하시며 강청하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시며 기도에 관한 말씀을 마치신다. 또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유명한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살전5:17)
분명 성경은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함을 가르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강청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제목을 잊어버릴까 염려함인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께 내 소원을 자꾸 알려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잊으실까?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를 아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된 우리, 기도는 이 관계를 기억나게 한다. 기도하면 이 관계가 확인되고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의 본성에 의해 쉽게 잊어버린다.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을 얻어내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면 된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할 때 절차와 양식이 있는가? 없다.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임을 이해할 때 모든 부담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인기도가 아닌 회중(대표)기도 때문에 부담이 된다. 작든 크든 공식모임에서 기도를 해야 할 때 긴장된다. 이때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형식(양식)을 따르면 된다. 주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 구원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주기도의 형식은 네 가지를 기본 순서로 보면 된다. 이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대체로 그렇게 해온 것이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대표기도의 형식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들을 감사하며 진심으로 찬양 드린다. 여기에는 우리 죄에 대한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도 포함된다. 세 번째는 우리의 지금 필요를 구한다. 개인기도일 때는 개인의 필요를, 회중기도일 때는 전체가 필요로 하는 기도제목을 간구한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주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예수이름으로 마무리한다.
기도응답은 보통 "Yes, No, Wait"로 표현 된다. 기도응답은 반드시 하나님께 Yes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물건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면 무조건 Yes라고 응답하셔야 한다고 확신한다면 큰 오해이다. 하나님께 신성모독 참람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비인격 기도응답 기계가 아니시다. 그것은 일반종교의 비인격 우상이다. 나는 하나님께 신뢰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응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Yes라고 주실 수도 있고 No라고 주실 수 있고, 기다리라고 Wait으로 응답주실 수 있다. 내가 하나님 백성이 분명하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기도하면 반드시 Yes라고 응답하는 수학 공식이 아니다. 기도응답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래서 응답받으면 감사가 넘친다. 그 응답이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 내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고 감사한다. 순종하고 따라간다. 지나고 보면 언제나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결정이 옳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조용하게 기도하기도 하고, 절박한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짖고, 새벽에 나가서, 금식하며, 철야기도회에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 단 우리는 죄의 본성이 있기에 자꾸 다른 사람 기도를 평가하고 정죄하기 쉽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를 많이 하면 사람은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데,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비인격 기도를 많이 하면 교만해진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인 기도의 축복을 날마다 누리자. 그때 비로소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귀하다”는 진정한 고백이 나올 것이다.
<요약>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 맡김이다.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기도에는 방식이나 비법이 없다. 조용히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나누자. 단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자기 내면의 성찰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기도는 내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분의 자녀 됨을 확인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지 내 자신의 인격수양이나 적극적 사고방식의 자기 최면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일반종교처럼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섬김을 받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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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
1.1 본래 인간
히브리어 아담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고유명사로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아담이고 다음은 일반명사로 사람, 인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류의 첫 조상의 이름을 아담으로 정하시고 모세가 그렇게 기록한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2:7-8)
창세기 1장부터 여기까지 히브리어 아담은 한글성경에서 “사람”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실 때부터는 고유명사 “아담”으로 바뀐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기 이전에 많은 사람을 이미 만드셨고 아담은 그들 중 종교적으로 똑똑한 한 사람을 골라 에덴동산으로 데려가셨다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후에 아담의 후손 인류를 이야기 할 때도 한글성경은 사람으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모두 아담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6:3, 창9:6 등등) 창세기 1-3장은 첫 사람 아담 속에 그 후손인 인류 전체를 포함시켜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 창세기 1-3장은 첫 사람 아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아담은 그의 후손 인류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인류란 아담 류(類), 아담 혈통, 아담 종족(Adam's race)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의 창조목적은 전 인류의 창조목적이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전 인류의 범죄가 된다.
1.2 구원, 하나님과 관계회복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 형상의 일곱 가지 의미는 이미 언급했다. 하나님을 절대의존해야 하는 피조물, 하나님의 대리통치자,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 피조세계에서 그 위엄과 존귀함이 하나님의 영광과 같음, 자기 행동과 자기 책임의 독립적 주체, 선택의 자유를 가진 자유 인격,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이다. 이런 존재로 창조 받은 아담(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다. 자기의 피조물 됨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거부했다. 그 후 자기가 하나님 되었다.
아담의 원죄 곧 죄책과 오염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고 많이 훼손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의 자리를 상실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타락한 육체적 존재가 되었다. 피조세계에서 누렸던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 천사보다 훨씬 못한 존재가 되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단을 두려워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이런 일은 범죄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범죄 이전에는 천사가 인간을 섬기며 흠모하였다.
구원이란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어...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의 위치를 다시 회복한다.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로 회복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서 확인되었다. 그것은 먼 미래에 공간적 천당에 들어가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변화가 일어나고 사단의 세력을 이기는 영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공동체의 축복을 누린다. 이 구원을 지금 이 자리(Here and now)에서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 속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이미 회복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완성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죄와 사망과 사단이 현존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문제와 갈등 속에 있다. 죄의 욕구와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구원의 첫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뿐이다. 구원의 완전한 열매는 예수 재림과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을 이 땅에서 누리려면 육체의 소욕과 사단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싸움이 필요하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 모습이다.(고전15:20)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처럼 거룩한 몸으로 부활 할 것이다. 우리 육체는 버려질 것이 아니기에 소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그러기에 현재 사단의 유혹에 우리 육체를 내어맡기지 말고 경건한 삶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다.(롬8장, 갈5장) 죄의 오염으로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셨다. 얼마든지 죄의 욕구를 이길 힘을 주셨다. 거룩한 변화 속에 진정한 자유가 넘치게 된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죄를 이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1.3 복음, 하나님과 관계회복 되는 방법
성경에는 복음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복음(福音)이란 한자 의미로 복된 소식이다. 무엇이 복된 소식인가? 이단들은 배고픈 자들에게는 빵을 주는 것이 복된 소식이고, 물에 빠진 자에게는 건져내 주는 것이 복음이라고 설명한 후,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며 자기들의 교리를 복음의 내용으로 바꾼다. 이는 복음으로 번역한 한자어를 가지고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는 것이다. 복음은 복된 소식을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이다.
복음의 헬라어 단어는 유앙겔리온이다. 유앙겔리온은 처음부터 기독교 용어가 아니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였다. 유앙겔리온이란 특별한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쓰는 단어이다. 그중 특히 외국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로 이제 평화가 왔다는 소식을 전할 때 사용하였다. 1세기 헬라시대의 전쟁은 오늘날의 전쟁과 다르다. 그때 전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의 싸움이다. 이기면 노예와 재물을 얻고 지면 죽거나 빼앗기고 노예가 된다. 침략군대와 전쟁이 벌어졌다. 군대는 전쟁터로 나가 사력을 다해 싸운다. 본국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오늘과 같은 정보화시대가 아니다. 본국에서는 전장의 소식을 알 수 가 없다. 소문에 소문이 증폭되어 두려움을 더 가져다준다. 이때 마라톤 병사처럼 한 병사가 달려온다. 그리고 전쟁을 이겼다고 알려준다. 온 백성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이 소식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이었다.
초대교회는 헬라세계의 유앙겔리온 이란 단어를 그대로 쓰며 그 내용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즉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헬라어 유앙겔리온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전쟁에서 이긴 것 같이 가장 기쁜 소식인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정의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1-4)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롬1장),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이다.(고전15장)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내용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이것 외에 그 어떤 소식도 기독교 복음이 아니다.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지성을 만족시키는 그 어떤 내용도 복음이 아니다.(갈1:8-9)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왜 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은 사단이 아니라 죄 때문이었다. 인간은 죄만 없으면 사단과 결별할 수 있고, 사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죄의 형벌로 사단과 함께 사망의 고통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이었던 인간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사망의 형벌이 이미 법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예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아담의 모든 죄책이 해결된다. 이 구원은 바로 단회성, 한순간에 이루어지며 불변하다.(칭의)
그러나 우리가 구원은 얻었으나 아직 천국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사단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여전히 부패한 죄의 본성이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십자가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의 법적인 죄값(죄책)은 지불되었지만 여전히 지금 내 본성에 남아있는 부패한 본성(오염, 원죄)과 그 열매들(자범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끝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이미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성도)이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면 사단의 참소와 죄의 형벌인 사망의 고통을 당한다.(롬6:2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새사람이 되게 하셨다.(롬6:3-5) 새사람이 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 부활을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을 성령내주,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이전의 나는 죄의 본성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자였으나 이제부터 나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해서 죄와 싸울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 죽음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언약백성이다.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죄의 본성과 싸우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아브라함 자손, 참 이스라엘,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아무 죄의식이 없는 거짓 자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죄의 행동을 이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의식에서 해방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이다. 그러므로 죄와 사단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과 사단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고 믿음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죽음으로 지켜왔고 우리에게 전해준 십자가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갈1:8)
2.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
2.1 하나님을 신뢰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전5:17)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교회를 핍박했지만 지금은 새롭게 변화된 자신이 그러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인류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이 전달해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We believe in God."이다. 그런데 여기서 “Believe”는 “Trust"라는 단어로 상호 교환된다. 미국 달러에 새겨져 있는 표현 ”In God we trust."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We trust in God."에서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In God we trust."라고 어순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는 똑같은 표현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채우는 비인격 우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 그분의 백성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범죄이전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러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고 아담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랐다. 이 신뢰관계 속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아무리 혼이 나도 조금 지나면 금방 다시 회복된다. 다시 집에서 떠들고 장난치고 부모에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이다.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집의 자녀는 우리 집에 오면 아무리 편하게 해주어도 편하게 있지 못한다. 그들은 실수를 하나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있어도 자기 집만 같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기와 나의 관계에 신뢰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자녀가 아니고 나도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는 바로 이와 같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의탁한다. 신뢰함의 가장 좋은 표현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내어 맡김은 내어 버림과 다르다. 쓰레기는 내어 맡기는 것이 아니고 내어 버림이다. 내어 맡김은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게 집 한 채가 전 재산이라고 하자. 그런대 내가 잠시 해외로 나가야 하고 그 집을 잠시 누군가가 맡아주어야 한다. 심지어는 법적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고 하자. 그때 내가 나의 전 재산인 집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서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신뢰함은 나의 전 삶을 의탁하고 맡기는 것이다. 그분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책임지신다. 그분은 나의 삶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분께 나 자신을 내어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오늘을 최선 다해 살아가는 새로운 인류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2.2 하나님께 순종함
하나님을 신뢰함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타난다. 그분이 나의 창조자, 나의 왕, 나의 목자, 나의 주인, 나의 아버지 되심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신다. 그러나 때로는 엄하게 책망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신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칭찬과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책망과 질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의 죄의 본성은 자기를 높여주기만 원한다.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건, 하기 싫은 일이건 하나님께 순종한다. 이것은 인격적 신뢰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분이 내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길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순종은 복종과 뉘앙스가 다르다. 복종은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그냥 굴복하는 것이다. 전쟁포로들이 수용소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감옥에서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한다. 왜냐하면 시키는 명령을 거부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순종은 자발성이 들어있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게 무조건 굴복을 요구하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분은 얼마든지 그렇게 요구하실 수 있는 창조주시고 나의 주인이시지만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인격적으로 아끼신다.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2.3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신다. 그분은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자기 백성을 건져내신 분이시다. 홍해를 가르셔서 자기 백성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사십 년간 먹이고 입혀주신 분이시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심지어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고, 아말렉 군대가 공격할 때 승리의 깃발이 되어주신 분이시다. 요단을 가르시고,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기브온 전투에서 태양까지 멈추시고 큰 우박으로 아모리 족속을 멸하신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셨고, 신실한 하나님이셨고, 만군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만난 곳이다. 공의의 심판자가 백성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일은 그 어떤 종교에도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 얻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다.(고전1:23)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그분은 조그마한 잘못도 가차없이 벌을 주시는 무서운 폭군이 아니다.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시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목자이시다. 아주 하찮은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집을 나가 재산을 다 허비해버린 몹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그 아들이 돌아오면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하시는 분이시다.(눅15장)
이 아버지가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우리를 위기에서 보호하신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죄로 물든 세상은 무엇이든 부족하다. 늘 결핍되어 있다. 인생은 늘 모자란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신다. 보호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고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는 것이다.
누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가? 내가 자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의 미래도 책임질 수 없다. 내 힘으로는 넘어 갈 수 없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 찾아오면... 막을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면... 은행에 수십억 원을 가지고 있는가? 수백억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 인생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한다.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시편은 말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3. 기도란 무엇인가?
3.1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기도는 내 요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인격 우상종교이다. 기도가 아니고 소원성취이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분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이었는데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심을 감격한다. 나는 아무 공로가 없는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해주심을 감사한다. 나는 매일 삶 속에서 실패하고 아직도 죄의 본성을 따라 살고 있는 데도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감사한다. 위기를 만났을 때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기에 함께하셔서 보호해 주심을 감사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나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 백성 됨을 감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다. 모자라는 세상 속에 성도는 삶에서 필요한 것이 많이 있다. 당장 해결해야할 긴급한 내용이 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필요를 기도로 채움 받은 증인들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호흡은 생명유지의 필수조건이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죄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은 사망의 형벌이 그대로 남아있고 사단의 유혹 또한 실재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로 날마다 영적인 호흡을 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있다. 내 속에 본성으로 뿌리내려 있는 죄의 세력과 내 밖에서 유혹하는 사단을 이길 수 없다. 다시 사망의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성도는 죄와 사단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인 능력이다. 기도할 때 귀신의 세력이 떠나간다. 예수님께서도 기도 외에는 이런 류(무리 類)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막9:29) 전도현장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사단의 나라로 진격해 들어간다. 죄와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건져내러 들어간다. 자기 노예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단과 그들을 해방시키려 들어가는 교회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성과 논리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의 화려한 언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이어야 한다. 기도만이 이일을 가능케 한다.
3.2 나라가 임하옵시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주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주기도는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할 하나님, 우리가 구해야 할 내용, 그리고 마지막 송영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 구원이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한 가지 기도제목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처음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가르킴이다. 기도는 우리 위에 계신 초월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자기 내면의 성찰이 아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전능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만 할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임을 회개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이다.(요3:5)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이다.(롬8:15)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는 자이다.(고전12:3)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시키심을 마음에 믿음으로, 예수께 자기의 전 인생을 내어맡기고 그분을 주님으로 시인한 자이다.(롬10:9-10) 이런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주기도의 첫 번째 부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관용적 찬양어구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달라는 구절의 반복 어구이다. 이 부분은 한 가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나라는 영토의 개념보다 주권의 개념이 먼저이다. 미국은 어디까지가 미국인가? 미국 대통령의 명령이 미치는 곳까지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미국대사관은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천당의 임재를 기도하는 것보다 지금 이 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빨리 세상이 종말 되어 천당이 임하여 달라는 의미보다 먼저 죄의 세력에 눌려있는 사단의 나라에 지금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당의 도래도 기다리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1-13)
주기도의 두 번째 부분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생활에서 필요한 부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임재하시는 하나님 나라 구원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부분에서 보호를 받기 위함이다.
첫째,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일용할 양식이란 하루 쓸 양식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아침에 나가 하루 분 만나를 얻은 것과 같다. 하나님은 왜 하루 분 양식만 주셨는가?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심이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보이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좋아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외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다. 우상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일용할 양식은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되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날마다 죄 사함이 필요하다. 인간은 죄에 오염되어 있다. 죄의 세력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죄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죄 짓기를 좋아하고 죄를 계획하고 죄를 실제로 짓는다. 그것이 내면의 도덕적인 것이냐 아니면 사회법에 저촉되는 것이냐 정도 차이일뿐 모든 사람은 죄를 짓는다. 이때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하고 심판받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 이름 붙잡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줌 같이”는 너무 복잡한 의미가 아니다. 누가 내게 거짓말을 함으로 금전적인 손실을 입혔다고 하자. 그는 내게 죄를 지은 것이다. 이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용서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은 끝난다.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날마다 시험을 이기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나의 죄의 본성을 자극하여 넘어뜨리려는 시험으로(유혹 temptation) 가득차 있다. 시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부에서 올 수도 있고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길 수도 있다. 사단이 외부에서 줄 수도 있고, 죄의 본성이 내부에서 요구할 수도 있다. 이때 시험 자체를 탓하거나 외부의 유혹자 사단을 탓해서도 안된다. 유혹은 주어지지만 그 유혹에 반응하여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형상의 의미이다. 우리의 죄의 본성에 지지 않고 유혹을 이기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넷째, 우리는 날마다 악(Evil) 혹 악한자 (Evil one)에서 건짐 받는 것이 필요하다. 악과 악한자의 구분이 본 절의 의미를 다르게 할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악은 악한 자 사단을 지칭한다. 우리가 세상 나라의 종이 된 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 그리고 유혹을 주는 사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도록 날마다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할 네 가지 “물질, 죄, 유혹(시험), 사단”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죄에 빠져있는 우리가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하나님 통치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다. 이 네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조심하고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다. 주님은 이것들을 구하며 하나님 나라가 지금 나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임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마지막 송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여기서 “대개”는 “왜냐하면”(For, Because)으로 번역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가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 구원의 임재를 구하고, 또 이것을 가로막는 네 가지 요소들을 이기도록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 구원이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는 한 가지 기도제목이다.
3.3 기도의 실제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신다. 먼저, 예수는 주기도를 가르치시고 그 다음, 친구를 위해 밤에 찾아가 떡을 구하는 사람을 비유로 하시며 강청하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시며 기도에 관한 말씀을 마치신다. 또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유명한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살전5:17)
분명 성경은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함을 가르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강청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제목을 잊어버릴까 염려함인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께 내 소원을 자꾸 알려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잊으실까?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를 아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된 우리, 기도는 이 관계를 기억나게 한다. 기도하면 이 관계가 확인되고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의 본성에 의해 쉽게 잊어버린다.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을 얻어내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면 된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할 때 절차와 양식이 있는가? 없다.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임을 이해할 때 모든 부담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인기도가 아닌 회중(대표)기도 때문에 부담이 된다. 작든 크든 공식모임에서 기도를 해야 할 때 긴장된다. 이때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형식(양식)을 따르면 된다. 주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 구원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주기도의 형식은 네 가지를 기본 순서로 보면 된다. 이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대체로 그렇게 해온 것이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대표기도의 형식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들을 감사하며 진심으로 찬양 드린다. 여기에는 우리 죄에 대한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도 포함된다. 세 번째는 우리의 지금 필요를 구한다. 개인기도일 때는 개인의 필요를, 회중기도일 때는 전체가 필요로 하는 기도제목을 간구한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주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예수이름으로 마무리한다.
기도응답은 보통 "Yes, No, Wait"로 표현 된다. 기도응답은 반드시 하나님께 Yes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물건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면 무조건 Yes라고 응답하셔야 한다고 확신한다면 큰 오해이다. 하나님께 신성모독 참람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비인격 기도응답 기계가 아니시다. 그것은 일반종교의 비인격 우상이다. 나는 하나님께 신뢰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응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Yes라고 주실 수도 있고 No라고 주실 수 있고, 기다리라고 Wait으로 응답주실 수 있다. 내가 하나님 백성이 분명하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기도하면 반드시 Yes라고 응답하는 수학 공식이 아니다. 기도응답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래서 응답받으면 감사가 넘친다. 그 응답이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 내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고 감사한다. 순종하고 따라간다. 지나고 보면 언제나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결정이 옳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조용하게 기도하기도 하고, 절박한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짖고, 새벽에 나가서, 금식하며, 철야기도회에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 단 우리는 죄의 본성이 있기에 자꾸 다른 사람 기도를 평가하고 정죄하기 쉽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를 많이 하면 사람은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데,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비인격 기도를 많이 하면 교만해진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인 기도의 축복을 날마다 누리자. 그때 비로소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귀하다”는 진정한 고백이 나올 것이다.
<요약>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 맡김이다.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기도에는 방식이나 비법이 없다. 조용히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나누자. 단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자기 내면의 성찰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기도는 내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분의 자녀 됨을 확인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지 내 자신의 인격수양이나 적극적 사고방식의 자기 최면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일반종교처럼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섬김을 받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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