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제23장 로마서, 십자가 복음

Author
gospel323
Date
2017-10-1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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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제23장 로마서, 십자가 복음

1. 바울과 로마서

1.1 로마서의 중요성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서양역사를 바꿔놓은 두 개의 큰 사건이 있었다고 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며 또 하나는 바울의 회심이라고 하였다. 회심한 바울이 유럽에 들어옴으로 서구문명이 기독교문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오늘날 서구문명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가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도였다. 신약성경 스물일곱 권 중 열네 권을 바울이 기록하였다.

로마서는 바울이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 자체를 기록한 서신서이다. 다른 서신들은 바울과 해당교회나 제자의 어떤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다. 문제해결을 위해 아니면 위로나 권면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글이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는 교회로 침투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고린도 전후서는 바울의 사도성이 의심받는 가운데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에베소서는 회람편지로, 빌립보서는 감사편지로, 골로새서는 이단 경계편지로 쓰여졌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종말론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는 교회목회를 위하여,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담긴 편지에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들어있지만 그것은 주된 내용이 아니고 일부분만 보조설명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로마서는 다르다. 기록 목적 자체가 복음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로마서를 읽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과 위대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로마서에서 변화 받았음을 고백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로마서는 복음의 내용 자체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로마서 배경과 기록 목적

우선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부분의 바울의 글부터 읽어보자.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1:10-13)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롬15:22-28)

김세윤 교수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우리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게 하고, 어떻게 해서 로마서가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복음의 내용 자체를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첫째, 바울은 지금 소아시아, 마게도냐 지역 등 로마 동반구 지역 전도를 다 마치고 로마의 서반구 전도를 하려는 시점에 있다. 그런데 동반구 지역 전도는 수리아의 안디옥교회가 지원해주었지만 로마 서반구까지는 거리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무리이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의 서반구지역 전도를 위해 로마 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원하고 있다.

둘째,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자신이 전한 복음과 사도권 논쟁으로 힘겹게 싸우다가 이제 겨우 마무리한 시점에 있다. 또한 수년간 많은 오해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진행한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 모금을 마치고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하는 시점에 있다.

셋째,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며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을 받아들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로부터의 배척은 당연하지만 교회로부터의 환영도 자신할 수 없었다. 이는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 거짓교사들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추천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지금까지 치열하게 싸웠는데 바울은 다시 그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만약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의 복음과 이방교회 대표자들이 가져온 헌금을 받아들이면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는 하나가 되지만, 만일 거부를 받으면 자신의 사역과 이방 교회는 유대 교회와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선교사역의 사활이 걸린 예루살렘 교회 방문이라는 중요한 시점을 앞두고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있는 바울은 이번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했다. 이는 그동안 자신이 가르쳐온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십자가 복음이 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에게 다시 저항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번 방문으로 이방교회와 유대교회의 하나 됨, 이것은 단순한 친교가 아니라 바울 사역의 정통성 여부를 인정받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되는 십자가 복음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확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후반부는 바울이 오로지 로마를 향해서 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의 서반구지역 선교에 재정적 지원도 얻지만 그것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벌어질 지도 모르는 논쟁에서 로마교회의 지지를 얻고 싶었다. 이는 로마교회가 제국의 수도교회로서 그 위치가 비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바울을 잘 모른다. 바울에 대한 소문은 어디를 가든지 부딪히고 싸움을 벌이는 자라는 좋지 못한 소문이 들린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설명함으로 로마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로마서를 쓰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로마서가 다른 바울서신들과는 달리 자신이 헬라세계에 다니면서 증거한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차분하게 설명하는 교리적인 서신이 된 것이다.

1.3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바울은 그의 첫 선교여행에서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지방에 도착한다. 사도행전 13장에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설교에는 바울이 증거하던 복음의 핵심이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까지 구약 역사를 언급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음을 상기시킨다.(행13:2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말한다.(행13:23)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일으키셨음을 시편을 인용하며 증거한다. 그리고 설교 마지막 부분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13:38-39)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거부한 죄인이 어떻게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다시 하나님 백성이 되는가? 그것은 십자가에서 속죄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었다.(행5:31) 그 후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 예루살렘으로 가기 앞서 자신이 마게도냐와 소아시아에서 전하던 복음의 내용을 로마서에 상세하게 기록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로마서의 개요를 정리해보겠다. 로마서 속의 핵심 내용은 이미 앞에서 모두 언급 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특히 로마서 1-8장이다. 로마서의 자세한 강해는, 독자들이 섬기는 교회 목사님과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와 틀을 이해하는 정도로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2. 로마서, 십자가 복음

2.1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형벌 받을 죄인이다.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 떠난 이방인들의 죄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의 죄를 실예로 들며 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지 이야기한다. 바울은 먼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롬1:16-17)를 통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죄 사함 받고 의롭다 칭함 받는다”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바로 이 구절에서 중세 천 년의 암흑기가 무너지고 종교개혁의 새로운 여명이 밝아오게 되었다.

로마서 1장에서 원죄를 설명하는 바울의 논지는 참으로 놀랍다. 우선 바울은 로마서를 읽고 있는 독자들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방 사람들의 죄악들을 하나하나 기술하는데 그 원인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1:28)라고 하고 있다. 죄는 어떤 악한 일을 저지르는 행위(자범죄)보다 먼저 그 마음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성향이다.(원죄) 하나님 떠난 이방인들의 죄의 원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계심이 분명한데도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한다.(롬1:18-20)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거부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을 원죄라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8-20)

하나님을 거부하니 자연히 우상숭배를 한다(롬1:21-23)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부하면 필연적으로 오는 결과이다. 인간은 형상이든 비형상이든 우상숭배를 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매춘과 동성연애 등 심각한 성적 타락을 한다.(롬1:24-27) 우상숭배는 필연적으로 육신의 타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영적 간음 우상숭배는 육적 간음으로 간다. 인류역사에 가장 오래된 두 직업은 무당과 매춘이다. 고대 종교에서 여자 제사장은 이 두 가지 일을 담당했다. 성경에는 여자 선지자와 여자 왕은 가끔 있다. 그러나 여자 제사장은 없다. 이는 주변 이방종교의 여자 제사장들과 구별됨이다. 정말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4-25)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대한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1:26-27)

그리고 온갖 부정적인 내면의 가치들이 생긴다.(롬1:28-32)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된 인간은 모든 일의 선악(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자기에 맞춰 행동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제한된 자원도 그렇고 주변사람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적 갈등이 온다. 갈등을 겪는 인간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심과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는데 그래서 세상은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그로인한 고통이 찾아온다. 교육과 사회법은 인간이 이를 표출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막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인간 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교육과 법의 형벌로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부패한 본성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냄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 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이러한 내면적 가치들을 억제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만 사람들은 죄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하나님 계심이 분명한데도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버려두시니(24,26,28절) 그들이 온갖 부끄러운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이런 죄인들이 멸망 받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것 아니냐는 것이 바울의 논지다.

우상숭배는 형상우상을 만들어 놓고 복을 구하는 것으로 말하면 그 의미가 너무 제한적이다. 우상숭배의 정의는 마땅히 섬겨야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욕심을 위하여 “다른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출20:4) “다른 것”에는 인간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형상은 가장 초보적인 수준이다. 우상이 추상적인 가치로 넘어갈수록 고상해 보이지만 그것도 역시 우상이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섬김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로마서 2장은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유대인의 범죄들을 지적한다.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불신세계의 죄들을 보고 “우리는 이방인들과 같지 않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고 있다”라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너희들도 죄인이다”라고 말하며 유대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17-24)

2.2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주셨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바울은 인간의 현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로 정의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이외에 또 다른 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서 모든 인류가 첫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피조세계에서 그 위엄과 존귀함이 하나님의 영광과 같음)을 잃어버리게 만든 죄가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난 자범죄들과 그 원인이 되는 원죄이다. 즉, 로마서 1장에 말하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성향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부정적 내면의 가치들, 그리고 제어되지 않고 나온 악한 행동들이다. 구원은 바로 죄로 인해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 드디어 십자가 복음이 등장한다. 로마서 1-2장은 로마서 3장의 이 말을 하기 위한 서론이었다. 그것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0-24)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실제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하나님을 거부하며 사는 이방인들의 삶을 보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의 기준대로 사는 유대인들을 보나 그들이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이미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는 속죄제사의 제물이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5-26)

2.3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칭의)

로마서 4장과 5장은 칭의 곧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현대인들이나 혹 당시 유대인들도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말은 참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현대인들에게는 언제나 댓가를 지불해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던 살아온 경험 때문이며,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할례, 율법을 지켜야 구원(하나님 백성됨) 얻는다고 하신 구약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3장에서 말한 믿음으로 구원 얻은 칭의의 실예를 든다. 이를 위해 모든 구원 얻는 자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을 설명한다. 당시 이방인 세계와 유대인들에게 설명하는데 아브라함만큼 적절한 예가 없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1-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3-24)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가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구원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증거한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은 무엇인가? 로마서 1-3장에서 말하는 죄를 용서 받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십자가 죄 사함을 믿음으로 죄용서 받았다. 의롭게 되었다. 하나님 자녀 되었다. 하나님 백성 되었다. 구원받았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갈라디아서에서도 똑같이 설명하는데 논지가 똑같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이며, 할례를 주신 것은 창세기 17장, 율법을 주신 것은 그 후 사백삼십 년 이후에 주셨다는 것이다.(갈3장)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구원요소는 믿음이고 율법(할례)은 그 다음 구원받은 아브라함 자손에게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주신 삶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5장은 어떻게 모든 인류가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지를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교하며 “대표의 원리”로서 칭의의 근거를 설명한다. 4장은 믿음으로 구원 얻었던 실예이고, 5장은 믿음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말한다. 이를 말하기 전에 바울은 믿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아들을 속죄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기술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음과 또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다. 복음은 기도응답 받음을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감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헌신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 한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전 인류가 어떻게 그 한 사람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바울은 대표의 원리로 말한다. 이 대표의 원리는 바울의 복음 설명 논지 중 대단히 중요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복음이 늘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됨을 안다. 도대체 아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일까? 아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바울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할 것은 왜 다른 신약 편지들에서는 아담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데 바울만 아담 이야기를 하는가? 아담 이야기는 초대교회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바울만의 생각인가?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다른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유대인들 세계에서 복음증거를 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두 아담의 범죄를 알고 있다. 아담 이야기는 유대교의 핵심원리이다. 이런 상황에 구태여 그들의 편지에 죄의 원인이었던 아담 이야기를 실명을 들며 직접 거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 세계에 복음 전했다. 이방인들은 죄의 시작이 되는 아담 이야기를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상세하게 아담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 신약성경에서 다른 사도들의 글은 너무 적다. 그들도 늘 아담 이야기를 죄의 원인으로 말하고 있는데 성경에 남겨진 글에는 그 이야기가 없는 편지만 모아졌다. 어쨌든 아담 이야기는 죄의 원인과 모든 인류의 타락근거로 제시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아담 이야기는 바울의 십자가 복음의 원리로 나온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 바울이 설명하는 아담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2-14)

바울은 모든 인류가 죄인된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아담 때문이었다. 아담은 아담 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첫 아담은 현 인류 곧 모든 아담종족(Adam's race)의 대표 이다. 그런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된 “대표의 원리”는 바로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얻는 근거도 된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15:45)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2.4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아직 네게 남아있는 죄의 세력을 이기라.(성화)

로마서 6-7장 까지는 성화 곧 거룩해져 감을 가르친다. 그런데 성화를 거룩해져감으로만 생각하면 뭔가 2%정도가 부족한 것 같다. 이는 마치 하나님을 위하여 어렵고 힘들게 해드려야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성화는 내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세력을 이김이다. 성화는 왜 하는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하지만 나를 위해서 한다. 죄를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게 유익하다. 죄를 이길 때 오는 자유는 그 어떤 것보다 행복하다. 내 신발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돌조각은 걸을수록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것을 빼내었을 때 편안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누구를 위해 돌을 빼야 하는가? 나를 위해 빼내는 것이다.

복음에서 성화가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죄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성화는 어감이 무척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느낌이 난다. 이는 복음의 한쪽 면만 지나치게 강조하여 들어왔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오늘도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하는 성화와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구조, 원죄의 속성, 이미와 아직의 상태, 사단의 존재 등을 이해하면 당연하다. 칭의와 성화는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단 논리적 순서는 언제나 칭의가 먼저이다. 성화는 칭의를 얻은 자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귀한 청소년 딸아이가 처음으로 혼자 멀리 여행을 간다고 하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조심해야 할 것들을 신신당부할 것이다. 옛날에는 길 건널 때 자동차만 조심하면 됐지만 요즘 그 정도의 일은 그리 위험한 축에 들지도 않는다. 세상에는 상상치도 못하는 악한 일들이 많다. 그런데 당신이 세상 물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예쁜 딸아이를 무방비 상태로 내보낸다고 하자.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당신은 세상이 얼마나 악한 곳인가를 모르거나 아니면 당신의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 당신은 딸을 미워하는 악한 부모임이 틀림없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이런 의미로 칭의로 구원 얻은 자에게 성화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것이 하나있다. 성화를 할 수 있는 비밀이 주어져 있다. 성화는 내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내안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화가 되어지도록 도와주신다. 이것이 종교와 복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5)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이미 앞서 언급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도와주심이다. 그래서 성도는 이제부터 자기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세력과 자기 밖에 존재하는 사단의 유혹과 싸울 힘을 얻게 되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6-7)

우리가 육체 곧 부패한 본성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우리 죄의 몸이 죽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우리 육체만 죽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우리도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우리의 정신적인 자각, 새로운 결심, 윤리적 결단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내주를 통한 신비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그런데 칭의와 다르게 성화는 우리의 적극적 행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와주시지만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동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가진 자기 판단과 자기 행동의 독립적 주체, 선택의 자유를 가진 자유인격, 도덕적 선택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의 책임을 사단에게 돌릴 수 없듯이 성화의 책임도 성령에게 전가할 수 없다. 그러나 연약하지만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면 죄를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성화는 십자가의 은혜로만이 가능하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축복을 다시 한 번 율법을 예를 들어 가르친다.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남을 설명했듯이, 바울은 7장에서 다시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는 구약법의 결혼관계를 예로 들며 율법에서 벗어남을 설명한다.

우리는 절대로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결혼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살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로 갈 수 없다. 남편이 죽어야만 재혼이 가능하다. 구약 결혼법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죽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율법이 죽었다고 하지 않고 우리가 죽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 옛 사람이 죽음을 설명하는 영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성령의 새로운 법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롬7:4-6)

결국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거나(6장)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7장) 단순히 우리가 새로운 결심을 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아주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근거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죄의 세력을 이기고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되어지는 성화 때문이다.

이를 볼 때 바울은 성도들에게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칭의로 얻는 구원만 강조하면 사람들은 본 회퍼가 말한 값싼 구원을받아 방종에 빠지기 쉽다. 성화만 강조하면 성도는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주눅들고 율법에 눌리기 쉽다. 성도를 들뜨게 만들거나 눌리게 만드는 것은 둘 다 문제가 있다. 성화만 강조하는 것이 비 복음적이면 칭의만 강조하는 것도 비 복음적이다. 이 두 가지의 조화, 칭의의 감격과 성화의 능력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가르쳐준 바울은 우리의 귀감이 된다. 결국 올바른 칭의는 성화를 가져와야하고, 올바른 성화는 칭의에 근거해야만 한다.

2.5 나는 죄의 세력과 싸워 거룩하게 살려고 하나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로마서 7:15-25, 그 유명한 바울의 탄식 부분이다. 성도는 칭의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 앞에 죄와 싸우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 내 개인적인 유익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이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니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거룩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만, 내 죄의 본성은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앞에 탄식과 깊은 절망에 빠진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15-25)

이 깊은 절망 속에서 탄식해본 자만이 죄가 얼마나 무서우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내 속에 엄청나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의 본성(원죄)은 내가 아무리 대단한 결심, 주님께 대한 헌신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잠시 눌려있을 뿐이지 언젠가 다시 솟아난다. 이 처절한 우리의 현실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을 과신하지도 않고 남을 정죄하지도 않게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절망이다.

2.6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줄 아시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의 꽃이요 다이아몬드와 같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부터 전개해온 모든 십자가 복음의 꽃이 이곳에서 활짝 피워진다. 로마서 8장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칭의)과 우리 삶에서 실제로 죄의 세력을 이기는 능력을 누림에 있다.(성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우리의 구원이 실제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인들과 불신세계에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우리 자신은 믿고 확신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아마 한심한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30대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초중고교 시절 운동을 잘했고 대학도 야구 선수로 스카우트 되어 들어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학시절 그에게 원인모를 정신적인 문제가 왔다.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고 겨우 졸업한 후 집에 와있다. 이 청년은 부모님께 매일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자기를 곧 스카우트 하러 온다고 말한다. 어떨 때는 프로농구 NBA에서도 요즘 자신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상적인 삶이 안되고 직장도 갈 수가 없다. 자기는 매일 확신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고 자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에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런 복음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이 아니라 종교이다. 종교는 아편이란 칼 막스의 말은 바로 거기에 적용되는 말이다. 복음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마치 변화할 수 있는 것처럼 환상에 잡히게 만드는 아편이 절대 아니다. 그런 아편에서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실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에 법에 의하여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가 그 지긋지긋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온 인류의 죄를 심판하신 후 내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죄를 정하셨다”(4절)는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죄에게 유죄판결을 내려 그 권세를 사용 못하게 하신 것이다. 죄를 의인화시켜 표현함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 다음은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육신을 좇는 자들과 성령을 좇는 자들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5장의 비교와 똑같다. 육신을 따르면 사망이고 성령을 따르면 생명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9절)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신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을 몸은 육신(육체 Flesh)으로 영혼과 함께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인 단순한 우리의 몸(Body)이 아니다. 이는 죄에 오염되어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가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죄인된 내 자아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5-11)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원죄 곧 죄에 오염된 육신(육체 창6:3) 상태에서 건져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그러니 우리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안된다.(12절) 여기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요구에 굴복하고 살 수 있음을 말한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죄 사함 받았어도 우리가 먼저 법적인 의인이 된 것이지 아직은 완전 의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 받은 죄인이다. 따라서 아직 죄에 오염되어 있는 우리의 부패한 본성 우리 자아는 우리에게 죄의 욕구대로 살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육신의 요구에 순종하면 우리는 사망의 열매를 먹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의 본성의 요구를 거부하고 성령께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생명을 얻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14절) 바울 시대는 노예 신분제 사회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아들과 그렇지 않는 노예는 아주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상속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았고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1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2-17)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유보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구원얻었어도 아직 천국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이 땅에는 죄의 세력과 사단의 유혹이 고난으로 남아있다. 아무리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는 아직 죄와 사단에게 노출되어 있기에 현재의 삶은 고난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으로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롬8:18-25)

우리가 미래에 얻어질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오늘 구원의 미완성의 첫 열매를 겨우 맛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어려움과 환란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6-28)

우리의 구원을 또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믿음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2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전에 미리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십자가에서 죽이시며, 또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사 우리로 죄의 세력을 이기게 하시고, 또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을 바라보며 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냐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도, 송사할 수도, 정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2-39)

여기까지가 로마서의 1부(롬1-8장)로 바울의 십자가 복음의 중요한 핵심이 된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설명해 나가는데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는 별 감흥이 없다. 평생 유대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다르다. 왜냐하면 새 언약(신약)인 복음은 옛 언약(구약)과 유대인들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지금까지 바울의 로마서를 읽게 되면 반드시 질문하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혈통적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여기에 대답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로마서의 2부이다.(롬9-11장)

2.7 이스라엘은 귀중하나 성경은 혈통적 자녀가 아닌 약속의 자녀를 말씀하신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육신적 이스라엘이 중요성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그러나 곧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예로 들며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롬9:8) 이는 이방인들이 구원얻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바울의 위대성은 자신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는데 이방인의 구원을 복음의 부요소로 보지 않고 복음의 주요소로 보았다는데 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과 똑같다.(마16:17) 바울은 탁월한 두뇌로 연구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알게 되었다.(갈1:11) 바울이 이방인 전도에 그토록 매진한 것은 휴머니즘의 발로가 아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이방인이 구원 얻을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행13:47, 갈3:13-14)

바울은 사라에게 이삭을 주신 것(8절), 리브가에게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 말씀하신 것(12절), 바로를 강팍케 하심(17절), 토기장이 비유(21절) 등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을 근거로 예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신약교회가 바로 이사야에서 말한 “남은 자”라고 말한다.(27절)

2.8 이스라엘의 실패는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의를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장은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의를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방인의 성공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3절) 그러면서 바울은 약속의 자녀는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라고 말하고 약속의 자녀들이 구원 얻은 근거를 제시한다.(9절) 그들은 구약 요엘서 2장 32절 예언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으려면 누군가가 가서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바울은 이사야 52장 7절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가 복음 전하라고 보냄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사람의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씀을 들어야 생긴다고 말하는데(롬10:17) 이 말씀은 온 땅에 퍼져있지만(시19:4)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 신명기 32장 21절과 이사야 65장 1절을 인용하며 제시한다.

2.9 혈통적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돌아온 후 최종적으로 구원하신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유대인 곧 이스라엘의 최종적 구원을 이야기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완악하게 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먼저 증거 되고 그 다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온 후 모든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이다.(25절)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됨을 감사한다. 이는 자신의 이방인 사역으로 이스라엘이 후에 시기케 됨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이방인 중 구원받은 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들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 돌 감람나무에 불과하다.(24절)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원리적인 부분설명을 마무리 한다.

여기까지가 로마서 2부이다. 전통적으로 로마서 1-11장은 복음의 교리부분으로 설명하고 나머지 12-16장은 실천부분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교리부분을 둘로 나누어 설명해 보았다. 이는 로마서 9-11장이 이방인인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얻은 근거를 말하기도 하지만, 로마서 1-8장이 더 세밀하게 말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2.10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여기서부터 로마서 3부에 해당된다.(롬12-16장) 바울은 성도에게 믿음으로 이미 구원얻었으니 이제 실제 삶에서 살아야 할 교훈을 가르친다.

로마서 12장은 우리를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1절), 우리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의식을 가져야 하고(5절), 이웃을 위해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라고 한다.(8절) 또 이웃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21절)
로마서 13장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굴복할 것(1절),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절),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말한다.(12절)

2.11 강한 자와 약한 자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로마서 14장에서 15장 13절까지는 당시 초대교회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우상제물에 관한 부분이다. 우상제물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당시는 심각한 이슈였다. 헬라세계에서 우상을 숭배하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은 매년 신들의 제전에서 벌어지는 우상제물에 관하여 갈등하고 있었다. 당시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왜냐하면 높은 사람들이 이방신의 제전에 술과 고기를 많이 내놓아 가난한 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신의 제전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체로 시장에서는 우상에게 제사를 하고 남은 고기를 팔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려면 우상제물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우상제사 하지 않은 고기도 살 수 있지만 그런 것은 많지 않았기에 값이 훨씬 더 나갔다. 그러니 가난한 교인들이 고기를 먹으려면 이방제물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교회 내부는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과 먹으면 안된다는 자들로 나뉘어 갈등한다. 먹는 자들은 우리는 믿음이 있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고 이들이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 8-10장에 나오는 강한 자이다. 약한 자들은 그래도 우상제물은 귀신에게 제사한 것이니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무시하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는 상황이었다.(롬15:3)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서로 판단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도를 섬기는 원칙을 제시한다. 사랑으로 행함으로 네 식물로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말도록 하라(16절) 성도는 할 능력이 있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 복음을 받은 성도이다.

로마서 15장에서 우상제물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며 덕을 세우라고 마무리 한다.(2절)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 사역이 구약 말씀의 성취임을 확인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2.12 마지막 권면과 인사말

로마서 15:14-33절은 바울의 마지막 권면이다. 자신의 로마 서반구 지역 선교사역을 위해 재정 도움을 요청하고,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중요한 상황을 이야기하며 기도요청을 한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로마 여러 성도들에게 자신의 동역자들과 문안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로마서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십자가 복음이 영세 전에 감취었다가 이제 나타내신바 된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였다고 말하고(26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끝맺는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롬16:25-27)

<요약>

로마서는 기독교 구원론의 근간이다. 여기에는 죄로 인하여 사망에 빠진 인간의 모습(1-2장), 십자가 대속(3장), 믿음과 칭의(4-5장),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인한 성화(6-7장), 성령의 도우심(8장)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초대교회 이래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십자가 죄 사함으로 얻게 된 칭의와 성화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복음이다. 이 복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우리 자녀들도 구원 얻을 것이다. 이 복음으로 세상은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이게 아빠가 너희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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