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신조(5) - 죄사함과 이웃용서 (마6:9-15)
Author
GOSPEL323
Date
2022-04-0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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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5) - 죄사함과 이웃용서 (마6:9-15)
1. “네가 하나님처럼 되어”
(1) 피조물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주인 되어 살아감
- 사람은 우연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피조물과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특별한 창조목적을 가지셨다(창1:27-28)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창조목적대로 살아야 한다. 아담은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분리되어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겠다고 선언했다.
(2) 모든 사람은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남 (원죄)
-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다. 범죄한 아담으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아담의 본성(=죄)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인이다. 죄는 사람 인격의 변질이요 타락된 성향이므로 사람과 분리되지 않는다. 죄는 사람을 떠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인격(=사탄)이 아니다.
(3) 모든 사람은 아담의 본성대로 살아감 (자범죄)
-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원죄) 바로 죄의 소욕이다(창4:7) 모든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아담의 본성/죄의 소욕대로 살아가고 그에 따라 죄의 행동들을 저지른다(자범죄) 모든 종교는 자범죄를 제거하고 없애는 방법론만 말하지만 복음은 자범죄의 원인이 되는 원죄를 해결해야 자범죄가 없어짐을 가르친다.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만 유일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셔야 하신 이유이다.
2. 죄사함과 이웃용서
(1) 죄는 마땅히 이행해야할 책임/의무를 하지 않은 것(=빚, debt)
① 네가 정녕 죽으리라(창2:17) =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 죄에 해당하는 대표적 헬라어는 “하말티아”(요8:34, 과녁을 빗나감)이다.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벗어나 살아감이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죄를 “오페이레마”로 쓴다. 헬라어 “오페이레마”는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빚(debt)이다.
-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죄사함을 받기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때 죄는 빚(마6:12, 오페이레마)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벗어나 살고 있고, 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이행해야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사탄에게 빚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빚(debt)을 진 것이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마18:24)나 돼서 사람이 갚을 수가 없다.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하는 빚이니 사망이다(롬6:23) 하나님께 지은 죄(debt)는 하나님께서 사면해 주셔야 해결된다.
②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빚(죄)를 대신 담당하심
-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처럼 스스로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들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께 갚아야할 빚(debt)을 지고 있다. 그 빚은 너무 커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정녕 죽으리라 선언 하셨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만 해결되는 빚이다. 사람은 해결할 수 없다.
- 하나님께서 우리 빚을 대신 담당해주셨다. 그 방법은 성자 예수님의 생명을 대속제물로 드려 죄의 값을 치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갚아야할 사망의 빚을 담당하심이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성육신하셨다. 십자가는 우리 죄(debt)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만유의 통치자요 공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할 방법이기 때문이다.
③ 죄사함은 칭의와 성화의 신앙생활 속에 주심
- 죄(빚)는 형벌을 가져오기에 죄사함은 내 인격이 아담의 본성으로 뒤틀어져 있는 것(=원죄)과 그 본성대로 살아가며 저지른 악한 행동들(=자범죄)에 대한 형벌면제를 의미한다. 이는 마지막 심판날 어떤 정죄도 없고 최종 무죄선언, 형벌없음으로 확정된다.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죄용서 받는 즉시 천국 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한 한편 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 죄사함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 속에 주어졌다. 우리는 예수 믿고 즉시 부활되지 않고 여전히 죄인으로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세상에서 살아간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죄없음 무죄선언 되고 영생의 부활을 얻을 것이지만 지금 나는 죄의 본성이 그대로 있고 때때로 죄에 넘어지고 있다. 이것이 구원의 현재, 성도의 삶이다. 이런 현실 속에 죄사함을 직접 대입하면 내가 지은 죄는 결국 용서받으니 죄를 지어도 문제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해당한다. 어차피 무죄선언 될 것이니 내가 오늘 짓는 죄는 죄가 아닌 것이다. 이들이 구원파 이단이다.
- 죄사함 속에는 오늘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칭의(=의롭다하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예수를 믿으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어떠한 형벌도 없다. 이것과 동시에 내가 오늘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덧입혀 주신다. 하나님의 의는 물질이나 기운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우리 속에 함께하심 곧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칭의와 성화의 신앙생활이 없는 죄사함이 바로 구원파이다.
- 구원의 현재, 성도의 신앙생활은 마지막 심판날 최종 무죄선언을 이미 보장 받고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무너뜨리는 성화의 과정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 고난 속에 수없이 부딪히고 깨져야 자기자랑이 없어지고 나를 내려놓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칭찬으로는 죄를 버리게 못한다. 오직 고난만 자신을 포기하게 만든다. 고난으로만 자기교만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우리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만든다. ex>소년등과 일불행
- 히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①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
-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산상수훈 속에 들어있다. 주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제자(성도)들에게 주신 기도이다. 그 하나님 나라가 죄로 더러워진 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성도 자신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구하는 청원으로 이어진다.
② 내가 하나님께 죄사함 받음을 구하는 기도
- 성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선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쌓아놓을 풍족한 재물이 아닌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양식이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는 하루씩 분량이었다. 백성이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함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 신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주기도의 핵심은 죄사함에 있다. 죄사함을 받아야 시험을 이기며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악한 자를 이기게 된다. 야고보는 시험은 내 속에 있는 욕심에서 나오는 죄에서 온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우리가 죄악을 행하는 것은 악한자의 유혹/시험(temptation)에 빠진 것인데 그 시작은 내 속에 있는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죄사함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③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
- 주기도에서 약간 어려운 부분은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붙여진 내용이다. 이는 마치 우리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웃을 용서했으니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해주셔야 하는 의무가 있으신가? 나는 이웃을 용서했으니 하나님께 권리주장 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 주기도는 불신자가 구원받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제자(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기도이다. 죄용서는 성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자범죄들에 대한 용서를 구함이다. 구원 얻기 위한 단회적 회개와 죄용서가 아닌 구원 이후 성화의 삶 속에 반복되는 회개와 죄용서를 말한다.
- 그러므로 주기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며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기도이다. 좀 더 실천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도래는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해줄 때 임한다. 주기도는 하나님께 죄용서 받은 힘으로 이웃을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 이러한 기도는 주기도 마지막 두 구절로 근거를 얻는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이 구절은 내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할테니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권리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하셨으니 너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이다.
<결론 및 적용>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 (마18장)
(1) 예수님은 죄를 빚(debt)으로 말씀하시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 비유하신다.
- 일만 달란트는 1만불이 아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므로 노동자가 6천일 동안 일해서 버는 금액이다. 계산하기 쉽게 하루 일당 100불로 치면, 1달란트는 60만불, 1만 달란트는 60억불, 6 billion 한국 돈으로는 6조이다. 1백 데나리온은 1만불이다. 그러나 1만 달란트는 오늘날 60억불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이다. 오늘 돈으로는 환산하자면 6천억불 x 6천억불 이상이다.
(2) 이웃용서는 하나님께 죄사함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다.
- 우리는 60억불 탕감(=용서) 받은 사람이다. 내게 1만불 빚진 자를 용서해줘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줘야 한다. 내가 일만 달란트 죄사함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은 고난 속에 한없이 낮아질 때 하나님의 은혜로 체험된다. 고난이 은혜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1. “네가 하나님처럼 되어”
(1) 피조물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주인 되어 살아감
- 사람은 우연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피조물과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특별한 창조목적을 가지셨다(창1:27-28)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창조목적대로 살아야 한다. 아담은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분리되어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겠다고 선언했다.
(2) 모든 사람은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남 (원죄)
-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다. 범죄한 아담으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아담의 본성(=죄)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인이다. 죄는 사람 인격의 변질이요 타락된 성향이므로 사람과 분리되지 않는다. 죄는 사람을 떠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인격(=사탄)이 아니다.
(3) 모든 사람은 아담의 본성대로 살아감 (자범죄)
-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원죄) 바로 죄의 소욕이다(창4:7) 모든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아담의 본성/죄의 소욕대로 살아가고 그에 따라 죄의 행동들을 저지른다(자범죄) 모든 종교는 자범죄를 제거하고 없애는 방법론만 말하지만 복음은 자범죄의 원인이 되는 원죄를 해결해야 자범죄가 없어짐을 가르친다.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만 유일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셔야 하신 이유이다.
2. 죄사함과 이웃용서
(1) 죄는 마땅히 이행해야할 책임/의무를 하지 않은 것(=빚, debt)
① 네가 정녕 죽으리라(창2:17) =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 죄에 해당하는 대표적 헬라어는 “하말티아”(요8:34, 과녁을 빗나감)이다.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벗어나 살아감이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죄를 “오페이레마”로 쓴다. 헬라어 “오페이레마”는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빚(debt)이다.
-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죄사함을 받기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때 죄는 빚(마6:12, 오페이레마)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벗어나 살고 있고, 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이행해야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사탄에게 빚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빚(debt)을 진 것이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마18:24)나 돼서 사람이 갚을 수가 없다.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하는 빚이니 사망이다(롬6:23) 하나님께 지은 죄(debt)는 하나님께서 사면해 주셔야 해결된다.
②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빚(죄)를 대신 담당하심
-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처럼 스스로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들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께 갚아야할 빚(debt)을 지고 있다. 그 빚은 너무 커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정녕 죽으리라 선언 하셨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만 해결되는 빚이다. 사람은 해결할 수 없다.
- 하나님께서 우리 빚을 대신 담당해주셨다. 그 방법은 성자 예수님의 생명을 대속제물로 드려 죄의 값을 치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갚아야할 사망의 빚을 담당하심이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성육신하셨다. 십자가는 우리 죄(debt)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만유의 통치자요 공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할 방법이기 때문이다.
③ 죄사함은 칭의와 성화의 신앙생활 속에 주심
- 죄(빚)는 형벌을 가져오기에 죄사함은 내 인격이 아담의 본성으로 뒤틀어져 있는 것(=원죄)과 그 본성대로 살아가며 저지른 악한 행동들(=자범죄)에 대한 형벌면제를 의미한다. 이는 마지막 심판날 어떤 정죄도 없고 최종 무죄선언, 형벌없음으로 확정된다.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죄용서 받는 즉시 천국 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한 한편 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 죄사함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 속에 주어졌다. 우리는 예수 믿고 즉시 부활되지 않고 여전히 죄인으로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세상에서 살아간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죄없음 무죄선언 되고 영생의 부활을 얻을 것이지만 지금 나는 죄의 본성이 그대로 있고 때때로 죄에 넘어지고 있다. 이것이 구원의 현재, 성도의 삶이다. 이런 현실 속에 죄사함을 직접 대입하면 내가 지은 죄는 결국 용서받으니 죄를 지어도 문제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해당한다. 어차피 무죄선언 될 것이니 내가 오늘 짓는 죄는 죄가 아닌 것이다. 이들이 구원파 이단이다.
- 죄사함 속에는 오늘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칭의(=의롭다하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예수를 믿으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어떠한 형벌도 없다. 이것과 동시에 내가 오늘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덧입혀 주신다. 하나님의 의는 물질이나 기운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우리 속에 함께하심 곧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칭의와 성화의 신앙생활이 없는 죄사함이 바로 구원파이다.
- 구원의 현재, 성도의 신앙생활은 마지막 심판날 최종 무죄선언을 이미 보장 받고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무너뜨리는 성화의 과정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 고난 속에 수없이 부딪히고 깨져야 자기자랑이 없어지고 나를 내려놓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칭찬으로는 죄를 버리게 못한다. 오직 고난만 자신을 포기하게 만든다. 고난으로만 자기교만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우리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만든다. ex>소년등과 일불행
- 히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①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
-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산상수훈 속에 들어있다. 주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제자(성도)들에게 주신 기도이다. 그 하나님 나라가 죄로 더러워진 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성도 자신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구하는 청원으로 이어진다.
② 내가 하나님께 죄사함 받음을 구하는 기도
- 성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선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쌓아놓을 풍족한 재물이 아닌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양식이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는 하루씩 분량이었다. 백성이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함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 신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주기도의 핵심은 죄사함에 있다. 죄사함을 받아야 시험을 이기며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악한 자를 이기게 된다. 야고보는 시험은 내 속에 있는 욕심에서 나오는 죄에서 온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우리가 죄악을 행하는 것은 악한자의 유혹/시험(temptation)에 빠진 것인데 그 시작은 내 속에 있는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죄사함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③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
- 주기도에서 약간 어려운 부분은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붙여진 내용이다. 이는 마치 우리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웃을 용서했으니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해주셔야 하는 의무가 있으신가? 나는 이웃을 용서했으니 하나님께 권리주장 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 주기도는 불신자가 구원받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제자(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기도이다. 죄용서는 성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자범죄들에 대한 용서를 구함이다. 구원 얻기 위한 단회적 회개와 죄용서가 아닌 구원 이후 성화의 삶 속에 반복되는 회개와 죄용서를 말한다.
- 그러므로 주기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며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기도이다. 좀 더 실천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도래는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해줄 때 임한다. 주기도는 하나님께 죄용서 받은 힘으로 이웃을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 이러한 기도는 주기도 마지막 두 구절로 근거를 얻는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이 구절은 내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할테니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권리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하셨으니 너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이다.
<결론 및 적용>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 (마18장)
(1) 예수님은 죄를 빚(debt)으로 말씀하시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 비유하신다.
- 일만 달란트는 1만불이 아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므로 노동자가 6천일 동안 일해서 버는 금액이다. 계산하기 쉽게 하루 일당 100불로 치면, 1달란트는 60만불, 1만 달란트는 60억불, 6 billion 한국 돈으로는 6조이다. 1백 데나리온은 1만불이다. 그러나 1만 달란트는 오늘날 60억불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이다. 오늘 돈으로는 환산하자면 6천억불 x 6천억불 이상이다.
(2) 이웃용서는 하나님께 죄사함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다.
- 우리는 60억불 탕감(=용서) 받은 사람이다. 내게 1만불 빚진 자를 용서해줘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줘야 한다. 내가 일만 달란트 죄사함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은 고난 속에 한없이 낮아질 때 하나님의 은혜로 체험된다. 고난이 은혜로 들어가는 통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