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교회(1) - 에덴에서 새예루살렘까지 (창1:1-5, 창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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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323
Date
2022-01-16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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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1) - 에덴에서 새예루살렘까지 (창1:1-5, 창1:26-28)
1. 에덴동산
(1) 에덴은 실제 사실이다.
- 에덴동산을 단군신화와 같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에덴은 지구상에 실제 했던 장소이며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다. 에덴을 포함한 창세기 사건들을 신화나 전설로 여기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종교문학이 되며 허구가 된다.
- 에덴의 위치는 찾을 수 없다. 어떤 학자는 네 개의 강을 기준으로 고대 아르메이나 지역 현 이란의 북부로 추정하나 노아홍수 대격변으로 모든 지형이 바뀌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두 강 티그리스 유브라테스 이름은, 고대 강 이름을 알고 있던 후손들이 후대에 붙인 이름일 수도 있다. 에덴은 게루빔 천사들이 화염검(불칼)으로 지키고 있다. 에덴의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2) 가나안/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의 에덴
- 에덴의 동쪽은 최종적으로 시날평지 바벨론이다. 그렇다면 바벨론의 서쪽은 어디일까? 가나안/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벨론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부르신 이유이다. 세상나라 바벨론에서 하나님 나라 에덴으로 부르심이다. 그래서 가나안 특히 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의 에덴이다. 세상나라 바벨론과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신약교회)의 대조가 여기서 나온다. 모든 구약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으로 성취완성되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의 에덴일 뿐 그 이상 지나치면 유대주의가 된다.
- 예루살렘을 실제 에덴동산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근거 없고 지나치고 위험하다. 유대인 중심의 유대주의 사상과 신학이다. 예루살렘이 실제 장소적 에덴동산이면 이스라엘만 하나님 나라가 되고 주변의 아랍국가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상나라 적대세력이 된다. 오늘날 그들과의 모든 전쟁은 여호와의 거룩한 헤렘 전쟁이 된다.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은 어떤 경우든 정당화 된다. 오늘 유대인들의 사상적 근거다.
2. 에덴에서 새예루살렘까지
(1)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다.
① 구원보다 창조가 먼저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샤마임-하늘들,우주, 하에레츠-땅,지구)를 창조하시니라”(창1:1)
- 하나님은 지구와 대우주를 한 순간에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1절의 천지는 지구와 태양계 등 모든 천체가 포함된 대우주를 말한다. 하나님은 첫째날 지구(하에레츠)를 포함한 대우주(하샤마임)를 창조하셨고 계속해서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하나씩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곳에 생명체와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1절은 천지창조 선언이 아니다. 대우주와 태양계 지구를 첫째날 한순간에 창조하심을 말한다.
- 만약 1절은 천지창조 선언이고 3절부터 첫째날 빛 창조가 시작된다고 하면 2절의 혼돈, 공허, 흑암 해석이 이상해 진다. 하나님께서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땅과 물이 있고 그 땅에는 혼돈 공허 흑암이 있다. 그래서 첫창조와 사탄타락으로 인한 혼돈 공허 흑암이 생겼다는 이중창조론와 간격이론이 나온다. 귀신론자들의 주장이다.
- “땅이 혼돈(질서없음)하고 공허(내용없음)하며 흑암(빛이없음)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 2절의 땅은 지구를 말한다. 대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구에 생명체가 거하도록 창조하시기 위해 먼저 지구를 포근히 감싸고 계신다. 혼돈은 지구가 아직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함을 말하고, 공허는 지구 공간에 아직 생명체가 없이 비어있음을 말하며, 흑암은 빛이 없어 지구가 어두운 상태임을 말한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2-5)
-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어두운 지구에 빛을 주시고, 혼돈을 정리하시고, 공허를 채우시며 생명체와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 첫번째가 빛이다. 어두운 지구(땅,물)에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빛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1절부터 5절까지 전체가 첫째날 창조다. 첫째날 하루는 진화론의 수십억만 년 긴 기간 아닌 짧은 하루이다. 하나님께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한 순간에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우리는 성경 계시를 의존해서 믿고 신학 해야 한다.
-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다. 우주는 어느 순간 갑자기 발생했고 팽창하고 있으며(빅뱅), 선캄브리아기 지층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생명체 화석이 캄브리아기에 왜 갑자기 폭발적으로 출현하는지(캄브리아 대폭발)는 과학자들이 풀 수 없는 난제다. 모두 무에서 갑작스럽게 한 순간 등장한다. 하나님의 창조다.
② 모세는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창조방법)보다 왜 창조하셨는지(=창조목적)을 기록
- 성경 창세기에는 창조기록을 1장(1:1-2:3)으로 끝내고 2장은 사람창조를 핵심요약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이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역사 속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여주신 사실을 그대로 선포할 뿐이다. 이점이 성경을 사람의 창작물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계시임을 증명한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을 사실로 정확하게 기록할 뿐이다. 증명하기 위해 덕지덕지 설명을 붙이는 자체가 조작 냄새가 난다. 사람의 이성범위 내에서 설명되는 하나님은 사람 수준에 불과하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어야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신 창조주시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와 태양계, 지구, 사람이 창조되었다. 죄에 빠진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 이것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난해해질까? 또 지금의 과학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미래의 더 발전된 과학지식으로 기록해야 하는데 지금 과학자들은 이해나 할까? 성경은 비과학적이어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는다. 바로 죄 때문이다. 예수 믿어 죄사함 받고 구원 얻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특징은 창세기 1장이 완전 사실로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속에 죄가 세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③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은 실제 일어난 사실
- 아브라함 이전까지 창세기 기록을 saga(신화소설)로 여기면 성경은 종교적 교훈을 주기위해 만들어진 동화책이 된다. 하나님의 6일 창조와 타락 홍수 바벨탑을 이 땅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믿기 위해 우리가 과학으로 입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 결정적 원인은 창세기 1장을 사실이 아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글이라 설명하는 교회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창세기는 태초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순서대로 서술한 조선왕조실록 같은 일지기록이 아니다. 모세는 창세기 50장의 기록을 통해 태초부터 요셉 때까지 내러티브 이야기체로 기록한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일까?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모세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주제에 맞는 사건을 선택하고 강조하고, 배열하고, 해석하며 창세기 50장 분량으로 요약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한다.
- 이러한 서술방식은 성경이 아닌 모든 일반 책에도 동일하다. 당신의 지나온 삶을 레터용지 10장 분량으로 설명해보세요 하면... 당신은 모든 사건을 말할 수 없고 당신의 삶에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플롯) 몇 개를 중심으로 이야기(스토리)를 연결하며 말해 나갈 것이다. 그게 이야기체 내러티브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실제 사실을 기술하되 기록양식은 조선왕조실록처럼 일지식 사건나열기록이 아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의 의도에 의해 선택 배열 강조 해석하는 내러티브 방식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알면 성경의 많은 부분이 풀린다.
- 창조는 과학의 입증영역이 아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 사람은 처음 가진 자기생각을 바꾸지 않는 죄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현장을 사진으로 찍고 동영상으로 녹화해서 보여줘도 조작이라 의심하고 끝까지 거부한다.
- 성경은 온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사람의 죄로 더럽혀진 첫창조를 다시 회복완성하시기 위해 인류 역사 속에 그리스도 구원사를 진행해 오신다는 기록이다. 1600여년 동안 약 40여명의 성경기록자들이 각자 있는 곳에서 동일한 주제를 기록함을 볼 때 성경은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2) 사람 창조목적 -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고 다스리라.
- 에덴은 두 사람과 그 가족이 활동하고 사역할 만한(?) 공간이다. 온 지구가 모두 에덴은 아니었다. 에덴 이외의 지역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정복하고 다스려야 에덴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시지만(창1:28) 아담에게는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하신다(창2:15). 에덴은 아담이 에덴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뭘 만들어 내야 완전해짐이 아니다.
-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창조목적대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아담은 에덴을 하나님 창조목적대로 잘 다스리며 지키고, 그의 자녀들이 에덴 밖으로 나가 그렇게 살도록 해야 했었다. 에덴 이외의 지역은 원시림에 둘러싸인 불모의 개척지역이 아니다. 그곳도 에덴처럼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에덴이라 부르지 않음은 아직 사람이 거하지 않아 피조물들이 하나님 대리통치자의 다스림과 지킴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에덴/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다.
-하나 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정복은 그 땅으로 들어가는 것, 다스림은 그곳의 생명체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질서를 주고 돌보는 것이다. 에덴은 이미 하나님 대리통치자의 정복과 다스림이 있던 완전한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을 지키라(유지하라)고 하신다.
- 에덴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사람과 만나주시던 지구상의 첫 장소요 유일한 장소요 예배장소다. 에덴에는 사람의 죄가 없었기에 삶과 예배가 다르지 않다. 예배가 삶이요, 삶이 예배다. 그곳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바르게 실현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영광과 경배를 받으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연합하여 살아갔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샬롬(안식,평안)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셨다.
-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창조목적을 파괴했다.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불순종과 반역으로,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하나님 백성됨을 상실했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중단되었고, 피조세계는 사람의 죄로 사망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회복완성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진행해오셨고 그중 아브라함을 택하사 신구약교회를 만들어 가신다.
② 하나님의 형상 - 성령내주
- 우주와 지구 동물 등이 창조됨을 보면 모두 사람창조로 집중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현시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이 대리통치하게 하신다. 이때 피조세계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에덴은 그것을 실현하는 장소였다. 하나님 나라다.
- 하나님 형상의 중요개념은 사람창조 중심으로 다시 핵심기술한 창세기 2장 7절을 근거로 대표정의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의 호흡은 성령을 말하며, 사람은 성령(루아흐,하나님의 호흡)을 마음에 모시고 성삼위하나님과 동행/연합하며 살아가게 창조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람 안에 내주하실 때,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모습)이 나타난다. 사람은 이렇게 창조되었다. 이것이 오리지널 사람의 모습이다. 성령내주가 사람창조의 핵심이요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하나님 형상이다.
-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호흡(성령)이 들어갔다고 사람이 신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호흡(성령)은 사람을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시켜 하나님 안에 거하게 만든다. 성령내주는 성령과 사람의 영을 뒤섞어 사람이 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며 사람과 함께하시며 연합해주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을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동행,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요14:10,20 요17:21)이다. 그 핵심이 하나님의 호흡 성령내주이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의 기본개념이다.
-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③ 생명(살아있음) - 사람이 성령내주로 성삼위 하나님과 동행/연합해서 살아가는 삶
- 성경에서 죽음(죽어있음)은 하나님과 분리를 말하고 생명(살아있음)은 하나님과 동행/연합이다. 범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함께하지 않으신다(창6:3) 오순절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시 사람에게 임하는 구속사적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코에 다시 생명의 성령을 불어넣으신다. 마치 말씀(로고스)이셨던 창조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아담에게 하나님의 호흡(성령)을 불어넣으셨듯이, 제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호흡(성령)을 불어넣으심을 보여주심이다.
- 요20:21-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산영”(네페쉬 하야)는 지금 사람이 폐로 숨을 쉬며 사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네페쉬 하야(산영)은 물리적 육체를 가진 사람이 성령내주로 말미암아 영이신 성삼위하나님과 동행/연합함을 말한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동행함은 물리적 육체를 가진 하나님을 봄이 아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이다. 그러면 아담의 눈에는 영이신 하나님이 보였는가? 아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는 비물질적이다. 영은 죄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영은 물리적 존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아담은 성령내주로 하나님과 동행/연합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히 알았고 늘 존재확인하고 살았다.
- 성령내주로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동행함은 예수님에게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사 죄로부터 보호되셨고 일생동안 성령내주 성령충만 하사 하나님과 연합/동행하셨다. 예수님이 일생동안 성부하나님과 단 일초도 떨어지시거나 분리됨이 없으셨다. 그래서 성삼위일체시다. 물론 예수님의 성삼위일체와 우리의 성령내주는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피조물 존재방식으로서 비교불가 하지만,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셨기에 첫아담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방식 그대로 성령내주 성령충만의 방식으로 따르셨다.
- 성령내주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부활이후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육신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만져지는 육체가 있으시기에 우리 눈으로 직접 본다. 성부하나님은 성도의 육체 눈으로 볼 수 없다. 에덴의 아담처럼 성령내주로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본다. 참고로, 죄가 있는 우리에게 성령내주 성령충만 구분되나 죄가 없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령내주는 곧 성령충만을 말한다. 부활한 성도는 성령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의지하고 따라간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거룩한 아담의 모습이 회복 완성됨이다. 그래서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다.
<결론 및 적용>교회는 새에덴, 새예루살렘의 도래를 기다리는 공동체다.
(1) 교회는 여자의 후손(가죽옷) 계시를 믿고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 성경은 죄에 빠져 사망의 고통에 있는 인류에게 주어졌다. 이들에게 무슨 계시가 필요하겠는가? 구원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가 없었던 성경의 첫 2장(창1-2장)과 죄가 제거된 마지막 2장(계21-22장)도 구원의 회복과 완성을 목적으로 기록된다. 성경은 철저히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죄로 인해 사망이 시작된 첫 사건이다. 거기에서 죄와 죄용서 받을 구원의 방법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계시되었다. 여자의 후손, 가죽옷 예언이다.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은 별개의 두 계시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 한 계시이다.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이 가죽옷(희생제사) 방법으로 죄없다하심(죄용서) 의롭다하심(칭의) 거룩다하심(성화)로 구원하시겠다는 계시다. 여자의 후손(그리스도)과 여자의 후손들(신약교회)이 뱀(사탄)과 뱀의 후손(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죄인들)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다시 회복완성 하게 된다는 구원예언이다.
-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은 종교적 교훈을 위해 쓰여진 동화나 소설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이 증인이며 당사자고 전달자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여자의 후손(가죽옷) 예언을 직접 보고 듣고 생생히 체험했다. 아담은 이 사실을 자기 자녀들에게 생생히 전했다. 아담은 여자의 후손 구원계시를 증거한 최초의 선지자이다. 아담이 아무리 여자의 후손 예언을 증거해도 그의 후손들은 에덴을 본적이 없고 이미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자손들 중 아벨과 셋의 자녀들 정도만 아담의 말을 믿었다. 나머지는 아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노아홍수 심판이 임한 원인이다.
-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이 오셔서 가죽옷(희생제사) 방식으로 죄인을 구원하면 어떤 구원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피조세계에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 에덴이 회복완성 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경의 한 장소를 정하시고 그곳에 하나님이 왕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계시하셨다. 그 처음은 에덴이며, 그 마지막은 새하늘과 새땅의 새예루살렘이다.
(2)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목표한다.
- 우상종교는 재물과 부요를 구원으로 제시하고, 고행과 공덕을 말하는 인도종교는 해탈(존재소멸)을 구원이라 말한다. 세상종교에는 창조가 없기에 구원은 지금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온 우주와 세상만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을 벗어났다고 육체를 소멸시켜도 그 순간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는 동안 마음이 편하고 고민을 해결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원이 아니다.
- 성경은 구원보다 창조가 먼저다.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는데 사람의 타락이 있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소원성취가 아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곧 창조경륜 회복완성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그 일을 감당한다.
- 교회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막 성전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새예루살렘의 모형으로 주어졌다. 신약교회는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탄생하였다. 교회는 아직 부활의 완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비록 지상교회가 아직 어렵고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약교회 밖에 없다. 주의 재림과 우리 몸의 부활의 때에 지상교회는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인 천상교회와 만나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완성 하게 될 것이다.
1. 에덴동산
(1) 에덴은 실제 사실이다.
- 에덴동산을 단군신화와 같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에덴은 지구상에 실제 했던 장소이며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다. 에덴을 포함한 창세기 사건들을 신화나 전설로 여기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종교문학이 되며 허구가 된다.
- 에덴의 위치는 찾을 수 없다. 어떤 학자는 네 개의 강을 기준으로 고대 아르메이나 지역 현 이란의 북부로 추정하나 노아홍수 대격변으로 모든 지형이 바뀌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두 강 티그리스 유브라테스 이름은, 고대 강 이름을 알고 있던 후손들이 후대에 붙인 이름일 수도 있다. 에덴은 게루빔 천사들이 화염검(불칼)으로 지키고 있다. 에덴의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2) 가나안/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의 에덴
- 에덴의 동쪽은 최종적으로 시날평지 바벨론이다. 그렇다면 바벨론의 서쪽은 어디일까? 가나안/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벨론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부르신 이유이다. 세상나라 바벨론에서 하나님 나라 에덴으로 부르심이다. 그래서 가나안 특히 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의 에덴이다. 세상나라 바벨론과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신약교회)의 대조가 여기서 나온다. 모든 구약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으로 성취완성되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의 에덴일 뿐 그 이상 지나치면 유대주의가 된다.
- 예루살렘을 실제 에덴동산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근거 없고 지나치고 위험하다. 유대인 중심의 유대주의 사상과 신학이다. 예루살렘이 실제 장소적 에덴동산이면 이스라엘만 하나님 나라가 되고 주변의 아랍국가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상나라 적대세력이 된다. 오늘날 그들과의 모든 전쟁은 여호와의 거룩한 헤렘 전쟁이 된다.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은 어떤 경우든 정당화 된다. 오늘 유대인들의 사상적 근거다.
2. 에덴에서 새예루살렘까지
(1)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다.
① 구원보다 창조가 먼저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샤마임-하늘들,우주, 하에레츠-땅,지구)를 창조하시니라”(창1:1)
- 하나님은 지구와 대우주를 한 순간에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1절의 천지는 지구와 태양계 등 모든 천체가 포함된 대우주를 말한다. 하나님은 첫째날 지구(하에레츠)를 포함한 대우주(하샤마임)를 창조하셨고 계속해서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하나씩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곳에 생명체와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1절은 천지창조 선언이 아니다. 대우주와 태양계 지구를 첫째날 한순간에 창조하심을 말한다.
- 만약 1절은 천지창조 선언이고 3절부터 첫째날 빛 창조가 시작된다고 하면 2절의 혼돈, 공허, 흑암 해석이 이상해 진다. 하나님께서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땅과 물이 있고 그 땅에는 혼돈 공허 흑암이 있다. 그래서 첫창조와 사탄타락으로 인한 혼돈 공허 흑암이 생겼다는 이중창조론와 간격이론이 나온다. 귀신론자들의 주장이다.
- “땅이 혼돈(질서없음)하고 공허(내용없음)하며 흑암(빛이없음)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 2절의 땅은 지구를 말한다. 대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구에 생명체가 거하도록 창조하시기 위해 먼저 지구를 포근히 감싸고 계신다. 혼돈은 지구가 아직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함을 말하고, 공허는 지구 공간에 아직 생명체가 없이 비어있음을 말하며, 흑암은 빛이 없어 지구가 어두운 상태임을 말한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2-5)
-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어두운 지구에 빛을 주시고, 혼돈을 정리하시고, 공허를 채우시며 생명체와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 첫번째가 빛이다. 어두운 지구(땅,물)에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빛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1절부터 5절까지 전체가 첫째날 창조다. 첫째날 하루는 진화론의 수십억만 년 긴 기간 아닌 짧은 하루이다. 하나님께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한 순간에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우리는 성경 계시를 의존해서 믿고 신학 해야 한다.
-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다. 우주는 어느 순간 갑자기 발생했고 팽창하고 있으며(빅뱅), 선캄브리아기 지층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생명체 화석이 캄브리아기에 왜 갑자기 폭발적으로 출현하는지(캄브리아 대폭발)는 과학자들이 풀 수 없는 난제다. 모두 무에서 갑작스럽게 한 순간 등장한다. 하나님의 창조다.
② 모세는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창조방법)보다 왜 창조하셨는지(=창조목적)을 기록
- 성경 창세기에는 창조기록을 1장(1:1-2:3)으로 끝내고 2장은 사람창조를 핵심요약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이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역사 속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여주신 사실을 그대로 선포할 뿐이다. 이점이 성경을 사람의 창작물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계시임을 증명한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을 사실로 정확하게 기록할 뿐이다. 증명하기 위해 덕지덕지 설명을 붙이는 자체가 조작 냄새가 난다. 사람의 이성범위 내에서 설명되는 하나님은 사람 수준에 불과하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어야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신 창조주시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와 태양계, 지구, 사람이 창조되었다. 죄에 빠진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 이것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난해해질까? 또 지금의 과학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미래의 더 발전된 과학지식으로 기록해야 하는데 지금 과학자들은 이해나 할까? 성경은 비과학적이어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는다. 바로 죄 때문이다. 예수 믿어 죄사함 받고 구원 얻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특징은 창세기 1장이 완전 사실로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속에 죄가 세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③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은 실제 일어난 사실
- 아브라함 이전까지 창세기 기록을 saga(신화소설)로 여기면 성경은 종교적 교훈을 주기위해 만들어진 동화책이 된다. 하나님의 6일 창조와 타락 홍수 바벨탑을 이 땅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믿기 위해 우리가 과학으로 입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 결정적 원인은 창세기 1장을 사실이 아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글이라 설명하는 교회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창세기는 태초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순서대로 서술한 조선왕조실록 같은 일지기록이 아니다. 모세는 창세기 50장의 기록을 통해 태초부터 요셉 때까지 내러티브 이야기체로 기록한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일까?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모세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주제에 맞는 사건을 선택하고 강조하고, 배열하고, 해석하며 창세기 50장 분량으로 요약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한다.
- 이러한 서술방식은 성경이 아닌 모든 일반 책에도 동일하다. 당신의 지나온 삶을 레터용지 10장 분량으로 설명해보세요 하면... 당신은 모든 사건을 말할 수 없고 당신의 삶에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플롯) 몇 개를 중심으로 이야기(스토리)를 연결하며 말해 나갈 것이다. 그게 이야기체 내러티브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실제 사실을 기술하되 기록양식은 조선왕조실록처럼 일지식 사건나열기록이 아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의 의도에 의해 선택 배열 강조 해석하는 내러티브 방식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알면 성경의 많은 부분이 풀린다.
- 창조는 과학의 입증영역이 아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 사람은 처음 가진 자기생각을 바꾸지 않는 죄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현장을 사진으로 찍고 동영상으로 녹화해서 보여줘도 조작이라 의심하고 끝까지 거부한다.
- 성경은 온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사람의 죄로 더럽혀진 첫창조를 다시 회복완성하시기 위해 인류 역사 속에 그리스도 구원사를 진행해 오신다는 기록이다. 1600여년 동안 약 40여명의 성경기록자들이 각자 있는 곳에서 동일한 주제를 기록함을 볼 때 성경은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2) 사람 창조목적 -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고 다스리라.
- 에덴은 두 사람과 그 가족이 활동하고 사역할 만한(?) 공간이다. 온 지구가 모두 에덴은 아니었다. 에덴 이외의 지역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정복하고 다스려야 에덴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시지만(창1:28) 아담에게는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하신다(창2:15). 에덴은 아담이 에덴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뭘 만들어 내야 완전해짐이 아니다.
-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창조목적대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아담은 에덴을 하나님 창조목적대로 잘 다스리며 지키고, 그의 자녀들이 에덴 밖으로 나가 그렇게 살도록 해야 했었다. 에덴 이외의 지역은 원시림에 둘러싸인 불모의 개척지역이 아니다. 그곳도 에덴처럼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에덴이라 부르지 않음은 아직 사람이 거하지 않아 피조물들이 하나님 대리통치자의 다스림과 지킴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에덴/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다.
-하나 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정복은 그 땅으로 들어가는 것, 다스림은 그곳의 생명체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질서를 주고 돌보는 것이다. 에덴은 이미 하나님 대리통치자의 정복과 다스림이 있던 완전한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을 지키라(유지하라)고 하신다.
- 에덴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사람과 만나주시던 지구상의 첫 장소요 유일한 장소요 예배장소다. 에덴에는 사람의 죄가 없었기에 삶과 예배가 다르지 않다. 예배가 삶이요, 삶이 예배다. 그곳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바르게 실현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영광과 경배를 받으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연합하여 살아갔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샬롬(안식,평안)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셨다.
-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창조목적을 파괴했다.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불순종과 반역으로,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하나님 백성됨을 상실했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중단되었고, 피조세계는 사람의 죄로 사망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회복완성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진행해오셨고 그중 아브라함을 택하사 신구약교회를 만들어 가신다.
② 하나님의 형상 - 성령내주
- 우주와 지구 동물 등이 창조됨을 보면 모두 사람창조로 집중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현시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이 대리통치하게 하신다. 이때 피조세계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에덴은 그것을 실현하는 장소였다. 하나님 나라다.
- 하나님 형상의 중요개념은 사람창조 중심으로 다시 핵심기술한 창세기 2장 7절을 근거로 대표정의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의 호흡은 성령을 말하며, 사람은 성령(루아흐,하나님의 호흡)을 마음에 모시고 성삼위하나님과 동행/연합하며 살아가게 창조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람 안에 내주하실 때,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모습)이 나타난다. 사람은 이렇게 창조되었다. 이것이 오리지널 사람의 모습이다. 성령내주가 사람창조의 핵심이요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하나님 형상이다.
-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호흡(성령)이 들어갔다고 사람이 신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호흡(성령)은 사람을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시켜 하나님 안에 거하게 만든다. 성령내주는 성령과 사람의 영을 뒤섞어 사람이 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며 사람과 함께하시며 연합해주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을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동행,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요14:10,20 요17:21)이다. 그 핵심이 하나님의 호흡 성령내주이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의 기본개념이다.
-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③ 생명(살아있음) - 사람이 성령내주로 성삼위 하나님과 동행/연합해서 살아가는 삶
- 성경에서 죽음(죽어있음)은 하나님과 분리를 말하고 생명(살아있음)은 하나님과 동행/연합이다. 범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함께하지 않으신다(창6:3) 오순절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시 사람에게 임하는 구속사적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코에 다시 생명의 성령을 불어넣으신다. 마치 말씀(로고스)이셨던 창조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아담에게 하나님의 호흡(성령)을 불어넣으셨듯이, 제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호흡(성령)을 불어넣으심을 보여주심이다.
- 요20:21-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산영”(네페쉬 하야)는 지금 사람이 폐로 숨을 쉬며 사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네페쉬 하야(산영)은 물리적 육체를 가진 사람이 성령내주로 말미암아 영이신 성삼위하나님과 동행/연합함을 말한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동행함은 물리적 육체를 가진 하나님을 봄이 아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이다. 그러면 아담의 눈에는 영이신 하나님이 보였는가? 아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는 비물질적이다. 영은 죄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영은 물리적 존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아담은 성령내주로 하나님과 동행/연합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히 알았고 늘 존재확인하고 살았다.
- 성령내주로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동행함은 예수님에게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사 죄로부터 보호되셨고 일생동안 성령내주 성령충만 하사 하나님과 연합/동행하셨다. 예수님이 일생동안 성부하나님과 단 일초도 떨어지시거나 분리됨이 없으셨다. 그래서 성삼위일체시다. 물론 예수님의 성삼위일체와 우리의 성령내주는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피조물 존재방식으로서 비교불가 하지만,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셨기에 첫아담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방식 그대로 성령내주 성령충만의 방식으로 따르셨다.
- 성령내주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부활이후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육신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만져지는 육체가 있으시기에 우리 눈으로 직접 본다. 성부하나님은 성도의 육체 눈으로 볼 수 없다. 에덴의 아담처럼 성령내주로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본다. 참고로, 죄가 있는 우리에게 성령내주 성령충만 구분되나 죄가 없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령내주는 곧 성령충만을 말한다. 부활한 성도는 성령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의지하고 따라간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거룩한 아담의 모습이 회복 완성됨이다. 그래서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다.
<결론 및 적용>교회는 새에덴, 새예루살렘의 도래를 기다리는 공동체다.
(1) 교회는 여자의 후손(가죽옷) 계시를 믿고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 성경은 죄에 빠져 사망의 고통에 있는 인류에게 주어졌다. 이들에게 무슨 계시가 필요하겠는가? 구원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가 없었던 성경의 첫 2장(창1-2장)과 죄가 제거된 마지막 2장(계21-22장)도 구원의 회복과 완성을 목적으로 기록된다. 성경은 철저히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죄로 인해 사망이 시작된 첫 사건이다. 거기에서 죄와 죄용서 받을 구원의 방법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계시되었다. 여자의 후손, 가죽옷 예언이다.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은 별개의 두 계시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 한 계시이다.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이 가죽옷(희생제사) 방법으로 죄없다하심(죄용서) 의롭다하심(칭의) 거룩다하심(성화)로 구원하시겠다는 계시다. 여자의 후손(그리스도)과 여자의 후손들(신약교회)이 뱀(사탄)과 뱀의 후손(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죄인들)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다시 회복완성 하게 된다는 구원예언이다.
-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은 종교적 교훈을 위해 쓰여진 동화나 소설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이 증인이며 당사자고 전달자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여자의 후손(가죽옷) 예언을 직접 보고 듣고 생생히 체험했다. 아담은 이 사실을 자기 자녀들에게 생생히 전했다. 아담은 여자의 후손 구원계시를 증거한 최초의 선지자이다. 아담이 아무리 여자의 후손 예언을 증거해도 그의 후손들은 에덴을 본적이 없고 이미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자손들 중 아벨과 셋의 자녀들 정도만 아담의 말을 믿었다. 나머지는 아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노아홍수 심판이 임한 원인이다.
-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이 오셔서 가죽옷(희생제사) 방식으로 죄인을 구원하면 어떤 구원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피조세계에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 에덴이 회복완성 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경의 한 장소를 정하시고 그곳에 하나님이 왕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계시하셨다. 그 처음은 에덴이며, 그 마지막은 새하늘과 새땅의 새예루살렘이다.
(2)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목표한다.
- 우상종교는 재물과 부요를 구원으로 제시하고, 고행과 공덕을 말하는 인도종교는 해탈(존재소멸)을 구원이라 말한다. 세상종교에는 창조가 없기에 구원은 지금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온 우주와 세상만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을 벗어났다고 육체를 소멸시켜도 그 순간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는 동안 마음이 편하고 고민을 해결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원이 아니다.
- 성경은 구원보다 창조가 먼저다.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는데 사람의 타락이 있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소원성취가 아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곧 창조경륜 회복완성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그 일을 감당한다.
- 교회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막 성전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새예루살렘의 모형으로 주어졌다. 신약교회는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탄생하였다. 교회는 아직 부활의 완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비록 지상교회가 아직 어렵고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약교회 밖에 없다. 주의 재림과 우리 몸의 부활의 때에 지상교회는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인 천상교회와 만나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완성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