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성화(7) - 은혜로운 성화 신앙생활 (갈2:16-21)
Author
GOSPEL323
Date
2022-01-0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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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7) - 은혜로운 성화 신앙생활 (갈2:16-21)
1. “그러므로 너희는...”
(1) 복음은 성도의 실천적 성화문제로 귀결
-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성도는 삶에서 어떻게 거룩해져 갈 수 있는가? 복음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에 따라 구원론/성화론이 달라진다. 죄인의 성화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어 시작되고 교회가 베푸는 미사와 여러 제의에 참여함으로 계속 죄가 씻겨지고 하나님의 의가 강화되는 은혜를 입는다(로마카톨릭) 성화는 성령내주(중생)으로 시작되며 날마다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성령충만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개혁교회)
(2) 신앙생활(성화)이 은혜로 되어지려면...
- 구원과 복음은 성삼위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 성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믿음은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행위 일뿐 결코 행위(공로)가 될 수 없다. 죄인이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죄없다하심(죄사함) 의롭다하심(칭의) 거룩다하심(성화)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 구원 받는다.
- 문제는 하나님 나라 구원이 이미와 아직의 이중구도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도록 구원의 현재로 주어졌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부활의 완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직도 죄의 본성을 가진 채 오늘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구원에는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이다.
- 성도는 죄의 세상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요청이 당연히 주어진다. 여기에서 성도의 성화문제가 발생한다. 성도는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따라 거룩해져 갈 수 있는가?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은 은혜구원 은혜신앙생활을 바르게 고백하나 신앙생활에는 행위구원과 행위신앙생활을 하는 안타까운 경향이 있다. 은혜구원은 은혜신앙생활을 가져온다. 은혜칭의는 은혜성화로 나타난다. 성화가 은혜 되는 원리를 확인하자.
2. 은혜로운 성화 신앙생활
(1) 거룩함(성화)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① 거룩함은 하나님의 신적속성이요 사람에게 사용될 수 없음
- 성경에서 거룩은 죄와 완전히 구별분리를 의미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신적속성을 가르키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거룩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이 죄를 없애고 의를 행한다해도 불가하다. 99.9%는 거룩이 아니다. 100%여야 거룩하다. 부활 이전까지 그 어떤 사람도 100% 죄없고 의로울 수 없기에 거룩은 하나님의 용어지 결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
② 거룩함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
- 성경에서 사람에게 사용할 수 없는 거룩을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일 때 그렇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은 그가 죄 없고 완전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구약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이라 부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이지, 죄가 없거나 율법을 완전히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이 땅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거룩은 부활 이전까지는 없다. 그러므로 거룩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죄가 없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한다.
③ 거룩함(성화)는 구원 이후에 되어져감이 아닌 그리스도로 믿을 때 이미 주심
-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히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없다하심(죄용서)과 의롭다하심(칭의)를 얻을 때 거룩다하심도 이미 받았다. 즉 성화는 성도가 살아가며 점점 획득할 것이 아니라 칭의와 함께 이미 처음부터 선언되어졌다(결정적성화/존머레이) 구원론의 성화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성화되었기에(결정적성화) 신앙생활 속에서 점점 성화되어 간다(점진적성화)
- 엄밀히 말하면, 점진적 성화란 용어자체에 모순이 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완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 없다. 성화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성화 앞에 점진적이란 용어를 붙이므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점점 더 거룩해져가는 과정과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지만 그 표현은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해간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음도 알고 사용해야 한다.
(2) 성화는 성도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닌 그리스도와 연합(접붙임)되었기 때문
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룩하고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계속 가르친다(점진적성화) 하나님 백성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한다. 성결한 삶이다. 성도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고 분명하지만 그 이유와 근거를 포도나무비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지 못하면 성화는 행위구원의 한 지류로 전락하기 쉽다.
- 성도가 살아가며 점점 더 성결해져가는 성화(점진적성화)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성도가 아무리 성화가 되어도 부활이전까지 죄의 본성을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룩은 완전함을 말한다. 완전무죄 완전의인 100%여야 거룩하다. 그렇다면 어떤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 설 완전한 거룩/성화를 이룰 자가 없다. 20% 성화된 자나 99% 성화된 자는 똑같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결국 성도의 점진적 성화는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 그렇다면 너희는 거룩하라는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가 죄가 하나도 없이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는 이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말함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임을 잊지 말라는 말이고 성도가 지향해야할 신앙의 목표를 말함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에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라는 말이지 너희가 거룩한 행위를 해서 거룩함을 쌓아나가라는 성화행위 구원 혹은 성화행위 신앙생활이 아니다.
②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니 세상을 따르지 말고 구별되라(거룩)
- 성도의 선한 행위, 거룩한 일은 이미 하나님 백성 된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와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 이전까지 그 어떤 누구도 죄에서 벗어난 자는 없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이건 신약의 그 어떤 사도들이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완전무흠의 거룩을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은 세상과 점점 더 구별되어져 나가는 성결의 진보과정을 말할 뿐이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면 알수록, 세상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 백성임을 알면서 세상방식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그가 아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의 성령이 결코 그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하지 않으신다. 이런 면에서 성화(경건한 삶)가 없다면 상급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구원을 걱정해야 한다.
- 성화는 칭의의 다른 이름이다. 칭의와 성화는 분명 신학적으로 구분되고, 또 구별해야 구원을 이해하기 유리하나 성도의 실제 삶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똑같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측면에서는 칭의라 불리고 사람에게는 성화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칭의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최종 법정적 형벌없음(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 선언이지만 그 내용으로 볼 때 성령내주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믿는 순간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나 그 내용은 성령내주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성도가 부활하는 그 때까지 매 순간 계속되고 영원히 유효하다. 포도나무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③ 그 방법은 그리스도와 연합(접붙임)
- 성화는 성도에게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것을 말한다. 죄인이 예수를 믿는 순간 천사가 되지 않고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그를 정결케 하며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위인과 교회사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죄가 없어 의인되고(칭의) 거룩다하심(성화)을 얻지 않았다. 부활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죄의 본성을 벗어난 자가 없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사도들... 모두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도 죄의 본성을 가졌음은 명확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있는 그들을 죄없다, 의롭다, 거룩다 하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성령내주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 성화는 칭의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전적인 하나님/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하나님은 칭의를 주시고 성화는 사람의 몫이 된다. 그래서 칭의(구원)는 은혜로 얻지만 성화는 우리의 삶으로 해내야 하는데 이런 신앙생활은 행위구원과 구분하기 어렵다. 말은 은혜구원인데 삶은 행위구원과 별 차이가 없다.
- 성화행위 구원과 성화은혜 구원 아니면 성화행위 신앙생활과 성화은혜 신앙생활의 차이는 무엇일까? 성도가 행동하는 것은 둘 다 동일하다. 성화은혜 구원/성화은혜 신앙생활도 성도가 행동하는 것이다. 성도는 로봇처럼 가만히 있고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에 접붙여짐/연합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가 행하는 성화는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가 되기 쉽다(마5:20)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더 의롭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613개 율법의 모든 조항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유는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신다.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나오는 성화라야 한다. 구원도 은혜로 얻고 성화도 은혜로 얻는다. 성도가 아무리 구원 얻었어도 부활의 날까지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도 자신의 부패한 본성에서 선행이란 결코 나올 수 없다. 가시나무에 포도열매 몇 송이를 걸어놓았다고 포도나무 되지 않는다. 가시나무가지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져야 포도열매를 맺는 포도나무가지가 된다. 포도나무비유를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연결해서 확인해보자.
<결론 및 적용>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 포도나무 비유
(1) 성령의 열매/그리스도의 성품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다.
- 성도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성령의 힘으로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용은 알겠지만 실제는 행위종교와 구분이 안된다. 성령을 의지해서라는 말은 그냥 관용구에 불과하다. 뭐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열매를 맺어내는 것은 성도 자신이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화는 어렵다. 이런 오해가 성도들에게 많다.
-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을 수 없다. 그것은 포도나무비유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있을 때 맺게 되는 그리스도의 열매다. 비록 그 성품이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는 전혀 그런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포도열매는 가지의 것이 아닌 포도나무의 것이다. 아주 쉽고 중요한 원리다.
(2) 의의 열매를 맺으려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 집중할 것
- 죄인에게 죄는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듯, 죄인에게 의의 열매는 맺고 싶다고 맺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화가 어렵다. 안되는 것을 무조건 해내라고 하니 힘들다. 죄의 욕구를 버릴 수도 없고 의의 행동을 할 수도 없는데 그리스도 생각하며 믿음으로 해내라고 하니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다. 의의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닌 그리스도의 열매임을 분명히 알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 성도는 믿을 때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다하심(결정적성화)을 얻었다. 성도가 죄가 없기 때문에 거룩다하심을 얻지 않았다.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접붙여졌기 때문에 거룩다하심(결정적성화)을 얻었다. 성도는 이미 거룩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성화가 되어 진다. 구약에서 거룩함은 죄가 없는 흠 없는 자란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란 뜻이다. 신약에서 거룩함은 바리세인과 서기관처럼 율법을 모두 지킴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 곧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거룩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한다. 성도는 율법을 모두 지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내가 율법을 지키려면 지킬수 없지만, 그리스도께 속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와 성령 때문이다.
-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성화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내주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성도가 예수를 믿고 즉시 죽거나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 10년 후, 30년 후에 죽는다고 하자. 그들 모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들의 성화정도는 모두 다르다. 한편강도와 바울의 성화정도는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구원 얻음이 분명하다 구원은 우리의 성화행위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온다. .
(3)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삶(=성령충만)
- 바울은 포도나무비유를 그대로 풀어서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2:20)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바울을 이것을 믿는다고 했다.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도록 하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이며 이때 비로소 성령의 열매 곧 그리스도의 성품들이 내게 나타난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내 육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 하나님이 의롭다하셨으니(칭의) 성도(죄인)는 하나님의 의(칭의)를 가지고 거룩함(성화)을 이뤄 낼 수 있는가?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포도나무 비유처럼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연합에서 출발하지 않고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노력하며 거룩함을 이루려 할 때는 어렵다. 아무리 성도가 그리스도와 성령을 의지하며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하여 한다 해도 실제는 그리스도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거룩한 행위를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려는 자기의 선한 행동일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접붙여졌을 때 나오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다. 분명히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가 신앙생활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하게 된다. 십자가은혜로 출발해서 성화행위구원 혹은 성화행위 신앙생활로 마치기 쉽다. 성화행위구원은 유대교 율법행위구원의 기독교 버전이다.
- 성화은혜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다. 성도가 자기 힘으로는 거룩함을 이룰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통치하시도록 죄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리스도와의 성품(성령의 열매)이 자연스럽게 나타냄이다(갈2:20) 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심을 나타내심이다. 내가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하면 성화행위구원이 되지만, 내가 의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고 십자가에 죄의 소욕을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리면 성화은혜구원이 된다.
- 이처럼 내가 주님을 위해 선한 일/성품을 나타내는 성화와 주님이 내게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성화는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바리세인과 서기관의 의가 나오고 후자는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 그 핵심은 십자가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1. “그러므로 너희는...”
(1) 복음은 성도의 실천적 성화문제로 귀결
-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성도는 삶에서 어떻게 거룩해져 갈 수 있는가? 복음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에 따라 구원론/성화론이 달라진다. 죄인의 성화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어 시작되고 교회가 베푸는 미사와 여러 제의에 참여함으로 계속 죄가 씻겨지고 하나님의 의가 강화되는 은혜를 입는다(로마카톨릭) 성화는 성령내주(중생)으로 시작되며 날마다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성령충만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개혁교회)
(2) 신앙생활(성화)이 은혜로 되어지려면...
- 구원과 복음은 성삼위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 성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믿음은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행위 일뿐 결코 행위(공로)가 될 수 없다. 죄인이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죄없다하심(죄사함) 의롭다하심(칭의) 거룩다하심(성화)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 구원 받는다.
- 문제는 하나님 나라 구원이 이미와 아직의 이중구도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도록 구원의 현재로 주어졌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부활의 완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직도 죄의 본성을 가진 채 오늘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구원에는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이다.
- 성도는 죄의 세상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요청이 당연히 주어진다. 여기에서 성도의 성화문제가 발생한다. 성도는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따라 거룩해져 갈 수 있는가?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은 은혜구원 은혜신앙생활을 바르게 고백하나 신앙생활에는 행위구원과 행위신앙생활을 하는 안타까운 경향이 있다. 은혜구원은 은혜신앙생활을 가져온다. 은혜칭의는 은혜성화로 나타난다. 성화가 은혜 되는 원리를 확인하자.
2. 은혜로운 성화 신앙생활
(1) 거룩함(성화)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① 거룩함은 하나님의 신적속성이요 사람에게 사용될 수 없음
- 성경에서 거룩은 죄와 완전히 구별분리를 의미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신적속성을 가르키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거룩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이 죄를 없애고 의를 행한다해도 불가하다. 99.9%는 거룩이 아니다. 100%여야 거룩하다. 부활 이전까지 그 어떤 사람도 100% 죄없고 의로울 수 없기에 거룩은 하나님의 용어지 결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
② 거룩함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
- 성경에서 사람에게 사용할 수 없는 거룩을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일 때 그렇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은 그가 죄 없고 완전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구약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이라 부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이지, 죄가 없거나 율법을 완전히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이 땅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거룩은 부활 이전까지는 없다. 그러므로 거룩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죄가 없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한다.
③ 거룩함(성화)는 구원 이후에 되어져감이 아닌 그리스도로 믿을 때 이미 주심
-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히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없다하심(죄용서)과 의롭다하심(칭의)를 얻을 때 거룩다하심도 이미 받았다. 즉 성화는 성도가 살아가며 점점 획득할 것이 아니라 칭의와 함께 이미 처음부터 선언되어졌다(결정적성화/존머레이) 구원론의 성화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성화되었기에(결정적성화) 신앙생활 속에서 점점 성화되어 간다(점진적성화)
- 엄밀히 말하면, 점진적 성화란 용어자체에 모순이 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완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 없다. 성화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성화 앞에 점진적이란 용어를 붙이므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점점 더 거룩해져가는 과정과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지만 그 표현은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해간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음도 알고 사용해야 한다.
(2) 성화는 성도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닌 그리스도와 연합(접붙임)되었기 때문
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룩하고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계속 가르친다(점진적성화) 하나님 백성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한다. 성결한 삶이다. 성도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고 분명하지만 그 이유와 근거를 포도나무비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지 못하면 성화는 행위구원의 한 지류로 전락하기 쉽다.
- 성도가 살아가며 점점 더 성결해져가는 성화(점진적성화)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성도가 아무리 성화가 되어도 부활이전까지 죄의 본성을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룩은 완전함을 말한다. 완전무죄 완전의인 100%여야 거룩하다. 그렇다면 어떤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 설 완전한 거룩/성화를 이룰 자가 없다. 20% 성화된 자나 99% 성화된 자는 똑같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결국 성도의 점진적 성화는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 그렇다면 너희는 거룩하라는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가 죄가 하나도 없이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는 이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말함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임을 잊지 말라는 말이고 성도가 지향해야할 신앙의 목표를 말함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에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라는 말이지 너희가 거룩한 행위를 해서 거룩함을 쌓아나가라는 성화행위 구원 혹은 성화행위 신앙생활이 아니다.
②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니 세상을 따르지 말고 구별되라(거룩)
- 성도의 선한 행위, 거룩한 일은 이미 하나님 백성 된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와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 이전까지 그 어떤 누구도 죄에서 벗어난 자는 없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이건 신약의 그 어떤 사도들이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완전무흠의 거룩을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은 세상과 점점 더 구별되어져 나가는 성결의 진보과정을 말할 뿐이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면 알수록, 세상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 백성임을 알면서 세상방식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그가 아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의 성령이 결코 그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하지 않으신다. 이런 면에서 성화(경건한 삶)가 없다면 상급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구원을 걱정해야 한다.
- 성화는 칭의의 다른 이름이다. 칭의와 성화는 분명 신학적으로 구분되고, 또 구별해야 구원을 이해하기 유리하나 성도의 실제 삶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똑같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측면에서는 칭의라 불리고 사람에게는 성화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칭의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최종 법정적 형벌없음(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 선언이지만 그 내용으로 볼 때 성령내주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믿는 순간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나 그 내용은 성령내주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성도가 부활하는 그 때까지 매 순간 계속되고 영원히 유효하다. 포도나무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③ 그 방법은 그리스도와 연합(접붙임)
- 성화는 성도에게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것을 말한다. 죄인이 예수를 믿는 순간 천사가 되지 않고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그를 정결케 하며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위인과 교회사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죄가 없어 의인되고(칭의) 거룩다하심(성화)을 얻지 않았다. 부활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죄의 본성을 벗어난 자가 없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사도들... 모두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도 죄의 본성을 가졌음은 명확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있는 그들을 죄없다, 의롭다, 거룩다 하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성령내주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 성화는 칭의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전적인 하나님/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하나님은 칭의를 주시고 성화는 사람의 몫이 된다. 그래서 칭의(구원)는 은혜로 얻지만 성화는 우리의 삶으로 해내야 하는데 이런 신앙생활은 행위구원과 구분하기 어렵다. 말은 은혜구원인데 삶은 행위구원과 별 차이가 없다.
- 성화행위 구원과 성화은혜 구원 아니면 성화행위 신앙생활과 성화은혜 신앙생활의 차이는 무엇일까? 성도가 행동하는 것은 둘 다 동일하다. 성화은혜 구원/성화은혜 신앙생활도 성도가 행동하는 것이다. 성도는 로봇처럼 가만히 있고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에 접붙여짐/연합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가 행하는 성화는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가 되기 쉽다(마5:20)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더 의롭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613개 율법의 모든 조항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유는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신다.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나오는 성화라야 한다. 구원도 은혜로 얻고 성화도 은혜로 얻는다. 성도가 아무리 구원 얻었어도 부활의 날까지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도 자신의 부패한 본성에서 선행이란 결코 나올 수 없다. 가시나무에 포도열매 몇 송이를 걸어놓았다고 포도나무 되지 않는다. 가시나무가지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져야 포도열매를 맺는 포도나무가지가 된다. 포도나무비유를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연결해서 확인해보자.
<결론 및 적용>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 포도나무 비유
(1) 성령의 열매/그리스도의 성품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다.
- 성도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성령의 힘으로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용은 알겠지만 실제는 행위종교와 구분이 안된다. 성령을 의지해서라는 말은 그냥 관용구에 불과하다. 뭐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열매를 맺어내는 것은 성도 자신이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화는 어렵다. 이런 오해가 성도들에게 많다.
-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을 수 없다. 그것은 포도나무비유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있을 때 맺게 되는 그리스도의 열매다. 비록 그 성품이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는 전혀 그런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포도열매는 가지의 것이 아닌 포도나무의 것이다. 아주 쉽고 중요한 원리다.
(2) 의의 열매를 맺으려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 집중할 것
- 죄인에게 죄는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듯, 죄인에게 의의 열매는 맺고 싶다고 맺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화가 어렵다. 안되는 것을 무조건 해내라고 하니 힘들다. 죄의 욕구를 버릴 수도 없고 의의 행동을 할 수도 없는데 그리스도 생각하며 믿음으로 해내라고 하니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다. 의의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닌 그리스도의 열매임을 분명히 알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 성도는 믿을 때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다하심(결정적성화)을 얻었다. 성도가 죄가 없기 때문에 거룩다하심을 얻지 않았다.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접붙여졌기 때문에 거룩다하심(결정적성화)을 얻었다. 성도는 이미 거룩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성화가 되어 진다. 구약에서 거룩함은 죄가 없는 흠 없는 자란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란 뜻이다. 신약에서 거룩함은 바리세인과 서기관처럼 율법을 모두 지킴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 곧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거룩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한다. 성도는 율법을 모두 지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내가 율법을 지키려면 지킬수 없지만, 그리스도께 속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와 성령 때문이다.
-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성화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내주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성도가 예수를 믿고 즉시 죽거나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 10년 후, 30년 후에 죽는다고 하자. 그들 모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들의 성화정도는 모두 다르다. 한편강도와 바울의 성화정도는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구원 얻음이 분명하다 구원은 우리의 성화행위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온다. .
(3)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삶(=성령충만)
- 바울은 포도나무비유를 그대로 풀어서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2:20)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바울을 이것을 믿는다고 했다.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도록 하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이며 이때 비로소 성령의 열매 곧 그리스도의 성품들이 내게 나타난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내 육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 하나님이 의롭다하셨으니(칭의) 성도(죄인)는 하나님의 의(칭의)를 가지고 거룩함(성화)을 이뤄 낼 수 있는가?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포도나무 비유처럼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연합에서 출발하지 않고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노력하며 거룩함을 이루려 할 때는 어렵다. 아무리 성도가 그리스도와 성령을 의지하며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하여 한다 해도 실제는 그리스도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거룩한 행위를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려는 자기의 선한 행동일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접붙여졌을 때 나오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다. 분명히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가 신앙생활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하게 된다. 십자가은혜로 출발해서 성화행위구원 혹은 성화행위 신앙생활로 마치기 쉽다. 성화행위구원은 유대교 율법행위구원의 기독교 버전이다.
- 성화은혜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다. 성도가 자기 힘으로는 거룩함을 이룰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통치하시도록 죄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리스도와의 성품(성령의 열매)이 자연스럽게 나타냄이다(갈2:20) 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심을 나타내심이다. 내가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하면 성화행위구원이 되지만, 내가 의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고 십자가에 죄의 소욕을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리면 성화은혜구원이 된다.
- 이처럼 내가 주님을 위해 선한 일/성품을 나타내는 성화와 주님이 내게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성화는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바리세인과 서기관의 의가 나오고 후자는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 그 핵심은 십자가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