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계시록(42)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 (계22:1-5)
Author
GOSPEL323
Date
2021-08-0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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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42)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 (계22:1-5)
1. 생명이란?
(1)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 성경에서 생명은 사람의 심장박동과 호흡여부를 말하지 않는다. 생명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것과 이에 따르는 모든 올바른 열매를 말한다. 사람은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생명을 얻도록 창조되었다(요16:21)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이루어졌다.(창2:7)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원리이며 피조물의 존재방식이다.
-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 요16: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
-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는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 곧 성령이다. 몸(Body)를 가진 사람은 성령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며 연합될 때 비로소 그 존재목적을 이루고 생명이 있다. 에덴에서 사람은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였다. 그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성부하나님과 성자로고스의 얼굴을 날마다 뵙고 섬겼고 순종했다.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성령내주 성령충만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은 사람을 신이 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섬기는 가장 완전한 피조물로 만든다.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원리요 피조물의 존재방식이기에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동일하다.
2.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
(1)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1절)
① 에덴동산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창2장)
- 동산이란 다른 곳보다 높게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말한다. 에덴동산 중앙 높은 곳, 하나님의 보좌로 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온 에덴을 적시고 네 강물이 되어 땅의 사면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에덴의 각종나무 실과를 맺게 하고 생명나무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수였다.
② 에스겔 성전(겔47장), 스가랴 성전(슥14장) 새예루살렘성(계22장)
- 에스겔의 환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모델로 제시되었기에 실제 지명이 나온다.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는 성전의 동쪽 문으로 흘러나와 남쪽 사해바다 아라바로 도착한다. 그 생수가 가는 곳마다 생명실과들이 맺히고 사해바다의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물고기가 풍성하게 된다.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사해바다가 살아난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에덴동산의 모형임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 번역되나 이는 상당한 의역이다. 직역하면 “샬롬의 터” 곧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서 오는 평안과 안식의 장소란 뜻이다. 에덴을 말한다.
- 겔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 스가랴 역시 성전회복과 생명수의 강을 말한다. 스가랴는 스룹바벨 성전건축을 독려하며 건물성전 건축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지으실 참된 영적성전/교회를 예언하고 그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날 것을 말했다. 모두 에덴의 회복과 완성을 말한다.
- 슥14:8-11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 새예루살렘성에서도 역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에스겔 새성전, 새예루살렘성 모두 에덴의 회복과 완성을 말하고 있음이다. 생수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말한다. 생명열매는 생명수의 강에서 자라는 나무의 열매다. 구체적인 한 나무를 지칭하겠으나 여러 나무를 통칭한다고 해도 큰 문제될 것은 없다. 생명나무 열매 하나를 먹으면 목숨이 100년씩 연장되는 그런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된 나무이며,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함이다.
- 계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③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심이라.”(요7:38)
- 예수님은 에덴의 생수(창2:10) 에스겔의 생수(47:1)과 스가랴의 생수(14:8)를 성령으로 말씀하셨다. 생명은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는 성령이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말씀하신 생수도 성령을 말한다. 성령내주 성령충만을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 생명을 얻음이다.
-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2) “다시 저주가 없으며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를 볼 것이요...”(3절)
① 땅이 저주를 받아, 극심한 수고, 출산의 고통
-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이며,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죄로 인해 사람에게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이 찾아왔다. 땅은 저주를 받아 소출을 적게 내므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극심한 수고와 노동을 해야 겨우 가족을 부양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에덴에서 아담이 했던 모든 노동은 그 일이 무엇이건 예배요 봉사요 섬김의 제사장의 직무였지만, 범죄이후의 아담의 노동은 살기위한 수고요 저주다. 또한 하와는 다른 피조물들에게 없는 출산의 고통이 생겨난다. 범죄 하지 않았다면, 하와는 산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② 무화과 나무아래 숨음 -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음
-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저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도록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다. 사람의 생명은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고 이 연합이 있을때만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져 버렸다.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만들었다. 에덴에서 아담은 단 한순간도 하나님과의 연합이 단절된 적 없었는데, 죄로 인해 아담은 단 한순간도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게 되었다.
- 죄가 두려움을 가져왔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무화과 나무아래 숨는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지고 하나님 백성으로 순종할 때오던 자유는 없어졌다. 극심한 노동과 출산의 고통은 이에 비하며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게 됨은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린 것 보다 더한 고통이며 가장 큰 저주다.
③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4절)
- 하나님의 형상은 그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표요 하나님의 이름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늘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있었기에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다.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은 떠나시고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고 상실되었다. 아담은 죄인의 형상이 되었다. 아담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지워지고 죄인이란 이름이 쓰여진다.
-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있다. 성도는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성도가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수록 죄인의 형상은 점점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성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부활은 칭의로 시작된 성화를 영화로 완성함이다.
-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것이다. 이는 부활한 성도는 영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대면하며 교제하듯 성령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다시 연합됨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거울로 보나 그때는 주의 얼굴을 맞대고 보듯 온전하게 볼 것이다. 새예루살렘에서 성도는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 성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있다. 부활한 성도는 단 한순간도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이 단절되지 않고 단절될 가능성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때문이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사람의 반역(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없다.
(3)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5절)
① 에덴에서 아담, 제사장적 왕
-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창2: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하나님께서 에덴의 아담에게 주신 직무는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다. “다스리며”(개역한글)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를 개역개정 성경은 “경작하며”로 번역했다.
- 히브리어 아바드(경작하다)는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말한다. 경작하다(아바드)는 땀 흘리는 수고의 농사일을 연상시키나 그것은 땅이 저주를 받음으로 생긴 범죄 이후의 일이다. 범죄이전 아담은 에덴농장에서 노동을 한 것이 아니라 에덴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했다. 히브리어 간(동산)은 경계가 있는 작은(?) 구역을 말한다. 지구 전체가 에덴동산이 아니다. 지구 내에 한 곳이 에덴동산이다. 에덴은 하나님의 농장이 아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아담은 제사장이다.
- 하나님은 아담을 제사장으로 만드셨다. 그의 직무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도록 돌보며 경작하는(아바드/다스리는) 일이다. 이는 피조물들에게는 왕적 직무로 나타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사장의 직무다. 범죄이후 제사장은 성전에서 희생제사 드림이 주된 사역이나 범죄이전 에덴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에덴을 지키는 일이었다. 에덴에서 모든 일이 예배(섬김,봉사)였다. 아담이 이 직무를 다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고 에덴은 유지된다.
- 에덴에서 아담은 제사장적 왕이었다. 그의 직무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돌보며 북돋아주는 다스리는 왕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덴)의 거룩함을 지키는 섬김과 봉사의 제사장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의 통치와 다스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아담은 제사장적 왕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아담을 창조하셨다. 제사장이 희생제사 드림은 범죄이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한 부분으로 백성의 죄를 대속하려 함이다.
- 뱀(사탄)이 하와에게 불신앙을 퍼뜨릴 때, 제사장적 왕인 아담이 해야 할 일은 사탄을 내쫓고 하와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언약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바로 그 일이 에덴(성전)을 경작하고 지키는(섬김과 봉사) 제사장적 왕으로서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②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 천년동안, 이 땅에서
- 예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의 범죄로 중단되고 깨어진 하나님 나라 창조경륜을 회복완성 하시기 위해 둘째아담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적 왕이시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죄인들을 속죄하여 범죄이전 아담의 직무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속죄피로 죄인(아담의 후손들)을 구속하사 하나님 나라 백성 삼으셨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이 첫아담에게 주신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도우시고 지키시며 통치하신다.
-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한다(계20:4) 예수님은 성도에게 이미 구원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다(요5:24) 구원은 미래에 되어질 일이 아니다. 지금 이미 얻었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성도를 천상에 있는 성도와 동일하게 보신다. 요한계시록도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동일시한다. 그리스도는 오른 손에 일곱별을 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지나신다. 지금 핍박 받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입은 천상교회와 동일하다(계7장) 인맞은 자 144000과 흰옷 입은 큰 무리는 별개의 두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한 집단의 두 측면이다.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지상교회의 실체가 바로 그 영광스러운 천상교회임을 말한다. 물론 이미 죽어 천상교회에 있는 성도들까지 지상교회라고 함은 아니다.
- 천년동안은 무척 긴 시간임을 말하나 세세토록(영원토록)과는 다르다. 천년동안을 주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지상교회는 죄, 사탄, 사망으로부터 눈물이 있고, 환란과 핍박이 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백성이다.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 성도의 왕노릇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제사장적 왕의 통치에 참여함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기희생으로 섬김과 봉사의 직무를 감당함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함은 중세교회를 말함이 아니다. 교회가 중세교회를 흉내냄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왕의 직무와 정반대다. 코메디요 타락이다.
③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5절)
- 새하늘과 새땅은 에덴이 회복 완성된 하나님 나라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첫아담에게 주신 창조경륜대로 피조물들을 아바드(경작,다스림)해서 에덴을 지키는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한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들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 일은 완성된 에덴을 지키고 섬기며 봉사하는 일 정도로 이해하자.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은 이정도로 멈춤이 옳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던 모든 일은 예배였듯,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예배다. 그 일은 예배당에서 찬송만 부르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성도는 새하늘과 새땅의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다.
<결론 및 적용>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를 마시며...
(1) 내가 느끼는 어떤 감정이 성령내주 성령충만을 확증하지 않는다.
- 성령충만은 내 감정에 달려있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수많은 요인에 의해서 바뀌고 변한다. 마치 출렁이는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배와 같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린다. 내 감정과 느낌의 성령충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2) 성령충만은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함이다.
- 성령께서 말씀하시면 나는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성령의 말씀인지 내 생각인지, 심지어 사탄의 말인지...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그래서 성경말씀을 기록해주셨다. 성경과 다른 모든 것은 성령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께 순종함이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것... 이것이 주의 말씀이며 성경의 결론이다. 이것만 우리를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에덴의 생명을 얻게 한다.
- 성령충만은 엑스타시 황홀경이 아니라 그리스도(말씀)께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과 세상사람들 사이에 서서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하라고 하신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것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지금 성도의 삶은 성령충만을 간헐적으로 체험한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죄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끔 이루어지고 나의 많은 삶은 하나님과 단절된다. 그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사망이다.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에서는 성령충만이 지속되어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단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게 한다. 우리는 죄가 완전히 영원히 제거된 부활의 영화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1. 생명이란?
(1)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 성경에서 생명은 사람의 심장박동과 호흡여부를 말하지 않는다. 생명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것과 이에 따르는 모든 올바른 열매를 말한다. 사람은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생명을 얻도록 창조되었다(요16:21)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이루어졌다.(창2:7)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원리이며 피조물의 존재방식이다.
-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 요16: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
-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는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 곧 성령이다. 몸(Body)를 가진 사람은 성령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며 연합될 때 비로소 그 존재목적을 이루고 생명이 있다. 에덴에서 사람은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였다. 그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성부하나님과 성자로고스의 얼굴을 날마다 뵙고 섬겼고 순종했다.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성령내주 성령충만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은 사람을 신이 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섬기는 가장 완전한 피조물로 만든다.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원리요 피조물의 존재방식이기에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동일하다.
2.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
(1)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1절)
① 에덴동산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창2장)
- 동산이란 다른 곳보다 높게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말한다. 에덴동산 중앙 높은 곳, 하나님의 보좌로 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온 에덴을 적시고 네 강물이 되어 땅의 사면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에덴의 각종나무 실과를 맺게 하고 생명나무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수였다.
② 에스겔 성전(겔47장), 스가랴 성전(슥14장) 새예루살렘성(계22장)
- 에스겔의 환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모델로 제시되었기에 실제 지명이 나온다.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는 성전의 동쪽 문으로 흘러나와 남쪽 사해바다 아라바로 도착한다. 그 생수가 가는 곳마다 생명실과들이 맺히고 사해바다의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물고기가 풍성하게 된다.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사해바다가 살아난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에덴동산의 모형임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 번역되나 이는 상당한 의역이다. 직역하면 “샬롬의 터” 곧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서 오는 평안과 안식의 장소란 뜻이다. 에덴을 말한다.
- 겔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 스가랴 역시 성전회복과 생명수의 강을 말한다. 스가랴는 스룹바벨 성전건축을 독려하며 건물성전 건축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지으실 참된 영적성전/교회를 예언하고 그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날 것을 말했다. 모두 에덴의 회복과 완성을 말한다.
- 슥14:8-11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 새예루살렘성에서도 역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에스겔 새성전, 새예루살렘성 모두 에덴의 회복과 완성을 말하고 있음이다. 생수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말한다. 생명열매는 생명수의 강에서 자라는 나무의 열매다. 구체적인 한 나무를 지칭하겠으나 여러 나무를 통칭한다고 해도 큰 문제될 것은 없다. 생명나무 열매 하나를 먹으면 목숨이 100년씩 연장되는 그런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된 나무이며,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함이다.
- 계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③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심이라.”(요7:38)
- 예수님은 에덴의 생수(창2:10) 에스겔의 생수(47:1)과 스가랴의 생수(14:8)를 성령으로 말씀하셨다. 생명은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는 성령이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말씀하신 생수도 성령을 말한다. 성령내주 성령충만을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 생명을 얻음이다.
-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2) “다시 저주가 없으며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를 볼 것이요...”(3절)
① 땅이 저주를 받아, 극심한 수고, 출산의 고통
-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이며,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죄로 인해 사람에게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이 찾아왔다. 땅은 저주를 받아 소출을 적게 내므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극심한 수고와 노동을 해야 겨우 가족을 부양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에덴에서 아담이 했던 모든 노동은 그 일이 무엇이건 예배요 봉사요 섬김의 제사장의 직무였지만, 범죄이후의 아담의 노동은 살기위한 수고요 저주다. 또한 하와는 다른 피조물들에게 없는 출산의 고통이 생겨난다. 범죄 하지 않았다면, 하와는 산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② 무화과 나무아래 숨음 -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음
-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저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도록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다. 사람의 생명은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고 이 연합이 있을때만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져 버렸다.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만들었다. 에덴에서 아담은 단 한순간도 하나님과의 연합이 단절된 적 없었는데, 죄로 인해 아담은 단 한순간도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게 되었다.
- 죄가 두려움을 가져왔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무화과 나무아래 숨는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지고 하나님 백성으로 순종할 때오던 자유는 없어졌다. 극심한 노동과 출산의 고통은 이에 비하며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게 됨은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린 것 보다 더한 고통이며 가장 큰 저주다.
③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4절)
- 하나님의 형상은 그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표요 하나님의 이름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늘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있었기에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다.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은 떠나시고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고 상실되었다. 아담은 죄인의 형상이 되었다. 아담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지워지고 죄인이란 이름이 쓰여진다.
-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있다. 성도는 성령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성도가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수록 죄인의 형상은 점점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성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부활은 칭의로 시작된 성화를 영화로 완성함이다.
-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것이다. 이는 부활한 성도는 영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대면하며 교제하듯 성령으로 성삼위 하나님과 다시 연합됨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거울로 보나 그때는 주의 얼굴을 맞대고 보듯 온전하게 볼 것이다. 새예루살렘에서 성도는 성령내주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 성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있다. 부활한 성도는 단 한순간도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이 단절되지 않고 단절될 가능성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때문이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사람의 반역(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없다.
(3)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5절)
① 에덴에서 아담, 제사장적 왕
-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창2: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하나님께서 에덴의 아담에게 주신 직무는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다. “다스리며”(개역한글)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를 개역개정 성경은 “경작하며”로 번역했다.
- 히브리어 아바드(경작하다)는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말한다. 경작하다(아바드)는 땀 흘리는 수고의 농사일을 연상시키나 그것은 땅이 저주를 받음으로 생긴 범죄 이후의 일이다. 범죄이전 아담은 에덴농장에서 노동을 한 것이 아니라 에덴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했다. 히브리어 간(동산)은 경계가 있는 작은(?) 구역을 말한다. 지구 전체가 에덴동산이 아니다. 지구 내에 한 곳이 에덴동산이다. 에덴은 하나님의 농장이 아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아담은 제사장이다.
- 하나님은 아담을 제사장으로 만드셨다. 그의 직무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도록 돌보며 경작하는(아바드/다스리는) 일이다. 이는 피조물들에게는 왕적 직무로 나타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사장의 직무다. 범죄이후 제사장은 성전에서 희생제사 드림이 주된 사역이나 범죄이전 에덴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에덴을 지키는 일이었다. 에덴에서 모든 일이 예배(섬김,봉사)였다. 아담이 이 직무를 다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고 에덴은 유지된다.
- 에덴에서 아담은 제사장적 왕이었다. 그의 직무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돌보며 북돋아주는 다스리는 왕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덴)의 거룩함을 지키는 섬김과 봉사의 제사장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의 통치와 다스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아담은 제사장적 왕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아담을 창조하셨다. 제사장이 희생제사 드림은 범죄이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한 부분으로 백성의 죄를 대속하려 함이다.
- 뱀(사탄)이 하와에게 불신앙을 퍼뜨릴 때, 제사장적 왕인 아담이 해야 할 일은 사탄을 내쫓고 하와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언약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바로 그 일이 에덴(성전)을 경작하고 지키는(섬김과 봉사) 제사장적 왕으로서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②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 천년동안, 이 땅에서
- 예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의 범죄로 중단되고 깨어진 하나님 나라 창조경륜을 회복완성 하시기 위해 둘째아담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적 왕이시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죄인들을 속죄하여 범죄이전 아담의 직무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속죄피로 죄인(아담의 후손들)을 구속하사 하나님 나라 백성 삼으셨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이 첫아담에게 주신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도우시고 지키시며 통치하신다.
-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한다(계20:4) 예수님은 성도에게 이미 구원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다(요5:24) 구원은 미래에 되어질 일이 아니다. 지금 이미 얻었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성도를 천상에 있는 성도와 동일하게 보신다. 요한계시록도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동일시한다. 그리스도는 오른 손에 일곱별을 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지나신다. 지금 핍박 받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입은 천상교회와 동일하다(계7장) 인맞은 자 144000과 흰옷 입은 큰 무리는 별개의 두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한 집단의 두 측면이다.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지상교회의 실체가 바로 그 영광스러운 천상교회임을 말한다. 물론 이미 죽어 천상교회에 있는 성도들까지 지상교회라고 함은 아니다.
- 천년동안은 무척 긴 시간임을 말하나 세세토록(영원토록)과는 다르다. 천년동안을 주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지상교회는 죄, 사탄, 사망으로부터 눈물이 있고, 환란과 핍박이 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백성이다.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 성도의 왕노릇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제사장적 왕의 통치에 참여함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기희생으로 섬김과 봉사의 직무를 감당함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함은 중세교회를 말함이 아니다. 교회가 중세교회를 흉내냄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왕의 직무와 정반대다. 코메디요 타락이다.
③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5절)
- 새하늘과 새땅은 에덴이 회복 완성된 하나님 나라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첫아담에게 주신 창조경륜대로 피조물들을 아바드(경작,다스림)해서 에덴을 지키는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한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들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 일은 완성된 에덴을 지키고 섬기며 봉사하는 일 정도로 이해하자.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은 이정도로 멈춤이 옳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던 모든 일은 예배였듯,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예배다. 그 일은 예배당에서 찬송만 부르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성도는 새하늘과 새땅의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다.
<결론 및 적용>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를 마시며...
(1) 내가 느끼는 어떤 감정이 성령내주 성령충만을 확증하지 않는다.
- 성령충만은 내 감정에 달려있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수많은 요인에 의해서 바뀌고 변한다. 마치 출렁이는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배와 같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린다. 내 감정과 느낌의 성령충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2) 성령충만은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함이다.
- 성령께서 말씀하시면 나는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성령의 말씀인지 내 생각인지, 심지어 사탄의 말인지...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그래서 성경말씀을 기록해주셨다. 성경과 다른 모든 것은 성령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께 순종함이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것... 이것이 주의 말씀이며 성경의 결론이다. 이것만 우리를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에덴의 생명을 얻게 한다.
- 성령충만은 엑스타시 황홀경이 아니라 그리스도(말씀)께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과 세상사람들 사이에 서서 제사장적 왕의 직무를 감당하라고 하신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것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지금 성도의 삶은 성령충만을 간헐적으로 체험한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죄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끔 이루어지고 나의 많은 삶은 하나님과 단절된다. 그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사망이다.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에서는 성령충만이 지속되어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단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게 한다. 우리는 죄가 완전히 영원히 제거된 부활의 영화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