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행전(24) - 예루살렘 체포와 바울의 이유 (행21:1-40)

Author
GOSPEL323
Date
2020-08-09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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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24) - 예루살렘 체포와 바울의 이유 (21:1-40)

1.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20:16)

(1) 밀레도 권면 -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것을 말함

-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 직접 가려고 했다(행20:3) 그러나 그 배에는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고린도 유대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고 그들이 바울을 배에서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다시 돌아가 소아시아의 드로아 항구로 도착하여 강론한 후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는 배를 몇 번 갈아타고 여러 항구들을 거쳐 가이사랴 항구까지 도착한다.

- 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되고 환란을 당하기에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바울은 이 환란을 자신의 순교라고도 생각했다. 밀레도 권면을 마치고 에베소 장로들과 다 크게 울며 헤어진 이유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됨은 이미 성령께서 말씀해주셨다.

-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 두로의 제자들 - 바울에게 예루살렘 체포를 말하며 만류함

- 바울을 태운 배가 해안선을 따라 지나간 항로를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바울이 머물로 제자들을 만났던 드로아, 앗소, 밀레도, 두로, 가이샤랴 정도만 알면 되겠다. 두로는 솔로몬 성전의 백향목을 제공한 베니게(페니키아)의 수도였으며, 예수님 시대에는 수로보니게 지역의 도시였다. 바울은 그의 사역기간 동안 두로에 다녀간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두로의 제자들은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행한 바울의 소식과 메시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배가 두로에 일주일 정박하며 짐을 내리는 동안 바울은 두로의 제자들을 만나 그들의 집에 머물며 교제한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을 당하리라 말하며 바울을 만류한다.

(3) 선지자 아가보 -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군인들에게 감금될 것을 예언

- 배의 항로를 따라 바울은 돌레마이(악고)에서 하루 머물며 형제들을 만나고, 최종 목적지인 가이사랴 항구에 도착한다. 가이사랴에서 초대교회 일곱 집사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여러날 묵었는데 그의 네 딸은 예언하는 자들이었다. 그녀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 체포를 말했음은 당연하다.

-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이다. 그는 바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렸왔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을 묶으며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예언한다. 그래서 모두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울며 권하지만 바울은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왜 바울은 이렇게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는 것일까?

- 행21:13-14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2. 예루살렘 체포와 바울의 이유

(1) 이방인 교회들에서 모금한 구제헌금(=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

① 바울이 자비량(Tent maker) 선교

- 바울은 장막기술을 가지고 일을 하며 선교했다. 고린도에서 브리스가 부부를 만난 것도 같은 장막업을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비량을 하며 자신이 개척한 다른 이방인 교회들로부터는 일부러 후원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자비량이 선교의 가장 중요한 원리와 법칙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자비량은 선교의 절대원리가 될 수 없다.

- 예수님은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 그들이 주는 것을 먹으며 사역하라고 하셨다. 바울 자신도 안디옥교회와 빌립보교회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디모데에게 군사로 부름 받았으면 주인이 먹을 것을 주며, 농부는 수고한 곡식을 먹는 것이 마땅하고, 밭을 가는 소의 입에 멍에를 씌우지 말라고 한 것은 성도들이 주는 후원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이 장막업 일을 하며 자비량으로 선교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예루살렘 구제헌금 때문이다.

② 마게도냐와 고린도에서 예루살렘 구제헌금을 모금함

-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헬라지역에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이방인 교회가 세워지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모금했다. 물론 예루살렘 구제헌금은 이방인 교회가 반드시 내야하는 상납금도 아니고 축복의 씨드머니(Seed money)도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친교의 구제헌금이었다. 바울은 이것은 중요하게 생각했고 교회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 반드시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구제헌금 하도록 부탁했다. 물론 강요가 아니라 부탁이다. 지금 바울과 동행하는 7-8명의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가고 있었는 각교회들의 대표다. 고린도전후서에는 예루살렘 구제헌금을 독려하는 바울의 행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이 선교활동을 펼친 갈라디아, 마게도냐, 그리스(아가야) 모든 지역의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구제헌금(=연보)를 말하고 있다.

- 고전16:1-4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 고후9:1-5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③ 이방인에게 복음전하고 돈(헌금)을 받아간다는 오해

- 내용이 어찌됐든, 예루살렘 구제헌금은 사람들에게 오해되기 쉬웠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같더니 마지막에는 헌금을 거둬간다. 결국 바울도 돈 때문에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 아닌가?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되는 예루살렘 구제헌금의 의미를 알면 당연히 귀중함을 깨닫게 되지만, 교회에는 아직 연약한 성도들이 있기에 구제헌금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이 구제헌금 모금하는 자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또한 성도와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그들이 예루살렘 구제헌금을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자비량으로 선교했다.

- 행24:17-18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2) 율법을 지키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① 바울이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함

- 한편 바울은 꼭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는가? 여기서 오순절은 반드시 오순절만 말하지 않는다. 그때는 시간적으로 오순절에 했다. 유월절이나 초실절도 동일하다. 왜 바울은 유대인이면 반드시 모여야 하는 절기에 일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가? 오순절 예루살렘에는 그리스 로마 메데 바사,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든다. 그리스 로마제국 각 성읍들에서 유대인들은 이민자요 소수계 이므로 아무래도 로마 시민권자 바울에 대하여 소란을 일으키기 쉽지않다. 그러나 오순절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유대인들로 가득차 있어 대적자들이 바울을 순식간에 테러해서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왜 바울은 꼭 오순절에 올라가려고만 하는가? 구제헌금을 유대인들이 모두 모이는 절기가 아닌 다른 날에 주면 안되는가? 바울은 왜 유대인들이 다 모이는 삼대 절기(오순절,초막절,유월절)에 맞춰 올라가려는가?

②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행21:20)

-그 의문은 야고보의 말 속에서 풀린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결례를 행해달라는 특별한 부탁을 한다.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들인데 바울이 헬라 온 지역을 다니며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금하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했다. 야고보가 제안한 결례는 유대교 바리세인들이 아닌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에게 바울이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 이것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 문제 특히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의 정당성을 걸고넘어지는 무리들로 인해 늘 어려움을 당했고(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랍비 유대교를 믿는 동족 유대인들 예를들면 바리세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자로 핍박을 받았다. 더 심각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도 바울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빌립보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이나 에베소 아데미 상인들의 폭동은 아무 것도 아니다. 로마는 오히려 법으로 바울을 보호하고 도와줬다. 바울은 여전히 랍비유대교를 믿는 동족 유대인들과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과 복음을 오해하여 틈 만나면 문제를 일으키는 이방인 교회 헬라인 성도들 사이에서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삼중고에 쌓여 있었다. 아무도 바울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특히 바울에게 성전에 들어가 결례 행함을 부탁한 야고보도 조금 아쉽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에게 율법을 바르게 가르치려는 노력보다 쉬운 선택을 했다. 그들은 율법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이 복음과 율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고 또 율법을 금할 때 유대인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2년간 감옥 속에서 혼자 법정변호를 계속하며 산헤드린 유대교 전체와 로마제국을 상대로 소송싸움을 해나갈 때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한계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바울과 안디옥 교회를 사용하신 이유다. 하나님께서 AD 70년 건물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리신 이유다.

③ 율법을 거부함이 아니라 율법을 바르게 지킴

- 오순절 예루살렘에 올라감은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은 자신이 절기를 무시하지 않음을 나타냈다. 바울은 아직 율법에 열심히 있는 예루살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율법의 결례의식도 의도적으로 행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며 겐그레아에서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결례를 행했다. 바울은 결례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아닌 유대인 성도들을 위해서 결례의식을 행하고 있음을 말함이다.

- 예수님과 바울이 가르친 율법과 성전에 대한 메시지를 유대교 바리세인들은 완전 오해했고,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과 바울은 율법을 폐기하고 성전을 부인함이 아니다. 율법의 금지조항을 우스꽝스럽게 지키는 것은 율법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며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도 전혀 맞지 않음이다. 율법의 참뜻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십자가 죄사함과 성령의 의롭게 하심을 힘입어 칭의와 성화로 죄를 이기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율법을 바르게 지키게 된다. 그는 율법의 행위에 묶인 종이 되지 않고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성전의 의미도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알게 된다.

-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성전이 우상화 종교화된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율법을 폐하고 성전을 허물며 배척하라는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말장난 말꼬리 싸움이 아니라 실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율법과 성전을 주신 하나님의 바른 뜻을 지킨다고 했지 율법과 성전은 악하며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율법과 성전은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구원계시 표지판(Sign)이다. 표지판은 실체가 아니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율법과 성전은 결코 우상이 될 수 없다. 표지판을 보고 표지판이 가르치는 실체, 그리스도와 성령께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표지판을 제대로 보고 지킴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이걸 포기하는게 쉽지 않다.

-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에게 답답함과 아쉬움을 표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율법의 결례를 행한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다.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됨을 포기하고 이방인 교회를 단독적으로 세웠으면 어떨까? 이방인을 전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만 해도 놀라운 사역이다. 바울은 그 엄청난 사역을 해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방인 교회를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이방인의 교회를 세우는 만큼이나 어려웠다.

- 만약 바울이 답답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됨을 무시해버리고 자기 혼자 이방인 교회를 세웠으면 어땠을까? 바울이 하나님께 가서 나는 내 일을 다했는데 유대인들이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 우리의 생각이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한다. 주님께서 유대인 교회와 분리된 이방인 교회를 세우라고 하지 않으시는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3) 온 이스라엘(롬11:26), 한 새사람(엡2:15)

① 칭의와 성화로 구원

- 십자가 구원계시는 개인을 정결케 하고 의롭게 하는 십자가와 부활, 칭의와 성화의 복음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만대와 만대에 감추인 하나님의 경륜이며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다.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으로 죄인은 에덴의 창조경륜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고 복음이다. 이방인인 우리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배웠고 강조했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 교회와 전혀 반목하지도 우월여부를 가리지도 않는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바로 바울 때문이다.

②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룸

- 만약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반드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전혀 차별 없음을 분명하게 정리해주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눠져 하나 될 수 없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교회의 비극이 아니라 구원의 실패, 복음의 패배다.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분리될 위험이 매우 컸다. 바울은 그 둘을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수고를 다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은 십자가 복음으로 얻게 된 하나님 나라 구원의 핵심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오해를 사면서 까지 예루살렘 구제헌금을 모금하고, 일부러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 모두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를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게 하려고 함이다. 랍비유대교 유대인들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 성도들을 위함이다.

③ 온 이스라엘, 한 새사람 - 그리스도의 신약교회

- 하나님 나라는 에덴의 첫창조 아담의 모든 후손으로 구성된다. 혈통과 민족의 구분은 바벨탑 이후부터 언어가 달라지므로 형성되었다. 언어가 하나였을 때는 모두 한 가족이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요 노아의 후손이다. 민족개념은 바벨탑 이후 생겼다. 그중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아브라함부터다. 아브라함 이전에는 유대민족 자체가 없었다. 아브라함도 사실 하란에서 태어나 갈대아 우르에 거하던 이방인이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온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의 건물을 지어가고 한 새사람이 되었다. 구원은 유대인의 특권과 이방인의 차별을 철폐하고 모두 하나님 백성 되게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어떠한 특권과 차별도 없다. 그것이 에덴의 회복이요 완성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만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이스라엘이다. 그 둘이 합쳐져야 온 이스라엘 한 새사람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전혀 혼란스럽지 않음은 아무도 그 중요함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로 분명하게 정리해주었기 때문이다.

<적용>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서...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

-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이다. 부활승천 하신 후 성령을 파송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의롭고 거룩케 하시기 위한 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당신의 속죄 피로만 얻을 수 있다. 오직 당신께서 백성을 위해 죽으셔야 죄인이 죄와 사망에게 해방되고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 십자가는 가장 처절하고 무서운 처형 방법이다. 의도적으로 사람이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가장 오래 겪도록 만든 아주 야만적인 형틀이다. 로마 검투사 스팔타쿠스 반란 때, 반란군대는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수 만 명이 죽고 약 6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로마는 포로로 잡은 6천명 모두를 십자가에 매달아 로마로 들어오는 아피아가도에 죽 늘어세웠다. 그 길이가 수 십킬로에 달했다고 한다. 포로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몇 일씩 고통당하며 참혹하게 죽어갔다. 예수님도 그 참혹한 십자가로 죽으셨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높으냐고 자리다툼을 하는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2) 바울도 체포와 죽음을 염두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감

-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심정은 예수님과 동일하다. 그는 이번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와 환란 당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올라가면 자신의 처형당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예루살렘 유대인과 산헤드린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또한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 증거 하기 위해(가이사 상소는 로마로 가기위해 바울이 처음부터 염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다음시간에),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 방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죽음으로 로마복음화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두로의 형제들과 빌립의 네 딸들, 선지자 아가보 등 모두가 예루살렘 체포를 예언해도 바울은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드려지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3)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