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행전(16) - 마게도냐 환상과 성령인도 (행16:1-10)
Author
GOSPEL323
Date
2020-06-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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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16) - 마게도냐 환상과 성령인도 (행16:1-10)
1. 제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1)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할례와 율법이 아닌, 칭의의 복음을 공인하였다.
① 베드로와 야고보의 중요한 역할
-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은혜구원, 칭의의 복음 십자가 복음을 공인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과 고넬료에게 성령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했고, 야고보는 베드로의 주장을 지지하며 구약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을 제시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닌 칭의의 복음, 은혜구원을 주장하므로 교회 내의 히브리파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장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된다. 이로서 행위구원의 징검다리가 되는 할례와 안식일 등 율법주장은 복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얻는다는 십자가 진리가 굳게 서게 된다.
② 이방인 교회들이 칭의의 복음 은혜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져감
- 예루살렘 사도들이 구원의 길로서 행위(율법)를 배제하고 은혜(믿음)로 결론을 내리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내용은 더 이상 시비거리가 없게 되었다. 이로서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첫 목표는 지난 1차 선교여행으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들 곧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로 가서 그들을 칭의의 복음으로 더욱 든든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2)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었다.
① 2차 선교여행의 중요성
- 사도행전 속에서 1차 선교여행은 칭의의 복음을 확립한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가 중요하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의 사역은 모두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에 포함되고 요약된다. 심지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도 안디옥 칭의의 복음설교(행13:38-39)에 비하면 간략하게 다뤄진다.
- 2차 선교여행은 칭의의 복음이 유럽으로 확산되어,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그리고 에베소에 이방인의 교회가 세워지는 사역이었다. 3차 선교여행은 에베소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가르치며 틈틈이 1차, 2차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확립하고 또 다른 전도의 문을 여는 사역이었다. 세 차례에 걸린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2차 여행이 가장 극적이고 놀랍다. 아시아를 향하는 바울의 발걸음을 막으시고 마게도니야(유럽)으로 가라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인도가 핵심이다.
② 보호자요 동역자였던 바나바가 떠나감
- 중요한 사역을 앞에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다. 1차 선교여행의 비시디아 안디옥을 앞두고도 그랬다. 마가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낙심하기 보다는 크게 화가 났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울이 버가에서 복음 전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하며 이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200km 이상을 가야하는 긴 여행을 앞두고 자칫 선교여행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들었을 것이다. 모두 비시디아 안디옥 이신칭의 설교(?)를 앞둔 상황이었다.
- 2차 선교여행도 그랬다. 마가요한 문제로 심히 다투고 이로 인해 바울은 자신의 보호자요 소중한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었다. 바울은 수종자를 몸종이 아닌 사역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2차 선교여행에서 보면 수종자는 바울이 급히 떠났을 때 뒤에 남아 교회를 세우는 역할이었다. 어쨌든 바나바와 갈라서게 된 바울은 이제 보호자요 동역자를 잃어버리고 홀로 설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지만, 1차 선교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또 한 번 큰 시험이 있었다. 바울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성격으로 인해 바나바와 심히 다툴 정도로 마음이 상했다.
2. 마게도냐 환상과 성령인도
(1) 바울은 성령인도를 기도하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① 실라(실루아노)는 바울의 동역자
- 바울이 바나바와 다퉜기 때문에 하나님이 디모데를 주셨다고 말하지 말자. 바울의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함이 옳다. 잘못은 우리의 것이고 선함은 하나님의 은혜다. 가롯유다의 배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왔기에 유다는 구속사를 이루는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유다는 분명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만큼 악한 일을 했고 그 죄 값으로 죽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러한 악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진행하고 성취하심이 놀랍다. 바울은 문제를 처리하고 의사를 표시함에 있어서 인격의 아쉬운 면을 드러냈지만, 하나님은 그의 부족함을 넉넉함으로 채워주셨다.
- 실라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실루아노는 로마식 이름이다. 그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의안을 안디옥교회에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실라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훌륭한 조력자였고, 또한 후에 베드로를 도와 베드로전서를 대필한다(벧전5:12) 실라는 바울이 세운 제자가 아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하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 내의 중요한 사역자였다.
② 디모데는 바울이 세운 제자임
- 이제 바울은 실라와 함께 더베와 루스드라로 간다. 루스드라는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곳이다. 그때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복음을 받은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모든 성도들에게 칭찬 듣는 좋은 제자였다.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생각된다.
- 바울은 그 지경의 유대인들을 위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다. 유대인 디모데가 할례 받지 않으면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인 디도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한다(갈2:3) 유대인이 할례 받음은 문화관습이지만 헬라인이 할례를 받음은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 바울이 할례를 거부함은 유대문화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할례를 행했다. 그리스도와 성령이 오신 이후 할례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육신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인 성령내주로 성취되고, 의식은 교회의 세례로 대체된다. 새언약에서 할례는 언약백성의 징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유대인들의 전통 문화관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③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
- 바나바는 바울보다 먼저 된 자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는 바울의 훌륭한 보호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자신이 의지하고 기대볼 만한 사람이 없어졌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이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이제 바울은 혼자 선교여행의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바울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선교여행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이 성령인도 받는 놀라운 방법이었고 축복 중의 축복이었다.
(2)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① 선교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성령님이셨음
- 2차 선교여행에는 분명 성령께서 바울에게 가서 복음전하라고 하시는 지역이 있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1차 선교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중심으로 소아시아(터키 아나톨리아반도)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려 하였다. 그것이 당연했고 선교전략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소아시아 갈라디아 남부에 이제 고작 몇 개의 교회만 세워졌는데, 아직 소아시아 반도 전역에 복음 전해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이 남았은데... 그런데도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 복음은 바울이 전하지만 분명히 그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셨다. 모든 것을 바울이 계획하고 실행하고 성취해서 만들어냄이 아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하나하나 조금씩 인도해 주셨고 바울은 철저하게 성령님께 순종했다. 선교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셨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바울에게 명하셨고 바울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순종했다.
②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의 생각보다 완전함을 기억
- 바울의 계획은 소아시아에 복음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난 처음 목적은 1차 선교여행때 소아시아에 세워진 제자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소아시아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북동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썼다. 유럽으로 건너가는 계획은 바울에게 전혀 없었다.
-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③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높으시다. 바울의 계획은 소아시아였지만 성령께서 바울이 소아시아에 복음전하는 것을 막으시고 그리스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라고 하셨다. 그 결과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가 헬레니즘과 로마제국의 힘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신 네 나라 신상 꿈(단2장)과 다니엘의 네 나라 짐승 환상(단7장)의 성취이며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의 나오는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일어난 흰옷 입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성도와 연관이 있다. 아무리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그 당시에는 자신의 2차 선교여행이 그 예언 성취 속에 있음을 생생하게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 바울이라도 이천년 후 오늘날 세계의 판도를 생각했을까? 아무리 바울이라도 자기가 드로아 항구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다니엘과 에스겔 이사야 요한계시록처럼 전 세계에서 하나님 백성을 모으심이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가 내 생각보다 옳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3)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① 성령께서 바울을 조금씩 인도하심
- 성령님은 바울에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말씀으로 명확히 들려주지 않으심이 분명하다. 바울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며 무시아로 간 후 소아시아 북쪽인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 전하려 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전하지 말라고 하심을 어떻게 알았을까? 1차 선교여행과 다르게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회심자가 없고 전도의 문이 계속 막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끼고 알았을 것이다.
- 처음부터 성령께서 2차 선교여행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쉽고 간단할까? 왜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확히 보여주시면, 사람은 분명히 거기 가서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낸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내는 것과 내가 성령내주로 에덴의 생명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순종하며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전자는 한번 하나님의 일을 해내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매순간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② 성령인도는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
- 성령인도는 내가 하나님이 시키시는 어떤 일을 정확하게 해내는 로봇으로 만듬이 아니다. 그런 일은 천사나 불신자, 심지어 발람의 나귀(민22:22)처럼 짐승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매 순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신다. 한 번의 명확한 음성을 들으면 내가 그 일을 해 낼 수는 있지만 내가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성령인도는 지정의를 가진 자유인격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을 통해 매순간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감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함은 결코 한 번에 변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인도하시는 이유다.
③ 성경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며 하나님 뜻에 나를 복종시킴
- 바울을 드로아 항구까지 인도하신 성령께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과 배를 타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면 배를 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은 주먹구구 애매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계획과 뜻이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처음부터 바울이 마게도냐/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전하도록 인도하셨다. 그것을 바울이 깨닫고 순종하도록 삶에서 조금씩 인도하신 것뿐이다. 바울의 지정의를 중단시키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바울을 조금씩 인도하심이다.
- 보자기 환상(행10장)과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장)은 베드로와 바울 사역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구원사의 중요한 계시다. 히브리파 유대인 베드로에게는 이방인 전도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하셨고, 헬라파 유대인 바울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게 하게하셨다.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직접 통치하시며 인도하심이다.
- 오늘날 이와 같은 꿈과 환상을 기대하지 말라. 성경의 꿈과 환상은 심지어 신약의 예언과 환상, 선지자...는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계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방법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구원계시는 완전히 계시되었다. 더 이상 새롭게 더 추가되어야 할 것도 없다. 신구약 성경으로 구원계시는 완전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계시와 환상이 오늘 내게도 나타나기를 아예 꿈도 꾸지 말라. 성경을 읽고 십자가 복음, 칭의의 복음을 아는 것이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는 것이다. 사람이 예언과 환상을 한번만 체험하면 그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고 꿈과 환상, 예언을 좇아간다. 칭의와 성화는 전혀 관심 없고 기독교 무당과 기독교 점쟁이들의 종이 된다.
- 코로나 팬더믹으로 세상은 우리 아는 것과 완전히 달라졌다. 어떻게 변하고 어떤 결과가 있을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지키실 것이고, 교회를 복음에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따라간다. 성도들이 말씀이 없어 방황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설교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그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 십자가 복음, 하나님 나라 구원은 그냥 따분한 이야기일 뿐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성경을 인용해 감동적으로 설교하려고 급급하다. 성경은 설교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읽고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가? 칭의의 복음으로 살아가고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 것뿐이다.
- 성령인도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말씀과 기도다. 바울이 기도에 전무하고 말씀에 순종하려 한 것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하겠다. 성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설교 듣는 것이 결코 성경읽기를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 경외함으로 성경을 읽고 내뜻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기도생활을 날마다 해야 하겠다. 이것이 성령인도다.
<적용>성도가 자기 삶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
(1)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인 원리가 있다
- 성경의 십자가 진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할 것, 하나님과 교회에 유익한 결정인가? 내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면? 잘못된 판단은 내게 손해가 된다는 뜻이다. 내게 손해되어 보여도 하나님의 인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두려워 말 것, 하나님을 신뢰하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2) 내 삶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 하나님께서 문을 막으실 때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멈출 것(6-7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 원리를 따라 다시 점검해보고 기도함(8절) 하나님의 응답은 직접 음성보다 사건, 사람을 통해서 주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어지면,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간다(11-12절)
1. 제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1)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할례와 율법이 아닌, 칭의의 복음을 공인하였다.
① 베드로와 야고보의 중요한 역할
-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은혜구원, 칭의의 복음 십자가 복음을 공인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과 고넬료에게 성령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했고, 야고보는 베드로의 주장을 지지하며 구약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을 제시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닌 칭의의 복음, 은혜구원을 주장하므로 교회 내의 히브리파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장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된다. 이로서 행위구원의 징검다리가 되는 할례와 안식일 등 율법주장은 복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얻는다는 십자가 진리가 굳게 서게 된다.
② 이방인 교회들이 칭의의 복음 은혜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져감
- 예루살렘 사도들이 구원의 길로서 행위(율법)를 배제하고 은혜(믿음)로 결론을 내리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내용은 더 이상 시비거리가 없게 되었다. 이로서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첫 목표는 지난 1차 선교여행으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들 곧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로 가서 그들을 칭의의 복음으로 더욱 든든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2)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었다.
① 2차 선교여행의 중요성
- 사도행전 속에서 1차 선교여행은 칭의의 복음을 확립한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가 중요하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의 사역은 모두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에 포함되고 요약된다. 심지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도 안디옥 칭의의 복음설교(행13:38-39)에 비하면 간략하게 다뤄진다.
- 2차 선교여행은 칭의의 복음이 유럽으로 확산되어,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그리고 에베소에 이방인의 교회가 세워지는 사역이었다. 3차 선교여행은 에베소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가르치며 틈틈이 1차, 2차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확립하고 또 다른 전도의 문을 여는 사역이었다. 세 차례에 걸린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2차 여행이 가장 극적이고 놀랍다. 아시아를 향하는 바울의 발걸음을 막으시고 마게도니야(유럽)으로 가라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인도가 핵심이다.
② 보호자요 동역자였던 바나바가 떠나감
- 중요한 사역을 앞에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다. 1차 선교여행의 비시디아 안디옥을 앞두고도 그랬다. 마가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낙심하기 보다는 크게 화가 났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울이 버가에서 복음 전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하며 이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200km 이상을 가야하는 긴 여행을 앞두고 자칫 선교여행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들었을 것이다. 모두 비시디아 안디옥 이신칭의 설교(?)를 앞둔 상황이었다.
- 2차 선교여행도 그랬다. 마가요한 문제로 심히 다투고 이로 인해 바울은 자신의 보호자요 소중한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었다. 바울은 수종자를 몸종이 아닌 사역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2차 선교여행에서 보면 수종자는 바울이 급히 떠났을 때 뒤에 남아 교회를 세우는 역할이었다. 어쨌든 바나바와 갈라서게 된 바울은 이제 보호자요 동역자를 잃어버리고 홀로 설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지만, 1차 선교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또 한 번 큰 시험이 있었다. 바울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성격으로 인해 바나바와 심히 다툴 정도로 마음이 상했다.
2. 마게도냐 환상과 성령인도
(1) 바울은 성령인도를 기도하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① 실라(실루아노)는 바울의 동역자
- 바울이 바나바와 다퉜기 때문에 하나님이 디모데를 주셨다고 말하지 말자. 바울의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함이 옳다. 잘못은 우리의 것이고 선함은 하나님의 은혜다. 가롯유다의 배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왔기에 유다는 구속사를 이루는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유다는 분명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만큼 악한 일을 했고 그 죄 값으로 죽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러한 악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진행하고 성취하심이 놀랍다. 바울은 문제를 처리하고 의사를 표시함에 있어서 인격의 아쉬운 면을 드러냈지만, 하나님은 그의 부족함을 넉넉함으로 채워주셨다.
- 실라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실루아노는 로마식 이름이다. 그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의안을 안디옥교회에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실라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훌륭한 조력자였고, 또한 후에 베드로를 도와 베드로전서를 대필한다(벧전5:12) 실라는 바울이 세운 제자가 아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하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 내의 중요한 사역자였다.
② 디모데는 바울이 세운 제자임
- 이제 바울은 실라와 함께 더베와 루스드라로 간다. 루스드라는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곳이다. 그때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복음을 받은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모든 성도들에게 칭찬 듣는 좋은 제자였다.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생각된다.
- 바울은 그 지경의 유대인들을 위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다. 유대인 디모데가 할례 받지 않으면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인 디도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한다(갈2:3) 유대인이 할례 받음은 문화관습이지만 헬라인이 할례를 받음은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 바울이 할례를 거부함은 유대문화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할례를 행했다. 그리스도와 성령이 오신 이후 할례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육신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인 성령내주로 성취되고, 의식은 교회의 세례로 대체된다. 새언약에서 할례는 언약백성의 징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유대인들의 전통 문화관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③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
- 바나바는 바울보다 먼저 된 자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는 바울의 훌륭한 보호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자신이 의지하고 기대볼 만한 사람이 없어졌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이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이제 바울은 혼자 선교여행의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바울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선교여행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이 성령인도 받는 놀라운 방법이었고 축복 중의 축복이었다.
(2)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① 선교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성령님이셨음
- 2차 선교여행에는 분명 성령께서 바울에게 가서 복음전하라고 하시는 지역이 있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1차 선교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중심으로 소아시아(터키 아나톨리아반도)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려 하였다. 그것이 당연했고 선교전략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소아시아 갈라디아 남부에 이제 고작 몇 개의 교회만 세워졌는데, 아직 소아시아 반도 전역에 복음 전해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이 남았은데... 그런데도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 복음은 바울이 전하지만 분명히 그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셨다. 모든 것을 바울이 계획하고 실행하고 성취해서 만들어냄이 아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하나하나 조금씩 인도해 주셨고 바울은 철저하게 성령님께 순종했다. 선교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셨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바울에게 명하셨고 바울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순종했다.
②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의 생각보다 완전함을 기억
- 바울의 계획은 소아시아에 복음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난 처음 목적은 1차 선교여행때 소아시아에 세워진 제자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소아시아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북동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썼다. 유럽으로 건너가는 계획은 바울에게 전혀 없었다.
-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③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높으시다. 바울의 계획은 소아시아였지만 성령께서 바울이 소아시아에 복음전하는 것을 막으시고 그리스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라고 하셨다. 그 결과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가 헬레니즘과 로마제국의 힘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신 네 나라 신상 꿈(단2장)과 다니엘의 네 나라 짐승 환상(단7장)의 성취이며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의 나오는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일어난 흰옷 입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성도와 연관이 있다. 아무리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그 당시에는 자신의 2차 선교여행이 그 예언 성취 속에 있음을 생생하게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 바울이라도 이천년 후 오늘날 세계의 판도를 생각했을까? 아무리 바울이라도 자기가 드로아 항구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다니엘과 에스겔 이사야 요한계시록처럼 전 세계에서 하나님 백성을 모으심이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가 내 생각보다 옳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3)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① 성령께서 바울을 조금씩 인도하심
- 성령님은 바울에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말씀으로 명확히 들려주지 않으심이 분명하다. 바울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며 무시아로 간 후 소아시아 북쪽인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 전하려 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전하지 말라고 하심을 어떻게 알았을까? 1차 선교여행과 다르게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회심자가 없고 전도의 문이 계속 막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끼고 알았을 것이다.
- 처음부터 성령께서 2차 선교여행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쉽고 간단할까? 왜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확히 보여주시면, 사람은 분명히 거기 가서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낸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내는 것과 내가 성령내주로 에덴의 생명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순종하며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전자는 한번 하나님의 일을 해내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매순간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② 성령인도는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
- 성령인도는 내가 하나님이 시키시는 어떤 일을 정확하게 해내는 로봇으로 만듬이 아니다. 그런 일은 천사나 불신자, 심지어 발람의 나귀(민22:22)처럼 짐승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매 순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신다. 한 번의 명확한 음성을 들으면 내가 그 일을 해 낼 수는 있지만 내가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성령인도는 지정의를 가진 자유인격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을 통해 매순간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감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함은 결코 한 번에 변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인도하시는 이유다.
③ 성경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며 하나님 뜻에 나를 복종시킴
- 바울을 드로아 항구까지 인도하신 성령께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과 배를 타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면 배를 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은 주먹구구 애매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계획과 뜻이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처음부터 바울이 마게도냐/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전하도록 인도하셨다. 그것을 바울이 깨닫고 순종하도록 삶에서 조금씩 인도하신 것뿐이다. 바울의 지정의를 중단시키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바울을 조금씩 인도하심이다.
- 보자기 환상(행10장)과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장)은 베드로와 바울 사역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구원사의 중요한 계시다. 히브리파 유대인 베드로에게는 이방인 전도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하셨고, 헬라파 유대인 바울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게 하게하셨다.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직접 통치하시며 인도하심이다.
- 오늘날 이와 같은 꿈과 환상을 기대하지 말라. 성경의 꿈과 환상은 심지어 신약의 예언과 환상, 선지자...는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계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방법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구원계시는 완전히 계시되었다. 더 이상 새롭게 더 추가되어야 할 것도 없다. 신구약 성경으로 구원계시는 완전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계시와 환상이 오늘 내게도 나타나기를 아예 꿈도 꾸지 말라. 성경을 읽고 십자가 복음, 칭의의 복음을 아는 것이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는 것이다. 사람이 예언과 환상을 한번만 체험하면 그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고 꿈과 환상, 예언을 좇아간다. 칭의와 성화는 전혀 관심 없고 기독교 무당과 기독교 점쟁이들의 종이 된다.
- 코로나 팬더믹으로 세상은 우리 아는 것과 완전히 달라졌다. 어떻게 변하고 어떤 결과가 있을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지키실 것이고, 교회를 복음에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따라간다. 성도들이 말씀이 없어 방황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설교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그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 십자가 복음, 하나님 나라 구원은 그냥 따분한 이야기일 뿐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성경을 인용해 감동적으로 설교하려고 급급하다. 성경은 설교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읽고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가? 칭의의 복음으로 살아가고 그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 것뿐이다.
- 성령인도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말씀과 기도다. 바울이 기도에 전무하고 말씀에 순종하려 한 것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하겠다. 성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설교 듣는 것이 결코 성경읽기를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 경외함으로 성경을 읽고 내뜻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기도생활을 날마다 해야 하겠다. 이것이 성령인도다.
<적용>성도가 자기 삶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
(1)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인 원리가 있다
- 성경의 십자가 진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할 것, 하나님과 교회에 유익한 결정인가? 내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면? 잘못된 판단은 내게 손해가 된다는 뜻이다. 내게 손해되어 보여도 하나님의 인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두려워 말 것, 하나님을 신뢰하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2) 내 삶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 하나님께서 문을 막으실 때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멈출 것(6-7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 원리를 따라 다시 점검해보고 기도함(8절) 하나님의 응답은 직접 음성보다 사건, 사람을 통해서 주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어지면,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간다(11-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