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요한(13)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1-11)

Author
GOSPEL323
Date
2019-11-0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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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3)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8:1-11)

1. 초막절과 생수의 강

(1) The feast of tabernacles

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모여 살아감

- 레 23:39~42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 초막절은 장막절이며, 출애굽 광야 길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초막은 종려가지와 버들가지 등을 취해 만든 일주일 사용하고 버리는 임시 장막이다(느8:13-18) 초막은 한글 의역으로 원어로 보면 장막(tabernacles, booth)이 더 정확하다. 이스라엘은 광야 길 40년 동안 하나님의 성막을 가운데 두고, 그 성막 주위에 열두 지파 백성들의 장막이 진을 치고 있었다. 초막에 거하며 광야생활 어려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겸손해지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백성들 한 가운데 함께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함이다.

-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하나님! 출애굽 때 광야에서 함께해주셨던 것 같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옵소서." 기도한다. 이는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메시야 구원으로 이어진다. 예수께서 유월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다. 종려가지와 호산나는 유월절 예식이 아닌 메시야를 기다리는 초막절과 연관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야로 환영하며 환호하는 것이다.

②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내어 먹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

-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다. 하나님은 광야 40년동안 물을 주셔서 백성이 마실 수 있게 하셨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성전에 오라오는 자에게 비를 주신다고 예언했다(슥14장) 제사장들은 초막절기에 실로암 물을 길어다 성전 번제단에 부으며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스라엘에 이른 비를 내려주시길 기원했다.

(2)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①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영원토록 함께하심

- 이러한 초막절기에 예수님은 당신께서 생수의 강이심을 선포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수의 샘물”(요4:24)로 말씀하셨지만, 초막절에 모인 백성들에게는 “생수의 강”(요7:37)으로 선포하신다. 아무래도 한 개인이 아닌 다수의 백성들에게는 샘물보다는 강물이 더 풍성해 보임 때문이 아닐까? “생수의 샘물”과 “생수의 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말씀하는 것이었다.

② 성령을 생명을 주는 물로 표현

-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1)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케 하러 오셨다.

① 장로들의 유전(마15:1)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38년된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이다. 병자를 고치신 행동보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율법에 나와 있는가? 없다. 율법을 해석한 적용규례, 장로들의 유전일 뿐이다. 그렇다면 장로들의 유전이 생기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 “장로들의 유전”(마15:1)은 성경 율법을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유대 랍비와 산헤드린 장로들이 정한 율법수행의 세부규칙으로 그 성격상 문자적 적용으로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하루를 금식해야 하는데 그 날자 정함이 불분명하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그 날뿐만 아니라 전날과 다음날까지 모두 금식하게 정한다. 이렇게 해야 부지중 율법어김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를 켜거나 끄는 행위도 금지하고 자동차 시동을 켜는 일도 금한다. 시동을 걸면 점화플러그에서 스파크가 일어나 연료를 태워 불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냉장고 문을 열면 작은 전등불이 켜질까봐 전날 미리 전구를 빼놓는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율법은 장로들의 유전이 추가되어 점점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된다. (마11:30)

-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들이 해석한 적용규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동일게 여겨졌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안식일 규례를 어겼다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말라는 율법에 말씀하셨는가? 아니다. 장로들이 병자를 고치는 것도 일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의 본래 정신보다 장로들의 유전 안식일 규례를 더 중요시 한다고 책망하셨다.

- 안식일에는 일을 무조건 안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근거로 할례를 예로 드렸다. 하나님은 백성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 출산일은 임의대로 조정할 수 없기에, 유대인 산모가 안식일에 아이를 낳으면 8일째 되는 날도 안식일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할례를 행한다(요7장) 또한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성막 일을 한다. 또한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양을 구해낸다(마12장)

②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 이처럼 안식일은 무조건 일을 금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온전케 하고 죄에서 자유케 하며 구원하는 날이다. 할례를 행함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듯,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러한 해석과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예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율법의 수여자가 율법의 해석자가 되셨다. 사람의 권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교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성부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된 진리요 참된 계시다.

-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나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높여지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낮춰지신 분이다. 그분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성삼위하나님 여호와셨다. 율법의 수여자께서 친히 율법의 해석자가 되시고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통하여 친히 율법의 성취자,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다.

③ “나는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28절)

-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절) 초막절에서 유월절까지는 정확히 6개월이 걸린다. 이제 예수님은 6개월 후에 십자가를 지신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당신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신다. 십자가와 부활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 다시 본래의 영광을 얻으신다.

(2) 바리세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간음한 여인을 데려왔다.

①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6절)

-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기고 율법을 폐하는 자라고 단정했지만 일반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칭찬들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세인들이 아무리 예수를 공격해도 백성들에게는 예수의 긍정적인 소문이 점점 더 퍼져갔다.

- 이에 바리세인들은 예수가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백성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악한 궤계를 세운다. 장로들의 유전이 아닌 율법이 분명하게 금하는 범죄자를 데려와 예수의 태도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이는 일반백성들에게 예수가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려는 목적이었다.

- 율법은 간음한 자에 대해 이렇게 명한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20:10)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22:22) 하나님은 간음을 우상숭배와 함께 이스라엘에서 반드시 제거해야할 죄악으로 말씀하신다.

- 바리세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온 것은 평범한 일반상황이 아닌 바로 초막절기 성전에서 예수를 책잡아 고소하려는 계책임이었다. 이들은 간음한 자를 제하고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다.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의 악한 의도를 즉시 아셨다.

- 첫째, 율법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대답하면 예수님은 로마법에 걸린다.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고 소리치며 그녀를 돌로 칠 것이다. 당시 사형집행권은 로마가 가지고 있는데 초막절기 성전 뜰에서 소요가 일어나면 즉시 로마군대가 출동하고 예수님은 로마법에 의해 체포된다. 또한 예수께서 이전에 세리 창기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말씀하셨던 사랑과 용서 등의 가르심이 의심받게 된다.

- 둘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종교법에 걸린다.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재판에 고소하고, 거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율법을 거스리는 자로 선고받을 것이다. 이것은 장로들이 해석한 규례가 아닌 율법에 명확하게 명시된 규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리세인들이 가장 원하는 바다.

-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하셨다.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지만 일반백성들이 볼 때 긍정적인 칭찬들을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간음과 같은 명백한 죄를 그대로 두는 일은 일반사람들에게 큰 거부감을 준다. 어린아이라도 간음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할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은 이런 악한 의도가 있는 바리세인들의 궤계였다.

②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 바리세인들의 악한 궤계를 아시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 이는 바벨론 벨사살 왕이 잔치하던 중 나타나 벽에 글을 쓰신 하나님의 손가락을 기억케 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라서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듭해서 묻자 예수님이 몸을 일으키시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손가락으로 땅에 쓰고 계셨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몸을 숙이시고 계속 손가락으로 글을 쓰신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9계명)” 예수님은 십계명의 이 구절을 쓰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본다.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 나온 증인의 원칙에 근거한다. 율법은 범죄를 목격한 사람이 먼저 손을 들어 형을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찌니라”(신17:5-7) 여기에 예수님은 하나의 조건을 다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 이것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악한 의도로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 예수님께 질문하고 고소하려는 바리세인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죄도 판단할 수 없다고 오용돼서는 안된다. 이 말은 범죄자들의 자기 합리화 구절이 아니다.

- 간음한 여인은 분명 현행범 잡힌 명백한 죄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바리세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잡은 희생양처럼 보인다. 그녀가 정결한 여자였는데 함정에 빠졌다고 말함이 아니다. 원래 불의한 여인일수 있지만, 초막절 그 시간에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것을 보면 예수를 고소할 목적으로 파놓은 유대인의 함정에 빠진 여인처럼 보인다.

- 율법은 간음한 남녀 모두를 돌로 치라 하였는데 현장에서 여자만 잡아온 것은 이상하다. 왜 간음한 남자는 함께 끌고 오지 않았는가? 간음 중에 잡아왔다는 것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간음이란 남녀간에 은밀히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간음현장을 발견하고 잡기란 쉽지 않다. 바리세인들이 남자를 시켜 그 여인이 간음현장에서 잡히도록 유도한 것 아닌가 의심된다. 마치 매춘마약 경찰의 함정수사처럼 말이다.

- 설령 바리세인들이 함정을 만들지 않고 우연히 간음현장을 목격했다 할지라도,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예수님께 데려온 바리세인들은 악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사모하는 자들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궤계를 세운 악한 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율법을 이용하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십계명의 제 9계명을 어겼다.

- 간음한 여인에게 먼저 증인이 돌을 던져야 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돌을 던질 수 있다. 그런데 바리세인들은 처음부터 악한 의도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고소하려고 간음하는 현장을 만들어 급습해 여인을 체포해 왔다. 예수님 간음한 여인을 잡아온 바리세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권위 앞에, 율법의 수여자이신 성삼위 하나님 예수님의 권위 앞에 바리세인들은 감히 돌을 들 수 없었다. 증인이 돌을 들지 못하자 모인 군중들도 돌을 들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은 만물을 밝히 드러내시면 그들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큰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돌아간다.

③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

-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간음한 여인은 마땅히 고소와 정죄 받아야만 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분명히 간음은 죄임을 말씀하셨다. 이 여인이 생명을 얻으려면 간음의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면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죄인인 그녀를 살리셨다. 그녀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구원하셨다. 예수님의 용서 속에는 다음의 요소가 있다.

- 첫째, 죄에 대한 분명한 회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죄는 분명히 죄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다. 복음은 죄의 개념을 희석시켜 죄의식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실제로 죄를 분명히 가르치고 죄를 회개케 하며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38년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 둘째, 죄를 이기는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은 죄인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셔서 죄를 이기게 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사람은 죄인에게 죄 짓지 말라고 말해줄 뿐이지만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하심으로 죄를 이기도록 하신다. 성령을 보내주신다. 돌로 처형당할 죽음에서 용서받은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다시 과거의 부정한 생활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며 성령을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나는 후자가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적용>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1) 지금까지 나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도 살리시는 예수님이시다. 용서해주시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지난 날 저질러졌다면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것이다. 사죄의 은총을 기억하자.

-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2) 진정한 자유는 성령을 의지하고 거룩해질 때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