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예배(3) -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요1:1-18)

Author
gospel323
Date
2019-02-1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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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3) -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요1:1-18)

1. 삼위일체(Trinity)

(1)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엡1장) /경륜적 삼위일체

①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

-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공덕에 달려있지 않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나의 행함이 구원과 조금이라도 연관된다 자랑할 것이 있지만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에 관하여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것을 말한다.

② 예수님의 구속하심 – 십자가와 부활

- 죄는 인간 본성문제이다. 죄는 인간 내면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자기주인된 아담적 성향이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죄가 이끄는 대로 그대로 끌려간다. 어떻게 인간은 죄를 이기고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인간은 부패한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가?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어 죄를 이기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

③ 성령님의 인치심 -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시며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를 죄로부터 정결케 하고 자유케 하시는 일이시다. 그래서 성령님은 성결의 영, 거룩의 영으로 불리우신다. 주의 재림과 우리 몸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그 세력들과 싸우 며 나아가야 한다. 우리 힘은 너무도 연약하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도와주시기에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 날 수 있다. 낙심하고 좌절해도 다시 힘을 얻고 나아간다. 하나님 백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 구원은 불변하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요10:30) / 존재론적 삼위일체

① 성경 – 예수님의 자기진술과 제자들의 신앙고백

- 삼위일체는 성경에 직접 쓰여진 단어가 아니며, 성경의 진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삼위일체의 핵심은 예수님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예수님 자기진술과 제자들의 신앙고백에 나타나있다. 신약성경은 이 진리를 기록하고 기독교는 이 진리 위에 세워져있다.

-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씀하셨다(요10:30) 이러한 진술은 죽으시면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말씀하심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셨다. 바리세인들이 감히 반박하지 못함은 예수께서 이 선언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침상으로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보이시며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처럼 대언자 형식으로 말하지 않고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시고 직접 자신의 말로 선언하셨다.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바로 이 엄청난 예수님의 자기선언 때문이었다.

②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짐

- 삼위일체는 예수께서 자존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진리이다. 성령님은 영이시기에 삼위일체로 이해함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육체가 되신 성자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고, 분리불가한 한 동일실체이신 하나님이심을 이해함이 어렵다. 이러한 삼위일체는 창조주의 존재방식이지 피조물의 존재방식이 아니다. 피조물의 논리구조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다.

- 동방교회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세 분의 개별 위격이 한 동일본질 동일실체"라고 설명하였으나 분리불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진술에서 삼신론으로 가는 미세한 틈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며 "동일본질의 한 실체가 분리불가하다"고 분명히 명시하였다. 이렇게 해야 성경말씀처럼 예수님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뭐라고 극존칭을 붙여도 성부하나님과 분리불가한 동일본질의 한 실체로 고백하지 않으면 예수는 99.9%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0.1%가 부족한 예수는 하나님과 가장 비슷한 분, 하나님께 최고 근접한 분이지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아니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 실체, 영광 권위... 등 모두 동일하다. 단 삼위하나님 간에 순서적 질서는 있다. - 서철원 교의신학 2권 P86

- 다시 말하지만, 삼위일체는 성경계시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자존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다(요10:30) 이를 설명함은 피조물의 논리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 “세 분의 개별 위격이 분리불가한 동일본질의 한 실체”라는 진술이다. 이것 이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 성경 계시가 그렇게 말하기에 우리는 그대로 믿는다.

-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중요한 것은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경륜적/섭리론적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엡1장) 예수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예수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되고,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구원을 위한 성삼위 하나님의 대속사건이 된다. 예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은 없다.

③ O come to the Father through Jesus the Son

-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딤전2:5-6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2.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①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은 하나님과 동일본질 동일실체의 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함이다. 그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고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여기에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 신앙은 바로 바로 여기에 있다.

-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요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②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 예수님은 창세전에 계셨는데 우리를 자기 피로 구속하기 위하여 육체가 되셨다. 이를 위해 남자에 의한 일반적인 출생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원죄와 자범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되시고 무흠 무죄 거룩 의로우신 분으로 출생하셨다.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고백이다. 영세 전부터 계신 성자께서 이 땅에 육체가 되셔서 성육신하심을 말함이다. 성령잉태로 예수님은 죄가 없고 완전하심이 중요하지 로마카톨릭처럼 마리아를 숭배해서는 안된다.

-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2)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종교적 의미를 담은 소설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께서 역사 속에서 실제로 대속의 피를 흘리셨기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역사 속에서 실제로 부활하셨기에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성경이고 기독교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야란 용어이다. 구약은 그것을 예언하고 신약을 그것을 확인한다. 누가 아무리 내 대신 죽어도 내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죄가 용서되고, 좀더 정확히 해서 내가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죄 용서를 받는다.

②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그의 십자가로 죄인이 구원 얻음을 선언하는 불변의 사건이다. 기독교 진리는 부활의 역사적 사실 위에 서있다. 예수의 하나님 되심, 십자가 죄사함, 천국과 지옥, 하나님 나라 백성 됨... 모두 보이지 않는 사실이다. 현대 과학주의 객관적 데이터로 이 사실들을 보여주기 어렵다. 사람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로만 기독교 진리가 사실임이 증명된다. 부활이 거짓이면 기독교는 무너지고, 부활이 사실이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 무릎 꿇어야 한다.

- 십자가는 우리의 죄없다하심(죄용서)을, 부활은 우리를 의롭다하심(칭의)를 위함이었다. 죄용서는 우리가 이미 지은 죄에 대한 형벌 없음을 선언함이고, 의롭다 하심은 우리가 앞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며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다.

-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He descended into hell. 사도신조의 로마카톨릭 버전은 “저승/음부에 내려가시고”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도신조 초기형식인 루피누스 로마신조에는 “장사되시고”로만 되어있다. 또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요리문답에도 “장사되시고”로만 되어있다(서철원교수) 즉 “go to hell”은 사도신조 초기 원문에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며 본래 “go to the grave” 의미를 AD 750년 로마 카톨릭이 연옥과 림보교리를 만들기 위해 “go to hell”로 바꾼 것이다. AD 750년 이전에 유일하게 기록된 루피누스 두 개 버전 중 한 개의 “go to hell”은 그 의미가 무덤에 장사 지낸 것이다(권성수교수) 한국어 사도신조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로 정확히 잘 번역하였다.

(3) 예수님은 창조주와 구속주, 심판주가 되신다.

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다. 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보호하시며 구속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인류를 창조하신 예수님은 범죄한 죄인들의 대속제물로 오셔서 친히 구속주가 되시고 지금 성령으로 구속사역을 계속하시다가 마지막 날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

②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이것을 아타나시우스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방식으로 공식화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하신다”

- 창조와 구속과 심판은 하나님의 작정에서 나오고, 그 작정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창조주와 구속주, 심판주가 되신다. 천지창조 때 예수께서 삼위하나님의 한분으로 곁에 계셨음을 말함이 아니다. 예수께서 직접 아버지의 뜻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창조주, 창조중보자라는 뜻이고 2천년 기독교회의 정통신앙고백이다. - 서철원 교의신학 2권 P94

<적용>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백성들의 만남이다.

(1) 이 만남은 인격적 교제이며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 예배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계획과 뜻을 보여주시고 백성은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순종을 서약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심 선하심을 보여주시고 백성은 그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반응한다. 하나님은 보호와 인도를 약속하시고 백성은 그에 대한 감사와 기도와 헌금으로 화답한다.

(2)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자.

- 지역교회와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자. 온라인 인터넷 사이트는 지역교회를 대신할 수 없다. 성도는 지역교회에 속해야 하고 그 안에서 양육되어야 한다. 성도가 다른지역으로 출타할 경우 그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 교회 웹사이트는 주일설교를 다시 한 번 확인케 함이지 예배를 대신할 수 없다. 예배에는 설교가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나 예배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