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히브리서(22) -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자 (히12:1-13)

Author
gospel323
Date
2019-01-0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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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22) -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자 (12:1-13)

1.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1)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이유

①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칭의)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 아담은 에덴동산이라는 시공간에서 범죄 했고 그의 후손 인류도 시공간 역사 속에 범죄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아담과 인류의 범죄에 대해서 형벌을 요구하기에 사람은 실제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죄의 삯인 사망으로 귀결된다. 이는 시공간이 없는 영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세상 곧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인을 죄에서 건져내어 실제로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으로 오셔야 했다.

②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시기 위하여

- 사람은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아담처럼 살아간다. 모든 사람은 자기주인되어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왔다. 구원은 바로 이 죄에 대한 형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가 오늘 이 순간까지 살아오며 지어왔던 과거의 죄에 대한 죄 값이다. 이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용서 받았다.

- 그런데 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과거의 죄를 해결 받아도 미래에 분명 죄를 짓는다. 이는 분명하다. 부활 이전까지는 죄와 사망, 사탄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의 짐승 희생제사와 무엇이 다른가? 십자가로 죄용서 받았으나 성도가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십자가도 짐승제사처럼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아닌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 십자가는 과거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의롭다하심 곧 칭의이다. 칭의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연합해주셔서 내 안에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나를 의롭게 해주심이다. 성령 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 죄와 사탄을 이길 힘을 얻게 된다.

- 이것이 십자가와 짐승제사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짐승제사는 과거의 죄만 용서하는 상징이요 부족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내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의 형벌을 용서해주시고, 부활하셔서 나와 연합해주심으로 내가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시며 의롭고 거룩하게 하시는 완전한 구원이 되신다.

- 이처럼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칭의)가 없다면 자유인격체 사람은 절대로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의롭게 변화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죄인들이 살고 있는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다.

③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직접 창조하시고 선택하심으로 조성하심

-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한 장소, 한 민족, 한 나라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나라로 세우셨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준비되었고(구약),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역을 이루신 나라이다(신약) 이것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스라엘 나라(가나안 땅, 아브라함 자손)의 중요성이다.

-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혈통적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구속사적 사명은 이제 종결되었다. 더 이상 유대인의 특권과 우월성은 없다.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 백성이 된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백성 됨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구별도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영적 아브라함 자손, 참 이스라엘이다.

(2)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40)

①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구속사임

- 구약의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행한 그 당시의 일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의 나라와 직접 연관이 있지만, 사실 그 일은 모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준비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 백성들의 조상이 된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고난 받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음이 된다. 기생 라합이 여리고로 들어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줌은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가 된다.

-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이 받은 약속은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나라로 성취되어졌지만 그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은 영적 이스라엘 신약교회와 종말론적 그리스도 나라를 말함이다. 그들은 이것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아갔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신들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

②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 예언은 완성되었고 온전해 짐

- 그리스도가 없다면 구약의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유대인들의 이야기일 뿐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구약이 유대인들의 역사책이 아닌 신약교회의 성경이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인물과 사건들은 오늘 우리가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완성된다. 우리가 없다면 그들의 사역은 그리스도 예언으로만 존재하며 성취와 완성은 없다. 온전하지 못하다.

-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히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③ 이미 지나간 상징과 예표를 다시 붙잡으면 안됨

-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 중에 지나치게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갖는 분들이 있다. 세대주의 천년왕국 종말론 때문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재림하셔서 천 년간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 나라는 유대인 나라 다윗 왕국이다. 이는 상징이나 영적인 나라가 아닌 지상에 세워질 실제적 유대인의 나라이다. 유대인들이 천 년간 세계를 다스린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2등 시민으로 있지만 유대인들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이 건설되어 다시 성전에서 짐승 피의 희생제사가 드려진다.

- 세대주의 종말론과 천년왕국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간략히 요약하면, 첫째,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는데 세상에는 여전히 악인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천년이 끝나는 마지막에는 악인들이 감히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가 신적통치를 하심에도 말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주장하나 성경에는 한번 재림을 말할 뿐이다. 둘째, 본 히브리서 설교와 연관시켜 살펴보면,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구약의 피의 제사가 복귀된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정하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이미 지나간 그림자를 다시 붙잡는 것은 실체가 오셨음을 거부함이다. 이것이 가장 큰 오류이다.

- 세대주의 종말론의 위험성은 첫째, 무엇보다 율법과 복음을 적대적으로 만들어 도덕폐기론의 근거가 되며,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신약)의 핵심진리를 파괴한다. 율법과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절되고 연속된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함이 신약의 핵심주제인 교회를 알게한다. 교회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 참 이스라엘이다. 둘째,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기 보다는 매일 이스라엘 건국, 제3성전, 3차대전 아마겟돈 전쟁, 666 베리칩, 휴거 등에 집중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셋째, 재림의 날자를 정하게 됨으로 반드시 불건전한 시한부 종말론이 나오게 된다.

2.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자

(1) 피곤하고 낙심되지만, 예수님처럼 인내와 참음으로 신앙의 길을 달려가자(1-3절)

① 신앙생활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와 같음

- 바울은 신앙생활을 “경기하는 자”(딤후2:6)와 “달려갈 길”(딤후4:7)로 표현했다. 히브리서도 역시 성도의 삶을 “달리기 시합”(히12:1)으로 비유한다. 이 비유는 성도의 삶이 달리기 경기에 임하는 선수처럼 상을 바라보며 절제와 인내, 훈련을 참고 이겨냄... 등의 의미로 표현함이다.

②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 경주에 임하는 육상선수는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의 몸과 복장을 가장 가볍게 한다. 달리는데 조금이라도 불편을 주는 것을 제거해버린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고 있는 삶(=신앙생활) 속에서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 나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뺏어가고, 내가 지금 상 주심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는 경주자라는 것을 잊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본문이 말하는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들이다. 이런 죄들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 내 삶에서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버리도록 하자.

③ 십자가 모욕과 수치를 참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2-3절)

- 우리에게는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보다 더 확실한 모델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서 온갖 육체적 고통과 모욕, 수치를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다가올 인류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참고 인내하셨고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인류구원을 이루셨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 성도가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려하여 인내와 수고를 하고, 절제하며 거룩함을 향해 달려감은 하나님은 기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분명히 성도에게 상을 주신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경주자로 표현했다. 그 상은 모두가 동일하게 얻는 구원과 영생의 상급이 아니며 또한 황금아파트가 아님도 분명하다. 우리는 맘몬주의 상급신학을 거부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상급 자체를 잊어서는 안된다.

- 개혁주의 종말론에 비춰볼 때 그 상급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가 맡게 될 사역과 연관 있을 것같다. 예수님은 이것을 므나 비유로 말씀하신다. 주인은 모든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 나눠주었는데, 후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이 수고해서 얻은 만큼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맡겨주었다(눅19:12-27) 이로 볼 때 므나는 주인을 위함이 아니라 종 자신을 위함이고 더 나아가 후에 주인이 종에게 고을을 다스릴 능력 여부를 키워주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 새 하늘과 새 땅은 타락한 첫 창조의 회복과 완성이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이루시려 했던 사역을 성도를 통해서 이루게 하실 것이다. 그 일을 맡김에 성도는 각각 다르게 쓰임 받는다. 단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기에 차등상급이 되어도 어떠한 비교 우월 열등의식이 없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역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르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서 각각 다른 일을 맡기실 것이다.

(2)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필수 교육과정이다(4-13절)

①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4절)

- 지금 히브리 성도가 핍박과 어려움 속에 있지만, 아직 피 흘리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지만 피 흘리는 고난까지는 당하지 않았다. 아직 견딜 만하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말자. 본 절에서 “죄”는 1절에서 언급한 “죄” 자체가 아니라 3절의 “죄인들”과 같은 악의 무리를 가르킨다(Lane)

② 고난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치료과정(5-9절)

- 성도에게 고난은 치료과정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마치 신장투석을 해야 하는 환자가 병원에 가서 혈액에서 독을 빼내는 것과 같이 필연적이다. 부활이전까지 성도는 구원을 받았어도 죄의 본성은 남아있다. 이러한 죄성은 성도가 하나님 백성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방해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어 가신다.

- 히브리서는 이러한 고난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며 교육하는 징계로 비유했다. 부모의 징계는 자식을 사랑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고 낙심하거나 힘들어 하지 말라. 고난의 이유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③ 고난은 우리가 사역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훈련과정(10-13절)

- 성도에게 고난은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는 훈련과정이다. 성도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해야 한다. 이는 범죄이전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의로움으로서 하는 사역이다. 고난은 성도에게 죄인의 형상을 벗겨내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하는 놀라운 훈련과정이다. 고난을 많이 통과할 수록 성도는 죄에서 벗어나 겸손해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 히12:10-13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적용>2019년도를 새롭게 시작하며....

(1)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인내하며 더욱 달려가자.

- 빌2:10-14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2) 경주를 마친 후 하늘상급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말자.

-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