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하나님 나라(15) -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사람들 (창4:16-26)
Author
gospel323
Date
2018-07-25 08:05
Views
895
하나님 나라(15) -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사람들 (창4:16-26)
1.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는 사람들
(1)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창4:7)
① 범죄이후 아담은 자기와 자기 후손의 본성에 어떤 심각한 변화를 알게 됨
-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의)였던 아담은 범죄이후 하나님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룩한 피조물에서 하나님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주인이 된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의도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 실체를 죄라는 단어로 명확히 말씀하셨다.
②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은 죄의 소원(죄의 내적욕구)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심
-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므로 그의 후손들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범죄한 아담의 형상(=죄인의 형상)으로 태어났다(창5:3). 아담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본성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본성이 죄로 오염됨으로, 모든 사람은 죄의 본성이 요구하는 죄의 소원(=죄의 내적욕구)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또한 죄의 소원에 굴복하면 얻게 되는 열매를 분명히 경고하셨다.
③ 하나님은 그 죄의 소원을 절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심
- 죄는 마치 불과 같아서 그것은 온 집을 태우고도 남는다. 처음에는 작아보이지만 다스려 이기지 않으면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죄의 소원을 절대 작게 보지말고 다스리고 이겨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2)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4:7)
① 하나님은 죄의 위험성과 그 결과의 무서움을 분명히 경고하심.
- 죄는 다가오는 먹이에게 달려들기 적전 가만히 엎드려 있는 호랑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내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공격 대상은 바로 나이다. 죄에게 잡히기만 갈기갈기 찢기고 물어 뜯겨 비참하게 죽는다. 죄의 소원대로 행할 때 얻게 되는 사망의 열매는 치명적이고 처절하다. 여기서 나를 공격하는 죄의 소원은 부패한 내 본성의 욕구이지 나와 별개의 사단이 아니다. 죄의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3) 죄인은 스스로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 없다.
① 가인의 범죄는 죄의 소원이 사람의 힘으로 통제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
- 본래 하나님은 사람이 지정의, 양심에 의해 결정해서 행동하도록 하셨다. 양심은 이 일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옳고 그름(종교적 윤리적)을, 지성은 맞고 틀림(합리적)을 판단한다. 그 후 감정은 그 일을 좋고 나쁨(감정적)을 느끼게 하심으로 사람이 좋아하는 그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해서 행동하게 하셨다. 결국 사람의 행동은 감정이 최종 관문이며 그것이 의지와 연결되어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만들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이 일어는 발생구조이며 지금도 동일하다.
② 범죄이전 아담의 행동이 의로운 것은 양심 지성 감성 의지가 모두 거룩했기 때문임
- 범죄이전에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의가 있었다. 양심과 지성의 판단을 따르는 감성이 모두 하나님의 의로 거룩했기에 아담의 의지는 거룩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범죄이전 아담 모든 행동은 거룩한 양심과 탁월한 지성의 판단에 따라 일을 결정하고, 그 일을 좋아하는 의지를 작동시켜 행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③ 범죄이후 인간은 죄의 본성에 따라 죄의 욕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함(=죄의 소원)
- 죄로 인간의 지정의 양심 모든 것은 오염되었다. 양심은 화인을 맞아 그 흔적만 남아 있고, 지성은 그 기능이 약화되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감성은 죄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죄의 소원(=내적욕구)을 끊임없이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과 지성의 바른 판단을 따르지 않고 오직 죄의 본성이 가져다주는 죄의 소원을 하고 싶어 함으로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양심과 지성의 제동장치 없이 오직 죄의 소원대로 움직이는 좀비와 같이 된 것이다.
- 학교 교육은 지성과 양심을 조금이라도 되살려 사람이 죄의 소원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교육은 주로 인성 윤리교육과 합리적 판단교육으로 구분되는데 오늘날 한국교육은 합리적 판단교육이 주를 이루며 이것도 오직 입시와 취업목적의 지식교육이다. 인성 윤리교육은 윤리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다.
(4) 범죄 한 가인에게 닥친 사망의 열매는 헛수고, 헛열매였다.
① 농사짓는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아 소출을 얻지 못하고 유리방황하게 됨
- 아담의 원죄는 후손에게 전가되어, 가인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했다. 가인의 범죄는 아담의 원죄가 개인의 자범죄로 표출된 최초의 기록이다. 가인은 땅에서저주를 받는다. 농사하는 가인이 땅에 곡식을 뿌려도 땅이 소출을 내주지 않는다. 곡식을 얻으려는 가인은 모든 수고는 헛수고였다. 헛열매였다. 땅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는 인생이다.
② 가인 이야기는 가인 후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
- 가인의 형벌은 자범죄의 결과이다. 그것은 아담의 원죄처럼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인 이야기는 고대에 있었던 가인과 그 후손에게만 해당되는 불행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또한 지금 이 세상에는 생물학적으로 가인의 후손은 한 명도 없다. 노아 홍수이후 가인의 후손은 모두 없어졌다. 모든 인류는 의인 노아의 후손이며 특히 아시안 한국 사람은 그중에서도 주로 셈족의 혈통이 동쪽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대략 말한다. 원래 셈족은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 이스마엘 등의 혈통을 말하는데, 아무도 한국인이 함이나 야벳의 후손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은 셈족에 가깝다. 그렇다면 가인의 형벌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③ 가인의 범죄는 모든 인류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할 때 오는 자범죄의 위험성을 가르침임
-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를 통하여 심판하신 사람은 가인의 후손만이 아니다. 셋의 후손도 죄인이다.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셋의 후손도 멸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셋의 후손도 하나님의 홍수심판 경고를 믿지 않았고 그들도 사람의 딸들을 취하며 죄의 소원을 따라 살아갔다. 심지어 바벨탑은 의인 노아의 후손들이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인의 범죄는 가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소원대로 행동하면 얻게 되는 사망의 열매, 헛수고를 말씀하심이다.
(5) 심지어 셋과 에녹, 노아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 없었다.
① 가인과 그 후손은 죄의 소원대로 살아감
- 아담으로부터 첫범죄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받은 가인도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위험성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소원대로, 죄가 이끄는대로, 죄의 본성이 원하는대로, 자기 죄의 본성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살아갔다. 죄의 행동을 저질렀다.
② 그러나 의인인 셋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함
-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그리스도의 조상 계보이다. 셋은 에노스만 낳고 에노스는 게난 한 사람만 낳은 것이 아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그 후 807년을 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다(창5:7). 에노스는 90에 게난을 낳고 그 후 815년을 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다(창5:10). 모든 조상이 다 그렇다. 단 노아만 홍수 이전 아들 세 명 낳았고 그 이후에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다. 이 말은 수많은 언약의 계보 셋의 후손들도 죄로 인한 홍수심판 받았음을 말한다. 셋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대로 살아갔다.
③ 심지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노아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함
-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죽음을 보지 않고 직접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성경은 그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5:22) 에녹은 다른 기록들과 다르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햇다. 그런데도 그의 자녀들은 증손자 노아를 제외하고는 홍수 심판으로 죽었다. 물론 므두셀라나 노아의 아버지 라멕처럼 홍수이전 자연사한 하기도 했지만...
- 노아는 홍수를 통하여 죄의 무서움을 직접 확인한 사람이다. 그의 아내와 아들 며느리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생생한 증인들이다. 그런대도 이들도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다. 노아의 포도주 사건과 또한 그의 후손들이 지은 바벨탑이 그 증거이다. 어떤 누구도 죄의 소원을 다스릴 자가 없다. 분명히 병명은 알고 있지만 치료약 없다는 것이 인류의 절망이다.
2.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사람들
(1)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소원을 다스릴 길을 열어주셨다.
① 에녹은 죄의 소원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임.
-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죄의 소원대로 자기가 주인 되어 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갔다는 것이다. 범죄이전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그런 삶의 자세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동행하는 완전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② 하나님과의 동행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임
- 구약은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의 비밀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다(창6:8). 에녹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죄의 소원대로 자기 주인되어 살아가는데 유독 에녹과 노아는 죄의 소원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간 것이다. 이것은 에녹과 노아의 대단함이라기보다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③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죄인들의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한 그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신새로운 아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2)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용서하심과 의롭다하심(=칭의)을 얻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치 않으심.
- 피조물의 자기주장은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첫 아담처럼 자기나라를 세우려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자기 방식대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도 그리스도는 단번에 끊어버리셨다. 새로운 아담 그리스도는 첫 아담의 불순종의 길로 가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창조경륜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② 그리스도는 늘 성령충만 하셨고, 늘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심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범죄한 첫 아담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아담처럼 자기가 하나님 되어 자기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아담의 형상(=죄인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삶은사망이다. 성령충만, 말씀, 기도... 이 세가지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③ 우리가 에녹처럼 죄의 소원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음
- 이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된 구원이며 생명이다. 에녹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갔다. 에녹은 그리스도처럼 성령충만과 기도생활이 있었다. 에녹은 그리스도처럼 언제나 자기 뜻을 세우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에녹처럼 죄의 소원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① 자기가 죄의 본성대로 살아온 아담(=죄인)임을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믿음
- 모든 사람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소원대로 살다가 죄의 형벌을 받고 사망에 이른다. 이러한 죄인이 죄의 소원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명을 얻는 것은 먼저 십자가 앞에 나와 자기가 죄인이었음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②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함
- 믿음은 죄인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게 한다. 믿음은 죄인을 그리스도를 연합시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실재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다.
③ 이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용서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성령께서 함께하심
-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지은 모든 죄악에 대한 형벌을 면해주시고(=죄용서), 이후부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의롭다 칭해주신다(=칭의). 그리고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성도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로 그리스도의 형상(=하나님의 형상/의)이 나타나도록 도와주시므로, 성도는 점점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다가 최종 마지막 심판대에서 완전 의인으로 변화되어 구원받게 된다. 칭의 얻은 의인이 완전 무죄선언 받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적용>어떻게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을까?
(1) 죄인은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고(창4:17)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바벨탑을 세운다(창11:5)
① 성을 쌓고, 바벨탑(=성과 대)을 세우는 이유는 오직 자기를 위하여임
② 죄인은 마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 오직 인간이며 엄밀히 말해 자기임
- 시10: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다(창4:26)
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예배하는 것임
② 예배란 좁게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임
③ 넓게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임
④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살아주신 삶임
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의)가 나타나기 시작함
1.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는 사람들
(1)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창4:7)
① 범죄이후 아담은 자기와 자기 후손의 본성에 어떤 심각한 변화를 알게 됨
-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의)였던 아담은 범죄이후 하나님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룩한 피조물에서 하나님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주인이 된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의도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 실체를 죄라는 단어로 명확히 말씀하셨다.
②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은 죄의 소원(죄의 내적욕구)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심
-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므로 그의 후손들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범죄한 아담의 형상(=죄인의 형상)으로 태어났다(창5:3). 아담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본성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본성이 죄로 오염됨으로, 모든 사람은 죄의 본성이 요구하는 죄의 소원(=죄의 내적욕구)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또한 죄의 소원에 굴복하면 얻게 되는 열매를 분명히 경고하셨다.
③ 하나님은 그 죄의 소원을 절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심
- 죄는 마치 불과 같아서 그것은 온 집을 태우고도 남는다. 처음에는 작아보이지만 다스려 이기지 않으면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죄의 소원을 절대 작게 보지말고 다스리고 이겨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2)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4:7)
① 하나님은 죄의 위험성과 그 결과의 무서움을 분명히 경고하심.
- 죄는 다가오는 먹이에게 달려들기 적전 가만히 엎드려 있는 호랑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내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공격 대상은 바로 나이다. 죄에게 잡히기만 갈기갈기 찢기고 물어 뜯겨 비참하게 죽는다. 죄의 소원대로 행할 때 얻게 되는 사망의 열매는 치명적이고 처절하다. 여기서 나를 공격하는 죄의 소원은 부패한 내 본성의 욕구이지 나와 별개의 사단이 아니다. 죄의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3) 죄인은 스스로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 없다.
① 가인의 범죄는 죄의 소원이 사람의 힘으로 통제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
- 본래 하나님은 사람이 지정의, 양심에 의해 결정해서 행동하도록 하셨다. 양심은 이 일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옳고 그름(종교적 윤리적)을, 지성은 맞고 틀림(합리적)을 판단한다. 그 후 감정은 그 일을 좋고 나쁨(감정적)을 느끼게 하심으로 사람이 좋아하는 그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해서 행동하게 하셨다. 결국 사람의 행동은 감정이 최종 관문이며 그것이 의지와 연결되어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만들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이 일어는 발생구조이며 지금도 동일하다.
② 범죄이전 아담의 행동이 의로운 것은 양심 지성 감성 의지가 모두 거룩했기 때문임
- 범죄이전에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의가 있었다. 양심과 지성의 판단을 따르는 감성이 모두 하나님의 의로 거룩했기에 아담의 의지는 거룩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범죄이전 아담 모든 행동은 거룩한 양심과 탁월한 지성의 판단에 따라 일을 결정하고, 그 일을 좋아하는 의지를 작동시켜 행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③ 범죄이후 인간은 죄의 본성에 따라 죄의 욕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함(=죄의 소원)
- 죄로 인간의 지정의 양심 모든 것은 오염되었다. 양심은 화인을 맞아 그 흔적만 남아 있고, 지성은 그 기능이 약화되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감성은 죄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죄의 소원(=내적욕구)을 끊임없이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과 지성의 바른 판단을 따르지 않고 오직 죄의 본성이 가져다주는 죄의 소원을 하고 싶어 함으로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양심과 지성의 제동장치 없이 오직 죄의 소원대로 움직이는 좀비와 같이 된 것이다.
- 학교 교육은 지성과 양심을 조금이라도 되살려 사람이 죄의 소원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교육은 주로 인성 윤리교육과 합리적 판단교육으로 구분되는데 오늘날 한국교육은 합리적 판단교육이 주를 이루며 이것도 오직 입시와 취업목적의 지식교육이다. 인성 윤리교육은 윤리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다.
(4) 범죄 한 가인에게 닥친 사망의 열매는 헛수고, 헛열매였다.
① 농사짓는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아 소출을 얻지 못하고 유리방황하게 됨
- 아담의 원죄는 후손에게 전가되어, 가인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했다. 가인의 범죄는 아담의 원죄가 개인의 자범죄로 표출된 최초의 기록이다. 가인은 땅에서저주를 받는다. 농사하는 가인이 땅에 곡식을 뿌려도 땅이 소출을 내주지 않는다. 곡식을 얻으려는 가인은 모든 수고는 헛수고였다. 헛열매였다. 땅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는 인생이다.
② 가인 이야기는 가인 후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
- 가인의 형벌은 자범죄의 결과이다. 그것은 아담의 원죄처럼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인 이야기는 고대에 있었던 가인과 그 후손에게만 해당되는 불행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또한 지금 이 세상에는 생물학적으로 가인의 후손은 한 명도 없다. 노아 홍수이후 가인의 후손은 모두 없어졌다. 모든 인류는 의인 노아의 후손이며 특히 아시안 한국 사람은 그중에서도 주로 셈족의 혈통이 동쪽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대략 말한다. 원래 셈족은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 이스마엘 등의 혈통을 말하는데, 아무도 한국인이 함이나 야벳의 후손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은 셈족에 가깝다. 그렇다면 가인의 형벌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③ 가인의 범죄는 모든 인류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할 때 오는 자범죄의 위험성을 가르침임
-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를 통하여 심판하신 사람은 가인의 후손만이 아니다. 셋의 후손도 죄인이다.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셋의 후손도 멸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셋의 후손도 하나님의 홍수심판 경고를 믿지 않았고 그들도 사람의 딸들을 취하며 죄의 소원을 따라 살아갔다. 심지어 바벨탑은 의인 노아의 후손들이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인의 범죄는 가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소원대로 행동하면 얻게 되는 사망의 열매, 헛수고를 말씀하심이다.
(5) 심지어 셋과 에녹, 노아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 없었다.
① 가인과 그 후손은 죄의 소원대로 살아감
- 아담으로부터 첫범죄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받은 가인도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위험성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소원대로, 죄가 이끄는대로, 죄의 본성이 원하는대로, 자기 죄의 본성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살아갔다. 죄의 행동을 저질렀다.
② 그러나 의인인 셋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함
-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그리스도의 조상 계보이다. 셋은 에노스만 낳고 에노스는 게난 한 사람만 낳은 것이 아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그 후 807년을 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다(창5:7). 에노스는 90에 게난을 낳고 그 후 815년을 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다(창5:10). 모든 조상이 다 그렇다. 단 노아만 홍수 이전 아들 세 명 낳았고 그 이후에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다. 이 말은 수많은 언약의 계보 셋의 후손들도 죄로 인한 홍수심판 받았음을 말한다. 셋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대로 살아갔다.
③ 심지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노아의 후손들도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함
-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죽음을 보지 않고 직접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성경은 그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5:22) 에녹은 다른 기록들과 다르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햇다. 그런데도 그의 자녀들은 증손자 노아를 제외하고는 홍수 심판으로 죽었다. 물론 므두셀라나 노아의 아버지 라멕처럼 홍수이전 자연사한 하기도 했지만...
- 노아는 홍수를 통하여 죄의 무서움을 직접 확인한 사람이다. 그의 아내와 아들 며느리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생생한 증인들이다. 그런대도 이들도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다. 노아의 포도주 사건과 또한 그의 후손들이 지은 바벨탑이 그 증거이다. 어떤 누구도 죄의 소원을 다스릴 자가 없다. 분명히 병명은 알고 있지만 치료약 없다는 것이 인류의 절망이다.
2.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사람들
(1)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소원을 다스릴 길을 열어주셨다.
① 에녹은 죄의 소원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임.
-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죄의 소원대로 자기가 주인 되어 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갔다는 것이다. 범죄이전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그런 삶의 자세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동행하는 완전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② 하나님과의 동행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임
- 구약은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의 비밀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다(창6:8). 에녹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죄의 소원대로 자기 주인되어 살아가는데 유독 에녹과 노아는 죄의 소원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간 것이다. 이것은 에녹과 노아의 대단함이라기보다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③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죄인들의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한 그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신새로운 아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2)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용서하심과 의롭다하심(=칭의)을 얻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치 않으심.
- 피조물의 자기주장은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첫 아담처럼 자기나라를 세우려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자기 방식대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도 그리스도는 단번에 끊어버리셨다. 새로운 아담 그리스도는 첫 아담의 불순종의 길로 가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창조경륜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② 그리스도는 늘 성령충만 하셨고, 늘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심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범죄한 첫 아담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아담처럼 자기가 하나님 되어 자기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아담의 형상(=죄인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삶은사망이다. 성령충만, 말씀, 기도... 이 세가지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③ 우리가 에녹처럼 죄의 소원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음
- 이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된 구원이며 생명이다. 에녹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갔다. 에녹은 그리스도처럼 성령충만과 기도생활이 있었다. 에녹은 그리스도처럼 언제나 자기 뜻을 세우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에녹처럼 죄의 소원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① 자기가 죄의 본성대로 살아온 아담(=죄인)임을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믿음
- 모든 사람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소원대로 살다가 죄의 형벌을 받고 사망에 이른다. 이러한 죄인이 죄의 소원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명을 얻는 것은 먼저 십자가 앞에 나와 자기가 죄인이었음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②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함
- 믿음은 죄인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게 한다. 믿음은 죄인을 그리스도를 연합시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실재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다.
③ 이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용서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성령께서 함께하심
-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지은 모든 죄악에 대한 형벌을 면해주시고(=죄용서), 이후부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의롭다 칭해주신다(=칭의). 그리고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성도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로 그리스도의 형상(=하나님의 형상/의)이 나타나도록 도와주시므로, 성도는 점점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다가 최종 마지막 심판대에서 완전 의인으로 변화되어 구원받게 된다. 칭의 얻은 의인이 완전 무죄선언 받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적용>어떻게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을까?
(1) 죄인은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고(창4:17)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바벨탑을 세운다(창11:5)
① 성을 쌓고, 바벨탑(=성과 대)을 세우는 이유는 오직 자기를 위하여임
② 죄인은 마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 오직 인간이며 엄밀히 말해 자기임
- 시10: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다(창4:26)
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예배하는 것임
② 예배란 좁게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임
③ 넓게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임
④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살아주신 삶임
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의)가 나타나기 시작함